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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 백과사전 (百科事典은 학문, 기술, 예술 등 자연과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주로 참고서로서 활용된다. 백과사전의 영어명 ‘encyclopædia’는 그리스어의 ‘ἐγκύκλιος’와 ‘παιδεία’의 결합을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데, 온갖 종류의 지식을 가르쳐 기른다는 뜻이다. 즉, 백과사전의 원래 목적이 교육 이었다. 한편 백과사전의 또 다른 목적으로는 참고 가 있다. 현대의 백과사전들은 교육 과 참고 모두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백과사전에서 내용 분류의 단위이자,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을 표제어라고 한다. 표제어의 범위에 따라 백과사전의 종류가 나뉘는데, 넓은 범위를 갖는 표제어들로 백과사전을 구성하는 것을 대항목주의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표제어를 이용하는 것을 소항목주의하고 한다. 대항목주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고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교육 목적의 백과사전이 유명한 학자의 논문을 모아서 엮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소항목주의를 채택한 백과사전은 표제어별로 간결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대항목주의에 비해 다양한 표제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점이 있어서 참고 목적의 백과사전에 많이 쓰인다. 오늘날의 백과사전은 절충한 방식이 많으며, 내용에서도 문장 서술뿐만 아니라, 사진, 삽화, 도표 등 다양한 참고자료가 함께 제공되는 형태가 되었다. 현대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서적의 형태가 아니라 CD-ROM, DVD-ROM의 형태로 된 것도 있으며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것도 등장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온라인 으로 서비스해주고 있는 한국어 백과사전으로는 한국어 위키백과,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등이 있다. Encyclopaedia-Britannica 05-1913.jpg|섬네일|300px|right|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의 1913년 광고 백과사전의 기원은 플리니우스가 편찬한 박물지이다. 편찬방식이 중국의 유집과 같았다. 이 유집과 같이 편찬하는것은 17세기까지 편찬하였다. 최초의 알파벳 배열 백과사전은 1674년 모레리가 역사대사전에서 시도하였고, 그 이후 알스티드가 Encyclopaedia Septem Tomisdistincta에도 이용하였다.. 1728년 체임버스가 편찬한 백과사전이 현대적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백과사전은 알파벳순으로 배열하고 상호참조표시를 하고 논문을 수록하였다. 이후 체임버스는 증보판을 출간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파 시대가 있었다. 백과전서는 디드로가 중심이 되어 루소,케네,볼테르 등계몽주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 하였다. 2권이 1751년 발간되었는데 발행금치처분을 받았고, 이후 디드로가 더욱 만들어 1772년 28권을 완성시키고 보유5권과 색인을 참가시켜 모두 35권으로 완성시켰다. 또한 이와 비슷한 해에 19세기 세계대사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후 이책은 라루스 백과사전이 된다. 같은 세기 영국에서는 세계적인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를 1768년부터 매주 분책으로 발행하여 71년에 3권으로 만들었다. 백과사전은 더욱 발전하여 현재 대한민국에는 두산백과사전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ædia Britannica)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Die Brockhaus Enzyklopädie) 체임버스 백과사전(Chambers s Encyclopaedia) 라루스 백과사전(Grand Larousse encyclopAdique) 이탈리아나 백과사전(Enciclopedia Italiana) 소비에트 대백과사전(Bol shaya Sovetskaya Entsiklopediya) Meyers Konversations-Lexikon 4th.ed. 1885-1892 현대적인 백과사전은 1972년에 전32권으로 완간된 고단샤(講談社)의 《휴먼라이프 엔사이클로페디아》을 시작으로, , 1980년 가쿠슈겐큐사(學習硏究社)의 전32권 《그랜드 현대백과사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1988년 완간한 전35권의 《세계대백과사전》, 1988년 쇼가쿠칸(小學館)에서 전25권으로 간행한 《대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등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80년부터 《중국대백과전서》가 발행되기 시작하였고, 타이완에서는 1981년에 중국문화대학 중화학술원이 편찬한 전20권의 《중화백과전서》가 발간되었다. 한국의 현대적 백과사전은 1958년 문학과 교양서적을 전문출판하던 학원사(學園社)에서 간행한 《대백과사전》을 시초로 한다. 4·6배판 전체 6권으로 1958년 9월 25일 제1권을 출판한 후 8년에 걸쳐 완성했다. 50여 명의 편집진과 435명의 집필진이 참여하였고, 원고는 10만 매가 넘었다. 그 후 증보판 2권이 출간되었으며, 1967년에는 전12권의 《세계백과대사전》으로 개정되어 1970년에 전15권, 1973년에 전20권으로 증보된 신판이 발간되었다. 사전류 전문출판사인 동아출판사에서는 1959년 한권으로 발간한 《새백과사전》, 1964년 전2권의 《국민생활백과사전》을 거쳐, 전30권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을 1978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982년 9월부터 2권씩 출간, 1984년 완간하였다. 여기에는 13만여 항목이 수록되고 4만여 컬러 사진 및 8천여 흑백 사진이 삽입됐으며, 1986년과 1990년에 각각 보유편이 발간되었다. 이것은 후에 1996년 8월에 두산동아(주)에서 출간된 전 30권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으로 이어졌는데, 128167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으며 5개의 CD-ROM이 포함되었다. 1974년 태극출판사(太極出版社)에서 전16권으로 간행한 《대세계백과사전》에서는 다른 백과사전들과는 달리 가나다순의 사전식 배열이 아니라 주제별로 항목을 분류하였다. 동서문화사에서는 《한국세계대백과사전》을 1992년부터 시작하여 1995년에 전30권으로 간행하고, 1997년 8월 8일에 총 31권으로 완간하여 1999년에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으로 개편하였는데, 총13만 항목과 15만 색인이 수록되었고 기존의 백과사전에서 누락되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항목과 공산주의 이념까지 포함되었다. 학원출판공사에서는 전 32권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을 간행하는데, 3년의 준비 기간과 5년의 편집 기간을 거쳐 1993년 1월부터 출간하여 1994년에 완간되었다. 이것에는 14만 5천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고 기존 백과사전과 달리 30여개의 기본 동사가 표제어로 포함되었다. 한편, 외국의 백과사전이 번역된 것으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이 1989년부터 발간되어 1994년 3월에 전 27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총 11만여 항목이 수록되었으며 제26권은 참고문헌, 제27권은 색인으로 되어 있다. 1972년에 계몽사에서 만든 컬러학습대백과사전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최초로 만든 컬러판 대백과사전이다. 동아출판사(두산동아의 전신)에서 나온 15권으로 구성된 동아학습대백과, 16권으로 구성된 삼성당에서 나온 삼성학생대백과는 컬러 사진과 흑백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또한, 삼성당에 있는 삼성학생대백과사전은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지리사전이 같이 편집되어 있어서 청소년 학생들에게 새로운 독서습관을 키우게 되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흑백사진으로 편집되어 있는 중앙출판사의 세계대백과사전(전 5권)은 총 5만여 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고, 초등학생을 위하여 편집된 어린이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전 30권), 그리고, 웅진21세기학습대백과사전(학습별), 중앙대백과사전(20권)과 신21세기 학습대백과사전(3만여 항목)이 한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백과사전이다. 영상매체를 이용한 백과사전으로는 중앙 과학 백과사전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7년에 발행된 광명대백과사전(전20권), 조선대백과사전(전 30권, 10만여 항목), 그리고 백과사전(전3권, 3만 항목)이 있다. 그중에서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발행된 백과사전은 정치 사전, 경제 사전, 역사 사전을 통합하여 편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인터넷이 보급된 90년대 중반 이후 출판형태의 백과사전들은 종이책 출간을 중지하고 CD롬이나 인터넷으로 변화해나갔는데 두산세계대백과의 후신인 두피디아와 브리태니커가 2012년 현재에도 개정되고 있다. 물명류도 초기형태의 어휘모음이며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띠지만 최초의 백과사전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을 들 수 있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었고 가장 방대한 것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홍봉한의 증보문헌비고 성임의 태평통재 최명길 어숙권의 고사촬요 서명응의 고사신서 김육의 유원총보 김진의 신보휘어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성호사설류선과 잡동산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김시민의 동국휘어 홍만선의 산림경제 유중임의 증보산림경제 민노행의 지문별집 국조휘언 고금사실유취 유희의 물명고, 방물고 유형원의 반계수록 박준식과 김문영은 A. B. Kroeger의 Guide to Reference Books (1902년)와 James I. Wyer의 Reference Work (1930년), Louis Shores의 평가 기준 (1950년대 중반), Kenneth Kister의 저서 (1978년)와 그의 후속 연구, Bopp와 Smith의 백과사전 평가에 관한 조언 (1994년), Sader와 Lewis의 평가기준 (1995년), William A. Katz의 저서 (1997년)을 참고로 하여 백과사전의 평가요소를 다음의 6 가지로 범주화 하였다. 목적과 범위 편찬 목적, 취급 범위, 주된 독자, 내용의 깊이 권위 편집자․집필진․출판사의 권위, 기사의 서명 여부, 역사와 계보, 신뢰성(정확성), 서지, 서평지의 평가내용 접근성 배열방법, 상호참조, 색인, 여백주기 기술형식 표현형식, 객관성, 최신성(계속적 갱신, 연감․보유판의 발행) 형태적 특징 인쇄본과 전자본, 제본과 레이아웃 등의 체재와 삽도와 지도 특징과 가격 백과사전 목록 한국의 백과사전 * 대동운부군옥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어 위키백과 백과사전의 미래 위키백과 * 한국어 위키백과 ** 네이버 백과사전 ** Daum 백과사전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제공 - 두산동아 * 네이버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공 - 한국브리태니커 * Daum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백과사전 분류:명수 100 |
자연과학 (自然科學은 조직화된 지식의 체계이며, 과학의 한 분야이다. 자연과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일반 원리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과학은 결론도 중요하지만,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과학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는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추론된 것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은 조건에 따라 자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역학의 실험 방법은 여전히 자연 과학의 한 분야이며 특정 조건 아래에서라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충실하게 과학적 방법을 따른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체계도 다른 증거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언제나 반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두어야 한다. 자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학의 이러한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는 선사 시대부터 이미 여러 가지 자연 법칙에 기반한 생활을 해 왔다. 도구를 만들고 기계를 사용하며 불을 이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고대 시대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각종 기술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근대 과학은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정신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기계"로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파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출발한 근대 자연과학은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론과 아이작 뉴턴의 운동법칙 발견에 의한 고전 역학의 성립으로 현재와 같은 학문 체계를 이루는 기반을 수립하였다. 즉 경험적인 실험을 통하여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Microscope.jpg|섬네일|현미경의 발명은 미생물 관찰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과학적 방법이란 실험적인 증명에 기초를 두는 연구 방법이다. 즉, 믿음에 기초하여 이론적인 추측을 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증거를 통해 증명하는 방법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연구 분야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나 다음과 같은 방법이 일반적이다. 관찰 - 관찰은 자연 현상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은 관찰된 현상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 생겨난 것인지를 알아내는데 목적이 있다. 온도 변화의 측정, 물질 성분의 분석 등이 모두 관찰에 해당한다. 가설 - 가설은 관찰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 추측을 하는 것이다. 논증과 증거로서 증명되기 이전의 가설은 직관적이며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한편, 과학적 방법은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므로 언제든지 반례가 등장할 수 있다. 널리 인정받는 과학적 지식도 반례가 나타나면 부정되거나 수정될 수 있기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든 자연 과학의 법칙은 가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상 - 예상은 가설에 따라 자연 현상을 예측해 보는 것이다. 실험 - 실험은 적절한 통제를 통하여 관찰하고자 하는 현상을 단순화 하고 예상한 바와 같이 진행되는 지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연구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실험 방법이 있다. 증명 - 과학적 방법에서 증명은 실험의 결과를 놓고 가설에 따른 예상이 옳은지 아닌지를 논증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실험의 결과를 놓고 실험군과 대조군의 비교를 통하여 가설의 옳고 그름을 가리게 된다. 일반화 - 실험과 증명의 과정을 거쳐 논증된 가설이 많은 반복 실험에 의해 검토되어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인정된 과학적 지식은 자연 과학 법칙으로 불리게 된다. 예를 들어 고전 역학의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것이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유적들을 통해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톤 헨지와 고인돌같은 석조물의 건축을 위해서는 지레, 빗면, 쐐기, 도르래와 같은 단순 기계들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그노몬 ziggurat at Ali Air Base Iraq 2005.jpg|섬네일|우르의 지구라트 바빌로니아의 지도 천문학과 역법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초기 고대 사회 문명에서 이미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의 여신 이난나가 사람들에게 시간을 재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이야기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시간을 재기 위해 해시계의 일종인 그노몬을 사용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를 관찰하여 1년을 계산하였다. 시리우스가 해뜨기 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5월이 되면 나일 강의 범람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의 범람은 고대 이집트 농업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계절의 계산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월을 30일로 하고 12개월을 1년으로 하였다. 마지막달에는 우수리로 5일을 더해 1년은 365일로 계산되었다. 이집트 달력에는 윤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달력과 실제 계절이 차이를 보이게 된다.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 공법은 아치이며 이 역시 무게를 분산하여 지탱하는 역학 지식이 사용되었다. 고대의 생물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해부학적 구조를 직접 연구하는 등 생물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동물의 역사와 같은 다양한 생물 관련 저서를 남겼다. 화약과 로켓 최초의 화약과 로켓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의 발명은 다양한 화학 지식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최초의 화약은 한나라 시기에 발명되었으나 폭발력이 크지 않아 주로 전쟁터에서 불을 붙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화약의 원료인 초석의 비율이 커지게 되고 폭발력이 강하게 되자 총과 대포가 제작되게 되었다. 중국의 화약 기술은 13세기 무렵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지도의 제작 고대의 다양한 문화에서 지도가 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미 점토판에 그린 지도가 제작되었다. 본격적인 지도의 제작은 고대 그리스 때 이루어졌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서구 최초의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는다. 고대 로마는 자신의 영토안에 있는 속주를 잇는 도로를 표시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아그리파가 제작한 지도에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라인 강까지의 모든 속주의 위치와 면적, 주민들이 기록되었으며 각 속주를 잇는 도로망이 표기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천년 무렵 청동 정(鼎)에 새겨진 지도가 발견되었다. 한나라 후기에는 축척을 이용한 지도가 제작되었으며 3세기의 지도 제작자 배수는 직교하는 기준선과 축척을 이용한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였다. 논증 체계의 수립 고대 그리스의 학문은 논증을 통해 진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논증을 통해 입증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철학의 개념 뿐만 아니라 수학의 법칙, 정치적 주장 등에 대한 논증 체계가 수립되었다. 고대 그리스 학문의 이러한 특징은 논리학의 발달과 다양한 논증 방법의 개발로 이어져 후일 과학적 방법의 근간이 되었다. 13세기 이슬람의 천체 관측기구 혼천의와 시계가 결합된 혼천 시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관측한 달의 표면 중세 초기 서부 유럽의 상황 고대 로마의 붕괴 이후 서부 유럽에서는 한 동안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문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신학을 우선시 한 당시 상황에서 학문은 경험적인 지식보다는 종교에 기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였다. 한편, 세속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점성술과 연금술은 그 동기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중세 이슬람 세계의 업적 고대 로마의 몰락 후 중세 서부 유럽에서는 한 동안 고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성취가 지체되었다. 고대의 학문은 비잔틴 제국과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되었다. 특히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수학과 의학, 화학 등 여러 학문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중세 이슬람의 통치자들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의학과 관련한 서적들이 번역되었으며 점차 천문학, 점성술, 수학, 연금술, 자연사 분야의 지식들을 수용하였다. 처음에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인도의 서적들을 번역하여 도입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이슬람 과학은 점차 독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갈레노스의 의학서를 바탕으로 발달한 의학은 이븐 시나의 《의학 정전》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를 기반으로 발달한 천문학은 각종 관측기구의 고안과 함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사마르칸트에는 반지름 40미터, 3층건물 높이의 육분의를 쓰기도 했다. 알바타니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구면삼각법과 같은 기하학적 방법으로 개량·보완해서 태양과 달의 운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1년과 사계절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다.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관측소를 설립하였고 알마문은 바그다드에 828년경에 세계 최초의 관측소를 세운다. 관측소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이 딸려 있고 정부의 지원 하에 과학 교육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육은 점성술의 예언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후기에는 고대 천문학을 능가하는 비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을 만들어 행성 운동을 설명하였고 이를 고도로 정확한 관측으로 검증했다. 그러나 이 모형 역시 지구를 중심으로 한 모형이다. 이슬람의 수학은 이론적인 기하학보다 실용적인 산술, 대수학을 중시하였다. 인도로부터 쓰기 편한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였고 사실상 고차방정식을 해결했으나 이슬람 수학은 순수 수학적 목적에 의한 발전이라기보다 세금, 유산 분배와 같은 실용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은 광학의 발전에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사막 기후로 인해 눈에 무리가 가기 쉬운 이집트에서 안과학 문헌이 많이 쓰여졌으며 이슬람의 의사들은 눈 치료법과 시각(눈)의 해부학, 생리학의 전문가였다. 이슬람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의사가 아님에도 눈병에 관한 글을 썼으며 그의 광학에는 시각, 굴절, 암실, 불을 붙이는 거울, 렌즈, 무지개 등 다양한 광학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중세 이슬람의 과학은 후일 유럽으로 전파되어 유럽 과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알코올, 알고리듬과 같은 낱말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항해술의 발전과 지리학의 확장 15세기 명나라의 정화는 쑤저우에서 몸바사에 이르는 인도양을 항해하여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정화의 항해는 고대 인도의 무역로를 이루어졌다. 한편, 유럽에서도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항해는 모두 지리적인 인식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지리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달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다시 경험적인 지식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중력, 마찰, 관성과 같은 과학적 현상을 관찰하였으며 망원경을 사용하여 천체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중·근세의 과학 동아시아에서도 고대에서부터 중대한 조짐을 미리 살피기 위해 천체를 관찰하였다. 혼천의는 이슬람의 천문 관측기구를 참조하여 중국 원나라에서 제작되어 조선에 도입되었다. 한편, 조선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강우량 등의 기상 기록은 500여년 간 빠짐 없이 기상 현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과학 혁명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경험주의와 자연주의의 확산은 증거로서 논증된 지식만을 인정하는 풍토를 조성하였고 이로써 과학적 방법론이 수립되었다. 이후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 정립,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산소발견, 요하네스 케플러의 지구 공전 궤도 계산과 같은 업적에 힘입어 물리학, 화학, 천문학과 같은 학문들이 수립되게 되며 가히 폭발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학의 발전 양상을 과학 혁명이라 한다. 과학 혁명은 산업 혁명과 맞물리면서 근대의 특성을 낳았다. 18 - 19세기의 과학 of Species title page.jpg|섬네일|left|《종의 기원》초판본 표지 18세기에는 고생물학의 화석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지질 시대를 분류하는 지질학 연구가 이루어졌고, 여러 생물 종의 특징을 조사하고 분류한 분류학 등이 활발히 연구되었다. 칼 폰 린네가 생물의 학명 분류로 제시한 이명법은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19세기에는 전자기파의 예언과 발견, 진화 이론의 성립, 멘델의 유전법칙 발표와 유전학의 수립 등 다양한 분야가 새롭게 학문으로 수립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당시 서로 다른 힘으로 여겼던 전기와 자기가 같은 종류인 전자기력임을 증명하고 전자기파의 존재를 예언하였다. 그가 제시한 맥스웰 방정식은 후대의 전파 연구에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무선 통신과 방송 등 전파의 이용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찰스 다윈은 진화의 요인을 자연선택에 의한 종분화로 보는 진화 이론을 발표하였다. 다윈의 진화 이론은 당대에서 부터 기독교 등에 의한 극심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현대 진화 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레고어 멘델은 완두콩을 이용한 실험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유전법칙은 발표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20세기 초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재발견 되면서 고전 유전학의 핵심 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과학의 그림자 근대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복리 증진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과학의 결과물은 무기로 이용되어 더 큰 파괴와 살상을 불러왔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발명품이 무기로 사용되어 비난받자 자신이 번 자산을 인류의 복리 증진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데 사용하고자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노벨상은 오늘날까지도 과학과 평화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그러나, 노벨 이후에도 원자 폭탄과 같은 더 강력한 무기가 만들어져 더 많은 파괴를 가져왔다. 한편, 근대 과학과 산업 혁명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대량 생산과 교통의 발달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시켰다. 이로써 인류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고 더 빠르게 더 많은 물자를 거래하게 되었으나 소위 열강이라 불리던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근대 과학의 결과물인 물자와 기술로서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억압하였다. 20세기에 들어 과학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과학은 매우 세분화되어 보다 전문적인 하위 학문들을 구성하게 되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Hole Milkyway.jpg|섬네일|블랙홀에 의한 랜즈 효과 20세기 전반기에 이루어진 물리학의 가장 큰 발전은 양자역학이 성립되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양자역학의 성립은 곧 고전역학이 더이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고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우주와 자연 현상이 실상은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의지한다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유명한 사고실험으로 양자 역학의 확률성을 잘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 길이와 같은 물리량이 고전 역학의 관점과는 달리 더 이상 고정적인 상수로서 취급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장에 의한 공간의 변형을 예언하였으며 이는 훗날 태양의 중력장에 의한 빛의 굴절을 관측함으로써 증명되었다. 입자물리학의 발달은 기본입자의 발견을 가져 왔으며 양자 역학의 성과와 결합하여 표준 모형을 수립하게 되었다. 표준모형에서는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힘을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으로 정리하였으며, 20세기 후반부터 이들 힘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하려는 대통일이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세기 말 스티븐 호킹은 그 동안의 이론물리학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현대 우주론을 종합하였다.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달 Model Crick-Watson.jpg|섬네일|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제작한 DNA 모형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X선 회절로 DNA의 구조를 밝혔다. 이들이 밝힌 DNA의 구조는 두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사슬이 이중 나선의 형태로 꼬여 있는 모습이었다. DNA의 이러한 구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서열이 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과 DNA의 복제가 유전형질의 전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DNA 구조가 알려진 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유전자 발현의 기제가 알려지고 유전성 질환에서 유전자의 역할이 하나 둘 밝혀지게 되었다.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 또한 진화 현상이 직접 관측이 가능해지고,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으며, 살아있는 화석들의 유전체 연구를 통해 진화이론은 증명되었고, 이는 진화학 혹은 집단 유전학으로 발달했다. 새로운 물질의 발견과 핵 에너지의 사용 입자물리학의 발전은 19세기 이후 연구되던 여러 방사능 물질들의 핵분열과 핵융합의 조작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플루토늄과 같이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합성하였다. 핵물리학의 지식은 핵발전소와 같이 평화적인 분야에 이용되기도 하나 핵폭탄과 같이 재래식 무기를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되기도 한다. 우주 탐사 11 Landing - first steps on the moon.ogv|섬네일|달 표면에 발을 딛는 닐 암스트롱 (planet) large.jpg|섬네일| 보이저 2호가 찍은 토성 20세기 이후 현대는 무엇보다도 우주 탐사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인류는 달을 탐험하였고 태양계 외부로 보이저 2호와 같은 탐사선을 보냈으며 허블 우주 망원경을 지구 궤도에 띄워 외계를 관찰하고 있다. 물리학은 물질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서, 힘이나 에너지와 같은 개념을 포함한 시공간에서 물질의 운동을 연구하며, 더 나아가 우주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물리학이 연구하는 대상은 아원자 입자에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물리학이 다루는 물질에 대한 연구는 다른 모든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때문에 물리학은 흔히 "기초 과학"이라고 불린다. 현대의 물리학은 입자물리학, 핵물리학, 열역학, 양자역학과 같은 여러 하위 학문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생물학은 생물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이다. 생물학은 생물의 구조, 기능, 생장, 기원, 진화, 서식, 분류 등을 탐구한다. 현대 생물학은 카를 프리드리히 부르다흐, 고트프리드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독립적인 학문으로서 자리잡았다. 생물학은 많은 하위 학문을 포괄하는 광대한 주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 가운데 현대 생물학의 주요한 핵심 연구 분야는 세포 이론, 진화, 유전자, 에너지, 항상성 등을 들 수 있다. 생물학의 하위분야는 연구의 방법과 목적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생물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생화학,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탐구하는 분자생물학, 세포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다루는 세포생물학, 기관이나 조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생리학, 환경에서 다양한 생물 개체들이 맺는 관계를 탐구하는 생태학 등이 있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의 특성과 분류에 따른 학명을 명명하는데 동물은 동물 학명 국제 코드에 따르며, 식물과 균류는 각각 식물 학명 국제 코드와 균류 학명 국제 코드를 따른다. 이외에 바이러스, 바이로이드, 프리온과 같은 바이러스성 유기체는 바이러스 분류 및 명명 국제 코드를 따르고 있다. 한편, 여전히 분류되지 않은 바이러스 종들이 존재한다. 화학은 물질의 성질, 조성, 구조, 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학 역시도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물리학이 원소와 화합물을 모두 포함한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 열적·전기적·광학적·기계적 속성을 다루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통일된 이론을 구축하려는 것과는 달리 화학에서는 물질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화학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목적에 맞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길을 제공하며, 이는 농작물의 증산, 질병의 치료 및 예방, 에너지 효율 증대, 환경오염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하위분야로 천문학이 포함된다. 지구과학은 지구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지구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은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기상학, 지구 표면의 물질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지질학, 바다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 지구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물리학 등이 있다. 자연과학은 오랫동안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술로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토머스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의 전환 이론에 따르면 자연 과학의 과학적 방법 역시 시대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는 지식 체계의 일부이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지식 체계의 주도권 싸움의 결과로 보았다. 쿤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으며 과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연과학의 지식체계와 과학적 방법 자체에 대해 고찰하고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메타 과학이라 한다. 사회과학 공학 형식과학 The History of Recent Science and Technology |
헬륨 (, ←)은 화학 원소로, He (←)이고 원자번호는 2이다. 질량수가 3인 3He과 4인 4He이 있다. 화학 원소 중 끓는점이 가장 낮으며, 상압에서는 영점에너지로 인하여 절대영도에서도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단, 액체 헬륨의 동위원소는 일정한 온도 및 압력 하에서 고체로 존재할 수 있다. 기체, 액체, 고체가 공존하는 3중점이 없는 유일한 원소이다. 헬륨은 1868년 프랑스 천문학자 피에르 장센이 발견하였다. 그는 1868년 8월 18일 일식의 관측에서 특정 대역의 노란 빛, 즉 587.6나노미터 부분에 새로운 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고 헬륨의 존재를 밝혔다. 헬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말 헬리오스(Helios)에서 유래하였다. 수소 다음으로 가벼운 원소이며, 다른 원소와 잘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상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의 헬륨은 대부분은 방사성 원소의 핵붕괴로 생성된 알파 입자가 천연 가스에 포획된 상태로 있다가 발굴된다. 1903년, 미국의 천연 가스전에서 다량의 헬륨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헬륨은 우주에서 수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흔한 원소로서, 은하계 전체 원소의 24%를 차지한다. 태양과 가스 행성(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들도 수소와 헬륨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항성이 주계열성으로 빛나면서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수소 핵융합 반응으로도 일부 생성된다. 4He의 원자 구조 헬륨은 가장 반응성이 적은 비활성 기체이다. 그뿐만 아니라 알려진 모든 화학 원소 중에서 가장 반응성이 적다. 거의 모든 조건에서 헬륨은 단원자 분자로 존재하며 반응하지 않는다. 헬륨은 매우 높은 압력하에서 고체나 액체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조건을 맞춘 고압력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은 맨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이며, 압력을 가함에 따라 30% 정도 부피가 감소될 수 있다. 5×107 Pa의 압력에서 헬륨의 용적율은 물의 50배에 달한다. 압력 1기압에서 헬륨은 절대 영도에 도달하여도 고체가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양자 역학으로 설명되는데, 즉 헬륨의 영점 에너지가 너무 높아 절대 영도에 이르러도 분자 운동이 활발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헬륨을 고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1~1.5 K(약 −272 ℃)에서 약 2.5 MPa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헬륨의 고체 상태와 액체 상태는 굴절률이 같아 분간이 매우 어렵다. 헬륨은 1기압의 압력에서 약 2.3K에서 초유체로 상변이한다. 고압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도 초유체와 비슷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저온의 액체 헬륨에는 이상한 성질이 많다. 그중 여러가지가 헬륨이 원가자 보즈 입자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난다. 한 가지는 액체 헬륨이 점성 저항(viscous resistance) 없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속도가 작은 경우의 마른 물(dry water) 의 이상적인 예 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액체가 점성을 가지려면 내부 에너지의 손실이 있어야 한다. 즉 액체의 한 부분이 나머지와는 다른 운동을 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자 몇 개를 나머지 원자들과는 다른 상태로 때려서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서는 열운동이 아주 작아지고 모든 원자는 같은 상태로 가려 한다. 몇 개의 원자가 움직이고 있다면 다른 모든 원자들도 따라서 같은 상태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운동에는 어떤 경직성(rigidity)이 있어서 독립적인 입자의 경우에 생기는 불규칙한 난류이 형태로 움직임을 깨뜨릴 수가 없다. 보즈 입자로 이루어진 액체는 모든 입자들이 같은 상태로 가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고온에서는 많은 원자들을 여러 다른 상태들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열에너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 같은 협력적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선 헬륨 원자들이 모두 같은 상태로 가려 하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다. 헬륨이 초유동체(superfluid)가 되는 것이다. 한 자기 덧붙이자면, 이 현상은 헬륨의 동위 원소 중 원자량이 4인 것들에서만 볼 수 있다. 원자량이 3인 동위 원소는 개개의 원자가 페르미 입자이기 때문에 액체 상태에서 보통의 유체가 된다. 초유동체 현상은 4He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보즈 입자인 알파 입자의 성지리에 의한 양자역학적 효과이다. 헬륨을 이용한 비행선 헬륨을 이용한 조명기구 공기보다 가볍고 비활성 기체임을 이용해 폭발하기 쉬운 수소 대신에 비행선, 풍선, 애드벌룬에 이용된다. 또, 심해 잠수부의 산소통의 질소 대체로 이용된다. 그 이유는 질소보다 헬륨 이 혈액에 대한 용해도가 작아 잠수병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륨의 끓는점이 매우 낮은 것을 이용해 초저온 냉각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헬륨은 산화흔적이 남으면 안 되는 용접을 할 때 산소의 접근을 막기 위한 용도로 헬륨 환경을 조성한다. 반도체 등의 제작을 위해 플라즈마를 생성시킬 때 플라즈마의 균일한 정착을 위해 헬륨을 적정량 사용한다. 또한 목소리 변조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헬륨 가스에서는 공기 중에 비해 약 3배정도 전송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약 10~20초정도 목소리의 음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단 많은 양을 마실 경우 질식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헬륨은 트리믹스에 사용되는데, 트리믹스는 압축 공기에서 질소의 비율을 줄이고 그만큼을 헬륨으로 채운 것이다. 헬륨은 용해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압축 공기를 사용했을 때(30~40m)보다 더욱 깊이 잠수할 수 있다. 그러나 70m~80m 정도까지 내려가면 헬륨이 용해되어 헬륨 마취 현상이 일어난다. 1H→3He→6Be→방사성 붕괴→4He→12C→16O→ 20Ne→24Mg→28Si→56Fe 헬륨 - It s Elemental 분류:비활성 기체 분류:화학 원소 |
레드햇 본사. 레드햇 (Red Hat,)은 1993년에 창립된 리눅스 배포판 제작회사로, 레드햇 리눅스를 제작했다. 레드햇은 오픈 소스를 비즈니스로 전개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공급하고 지원을 유료로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최근에는 고도화된 소프트웨어를 유료로 판매하는 비즈니스도 시작하고 있다. 리눅스가 등장하고 초기에는 일반적인 사용자가 사용하기 쉽게 리눅스 커널을 중심으로 GNU 프로젝트, BSD, X11 등의 소프트웨어를 조합하여 공급하는 형태로 리눅스 초기의 확산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레드햇의 리눅스 배포판(이후, 레드햇 리눅스)은 GPL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자체 제작 소프트웨어도 GPL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래드햇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타 기업의 배포판도 많이 존재한다. (예, 수세 리눅스) 2003년 레드햇 리눅스 9을 마지막으로 일반 사용자용 레드햇 배포판의 판매 및 지원을 중지하고, 일반 사용자를 위한 리눅스 배포판의 개발은 오픈 소스인 페도라 프로젝트에 이양했다. 현재는 기업용 배포판인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지원 및 교육 등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06년에는 미들웨어 오픈 소스 업체인 제이보스를 인수하여, OS 뿐 아니라 미들웨어까지 사업영역을 넓혔다. 덧붙여 지금까지 레드햇은 주식을 나스닥(RHAT)에 상장하고 있었으나, 2006년 12월 12일에 뉴욕 증권거래소(RHT)로 거래소를 변경하였다. 2018년 10월 28일 IBM에 인수되었다. 1993년 Bob Young 이 리눅스와 유닉스 소프트웨어 악세사리를 판매하는 ACC Corporation을 설립하였다. 1994년, Marc Ewing 은 자신의 리눅스 배포판을 만들어 Red Hat Linux7 (Ewing은 카네기 멜른 대학에 다닐 때 할아버지가 준 빨간 라크로스 모자를 쓰고 다녔다)라고 이름붙였다. Ewing은 이를 10월에 릴리즈했고, 이에 따라 핼러윈 릴리즈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Young은 1995년 Ewing의 사업을 인수했고, 자신의 사업과 통합하여 Red Hat Software를 설립하여 CEO가 되었다. Red Hat은 1999년 8월 11일 기업을 상장했고, 이날 월 가 역사상 8번째로 높은 상장일 주가 상승이 있었다. 1999년 12월 Matthew Szulik 이 Bob Young의 뒤를 이어 CEO가 되었다. 1999년 11월 15일, Red Hat은 Cygnus Solutions를 인수했다. Cygnus는 free software 에 대한 상업적인 지원을 제공했고 GNU Debugger 나 GNU Binutils와 같은 GNU 소프트웨어 제품에 대한 유지관리를 제공했다. Cygnus의 창립자 중 한명인 Michael Tiemann은 Red Hat의 CTO가 되었고 2008년까지 오픈 소스 부서의 부사장 역할을 맡았다. 그 후 Red Hat은 WireSpeed, C2Net Hell s Kitchen Systems를 인수했다. 제이보스 분류:리눅스 기업 분류:1993년 설립된 기업 분류:클라우드 컴퓨팅 제공자 분류:1993년 설립된 기업 |
『 공상과학 』, 사이언스픽션 () 또는 줄여서 SF 는 미래의 배경, 미래의 과학과 기술, 우주여행, 시간여행, 초광속여행, 평행우주, 외계생명체따위의 상상적내용을 담은 픽션장르이다. 소설인 경우, 과학소설 (科學小說)이라고 한다. SF는 종종 과학적인것을 포함한 다른 혁신스런 잠재적인 결과를 탐구하여 "아이디어문학"이라 불리곤 했다. SF는 광범위한 하위장르와 주제를 가지고 있어 정의하기 어렵다. 작가이자 편집자인 나이트는 이러한 어려움을 요약하기 위해, "우리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면 그것이 바로 SF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작가 글래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SF의 정의는 포르노그래피의 정의와 같다. 당신은 그게 뭔지 모르지만, 보는 순간 알게 된다." 나보코프는 엄밀하게 정의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SF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는 《프랑켄슈타인》 1818년판 서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인라인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SF에 대한 간편하고 짧은 정의는 아마도 이것이다 과학적 방법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고 미래와 과거의 현실 세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기반한, 가능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현실적인 추측." 셜링의 정의는 이렇다. "판타지는 개연성 있게 만들어진 불가능한 것. SF는 가능하게 만들어진 개연성 없는 것." 델레이는 "헌신적인 애호가나 팬이라 해도, SF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어 한다"라고 적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정의"란 없고, "SF의 윤곽에 한계"란 없기 때문이다. SF는 주로 합리적으로 그리는 대안적인 가능 세계와 미래에 기반해있다. 이 장르는 그런 면에서 판타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이야기의 맥락내에서, SF의 상상적 요소는 과학적으로 정립됐거나 과학적으로 가정된 물리 법칙으로 대부분이 가능해진다.(그렇지만 이야기 속 몇몇 요소는 여전히 순수하게 상상된 사변일 수 있다) SF의 배경은 종종 합의된 현실과 반대이지만, 대부분의 SF는 다양한 가상의 요소로 가능성 있는 과학적 가설이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촉진된 상당한 정도의 불신의 유예에 의존하고 있다. SF의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가상의 시간선상의 미래, 혹은 역사학적이거나 고고학적인 진실과 모순된 역사적 배경 등의 시간적 설정 외우주(예시 우주 여행), 다른 세계, 지저 세계 등의 공간적 배경, 장면 외계인, 돌연변이, 안드로이드 혹은 휴머노이드 로봇, 그리고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다른 캐릭터들 광선총, 순간이동 장치, 휴머노이드 컴퓨터 같은 미래적이거나 그럴듯한 기술 시간 여행, 웜홀, 초광속 여행, 앤서블을 비롯한 새로운, 혹은 기존의 물리법칙과 모순되는 과학적 법칙 디스토피아, 포스트 자원고갈, 포스트 아포칼립스처럼 새롭거나 다른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시스템 마인드 컨트롤, 텔레파시, 염력, 순간 이동과 같은 불가사의한 능력 다른 세계, 차원과 그곳을 오가는 여행 SF를 사색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파악해보면, 이 장르의 기원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흐릿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2세기 루시안의 진짜 역사, 아라비안 나이츠 설화, 10세기의 다케토리 이야기, 13세기 이븐 알 나피스의 독학 신학(Theologus Autodidactus) 을 비롯한 SF의 선구자격 문학들을 만나게 된다. 막 싹트기 시작한 이성의 시대의 생산물들과 근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나타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 는 볼테르의 〈마이크로메가스〉(1752)와 케플러의 〈솜니움〉(1620~1630) 과 더불어 최초의 사이언스 판타지 작품들 중 하나이다. 아시모프와 세이건은 〈솜니움〉을 최초의 SF로 여긴다. 《솜니움》에서는 달 여행과 달에서 바라본 지구의 움직임이 묘사됐다. 영국인 귀족 여성 마거릿 캐번디시의 〈빛나는 세계〉(1666) 역시 초기 SF의 전조로 여겨진다. 또다른 예시는 홀버그의 소설 〈닐스 클림의 지하 여행〉(1741)이다. 18세기 문학 양식으로서 소설의 발달에 뒤따라, 19세기엔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과 〈최후의 인간〉이 SF소설의 정의를 내리는데 도움을 주며, 올디스는 〈프랑켄슈타인〉이 최초의 과학소설이라고 주장했다. 이보다 나중에 포는 달 여행을 그린 이야기 한 편을 썼다. 이밖에도 더 많은 예시들이 19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G Wells pre 1922.jpg|섬네일|left|150px|alt=Black-and-white photo of a man with bushy black mustache and black hair with parting.|H.G. 웰스 전기, 전보와 같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교통시설의 출현에 따라 웰스와 베른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서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웰스의 〈우주 전쟁〉(1898)은 발달된 무기를 장착한 세 발 달린 전투 기계를 탄 화성인들이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침략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것은 외계 침공을 실감나게 묘사한 소설이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 픽션을 기술하기 위해 "과학적 로망스(scientific romance)"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이것은 1884년 애벗의 노벨라 《플랫랜드 다차원의 이야기》를 비롯한 작품을 파생시켰다. 이 용어는 20세기 초반 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Verne.jpg|섬네일|150px|alt=Black-and-white photo of man in formal dress with unkempt hair, mustache and beard.|쥘 베른 20세기 초반,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창간인 건스백에 영향받아 나타난 펄프 매거진들을 통해 주로 미국인 SF 작가들로 이뤄진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다. 1912년 버로스는 화성을 배경으로 존 카터가 영웅으로 활약하는 장기 시리즈인 바숨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 《화성의 프린세스》를 출간한다. 1928년, 필립 놀란이 어메이징 스토리즈에 벅 로저스의 원작 소설 아마겟돈 2419를 실은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는 벅 로저스(1929), 브릭 브래드퍼드(1933), 플래시 고든(1934)으로 이어지는 연재 만화의 바탕이 됐다. 이 연재 만화와 연속된 영화 시리즈는 SF를 대중화시켰다. Stories Quarterly 1928 Spring.jpg|세계 최초의 SF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즈|섬네일 1930년대, 캠벨이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의 편집장을 맡게 되고, 아시모프, 나이트, 울하임, 폴, 블리시, 메릴 등을 비롯해 퓨처리안이라 불리게 되는 일군의 신진 작가들이 뉴욕시에서 나타난다. 이 시기의 다른 중요한 작가들로 스미스, 하인라인, 클라크, 스테이플던, 밴보트 등이 있다. 캠벨의 영향력 바깥에서 활동한 작가로 브래드버리와 렘이 있다. 캠벨이 《어스타운딩》지의 편집장으로 지낸 기간은 보통 과학소설의 황금기가 시작된 시기로 여겨지며, 과학적 발견과 성취를 찬양하는 하드 SF 소설로 특징지어 진다. 이 시기는 전후 기술적 발전, 골드가 편집한 잡지 《갤럭시》의 출현, 그리고 하드 사이언스보다 사회 과학을 더 강조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1950년대 비트 세대는 버로스 같은 사변적 작가들을 포괄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문학적"이거나 예술적 감성의 지식인적 자의식으로 가득찬 일련의 작가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높은 강도의 실험적 시도를 벌인 뉴웨이브가 영국을 중심으로 발흥했고, 동시기 미국에서는 허버트, 덜레이니, 젤라즈니, 엘리슨 등의 작가들이 새로운 경향, 사상, 스타일을 탐구한다. 르귄과 다른 작가들은 소프트 SF 분야를 개척했다. 1980년대, 깁슨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은 전통적인 SF의 낙관론과 발전에 대한 지지에서 방향을 돌렸다. 근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은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 묘사되었다. 《스타 워즈》 프랜차이즈는 과학적 엄밀함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더 신경을 쓰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C. J. 체리의 외계인의 삶과 복잡한 과학적 도전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엔 환경 문제, 글로벌 인터넷과 확장된 정보의 우주의 의미, 바이오테크놀러지, 나노테크놀러지, 포스트 냉전, 포스트 자원고갈 사회에 대한 관심을 비롯한 주제들이 급부상했다. 스티븐슨의 《다이아몬드 시대》는 이러한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캐릭터 중심 서사를 되돌려왔다. 텔레비전 시리즈 《스타 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1987)이 SF쇼의 범람을 예고했고, 이는 세 편의 《스타 트렉》 스핀오프 쇼(딥 스페이스 9, 항해자, 엔터프라이즈)와 《바빌론 5》로 이어진다. 고대 포털과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게이트들에 대한 영화 《스타게이트》가 1994년 개봉했다.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SG-1》이 1997년 7월 27일 첫 방영 되고, 이후 10시즌이 이어져 214개의 에피소드를 남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스타게이트 인피니티》와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아틀란티스》, 《스타게이트 유니버스》, DVD 직배급 영화 《스타게이트 진실의 방주》, 《스타게이트 연속체》 등의 스핀오프도 나왔다. 《스타게이트 SG-1》은 《엑스 파일》의 최장기 북미 SF TV 시리즈 방영 기록을 돌파했고, 이 기록은 후에 《스몰빌》에게 깨졌다. 기술적 변화의 급격한 속도에 대한 우려는 빈저의 소설 《실시간으로 버려지다》(Marooned in Realtime)로 대중화된 기술적 특이점이란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채택된다. 영어 Science fiction은 흔히 공상과학 , 공상과학소설 , 과학소설 등으로 번역된다. 1959년 일본의 하야카와(早川) 출판사는, 미국의 과학소설 잡지인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 약칭 F&SF)과 제휴하여 월간지 S-F 매거진(S-F マガジン)을 창간하면서 잡지 표지에 『공상과학소설지()』라는 부제(副題)를 붙였다. 여기서 공상 과학 이라는 용어는 본래 잡지 이름 중 F&SF를 편의상 의역한 단어였는데, 이를 계기로 science fiction 의 역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과거 일본에서는 SF소설을 과학소설 , 공상과학소설 , 환상과학소설 , 미래과학소설 이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잘 사용하지 않으며, 공상과학소설은 SF소설 라고 부르며, 공상과학장르는 사이언스 픽션 또는 약칭 SF 라고 부른다. 과거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의 아동용 소설 전집이나 외국어 사전류를 통째로 중역(重譯)하여 출간하는 일이 많았기에 일본에서 사용하던 공상 과학 이라는 말이 사이언스 픽션에 대한 역어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현재 사전, 신문기사 등에서 통용되고 있는 표준어이다. 공상과학 이 잘못된 용어이기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다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 공상과학 은 당초 사이언스 픽션 뿐만 아니라 판타지를 포함하는 표현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근본적 오류가 있고 엄밀하지 못한 단어이다. 따라서 영어 Science Fiction을 한국어로 번역함에 있어, 공상 이란 단어가 포함될 이유가 없다. 공상 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상상 이므로 본래 뜻을 훼손하며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때문에 "해당 단어가 90년대 이후 2000년대초까지 팬덤 내부에서 장르에 대한 자의식이 성숙하는 동안 많은 SF 독자들에게 상처를 준 말이었으며, 지금도 적지 않은 SF독자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단어"인 것이 사실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국내 SF계에서는 팬덤과 작가, 출판사 등을 통틀어 오랫동안 공상과학소설 을 과학소설 로 바꿔부르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현재는 영화, 만화, 게임 등 여타 매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장르명으로서 공상과학 을 대체하는 용어로 SF 가 선호되는 편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SF장르를 과학환상() 또는 간단히 과환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도 과학환상작품 이라는 유사용어를 사용한다. Sci-Fi(사이-파이)라는 약어는 1954년에 과학소설 연구가인 애커먼에 의해 공식 문헌에 사용되었다. 하인라인은 이보다 6년 먼저 사적인 글에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SF가 대중문화로 확산되면서 과거에 비해 더 오락 지향적인 SF물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고, 일부 영화 비평가들이 저급한 B급 SF 영화 를 Sci-Fi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부 평론가 등은 이 약어를 멸칭(蔑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SF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간주된다. SF는 발전과 미래 기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 주제는 SF 포럼보다는 문학과 사회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어왔다. 영화와 미디어 이론가인 비비안 소브책은 SF영화와 기술적 상상력 간의 영향관계를 검토했다. 기술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허구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가상 세계는 과학의 상상력을 확장시켰다. 《윌리엄 섀트너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How William Shatner Changed the World)는 현실에서 실현된 상상 속 기술의 다양한 예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새로운 작가들은 클라크 같은 초창기 SF작가들처럼 현재로선 불가능한 기술들을 곧 실현될 것처럼 보이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다. sm.jpg|섬네일|200px|아서 C. 클라크 하드 과학소설, 혹은 "하드 SF"는,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 천체 물리학, 화학의 정확한 세부사항에 대한 엄격한 관심, 혹은 더 발전한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세계에 대한 정밀한 묘사로 특징지어진다. 하드 SF에서 몇몇 정확한 미래 예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수많은 잘못된 예측들 역시 많이 나왔다. 벤퍼드, 랜디스, 브린, 로버트 L. 포워드 같은 몇몇 하드 SF 작가들은 본인들을 현직 과학자로 여기며, 루디 루커, 버너 빈지 같은 수학자 작가들도 있다. 다른 중요한 하드 SF 작가들로는 아시모프, 클라크, 클레먼트, 베어, 니븐, 소여, 백스터, 레이놀즈, 셰필드, 보야, 로빈슨, 이건 등이 있다. "소프트" SF는 아마도 사회 과학, 이를테면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에 기반한 작품들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작가로 르귄, 딕 등이 있다. 소프트 SF라는 용어는 주로 캐릭터와 감정에 집중한 이야기들로 설명할 수 있다; SFWA 그랜드 마스터 브래드버리는 자타공인 이 예술의 장인이었다. 동구권은 폴란드 작가 렘, 자이델과 소련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 불리초프, 자먀틴, 예프레모프 등을 비롯한 방대한 분량의 사회과학 소설을 생산해냈다. 어떤 작가들은 하드 SF와 소프트 SF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회과학 소설과 소프트 SF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야기와 연관된다; 오웰의 《1984》,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가 그 모범적인 사례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같은 풍자 소설 또한 과학소설이나 사변소설로 여겨진다. vs. Thunder Child.jpg|섬네일|H. G. 웰스의 소설 《우주 전쟁》의 일러스트. 헨릭 앨빔 코어 作 (1906년) SF 만화 잡지 《플래닛 코믹스》표지 (1948년 3월) SF를 다양한 하위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각각의 하위장르들이 간단히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어떤 연구들은 일반적으로 정의된 장르들을 중복된 것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장르 밖이나 그 사이에서 장르의 경계에 포섭되지 않는 공간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대중 시장과 문학 비평 사이에도 장르와 분류를 설정하는데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이버펑크 장르는 1980년대 초반 나타났다. 이 용어는 사이버네틱스와 펑크의 합성어 로서, 베트케의 1980년 단편 《사이버펑크》를 통해 처음 만들어졌다. 시간적 배경은 주로 근미래이며, 설정은 대개 디스토피아적이고, 특유의 고통으로 형상화된다. 사이버펑크의 일반적인 주제는 정보 기술, 특히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시각적으로 추상화된 인터넷의 발전, 인공 지능, 보철학, 기업이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닌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적 제어 등이다. 니힐리즘, 포스트 모더니즘, 필름 느와르 기법이 일반적인 요소이며, 주인공은 반항적인 안티 히어로일 때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깁슨, 스털링, 스티븐슨, 캐디건이 있다. 제임스 오흘레이는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사이버펑크 비주얼 스타일의 결정적인 예시라고 말했다. 이것은 후에 오시이의 《공각 기동대》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의 영상물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시간여행물은 18세기나 19세기에 그 전신이 나타난다. 최초의 중요한 시간여행 소설은 트웨인의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이다. 가장 유명한 소설은 웰스의 1895년작 《타임 머신》이다. 트웨인의 소설과 비교했을 때 웰스의 소설에선 시간여행 장치가 조종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차이가 있다. "타임 머신"이라는 용어는 웰스가 만들어낸 것이며, 이젠 시간여행 장치를 부르는데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백 투 더 퓨처》는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이다. 시간여행물은 조부모 패러독스 같은 논리적 문제로 인해 복잡해진다. 시간 여행은 현대 SF에서도 계속해서 인기있는 주제이며, 이를테면 《스타게이트 SG-1》이나 BBC의 텔레비전 드라마 《닥터 후》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대체 역사는 역사적 사건이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분야의 소설들은 종종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 여행을 동원하거나, 간단하게 우리의 역사와는 다른 우주를 설정한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무어의 《희년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나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가 이 분야의 고전이다. 횡향 상은 최고의 대체역사물에 수여된다. 이 이름은 라인스터의 1934년 작품 《시간의 횡향》에서 가져왔다. 터틀도브는 이 분야의 가장 눈에 띄는 작가이며, 종종 "대체 역사 마스터"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밀리터리 SF는 국가, 행성, 항성간의 군사 분쟁을 배경으로 삼은 하위장르이며,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대개 군인이다. 밀리터리 SF는 군사 기술, 절차, 의식, 역사의 세부 사항을 포함하며, 종종 실제 일어난 역사적 분쟁을 거울처럼 비춘다.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는 고든 딕슨의 《도르세이》와 함께 이 분야 초기의 예시이다. 초기 작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베트남 전쟁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스타일로 창작된 이 장르에 대한 비판이다. 존 링고, 데이비드 드레이크, 데이비드 웨버, 톰 크래트먼, 마이클 Z. 윌리엄슨, S. M. 스털링, 존 F. 칼, 돈 호스론 등이 이 분야에서 눈에 띄는 작가이다. 밴 북스 출판사는 이 소설가들 여럿을 육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인물은 평범한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등장을 주제로 다룬다. 스테이플던의 소설 《이상한 존》과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 와일리의 《검투사》에서처럼 자연적 발생을 기원으로 삼거나, 아니면 밴보트의 소설 《슬랜》에서처럼 과학적 진보를 통한 의도적인 개조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초인물이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초인들을 보는 사회의 반응과 초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다. 초인물은 현실 사회에서도 인간 개조에 대한 토론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폴의 《맨 플러스》 역시 이 카테고리에 포함 된다. 아포칼립스물은 전쟁을 통한 문명의 종말(해변에서), 전염병(최후의 인간), 운석 충돌(세계가 충돌할 때), 생태학적 재해(미지에서 불어온 바람), 그리고 기타 일반적 재해나 재해 발생 이후의 세계와 문명에 대해 다루는 하위장르이다. 스튜어트의 소설 《견디는 지구》(Earth Abides)와 팻 프랭크의 아아, 바빌론 등이 이 분야의 전형이다.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이 근미래(매카시의 《로드》)닥친 재앙의 여파부터 375년 후의 미래(바빌론의 물로 인해), 수백 수천년 후의 미래(러셀 호반의 리들리 워커, 월터 M. 밀러 2세의 레보위츠를 위한 송가)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는 데 비해, 아포칼립스물은 일반적으로 재앙 그 자체와 그 직후의 여파를 다룬다. 아포칼립스 SF는 비디오 게임에서 인기있는 장르이다.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폴아웃 시리즈는 핵전쟁의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면서 점차 회복되어 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작중 일부, 혹은 작중 전체를 외우주나 여러 개의 (때로 멀리 떨어진) 행성들을 배경으로 삼는 SF 모험물이다. 갈등은 대개 영웅적이고, 대규모로 발생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때로 황당한 플롯, 터무니없는 과학, 골판지 같은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로써 경멸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 용어는 동시에 노스탤지어적으로도 쓰이며, 현대 스페이스 오페라는 SF의 황금기 시절의 경이감을 재탈환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서브장르의 선구자는 종달새와 렌즈맨 시리즈를 쓴 에드워드 E. (닥) 스미스이다. 조지 루커스의 스타 워즈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 프랜차이즈 중 가장 유명하다. 이 시리즈는 온우주를 가로질러 펼쳐지는 선과 악의 장엄한 대결을 다룬다. 알래스터 레이놀즈의 묵시론 우주(Revelation Space) 시리즈, 피터 F. 해밀턴의 보이드 삼부작, 밤의 새벽, 판도라의 별 시리즈, 버너 빈저의 심연 위의 불길, 하늘의 깊이는 이 장르의 새로운 견본이다. 비디오 게임계에서 나타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좋은 예로 매스 이펙트 시리즈가 있다. 스페이스 웨스턴은 미국 서부극의 책과 영화의 주제를 미래적인 우주 변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하위장르는 일반적으로 갓 테라포밍 됐거나 정착된 콜로니 세계를 다루며, 이것은 무법이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확장되던 옛 미국 서부의 대역이다. 숀 코너리의 영화 《아웃랜드》, 하인라인의 《우주의 농부》, TV 시리즈 《반딧불》, 조스 휘던의 영화 《세레니티》 속편, 만화나 애니메이션인 《트라이건》, 《금지된 별》, 《카우보이 비밥》 등이 이 장르의 예시이다. 사회 과학 소설은 인간 사회와 SF적 설정에 배치된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SF 하위장르이다. 대부분 인류에 대한 사변에 집중하는 대신 과학적 엄밀함엔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보통은 소프트 SF로 분류된다. 기후물 혹은 클라이파이(Cli-fi)는 가상의 기상 설정과 그 결과를 다룬다. 인류학 SF 괴수물 바이오펑크 코믹 SF 페미니즘 SF 스팀펑크 디젤펑크 SF 시 SF 팬덤은 "아이디어 문학의 커뮤니티…새로운 아이디어가 사회에 출시되기 전에 나타나 길러지는 문화이다."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인 "팬"들은 컨벤션이나 클럽, 종이나 온라인 팬진, 웹사이트, 메일링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통로를 통해 서로 접촉한다. 미국의 SF 팬덤은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서한 칼럼을 통해 등장했다. 곧 팬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후에 팬진으로 알려질 비공식 출판물을 통해 자신들의 논평을 모았다. 정기적인 연락이 이어지자 팬들은 서로를 만나고 싶어했고, 지역 클럽을 조직했다. 1930년대, 최초의 SF 컨벤션은 팬들을 더 넓은 공간에서 만나게 했다. 컨벤션, 클럽, 팬진은 인터넷이 더 많은 사람들 간의 통신을 용이하게 만들기 전까지 수십년간 팬 활동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유의미한 형태로 조직된 팬덤은 나우누리, 천리안 등의 PC 통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인터넷 시대가 개막하며 보다 개인적인 성향의 팬덤층이 나타났다. 2017년에 이르러 SF작가들만으로 구성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와 넓은 범위의 팬 중심 단체인 한국SF협회가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세계 SF 학회(World Science Fiction Society)의 월드콘에서 수여되는 휴고상, SFWA와 작가 커뮤니티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는 네뷸라 상, 최고의 과학소설을 위한 존 W. 캠벨 기념상, 테오도어 스터전 기념상(단편) 등이 가장 권위있는 SF상으로 취급된다. SF영화 분야에서 유명한 상으로 SF, 판타지, 호러 영화 아카데미가 매년 수여하는 토성 상이 있다. 그밖에 캐나다의 프릭스 오로라 상(Prix Aurora Awards)이나 일본의 성운상 같은 국가별 상, 태평양 북서부 오리콘에서 수여되는 엔데버 상 같은 지역별 상, 판타지 분야의 세계 판타지 상이나 미술 분야의 첼시 상처럼 하위장르에 수여되는 상들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과학기술 창작문예가 있었으나 곧 폐지됐고, 2014년 과천SF영화제의 일환으로서 SF 어워드가 시작됐다. 낭독 중인 파멜라 딘 컨벤션(팬덤에서는 주로 "콘"으로 줄여부름)은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열리는 지방, 지역, 국가, 국제 행사이다. 일반적인 컨벤션은 SF의 모든 측면을 다루지만, 미디어 팬덤이나 펄킹을 비롯한 몇몇은 특정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대부분 NGO의 자원봉사자들로 조직되지만, 미디어 지향적 이벤트들은 주로 상업적인 프로모터들로 조직된다. 컨벤션의 행사들은 "프로그램"으로 불리며, 이는 패널 토론회, 독서회, 사인회, 코스튬 무도회 등을 포함한다. 프로그램의 일환이 아닌 컨벤션 내내 지속되는 행사들로는 딜러의 방, 아트 쇼, 환영 라운지("콘 스위트룸") 등이 있다. 컨벤션엔 수상식이 포함될 수도 있다. 월드콘은 매년 휴고상을 수여한다. 형식적인 맥락에 집착하지 않는 "클럽"이라 불리는 SF 조직들은 SF팬들을 위한 연중 행사를 연다. 이것은 SF 컨벤션이나 정기 클럽 미팅과 연계될 때도 있다. 대부분의 모임은 도서관, 학교, 대학교, 커뮤니티 센터, 술집, 식당, 조직원의 집에서 열린다. 전통 있는 모임인 뉴잉글랜드 SF 협회, 로스 앤젤레스 SF 협회 등은 모임을 위한 클럽하우스와 컨벤션 자료와 연구 자료들이 보관된 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전문 SF 작가들을 위한 미국 SF&판타지 작가 모임(SFWA)는 1965년 데이먼 나이트에 의해 비영리 단체로 설립됐다. 24년 후 데이먼 나이트의 에세이 "단결 또는 저런!"은 국립 판타지 팬 연합에 인계됐다. 팬덤은 미디어 팬덤, 창조적인 시대착오를 위한 모임, 게이머, 플리커, 퍼리 팬덤 등의 관련 그룹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최초의 SF 팬진 《혜성》은 1930년에 출간됐다. 팬진의 출판 방식은 젤라틴판, 둥사판, 저두 기계에서 현대적인 복사 방식에 이르기까지 수십년에 걸쳐 변화했다. 유통과 배급은 가끔씩 상업 인쇄물의 가격을 결정한다. 현대 팬진은 컴퓨터 프린터나 지역 인쇄소, 혹은 이메일을 통해서 발행된다. 현재 가장 유명한 팬진은 데이빗 랭포드가 편집하는 《앤서블》이며, 해당 팬진은 여러 차례 휴고상을 수상했다. 최근 상을 받은 다른 팬진들로 《파일 770》, 《미모사》, 《플록타》가 있다. 브래드 W. 포스터, 테디 할비아, 조 메이휴처럼 팬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업계에서 주목 받고 있으며, 휴고상은 최고의 팬 아티스트 항목을 신설했다. 가장 초창기에 조직된 온라인 팬덤은 SF Lovers 커뮤니티이며, 이것은 본래 1970년대 후반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되는 아카이브 파일을 받던 메일링 리스트에 기반한 것이다. 1980년대, 유즈넷 그룹이 온라인상에서 크게 확장했다. 1990년대, 월드 와이드 웹의 개발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말그대로 수천 수만개의 SF와 관련 장르, 매체를 다루는 웹사이트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이트는 소규모에 짧게 지속됐으며, 좁은 분야에 집중했지만, SF 사이트처럼 광범위한 SF 관련 레퍼런스와 리뷰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있었다. 애호가들 사이에선 주로 "팬픽"으로 불리는 팬 픽션은 기존의 책, 영화, 비디오 게임, TV 시리즈(드라마) 등의 설정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비영리적 픽션을 일컫는다. 이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는 (1970년대 이전의) 전통적인 "팬 픽션"의 의미와 헷갈리기 쉽다. 본래 팬덤 커뮤니티내에서 팬 픽션이란 팬들이 창작해 팬진에 실은 (종종 팬들 자신을 작중 인물로 활용한) 오리지널, 패러디 픽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1956년 아일랜드 팬 존 베리가 그와 아서 톰슨의 팬진인 《징벌》(Retribution)에 실은 군 디펙티브 에이전시(Goon Defective Agency) 이야기가 있다. 최근 몇년간, SF 우주간의 콜라보레이션을 지향하는 오리온의 팔, 갤럭시키 등의 사이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어떤 경우엔 책, 영화, TV 시리즈의 저작권자가 그들의 변호사를 통해 팬들에게 "중단 및 단념" 권고를 통지하기도 한다. 중요한 로망스 작가로 여겨지는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SF소설을 여럿 썼다. 《유년기의 끝》를 비롯한 많은 SF소설들이 비평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오웰의 《1984》,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주류 문학에서 존경받는 여러 작가들이 SF를 썼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레싱은 SF 시리즈 《아르고스의 카노푸스》를 썼고, 보니것이 쓴 대부분의 작품은 SF의 소재나 테마를 포함하고 있다. 학자 시피는 SF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SF와 판타지의 관계란 무엇인가? SF 독자는 여전히 남자 청소년들이 지배적인가? SF는 성숙하지만 괴벽하지 않은 문학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취향인가?" SF 작가 르귄은 그녀의 여러 차례 재판된 에세이 "과학소설과 브라운 부인(Science Fiction and Mrs Brown)"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영국 작가 울프의 에세이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르귄은 이러한 기준이 SF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에세이 초입부에 수사적으로 던진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시피 는 그의 에세이에서 르귄의 주장에 반론하지는 않으나, SF 소설과 SF 분야 밖에서 쓰인 소설 간에 놓인 본질적 차이를 논의하고 확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와 폴과 C. M. 콘블루스의 《우주 상인》을 비교하고, SF 소설의 기반과 특성은 노붐 (다코 수빈이 블로흐에게서 가져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사실과 다르지 않은, (현재의 지식으로는) 확실하게 불가능하지 않은 정보의 개별 조각" 이라고 정의한 용어)의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한편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창자라 불리는 피들러는 1970년대부터 주류 문학과 SF를 구분하기가 "황금기" 시절 작가들이 주장하던 때처럼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에서나 적절한 불모의 언어"를 통해 "학문적 해석"을 하는 아카데미 학자들이 "부적절하게도 엘리트 비평이론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테면 하인라인, 아시모프, 특히 밴보트, 닥 스미스, 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이 영문학계에서 종종 SF소설에 애착을 가진 학자들에게조차 부당하게 무시당하는 현실은 과학소설의 실패가 아니라 윤리적, 심미적인 엘리트비평이 평가의 잣대로 삼는 전통적 기준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고 논한다. SF는 고전적 문학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직설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SF와 비SF 소설을 모두 쓰는 작가 카드는, SF에서 작품의 메시지와 지적 의미는 이야기 내부에 포함되며, 따라서 문체의 기믹이나 문학적 게임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언어의 명확성을 예술성의 부족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카드의 말을 인용하면, 판타지 작가 줄리엣 E. 매케나는 비슷한 견지에서 말하길, SF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벤퍼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SF는 아마도, 비록 SF의 점령군이 여전히 문학의 성채, 로마 바깥에 야영하고 있더라도,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이다." 이러한 배제의 의미는 책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조나단 레뎀의 에세이 "근접 조우 과학소설의 낭비된 약속" 을 통해 뚜렷이 지적됐다. 레뎀은 1973년, 네뷸러상에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가 노미네이트되고,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가 수상했을 때, "SF가 주류와 융합될 수 있다는 희망의 죽음을 선언하는 숨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레뎀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SF&판타지 매거진》의 편집자는 "언제쯤 돼야 SF 장르는 메인스트림을 감동시키려는 시도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 라고 되물었다. 이 시점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버넷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베넷은 그의 최근 에세이에서 이 "끝없는 전쟁" 의 새로운 전개를 지적했다 판타지 사변 소설 브라이언 올디스. Billion Year Spree The True History of Science Fiction , 1973. 브라이언 올디스와 데이빗 윙글로브. Trillion Year Spree The History of Science Fiction , revised and updated edition, 1986. 킹슬리 에이미스. New Maps of Hell A Survey of Science Fiction , 1958. 닐 배론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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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原子, atom)는 화학 반응을 통해 더 쪼갤 수 없는 단위를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 또 핵반응을 통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나뉜다. 원자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원소 를 들 수 있는데,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고 한다면,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성분의 종류라고 하겠다. 한편, 여러 원자의 화학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자는 물질의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인도 유럽어에서 쓰이는 atom은 고대 그리스어 a-tomos 에서 온 것으로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 a- 부정, tomos 쪼갬)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뜻과는 약간 달리 동양에서 쓰이는 원자(原子)라는 한자어는 물체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준용하여 atom을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atom이라는 낱말은 언어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개념은 이미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쓴 것이다. 이러한 어원대로라면 당대에 알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단위(현재는 쿼크와 렙톤)가 원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물리학과 화학에서는 이 항목의 정의에 따른다. right 원자는 원자핵 주변에 전자가 존재하는 구조를 가지는데, 이 구조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가설을 세우고 주장하였다. 1803년 영국의 과학자 돌턴에 의해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고, 같은 종류의 원자는 크기와 질량이 같아 다른 원자로 변환, 소멸, 생성되지 않는다는 원자설을 제시하였다. 이때 돌턴이 제시한 원자모형은 딱딱한 공 모양이었다. 1897년 영국의 과학자 조지프 존 톰슨은 양극에서 음극으로 음극선을 쏘면서 진행경로에 장애물을 놓거나 전기장과 자기장을 걸어주는 음극선 실험을 수행하였다. 이 실험결과로부터 음극선은 질량이 있고 직진을 하며 전기적으로 (-)전하를 가지는 입자임을 알아냈고, 이를 전자라 명하였다. 이 실험을 바탕으로 1907년에 톰슨은 양전하를 가지는 물체에 음전하를 가지는 전자가 빵 속의 건포도처럼 박혀있는 원자모형을 제시한다. 전자의 발견은 돌턴의 원자 모형에서 전기적으로 양성을 띤 부분과 전기적으로 음성을 띤 부분을 구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11년 영국의 과학자 러더퍼드는 알파입자를 얇은 금박에 쏘는 알파입자산란실험을 통해 대부분의 알파입자는 금박을 통과하고 일부는 튕겨 나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러더퍼드는 원자의 중심에는 양전하를 띄는 입자가 모여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공전하고 있는 행성모형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선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13년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는 전자가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가지는 층에 존재한다는 양자개념을 도입하여 가설을 세우고 이에 근거한 보어의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양자역학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1926년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어 전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 즉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표하여 물질의 이중성을 입증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에 독일의 과학자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전자의 파동함수가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함수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확률적 해석을 바탕으로 원자 주위에서 전자를 발견할 확률을 계산하여 확률의 분포를 점으로 찍어 구름처럼 표시하는 현대의 원자모형이 탄생하였다. 양성자·중성자·전자의 특성 입자 질량kg 상대 질량 전하C 상대 전하 양성자 1.673×10-24 1 +1.602×10-19 +1 중성자 1.675×10-24 1 0 0 전자 9.110×10-28 1/1837 -1.602×10-19 -1 원자는 양성자의 양전하량과 총 전자의 음전하량이 같기 때문에 전기적으로 중성을 띄며, 원소에 따라 양성자 개수가 각각 다르다. 따라서 양성자의 개수로 원자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데, 이를 원자번호(Z)라 한다. 따라서 원자번호(Z)는 곧 양성자수이며, 양성자수와 중성자수를 합친 것을 질량수(A)라고 한다. 양성자수가 같지만 중성자수가 달라 질량수가 다른 원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를 동위원소라고 한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강한 상호작용으로 결합해 있다. 이들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를 주기율표로 분류할 수 있으며 화학적인 성질이 결정된다. 이 결합을 바꾸면 아주 강한 힘이 나온다. 전자는 원자핵과 반대인 음의 전하(-1)를 띠며 원자핵 주위에 확률적으로 전자구름을 이루며 존재한다. 양성자는 atom number이고 중성자는 atom mass-atom number이다. 원자 단위의 물리학은 원자 광학과 나노 과학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실험은 원자를 옮기고 운동 속도를 조정하며 이루어진다. 원자보다 더 작은 원자핵의 물리학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주제가 된다. 존 돌턴 (John Dalton) J. J. 톰슨 (Joseph John Thomson) 어니스트 러더퍼드 (Ernest Rutherford) 닐스 보어 (Niels Bohr) 스티븐 와인버그, 아원자 입자를 찾아서 , 민음사 *분자 *원자핵 *전자 *중성자 *양성자 네이버 캐스트 - 빅뱅에서 태어난 원자, 원자로 구성된 나, 원자와 원자 핵, 원자론이 부른 비극 분류:화학 분류:원자물리학 분류:화학 결합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
여러 각이 표시된 극좌표 극좌표계 (極座標系)는 평면 위의 위치를 각도와 거리를 써서 나타내는 2차원 좌표계이다. 극좌표계는 두 점 사이의 관계가 각이나 거리로 쉽게 표현되는 경우에 가장 유용하다. 직교 좌표계에서는 삼각함수로 복잡하게 나타나는 관계가 극좌표계에서는 간단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2차원 좌표계이기 때문에 극좌표는 반지름 성분과 각 성분의 두 성분으로 결정되며 주로 로 나타내는 반지름 성분은 극(데카르트 좌표에서 원점)에서의 거리를 나타낸다. 주로 로 나타내는 각 성분은 0°(직교 좌표계에서 x축의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잰 각의 크기를 나타낸다. 각과 반지름의 개념은 이미 기원전에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기원전 190 ~ 120년)가 여러 각마다 현의 길이를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는데, 그가 항성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묘사한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반지름 성분이 각에 따라 변하는 함수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완성된 좌표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극좌표를 정식 좌표계로 도입한 예는 여러 번 있었다. 이에 대한 역사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줄리언 로웰 쿨리지의 《극좌표의 근원》에 서술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에 그레구아르 생뱅상과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는 독립적으로 극좌표의 개념을 발표하였다. 생뱅상은 1625년에 작성해 1647년에 출판하였으며, 카발리에리는 1635년에 출판하였으며, 개정판은 1653년에 나왔다. 카발리에리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극좌표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블레즈 파스칼은 포물선의 길이를 계산하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유율법》(Method of Fluxions, 1671년 작성, 1736년 출판)에서 “일곱 번째 방법 나선에 대하여”로 표현한 극좌표와 다른 아홉 가지 좌표계 사이의 변환을 분석하였다. 야코프 베르누이는 학술지 《 Acta Eruditorum 》(1691년)에서 점과 선을 이용한 좌표계를 사용하고 각각을 극과 극축이라 불렀다. 좌표는 극에서의 거리와 극축에서의 각으로 정의하였다. 베르누이의 연구는 곡선의 곡률반지름을 찾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극좌표”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오 폰타나가 처음 정하였으며, 18세기의 이탈리아 학자들이 사용하였다. 영어로는 조지 피콕이 1816년 라크루아의 《미적분학》(Differencial and Intergral Calculus)을 번역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는 극좌표를 처음으로 3차원으로 확장하였으며, 오일러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극좌표로 표시된 (3, 60°)와 (4, 210°) 극좌표계의 점은 반지름( r )과 각( θ )로 표현된다. r 은 극에서의 거리를 의미하고, θ 는 0°(직교 좌표계의 x축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의 각도를 의미한다. 만약 r 이 음의 값을 갖는다면, θ 가 가리키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거리 | r |만큼 떨어진 점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극좌표 (3, 60°)는 극에서 60° 방향으로 3단위만큼 떨어진 곳을 나타낸다. 극좌표 (3, -300°)도 같은 위치에 그려진다. 데카르트 좌표와는 달리 극좌표에서는 하나의 점을 나타내는 방법이 무한히 많다. 여러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돌아와도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 r, θ )는 :( r, θ ± n ×360°) 또는 (− r, θ ± (2 n +1)×180°) 로 표현될 수 있다(n은 임의의 정수). (0, θ )는 일반적으로 극을 뜻하며, 반지름이 0이기 때문에 어떠한 각이든 상관이 없다. 점을 나타내는 방법을 하나로 제한할 때에는 r 은 양수로, θ 는 구간 0, 360°) 또는 (−180°, 180°(라디안으로는 0, 2π) 또는 (−π, π)의 수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극좌표의 각은 라디안을 이용한 호도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으며(2π rad = 360°),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항행에서는 60분법으로 각을 나타내며, 물리 분야(특히 회전 역학)와 거의 모든 미적분에서는 호도법이 쓰인다. 극좌표와 데카르트 좌표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그림. r 와 θ 는 삼각함수를 이용해 데카르트 좌표의 x 와 y 로 변환할 수 있다. 데카르트 좌표의 x 와 y 는 극좌표의 r 로 변환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 정리 사용) θ 를 정의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r = 0 일 때는 θ 는 임의의 실수가 될 수 있다. r ≠ 0 일 때는 표현의 유일성을 위하여 크기가 2π보다 작은 구간으로 한정한다. 보통은 0, 2π) 나 (−π, π가 사용된다. 0, 2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는 의 역함수이다.) (−π, 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극좌표를 이용하여 곡선을 나타내는 방정식을 극좌표 방정식 또는 극방정식 이라고 한다. 보통은 r 를 θ 에 관한 함수로 정의한다. 곡선 위의 점은 로 정의되며 함수 r 의 그래프로 생각할 수 있다. 극좌표 방정식 r ( θ )의 형태로부터 대칭성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r (− θ ) = r ( θ ) 이라면 곡선은 수평 반경(0° / 18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 (π− θ ) = r ( θ )이라면 수직 반경(90° / 27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 ( α − θ ) = r ( θ )일 때는 α/2 만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린 곳에서 대칭이 된다. 극좌표계의 성질 덕에 많은 곡선이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에 반해 데카르트 좌표로 표현되려면 난해한 곡선이 많이 있다.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곡선은 극좌 장미 곡선, 아르키메데스 나선, 달팽이꼴 곡선, 심장형 등이 있다. 아래에 서술된 내용에는 정의역과 치역의 범위의 제한은 없다. r ( θ ) = 1 로 정의되는 원 원의 중심이 ( r 0, φ )이며 반지름이 a 인 원의 일반적인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위의 방정식은 상황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r ( θ )= a (원의 중심이 극에 있고 반지름이 a인 경우) 극을 통과하는 선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된다. θ = φ 위의 방정식에서 φ 는 극을 통과하는 선의 기울기를 각도로 표현한 것이며( φ = arctan m ), m 은 데카르트 좌표에서의 기울기이다. 직선 θ = φ 에 수직이면서 점 ( r 0, φ )를 지나는 직선은 로 나타낼 수 있다. r ( θ ) = 2 sin 4 θ 로 정의되는 극좌표 장미곡선 수학에서 장미 곡선은 꽃잎을 지닌 꽃처럼 보이는 유명한 곡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는 임의의 상수) k 가 홀수일 때는 k 개의 꽃잎을 지니며, k 가 짝수일 때는 2 k 개의 꽃잎을 지닌다. k 가 정수가 아닐 때에는 꽃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때는 꽃잎이 겹쳐 보이게 된다. 즉, 4 n + 2개의 꽃잎을 지닌 장미 곡선을 그릴 수는 없다. 변수 a 는 꽃잎의 길이를 의미한다. of Archimedes.svg|섬네일|right|230px0 0일 때와 θ 1일 때 이 방정식은 쌍곡선이 되며, e = 1일 때는 포물선이 되고, e i 이 각 구간의 중점이라 하고 극에 중심을 두는 부채꼴을 만든다( r (θ i ), 중심각 Δθ , 호의 길이 r ( θ i ) Δθ ). 이때 만들어진 각 부분의 넓이는 이다. 따라서 총 넓이는 다음과 같은 리만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구간의 개수 n 이 증가함에 따라 그 극한값은 R 의 넓이에 가까워진다. 데카르트 좌표를 이용해서 무한소 넓이는 와 같이 계산된다. 치환 적분법으로 좌표계를 바꾸어 중적분할 때에는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극좌표계의 좌표에 따른 넓이는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이제 극좌표계로 주어진 함수는 다음과 같이 적분할 수 있다. 여기서 R 는 곡선 r ( θ ), θ b 에 둘러싸인 영역이다. R 의 넓이는 함수 f 를 1과 같다고 하면 된다.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한 놀라운 결과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가우스 적분이다. 벡터 미적분은 극좌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를 위치 벡터 , ( r 과 θ 는 시간 t 에 의해 좌우된다.) 의 방향을 나타내는 단위 벡터 를 다음과 같이 두고, 에 수직인 단위 벡터를 다음과 같이 두자. 이때 r 의 1계 미분, 2계 미분은 다음과 같다. 극좌표계는 원통좌표계와 구면좌표계로 확장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는 2차원의 극좌표계를 포함한다. 원통좌표계는 거리 좌표를 더해 극좌표계를 확장시키며, 구면좌표계는 각 좌표를 더해 확장한다. 원통좌표계로 그려진 점 원통 좌표계는 평면 극좌표로 (0,0)을 제외한 xy 평면 전체를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으므로, 여기에 z 축을 더하여, 3차원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평면 극좌표계의 r, θ, 그리고 z 로 이루어지는 이 좌표계를 원통 좌표계 라고 한다. 원통 좌표계 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 좌표 중 r 이 고정되고, θ, z 가 임의의 값을 취할 수 있을 때의 자취가 원통이기 때문이다. 원통 좌표계의 특이점은 z 축 위의 점들이다. 세 가지 원통 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써서 데카르트 좌표로 변환할 수 있다. 구면좌표계로 그려진 점 구면좌표계는 원점에서의 거리 r , z 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θ , xy 평면으로의 사영이 x 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φ, 이 세 가지 변수 r,θ,φ 로 이루어지는 좌표계이다. 특이점은 r nπ (단, n 은 자연수)를 만족하는 모든 ( r,θ,φ )이며, 직교 좌표계에선 각각 ( x,y,z )=(0,0,0), z 축에 해당한다. 구면 좌표계는 r 을 고정시켰을 때의 자취가 원점을 중심으로 하는 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면좌표계의 r 은 원점과의 거리인 반면 원통 좌표계의 r 은 z 축과의 거리이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원통 좌표계의 반지름을 r 대신 ρ 를 써서 표기하기도 한다. 원통 좌표계의 θ 는 구면좌표계의 θ 가 아닌, φ 와 일치한다. 또한 이 좌표계는 지구의 지도에 사용되는 위도, 경도와 비슷하다. 위도 δ 는 θ 의 여각이며( δ φ − 180°와 같이 정의된다. 세 가지 구면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직교 좌표로 변환될 수 있다. 극좌표계는 2차원이기 때문에 점이 2차원 면에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다. 극좌표계가 가장 널리 쓰이는 곳은 어떤 현상이 중앙에서의 거리와 방향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이다. 위의 예시는 기본적인 극좌표를 사용한 식이 곡선을 정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아르키메데스 소용돌이처럼 직교 좌표계로는 표현했을 때 복잡한 식이 한 예이다). 또한, 물체가 중심에서 돌거나 중심을 두고 발생하는 현상이 자주 관찰되는 물리 체계에서는 극좌표계를 적용하는 것이 보다 간단하고 직관적으로도 이해하기 쉽다. 극좌표계를 도입하고자 한 계기는 등속 원운동이나 궤도 운동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극좌표계는 항행에 자주 쓰이며, 각과 거리로 목적지나 여행 방향을 정해준다. 예를 들어 항공기는 항행을 위해 약간 변형된 극좌표를 사용한다. 0°는 주로 360°로 주로 일컬어지며, 각도는 반시계 방향이 아닌 시계 방향으로 돈다. 360°는 자북극을 가리키며, 90°, 180°, 270°는 각각 동쪽, 남쪽, 서쪽을 일컫는다. 따라서 동향으로 5해리를 이동하는 항공기는 90°로 5단위를 이동하는 것이 된다(항공 교통 관제에서는 90(niner-zero)라고 읽는다). 36W column loudspeaker polar pattern.png|섬네일|230px|공업 확성기에서의 6가지의 주파수의 출력 경향을 구면좌표계에 그린 것 중앙점이 대칭의 기준이 되는 시스템이면 자연스럽게 극좌표계를 사용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하수 공식이며, 방사적으로 대칭되는 우물에 곧잘 쓰인다. 또한 중심력이 있는 시스템도 극좌표가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력장(거꿀제곱법칙을 따른다), 안테나와 같이 점광원이 쓰이는 체계 등이다. 방사적으로 비대칭되는 시스템에도 극좌표계가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폰의 지향특성은 음원의 방향에 따라 비례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러한 패턴은 극좌표 곡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마이크인 카디오이드 마이크의 곡선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패턴은 낮은 주파수에 전방향성으로 바뀐다. 확성기의 출력을 3차원으로 모형화한 것은 확성기의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패턴이 주파수에 따라 많이 변하기 때문에 여러 주파수에서 그린 그래프가 필요하다. 극좌표계 그래프는 많은 확성기가 낮은 주파수에서 전방향성으로 향하는지를 알려준다. 구면좌표계 초구면 좌표계 구면 조화 함수 Coordinate Converter - converts between polar, Cartesian and spherical coordinates Polar Coordinate System Dynamic Demo 분류:좌표계 |
덩샤오핑 (, 1904년 8월 22일 - 1997년 2월 1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중국 공산당의 소위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국가원수직에 있었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그는 1904년 8월 22일 청나라 쓰촨 성 광안의 한 마을에서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덩원밍은 아들의 이름을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의 선성(先聖)으로 지어주었고, 다섯 살때에 서당 훈장이 희현으로 고쳐주었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된 후에 만들어낸 별명이다. 아버지가 지주였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므로, 덩샤오핑은 낙관주의 곧 모든 일을 좋게 생각하기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낙관주의는 정치가로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주었고, 원만한 성격덕분에 공산당에서 적이 없었다. Deng Xiaoping in France.jpg|섬네일|왼쪽|프랑스 유학 시절의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다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 곧 해외유학을 만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와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00명의 중국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도 1920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 유학생일 때에 덩샤오핑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기관지인 적광(赤光,붉은 태양)을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를 만난 때이기도 한데,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여섯살 어린 덩샤오핑을 아꼈으며, 덩샤오핑도 저우언라이를 큰형님으로 따랐다. 1926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때문이었다. 소련 유학시절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에 돌아왔다. 덩샤오핑은 유학을 마치고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 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으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중 류보청과 함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덩샤오핑은 류보청이 사단장인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일했다. 화이하이 대전에서 덩샤오핑이 이끈 60만명의 군대는 100만명의 국민당 군대를 크게 이겼다. 1946년부터 1949년 국공내전시기에 화중, 화남, 서남지방이 해방되었으며, 서남지방(쓰촨,꾸이저우,윈난,티베트)등 서남지방 4개성을 다스리는 제1서기가 되었다. 덩샤오핑의 가족 (1945년)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장 시유안으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두 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은 윈난 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을 두었다(2남 3녀). 덩샤오핑 서기장은 젊은 시절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으며, 르노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금속 노동자로 살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금속 노동 경험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생시절 중국 공산당(CCP)에 가입한다. 그는 장정의 베테랑이었으며 마오쩌둥(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다. 마오쩌둥은 혁명 직후 그를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Deng Xiaoping in NRA uniform.jpg|섬네일|왼쪽|1937년의 덩샤오핑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재정 부장·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부총리,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실권하였으나, 1973년 부총리로 다시 복권되었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Deng factory.jpg|섬네일|오른쪽|우한의 한 공장을 방문한 덩샤오핑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공산주의 사상을 존중하되 중국의 현실에 맞게 해석하는 합리적인 생각에 근거한 경제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다. 권력의 누수를 걱정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 1974년 복귀하고 1975년에는 중화인민지원군의 총참모장에 내정되지만 재차 1976년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가 겪은 가장 큰 슬픔은 홍위병에 쫓겨다니던 큰아들 덩푸팡(1944년-)이 베이징대학교에서의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덩푸팡은 1984년 장애인복지기금,1988년 장애인연합회,1999년엔 지적장애인의 자활을 돕는 단체등의 장애인 인권단체들을 만드는 등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다. 그 해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복직한다. 여러번 숙청당했다가 기적적으로 복귀를 반복하여 그에게는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후 마오쩌둥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고 그에게는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 라고 냉정한 평가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마오쩌둥의 직계는 물론 자신에게 잠재적인 정적이 될 만한 세력의 숙청을 감행한다. Zedong,Deng Xiaoping and Wang Jiaxiang.jpg|섬네일|왼쪽|마오쩌둥과 왕자샹과 함께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둥과 한나라의 고조와 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점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덩샤오핑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 가지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였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하나는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것이었다. 그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 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주석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Soong and Deng at International Meetings of Communist and Workers.jpg|섬네일|오른쪽|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공산당 노동자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쑹칭링과 함께(1957년) 1975년 당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76년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였으나 1978년 복권되었고 1982년까지 당 부주석·총참모장·부총리·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지냈다. 1978년부터는 중국 중앙인민협상회의 주석직을 겸하였으며,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은 1983년까지 유지하였다. 1982년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정치국 상무위원·공산당 중앙 고문위원회 주임을 겸직하여 중공의 최고 정치 실력자로 군림했으나, 1993년 사실상 은퇴하여 노환과 숙환에 시달리다 사망하였다. DengXiaoping.jpg|230px|섬네일|왼쪽|덩샤오핑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1981년 명예 국가 주석인 쑹칭링이 죽고 국가주석직 부활이 무산되자 그는 임시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83년 국가 주석직이 부활하여 리셴녠에게 주석직을 넘겼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위원회와 당 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을 그가 차지함으로써 실권은 그가 쥐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의 재통일의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덩샤오핑의 개혁의 목표는 4대 현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현대화, 공업의 현대화, 국방의 현대화, 과학기술의 현대화이다.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공산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공산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and Betty Ford meet with Deng Xiaoping, 1975 A7598-20A.jpg|250px|섬네일|왼쪽|1975년 베이징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덩샤오핑.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덩샤오핑 본인으로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들여왔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 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 분야에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 전체에 도입되었다. 많은 개혁들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이 경험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덩샤오핑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장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톈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 놓은 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93세. 덩샤오핑의 동상 언론인 짐 로워는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공산주의 틀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유언과 같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유해는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화장 정책을 추진한 중국 정부답게, 시민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유언했다. 죽고 난 뒤 장쩌민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문제도 중국본토가 매년 빠르게 현대화되고 번영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덩샤오핑 평전》- 벤저민 양 지음, 권기대 옮김, 황금가지 펴냄. 살림지식총서《덩샤오핑-개혁개방의 총설계사》/박형기 지음/살림 덩샤오핑주의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덩샤오핑 분류:1904년 태어남 분류:1997년 죽음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분류: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분류: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분류:중국의 혁명가 분류:중국의 공산주의자 분류:중국의 사회주의자 분류:쓰촨성 출신 분류: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문 분류:모스크바 손중산대학 동문 분류:하카인 분류:중국 공산당의 정치인 분류:중화민국 대륙 국민정부 초기 시대 인물 분류:중국-베트남 전쟁 관련자 분류: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중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마오쩌둥 분류:프랑스에 거주한 중국인 분류:소련에 거주한 중국인 분류:국공 내전 관련자 |
연분수 (連分數)는 다음과 같은 꼴의 분수를 말한다. 식에서 은 정수, 나머지 은 양의 정수이다. 위 분수꼴의 수는 로 쓰기도 한다. 같은 방법으로 일반적인 연분수를 로 쓴다. 이를 유한에만 한정하지 않고, 무한까지 확장하여, 무한 연분수 를 다음과 같이 극한을 이용하여 정의할 수도 있다. 위 극한은 어떤 양의 정수 들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모든 유한 연분수는 유리수이며, 모든 유리수는 의 경우와 같이 정확히 두가지 유한 연분수로 나타내어진다. 모든 무한 연분수는 무리수이며, 모든 무리수는 무한 연분수로 표현가능하며 그 표현은 유일하다. 무한 연분수 중 꼬리들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순환 연분수 라고 한다. 어떤 무리수가 순환 연분수로 표현가능할 필요충분조건은 그것이 어떤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는 것이다. 즉, 이차 무리수 ()인 것이다. 무리수를 무한 연분수로 나타내는 방법은, 처음 몇 항까지의 연분수가 좋은 유리수 근삿값을 주기 때문에 특히 유용하다. 이런 근사 유리수값을 연분수의 근사분수(convergents) 라 부른다. 짝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작은데 비하여, 홀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크다. 예를 들어, 원주율 파이()의 근사분수들을 계산해 보자. ::(는 보다 작은 최대 정수)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 이를 반복하면, 무한 연분수 를 얻는다. 의 세 번째 근사분수는 이며,이는 실제 값에 매우 가까운 값이다. 어떤 무리수의 번째 근사분수는, 그것을 분모와 분자가 서로소인 분수로 나타내었을 때의 분모보다 작은 분모를 가진 어떠한 유리수보다 주어진 무리수에 가까이 근접해 있다. 이 때의 오차의 한계는 을 주어진 무리수, 각각 과 을 번째 근사분수의 서로소인 분자와 분모라 할 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또한, 다음 식 을 만족하는 가장 작은 정수 에 대하여, 적당한 자연수 가 존재하여 와 를 만족한다. 펠 방정식 오정환, 이준복, 『정수론』, 교우사, 2003 Online continued fraction calculator 분류:분수 분류:해석학 (수학) |
10월 (시월, 十▽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고 2월하고도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그 다음 해가 평년일 경우에는 그 다음 해 4월과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9월과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화요일과 수요일에 57번, 금요일과 일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04년, 2032년) 및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1982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일 경우에는 10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20년, 2048년) 및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1981년, 1987년, 2015년, 2026년, 2037년)일 경우에는 한글날만 공휴일이며,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1988년, 2016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개천절만 공휴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추석이 있는 해도 있다. 이런 경우는 모두 음력 7월 이전에 윤달을 끼고, 이 가운데에는 9월 30일이 추석 당일인 경우 혹은 대체휴일이 적용된 경우도 포함한다. (예 2001년, 2006년, 2009년, 2012년 (10월 1일), 2017년, 2020년, 2025년 등) 북한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노동당 창건일이 주말과 겹쳐 10월에 공휴일이 사실상 없는 해가 된다.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16년, 2044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체육의 날과 겹쳐지며,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28년, 2056년) 및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2006년, 2017년, 2023년, 2034년, 2045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경찰의 날과 겹쳐진다. 음력 8월과 음력 9월이 이 달에 있으며 10월에는 음력 8월 15~16일, 9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8월이나 윤9월이 양력 10월에 낀다. 영어의 October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서 유래되었다. 음력 8월 15일은 추석이다. 대한민국의 K리그 정규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대한민국의 KBO 리그의 한국시리즈가 끝나는 달이다. 대한민국의 한국프로농구가 개막하는 달이다. 미국의 메이저 리그 사커 정규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미국의 핼러윈을 실시하는 달이다. 핼러윈의 날짜는 10월 31일. 핀란드 베이카우스리가의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미국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포스트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며, 가끔 월드시리즈가 치러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이를 가리켜 악토버 클래식 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는 10월부터 시작된다. 10월 1일 - 국군의 날 -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됨. 10월 2일 - 노인의 날 10월 3일 - 개천절 (공휴일) 10월 5일 - 세계 한인의 날 10월 8일 - 재향군인의 날 10월 9일 - 한글날 (공휴일) -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공휴일이 아니었음. 2013년부터 재지정. 10월 10일 - 임산부의 날 10월 15일 - 체육의 날 10월 셋째 토요일 - 문화의 날 10월 21일 - 경찰의 날 10월 24일 - 유엔의 날 - 1976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됨. 10월 25일 - 독도의 날 10월 마지막 화요일 - 금융의 날 10월 28일 - 교정의 날 - 독립기념일 (10월 1일) - 독립기념일 (10월 1일) - 독립기념일 (10월 1일) - 스승의 날 (10월 1일) - 국경절 (10월 1일) - 독립기념일 (10월 2일) - 독립기념일 (10월 3일) - 개천절 (10월 3일), 한글날 (10월 9일), 추석 연휴 (일부) - 통일기념일 (10월 3일), 종교개혁기념일 (10월 31일) - 모라산의 날 (10월 3일), 콜럼버스의 날 (10월 12일), 국군의 날 (10월 21일) - 독립기념일 (10월 4일) - 제헌절 (10월 5일) - 육군기념일 (10월 6일) - 독립기념일 (10월 8일) - 독립기념일 (10월 9일) - 노동당 창건일 (10월 10일) - 독립기념일 (10월 10일) - 쌍십절 (10월 10일) - 콜럼버스 기념일 (10월 둘째 주 월요일) - 체육의 날 (10월 둘째 주 월요일) - 추수감사절 (10월 둘째 주 월요일) - 혁명기념일 (10월 11일) - 독립기념일 (10월 12일) - 어린이날 (10월 12일) - 콜럼버스 기념일 (10월 12일), 혁명기념일 (10월 20일) - 푸미폰 아둔야뎃 기일 (10월 13일) - 대체휴일제 적용 -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날 (10월 14일) - 독립기념일 (10월 18일) - 마더 테레사의 날 (10월 19일) - 독립기념일 (10월 24일) - 추수감사절 (10월 25일) - 독립기념일 (10월 26일) - 독립기념일 (10월 27일) - 독립기념일 (10월 28일) - 오치 참전기념일 (10월 28일) - 독립기념일 (10월 29일) 의 - 연방가입일 (10월 31일) - 종교개혁기념일 (10월 31일) - 욤키푸르 (주로 10월 중에 온다.) - 노동절 (10월 넷째 주 월요일) 한로 10월 8일 또는 10월 9일. 상강 10월 23일 또는 10월 24일. |
1월 (一月)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첫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중 하나이다. 1월의 첫 번째 날은 양력설이다. 이 달과 작년의 5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며, 윤년일 경우에는 이 달과 그 해의 4월,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북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추우며(겨울의 두 번째 달이다.), 남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덥다(여름의 두 번째 달이다.). 북반구에서 1월은 남반구의 7월과 기후적으로 동일하며, 반대로 남반구의 1월은 북반구의 7월 기후와 동일하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음력 11월과 음력 12월이 이 달에 있으며 1월에는 음력 11월 15~16일, 1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영어 January (라틴어 Ianuarius)는 문(door)을 뜻하는 라틴어 ianua에서 유래했다. 문의 신인 야누스(Janus)에서 따왔으며,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로서 한해를 여는 신이기도 하다.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문은 시작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의 출발점의 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원래 고대 로마 달력은 10개월 (304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겨울은 달로서 생각되지 않았었다. 기원전 713년경, 로물루스의 계승자였던 누마 폼필리우스가 1월과 2월을 추가해 태음년(354일)과 같은 길이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비록 원래의 고대 로마 달력에서는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지만, 누마 통치기, 혹은 기원전 450년경 데켐비리에 의해 1월이 한 해의 첫 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유럽에서는 3월 25일(성모 영보), 12월 25일(크리스마스)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독교적 축일들이 새해의 첫 날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6세기 초에 공식적으로 다시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이는 1월 1일이 그리스도 할례축일이기 때문이었다. 1월 1일은 양력설이다.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다. 대개 윤년의 이듬해 1월 20일에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치른다. 일본의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이 1월 1일에 치러진다. 일본의 대학 입시 센터 시험은 1월 13일 이후 첫 번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시행된다. 토요일에는 지리/역사/공민, 국어(일본어), 외국어 시험이, 일요일에는 수학과 이과(과학) 시험이 치러진다. 일본에서는 두 번째 주 월요일이 성인의 날이다. 미국에서는 세 번째 주 월요일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이다. 동방 정교회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날은 1월 26일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글날은 1월 15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그 해의 병역판정검사는 주로 1월 하순에 시작한다. 과거 후기대학 학력고사는 1월에 치렀다. 보통 대한민국에서는 2월에 졸업식과 종업식을 치루지만 요즘은 1월에도 하는 경우도 많다. 1월 1일 - 양력설 (공휴일) - 공휴일 지정 당시에는 1월 3일까지 연휴였으나, 1990년부터 1월 3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며, 9년 후인 1999년부터 1월 2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다. 새해 첫날 (1월 1일) - 스리랑카, 이스라엘, 에티오피아, 미얀마, 일부 중동 국가 제외 - 독립기념일 (1월 1일), 콥트교 크리스마스 (1월 8일) - 독립기념일 (1월 1일) - 신년 및 크리스마스 연휴 (1월 1일~7일/8일) - 독립기념일 (1월 4일) - 크리스마스 (1월 6일) - 크리스마스 (1월 7일) - 성년의 날 (1월 둘째 주 월요일) - 마틴 루터 킹 생일 (1월 셋째 주 월요일) 주현절 (1월 6일) - 유럽의 기독교 국가만 동방교회 크리스마스 (1월 7일) - 콥트교 크리스마스 (1월 7일), 혁명기념일 (1월 25일) - 잔지바르 혁명기념일 (1월 12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날 (1월 26일) - 독립기념일 (1월 31일) 소한 1월 5일 또는 1월 6일. 대한 1월 20일 또는 1월 21일. |
2월 (二月, Februar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두 번째 달이며, 평년일 때에는 28일, 윤년일 때에는 29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이 달과 작년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3월 및 1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올해의 2월 28일과 작년의 3월 1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그리고 북반구에서는 겨울의 마지막 달이고 남반구에서는 여름의 마지막 달이다.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1981년, 1987년, 1998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93년, 2099년 등)일 경우 달력에서 나머지 한 주일의 칸이 비게 된다. 2월은 한중일월 모두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고 일본에만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는 달이다. 대한민국에서 2월의 공휴일은 설날이 2월이거나 설 당일이 1월 31일인 경우에만 있다. 그마저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음력설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예 없었다. 반면 북한은 광명성절이 기본적으로 공휴일이며 정월 대보름도 공휴일이기 때문에 2월에 최대 3개의 공휴일이 잡히기도 한다 880년의 2월에 리베몽에서 독일의 루트비히 3세와 프랑스의 루이 3세, 샤를로망 3세 간에 로렌의 영유권을 독일의 루트비히 3세에게 양도하는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날짜는 미상이다. 음력 12월과 음력 1월이 이 달에 있으며 2월에는 음력 12월 15~16일, 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로마의 달인 2월(February)은 고대 로마 달력에서 음력 2월 15일(보름달)에 개최된 정화 의식인 Februa에서 유래하여, 정화를 의미하는 라틴어 februum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월과 2월은 로마 달력에 추가된 마지막 두 달이었는데, 로마인은 원래 겨울을 달력에 없는 기간(monthless period)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다. 음력 1월 15일은 정월 대보름이다. 2013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매 5년마다 2월 25일에 대통령 취임식 이 치러졌다. 2017년부터는 5월 10일에 치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달에 졸업식과 종업식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학이 이달에 입학식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A리그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동계 올림픽은 주로 2월에 한다. 2월 2일은 그라운드호그 데이이다. 입춘 2월 4일 또는 2월 5일. 우수 2월 18일 또는 2월 19일. - 영웅의 날 (2월 1일) - 독립기념일 (2월 4일), 마하시비바라트리의 날 (2월~3월 중, 보통 2월에 온다.) - 대체휴일 적용. - 제헌절 (2월 5일) - 와이탕이의 날 (2월 6일) - 독립기념일 (2월 7일) - 추수감사절 (2월 둘째 주 토요일), 국군의 날 (2월 11일) - 건국기원절 (2월 1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체육의 날 (2월 둘째 주 화요일) - 광명성절 (2월 16일) - 대통령의 날 (2월 셋째 주 월요일) - 혁명기념일 (2월 17일) - 독립기념일 (2월 18일) - 공화국의 날 (2월 23일) - 독립기념일 (2월 25일), 해방기념일 (2월 26일) 카니발 - 일부 가톨릭 국가만. 설날 - 중화권 국가, 남북한,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만. |
3월 (三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세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북반구에서는 3월이 되면서 날씨가 풀리기 때문에, 대체로 이 달을 봄의 시작으로 본다. 남반구는 가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종료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윤년의 경우에는 작년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끝난다. 올해의 3월 1일과 내년의 2월 28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2003년, 2014년, 2020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48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76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에는 3월의 공휴일이 대통령 선거일이 3월 초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경우 정월 대보름이 3월 초가 아닌 경우에는 3월에 공휴일이 없다. 음력 1월과 음력 2월이 이 달에 있으며 3월에는 음력 1월 15~16일, 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낄 경우 춘분 이전은 윤1월, 춘분 이후는 윤2월이 된다. 3월(March)은 가장 오래된 고대 로마 달력의 첫번째 달인 마르티우스(Martius)에서 유래되었다. 마르티우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로마인들의 선조 그리고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르스의 달인 마르티우스는 전쟁을 위한 절기의 처음이었다. 대한민국, 일본에서는 이 달에 입학식을 한다. 일본에서는 이 달에 졸업식, 종업식을 한다. 대한민국에서 K리그의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미국의 메이저 리그 사커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 달에 장교의 임관식을 한다. 대한민국에서 KBO 리그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대한민국의 스키장은 보통 이 달에 폐장한다. 대한민국에서 2022년부터는 헌법 개정, 대통령 궐위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한 3월 3일~9일에 해당하는 수요일에 대통령 선거를 한다. 기독교의 부활절은 3월 말에 잡히기도 한다. 지구의 시간 매년 3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8시 30분 ~ 9시 30분에 시행된다. 3월 1일 - 삼일절 (공휴일) 3월 3일 - 납세자의 날 3월 셋째 수요일 - 상공의 날 - 삼일절 (3월 1일), 대통령 선거일 (숫자가 2, 7로 끝나는 해의 3월 3일~9일 사이에 있는 수요일) - 텍사스 독립기념일 (3월 2일) - 독립기념일 (3월 6일) 세계 여성의 날 - 러시아 등 일부만 - 국경일 (3월 12일) - 국경일 (3월 14일) - 성 파트리치오의 날 (3월 17일) - 춘분의 날 (3월 19~22일) - 독립기념일 (3월 20일) - 인권의 날 (3월 21일) - 베니토 후아레스 탄생일 (3월 21일) - 노루즈 (3월 21일) - 연방의 날 (3월 24일), 부활절 (일부) - 현충일 (3월 24일) - 독립기념일 (3월 25일) - 전사의 날 (3월 29일) 부활절 - 일부 기독교 국가만 경칩 3월 5일 또는 3월 6일. 춘분 3월 20일 또는 3월 21일. |
4월 (四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네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4월이 과학의 달이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7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로 58번, 월요일, 화요일로 57번, 목요일, 토요일로 56번 시작한다. 중국은 청명절, 일본은 쇼와의 날, 베트남은 훙왕 기일로 인해 4월에는 반드시 공휴일이 있으나 대한민국에서 4월의 공휴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 4월 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2006년 이후로 없으나, 4년에 한 번씩 하는 총선의 선거일이 4월로 잡히기 때문에 4년에 한 번씩 공휴일이 생긴다. 또한 식목일이 공휴일이던 2006년 이전에도 식목일이 주말과 겹쳐 공휴일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인 예로 1981년, 1987년, 1992년, 1998년 등) 반면 북한은 청명절과 태양절, 인민군 창건일 중 어느 하나가 주말에 겹치더라도 반드시 공휴일이 있다. 음력 2월과 음력 3월이 이 달에 있으며 4월에는 음력 2월 15~16일, 3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음력 3월 10일은 훙왕 기일이다. 음력 4월 8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한국에서는 4년마다 1회씩 4의 배수인 해(대개 윤년)의 이 달 9일~15일에 해당하는 수요일에 국회의원선거를 치른다. 기독교의 부활절은 3월 말에서 4월 사이에 오는데 4월에 올 확률이 높다. 한국의 워터파크는 보통 4월 말에 야외 시설물을 개장한다. MLB의 시즌이 시작하는 달이다. NBA의 정규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골프 대회 중 하나인 매스터스 토너먼트는 대개 4월에 치른다. 4월 첫째 금요일 - 향토예비군의 날 - 2006년 이전에는 4월 첫째 토요일이었음 4월 3일 - 4.3제주항쟁희생자 추념일 - 제주도에서 지방공휴일 제정 시도를 하고 있음 4월 5일 - 식목일 - 2005년에 마지막 공휴일. 2006년부터 공휴일에서 폐지됨. 4월 7일 - 보건의 날 4월 11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 1990년 ~ 2018년에는 4월 13일이었음. 4월 19일 - 4.19 혁명 기념일 4월 20일 - 장애인의 날 4월 21일 - 과학의 날 4월 22일 - 정보통신의 날, 새마을의 날 4월 25일 - 법의 날 4월 28일 -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 퇴역군인의 날 (4월 2일) - 어린이날 (4월 3일) - 독립기념일 (4월 4일) 부활절 - 기독교 국가만 - 여성의 날 (4월 7일) - 국회의원 선거일 (4의 배수인 해의 4월 9일~15일 사이에 있는 수요일), 부처님 오신 날 (4월 28~30일 사이에 오는 경우 / 4월 28일의 경우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과 겹침) - 청명절 (4월 4일), 태양절 (4월 15일) - 독립기념일 (4월 17일) - 독립선언일 (4월 19일) - 콩코드의 날 (4월 24일) , , - ANZAC의 날 (4월 25일) - 자유의 날 (4월 25일) - 독립기념일 (4월 27일) - 인권의 날 (4월 27일) - 왕의 날 (4월 27일) - 독립기념일 (4월 27일) - 승리의 날 (4월 28일) - 영웅의 날 (4월 28일) - 쇼와의 날 (4월 29일) - 훙 왕 기일 (음력 3월 10일; 주로 4월에 온다.) 청명 4월 4일 또는 4월 5일. 곡우 4월 19일 또는 4월 20일. |
6월 (유월, , 六▽月)은 에서 한 해의 여섯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는 네개의 달중 하나이다. 이름의 유래는 오비디우스의 "Fasti"라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와 동격이자 쥬피터의 아내 로마 여신 유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젊은이"를 뜻하는 라틴어 "juniores"인데, 이는 5월을 뜻하는 "May"가 "노인"을 뜻하는 라틴어 "maiore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Fasti"VI.1–88). 어느 해건 6월이 시작하는 요일은 그 해의 다른 달이 시작하는 요일들과는 항상 다르며, 이는 5월과 6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또한, 6월이 끝나는 요일은 그 해의 3월이 끝나는 요일과 항상 같으며, 6월이 시작되는 요일은 내년 2월이 시작되는 요일과 항상 같다. 또한, 전년도 9월,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단, 평년의 경우에만 해당).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3월, 1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8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6월에는 북반구에서 낮이 가장 긴 날이 있고, 남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짧은 날이 있다. 또한 북반구에서 6월의 계절은 남반구에서의 12월의 계절과 같다. 북반구에서 기상학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날은 6월 1일이며, 반대로 남반구에선 6월 1일에 겨울이 시작된다. 6월엔 특히 결혼식이 많이 치러지는데, 그 유래중 하나로는 6월이 유노(헤라)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유노는 결혼의 여신이었고, 그로 인해 6월에 결혼을 하면 운이 따른다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서는 여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에는 겨울이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위대한 김정일의 날만,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소년단 창립기념일만 공휴일이다. 일본에는 이 달에 공휴일이 아예 없다. 과거에는 8월과 12월에도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생일인 12월 23일이 천황절, 2016년 8월 11일이 산의 날로 지정되면서 6월만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말을 제외한 휴일이 하루도 없는 달로 남게 되었다. 음력 4월과 음력 5월이 이 달에 있으며 6월에는 음력 4월 15~16일, 5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6월에 윤달이 들 경우 하지 이전이면 윤4월, 하지 이후이면 윤5월이 들게 된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이다. 아일랜드에서 6월 16일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인 율리시스를 기념하기 위한 날인 블룸즈데이이다. 미국에선 6월의 3번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기념한다. 스웨덴과 핀란드에선 6월의 3번째 금요일을 하지제로 기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6월 7일과 8일에 가오카오를 치른다. 6월 7일에는 어문과 수학, 6월 8일에는 문/이과 종합과 외국어 시험을 본다. 기독교에서 성령 강림절 이후 월요일은 주로 6월에 온다. 6월 1일 - 의병의 날 6월 6일 - 현충일(공휴일) 6월 10일 - 6·10 민주항쟁 기념일 6월 25일 - 6.25전쟁일 - 독립기념일(6월 1일) - 빤짜실라의 날(6월 1일) - 공화국의 날(6월 2일) - 여왕 생일(6월 첫째 주 월요일) -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생일 (6월 5일) - 국경일(6월 6일), 하지절 (6월 네 번째 토요일) - 현충일(6월 6일) - 조선어린이재단의 날 (6월 6일),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의 날 (6월 19일) - 독립기념일(6월 12일) - 러시아의 날 (6월 12일) - 공화국의 날 (6월 17일) - 아이마라 신년 (6월 21일) - 독립기념일 (6월 25일) - 체육의 날 (6월 26일) - 독립기념일 (6월 27일) - 독립기념일 (6월 27일) - 제헌절 (6월 28일) - 혁명의 날(6월 30일) - 국군의 날 (6월 30일) - 독립기념일 (6월 30일) 성령 강림절 이후 월요일 - 기독교 국가 일부만 - 단오절 FIFA 월드컵의 개막전이 치러지는 달이다. NHL의 결승전이 치러지는 달이다. 망종 6월 5일 또는 6월 6일. 하지 6월 21일 또는 6월 22일. |
7월 (七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일곱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월요일과 화요일에 57번,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7월의 기온은 북반구에서는 가장 높고, 남반구에서는 가장 낮아, 북반구의 1월 기온과 같다. 11월과 함께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빈약한 달이기도 하다.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7월에 공휴일이 없고, 대한민국에서는 7월에 공휴일이 2008년 이후로 아예 없다. 2007년 이전에도 1983년, 1988년, 1994년, 2005년과 같이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나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인 경우 사실상 7월에 공휴일이 없는 해가 있었다. 반면 북한은 7월 27일이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로 공휴일이며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이 주말에 겹쳐서 북한도 7월에는 사실상 공휴일이 없는 해가 된다. 일본의 경우는 7월에 공휴일이 반드시 있다. (바다의 날) 국내에서는 7월 말부터 휴가철이 시작된다. 음력 5월과 음력 6월이 이 달에 있으며 7월에는 음력 5월 15~16일, 6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끼는 경우는 대서 이전은 윤5월, 대서 이후는 윤6월이다. 영어로 7월을 의미하는 July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전에는 5번째(fifth)를 의미하는 퀸틸리스 (Quintilis 또는 Qinctilis)로 불렸다. 한국에서는 7월 하순부터 휴가철이 시작된다. *FIFA 월드컵의 결승전이 치러지는 달이다. 스위스 슈퍼리그의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7월 둘째 수요일 - 정보보호의 날 7월 17일 - 제헌절 - 2007년에 마지막 공휴일.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폐지됨. 현재 김해영 의원이 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발의한 상태임. - 캐나다의 날 (7월 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반환기념일 (7월 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독립기념일 (7월 1일) - 세레체 키타마의 날 (7월 1일), 대통령의 날 (7월 16일) - 대체휴일제 적용 - 공화국의 날 (7월 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자유의 날 (7월 1일) - 독립기념일 (7월 1일), 자유의 날 (7월 4일) - 독립기념일 (7월 3일) - 독립기념일 (7월 4일) - 토요일이면 전날인 금요일, 일요일이면 다음날인 월요일에 대체휴일 적용 -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 -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 -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 - 투포우 탄신일 (7월 4일) - 독립기념일 (7월 5일) - 독립기념일 (7월 5일) - 독립기념일 (7월 5일) - 얀 후스의 날 (7월 5일) - 독립기념일 (7월 6일) - 수도의 날 (7월 6일) - 독립기념일 (7월 6일) - 사바 사바 (7월 7일) - 독립기념일 (7월 9일) - 독립기념일 (7월 9일) - 대통령 선거일 (5년에 1번, 7월 3일~9일 사이의 수요일) - 독립기념일 (7월 10일) - 나담 (7월 11일~7월 13일) - 바다의 날 (7월 셋째 주 월요일) - 바스티유의 날 (7월 14일) - 하사날 볼키아 생일 (7월 15일) - 국왕 탄신일 (7월 17일) - 제헌절 (7월 18일) - 독립기념일 (7월 20일) - 해방기념일 (7월 21일) - 독립기념일 (7월 21일) - 소부자 왕 탄신일 (7월 22일) - 혁명기념일 (7월 23일) - 어린이날 (7월 24일), 독립기념일 (7월 30일) - 공화국의 날 (7월 25일) - 독립기념일 (7월 26일) -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 (7월 27일) - 국왕 생일 (7월 28일), 삼보절, 입안거 (7월 중에 온다.) - 독립기념일 (7월 28일) - 파시스트 몰락의 날 (7월 28일) - 왕좌의 잔치 (7월 30일) - 영웅의 날 (7월 첫째 주 월요일), 통일절 (7월 첫째 주 월요일 이후에 오는 첫 화요일) - 제헌절 (7월 첫째 주 월요일) - CARICOM의 날 (7월 첫째 주 월요일) - 입안거 (7월 중에 온다.) 소서 7월 7일 또는 7월 8일. 대서 7월 22일 또는 7월 23일. |
8월 (八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덟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이 달부터 연말까지는 2의 배수가 오는 달마다 31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2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되며, 다음 해도 평년인 경우 다음 해 5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10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 금요일은 57번, 화요일, 일요일은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개국에서 공휴일이 빈약한 달 중 하나로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8월에는 공휴일이 없고 일본은 2015년까지 8월에 공휴일이 하나도 없었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8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휴가철이 끝나는 달이다. 2015년까지는 일본에서 6월과 함께 공휴일이 없는 달이었으나 산의 날이 8월 11일로 지정되면서 빠졌다. 음력 6월과 음력 7월이 이 달에 있으며 8월에는 음력 6월 15~16일, 7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들 경우 처서 이전은 윤6월, 처서 이후는 윤7월이다. 8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gust는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하였다. 그 전에는 섹스틸리스 (Sextillis)였다.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는 8월에 한 시즌이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세리에 A는 8월에 한 시즌이 시작한다. 네덜란드의 에레디비시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프랑스의 리그 1은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독일의 분데스리가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A-리그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스코틀랜드의 프리미어리그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윤년에 하계 올림픽이 대개 개막한다.(빠른 경우에는 7월 말에 개막하기도 한다. 예외로 1988년 하계 올림픽은 9월에, 1964년 하계 올림픽은 10월에 개막했다.) 대한민국, 일본에서는 8월에 2학기 개강을 한다. 8월 15일 - 광복절(공휴일) 8월 22일 - 에너지의 날 의 - 연방가입일 (8월 1일) - 독립기념일 (8월 1일) - 건국기념일 (8월 1일) - 독립기념일 (8월 3일) - 독립기념일 (8월 5일) - 독립기념일 (8월 6일) - 독립기념일 (8월 6일) - 독립기념일 (8월 7일) - 보야카 전투 기념일 (8월 7일) - 독립기념일 (8월 9일) - 여성의 날 (8월 9일) - 독립기념일 (8월 10일) 의 - 연방가입일 (8월 10일) - 독립기념일 (8월 11일) - 산의 날 (8월 11일) - 독립기념일 (8월 13일) - 독립기념일 (8월 14일) - 독립기념일 (8월 15일) - 광복절 (8월 15일) - 국경일 (8월 15일) - 제헌절 (8월 15일) - 어머니날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 일부 기독교 국가만 (8월 15일) - 독립기념일 (8월 17일) - 독립기념일 (8월 17일) - 독립기념일 (8월 19일) - 독립기념일 (8월 20일) - 헝가리 국경일 (8월 20일) 의 - 연방가입일 (8월 21일) - 독립기념일 (8월 24일) - 독립기념일 (8월 25일) - 조국해방기념일 (8월 15일), 선군의 날 (8월 25일) - 독립기념일 (8월 27일) - 독립기념일 (8월 31일) - 독립기념일 (8월 31일) - 독립기념일 (8월 31일) - 8월 휴일 (8월 7일) - 로투 (8월 두 번째 월요일) - 하계 휴일 (8월 마지막 월요일) 입추 8월 7일 또는 8월 8일. 처서 8월 23일 또는 8월 24일. |
9월 (九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아홉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는 가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과 같은 남반구에는 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에는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모두 있을 가능성이 높은 달로 일본과 베트남, 북한은 건국 이래 9월에 공휴일이 최소 하나는 무조건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9월의 공휴일은 추석이 9월 내에 들거나 늦어도 10월 1일이 추석 당일이어야만 있으나 추석이 9월에 들 확률이 10월에 들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 9월에 공휴일이 있을 확률은 높은 편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이와 동일하다. 미국에서는 이 달에 학년이 시작한다. 음력 7월과 음력 8월이 이 달에 있으며 9월에는 음력 7월 15~16일, 8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7월 (추분 이전) 윤8월 (추분 이후)이 양력 9월에 있다. 음력 8월 15일은 추석이다. 러시아 등의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에서는 새학년의 새학기가 시작된다. 대한민국 에서는 이 달에 2학기가 시작된다. (1945년에서 1950년대 초까지는 9월에 새학년이 시작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일부 대학들은 미국처럼 9월 학기제를 시행한다. 에티오피아의 새해 첫날은 양력으로 환산할 경우 9월 11~13일 사이에 온다. 일부 축구 리그는 9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KBO 리그는 9월부터 주말 낮 경기를 재개한다. 9월 7일 - 사회복지의 날 9월 16일 - 세계 오존층 보호의 날 9월 18일 - 철도의 날 - 2018년 이후 6월 28일로 날짜 변경. 9월 27일 - 관광의 날 - 독립기념일 (9월 1일) - 독립기념일 (9월 2일) - 독립기념일 (9월 6일) - 독립기념일 (9월 7일) - 독립기념일 (9월 8일) - 건국일 (9월 9일) - 독립기념일 (9월 9일) 의 - 연방가입일 (9월 9일) - 레이버 데이 (9월 첫째 주 월요일) - 레이버 데이 (9월 첫째 주 월요일) - 에티오피아 신년 (9월 11일)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독립기념일 (9월 16일) - 독립기념일 (9월 16일) - 국경일 (9월 18일), 육군의 날 (9월 19일) - 국경일이 화요일이면 9월 17일, 육군의 날이 목요일이면 9월 20일 추가 휴무 - 독립기념일 (9월 19일) - 경로의 날 (9월 셋째 주 월요일) - 독립기념일 (9월 21일) - 독립기념일 (9월 21일) - 독립기념일 (9월 21일) - 독립기념일 (9월 22일) - 독립기념일 (9월 22일) - 추분 (9월 23일) - 사우디 국가기념일 (9월 23일) - 주권의 날 (9월 28일) - 독립기념일 (9월 30일) - 로쉬 하샤나 (유대력 1월 1일, 보통 9월에 있다.) 백로 9월 7일 또는 9월 8일. 추분 9월 22일 또는 9월 23일. |
11월 (十一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한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고, 그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 2월과 마지막 요일이 ㄱ.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3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5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8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에서 공휴일이 가장 빈약한 달로, 중국과 베트남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건국 이래로 11월에 법정공휴일이 아예 없다. 반면 북한은 11월 16일이 어머니날로 공휴일이며 남한에는 4번의 임시공휴일이 11월에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은 11월에 공휴일이 2개 있다. 음력 9월과 음력 10월이 이 달에 있으며 11월에는 음력 9월 15~16일, 10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9월이나 윤10월이 양력 11월에 든다. 11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vember는 "nine"을 의미하는 라틴어 novem에서 유래하였다. 11월은 고대 로마 달력의 9번째 달이었다. 이 달 중순에 대한민국에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1995학년도 (1994년)부터 2006학년도 (2005년)까지는 수요일이 시험일었으나 2007학년도 (2006년)부터는 목요일이 시험일이다. 한편 2012~2014학년도 수능에서는 11월 하순에 성적표가 나왔다. 매 윤년 이 달마다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선거일은 11월 2일~8일 사이의 화요일. 일본의 시치고산은 11월 15일에 한다. FIFA 월드컵의 예선은 월드컵 개최 전년도 11월에 끝난다. 미국의 메이저 리그 사커의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월드시리즈가 치러지는 달이다. 일본의 J리그 디비전 2 (J리그 2부) 플레이오프를 이 달에 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스키장은 보통 이 달에 개장한다. K리그 클래식은 이 달에 시즌이 끝난다. 대한민국에서 병역판정검사는 보통 11월에 끝난다. 과거 예비고사는 주로 11월에 치렀다. 11월 3일 - 학생독립운동기념일 (舊, 학생의 날) 11월 5일 - 소상공인의 날 11월 9일 - 소방의 날 11월 11일 - 농업인의 날, 광고의 날, 보행자의 날, 11월 17일 - 순국선열의 날 만성절 - 일부 기독교 국가만 (11월 1일) - 추수감사절 (11월 넷째 주 목요일), 퇴역군인의 날(11월 11일)- 퇴역군인의 날은 대체휴일제 적용 - 문화의 날 (11월 3일), 근로감사의 날(11월 23일) - 독립기념일 (11월 3일) - 승리의 날 (11월 3일), 공화국의 날 (11월 11일) - 시민권의 날 (11월 4일) - 독립기념일 (11월 11일) - 독립기념일 (11월 11일) - 현충일 (11월 11일) - 독립기념일 (11월 3일), 퇴역군인의 날 (11월 11일) - 공화국의 날 (11월 15일) - 어머니날 (11월 16일) - 독립기념일 (11월 18일) - 혁명기념일 (11월 20일) - 독립기념일 (11월 22일) - 독립기념일 (11월 25일) - 독립기념일 (11월 28일) - 순국자의 날 (11월 30일) - 독립기념일 (11월 30일) 입동 11월 7일 또는 11월 8일. 소설 11월 22일 또는 11월 23일. |
12월 (十二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한국, 일본, 중국, 미국에서는 이 달을 대체로 겨울의 시작으로 본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는 여름이 된다. "구랍"이라고도 부르나, 이는 "지난해 섣달"을 뜻하므로, 양력 12월과는 무관한 명칭이다. 이 달과 그 해의 9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이 달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일 경우 그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이 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이 달에 있는 크리스마스와 내년의 첫날은 항상 같은 요일이다. 또한 올해 첫날 1월 1일 과 마지막날 12월 31일은 평년일 경우만 요일이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대한민국에서 12월의 공휴일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04년, 2032년 등)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1982년, 1988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16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4년, 2049년 등) 그리고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 2050년 등)일 경우에는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절만 공휴일이고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김정숙 생일만 공휴일이 된다. 1988년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12월에 휴일이라곤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와 함께 12월 23일이 천황탄생일로 지정되면서 일본에도 12월에 휴일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에는 12월에 휴일이 없다. 북한은 12월에 휴일이 2개 (김정숙 생일, 사회주의헌법절) 있다. 음력 10월과 음력 11월이 이 달에 있으며 12월에는 음력 10월 15~16일, 1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12월에 윤달이 낄 경우는 동지 이전에는 윤10월이, 동지 이후는 윤11월이 든다. 12월 3일 - 소비자의 날(대한민국) 12월 5일 - 무역의 날 12월 10일 - 세계 인권 선언 기념일 12월 25일 - 크리스마스(聖誕節) 12월 27일 -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 대한민국에서는 5년마다(2, 7로 끝나는 해) 한 번씩 12월 16~22일 사이의 수요일에 대통령 선거를 치렀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치러진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2017년 5월 9일에 치렀으며,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부터는 3월 3~9일 사이의 수요일에 치를 예정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2월부터 2월까지 민방위의 날 훈련을 하지 않는다. NBA의 정규 시즌이 시작되기도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는 12월 초에 나온다. 사회복무요원 본인선택은 12월에 한다. 과거 전기대 학력고사는 12월에 치르기도 했다. 과거 고입선발고사는 주로 12월에 치렀다. 대한민국의 일부 스키장은 12월 초에 개장한다. 유럽의 주요 축구 리그들은 12월 중순부터 1월까지 겨울 휴식기에 들어간다. FIFA 월드컵 본선 조추첨은 대개 월드컵 전년도 12월에 한다. 유대교의 축제 하누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축제 콴자는 12월에 온다. - 독립기념일 (12월 1일) - 내셔널 데이 (12월 2일) - 제헌절 (12월 6일) - 독립기념일 (12월 6일) - 농부의 날 (12월 첫째 주 금요일) - 영웅의 날 (12월 7일) - 제헌절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일부 가톨릭 국가만 (12월 8일) - 독립기념일 (12월 9일) - 제헌절 (12월 10일), 신년망일 (12월 31일) - 독립기념일 (12월 12일) - 독립기념일 (12월 16일) - 화해의 날 (12월 16일) - 카타르 내셔널 데이 (12월 18일) - 반환기념일 (12월 20일) - 독립기념일 (12월 21일) - 천황탄생일 (12월 23일) - 대체휴일제 적용 - 독립기념일 (12월 24일) 크리스마스 (12월 25일) - 동방교회 국가와 북한 등 일부 국가 제외. 레바논과 몰도바 등 5개 국가는 12월 25일과 1월 7일 두 날을 모두 크리스마스로 인정하고 있다. - 위대한 지도자의 날 (12월 25일) - 제헌절 (12월 25일) 박싱 데이 - 일부 기독교 국가만 (12월 26일) - 김정숙 생일 (12월 24일), 사회주의 헌법절 (12월 27일) - 독립기념일 (12월 29일) - 하누카 - 리잘의 날 (12월 30일), 신년망일 (12월 31일) 대설 12월 7일 또는 12월 8일. 동지 12월 21일 또는 12월 22일. love in december -club 8 |
원통좌표계 (cylind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을 나타내기 위해, 평면 극좌표계에 평면에서부터의 높이 (혹은 )를 더해, 로 이루어지는 좌표계이다. 원통좌표계는 한 축을 중심으로 대칭성을 갖는 경우에 유용하다. 예를 들면, 반지름이 인 무한히 긴 원통의 직교좌표계에서의 식은 이지만, 원통좌표계에서는 간단히 가 된다. 이런 이유로 원통좌표계(cylinder-ical coordinate)란 이름이 붙어있다. 섬네일 3차원 공간의 점 P 는 로 표시된다. 이를 직교좌표계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은 원점 O 에서 P의 평면으로의 사영 p 까지의 거리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은 축에서 P까지의 거리이다. 는 양의 축 방향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측정한 OP 까지의 각이다. 는 와 같다. 에 높이(height)란 의미를 주어 대신 를 사용한 란 표기도 자주 쓰인다. 원통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제한 없음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부피 요소 분류:좌표계 |
500px 비활성 기체 (非活性氣體) 혹은 불활성 기체 (不活性氣體), 희가스 (稀gas), 귀족 기체 (noble gas)는 화학 계열로 주기율표의 18족 원소를 말한다. 최외각 전자가 모두 차 있는 이러한 원소들은 전자를 주고 받기 힘들기 때문에 화학결합을 하기 어렵다. (예외로 Xe는 산소, 할로젠 등과 반응한다.) 주기 원소 이름 원소 기호 (번호) 원자 질량 녹는점 (K) 끓는점 (K) 1 헬륨 He (2) 4.002602(2) (2.5 메가파스칼에서 0.95) 4.22 2 네온 Ne (10) 20.1797(6) 24.56 27.07 3 아르곤 Ar (18) 39.948(1) 83.80 87.30 4 크립톤 Kr (36) 83.798(2) 115.79 119.93 5 제논 Xe (54) 131.293(6) 161.4 165.03 6 라돈 Rn (86) (220) 202 211.3 7 오가네손 Og (118) (294) ? ? 헬륨 네온 아르곤(수은이 조금 포함됨) 크립톤 제논 분류:원소족 분류:주기율표 족 |
구면좌표계 (球面座標係, sphe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 상의 점들을 나타내는 좌표계의 하나로, 보통 로 나타낸다. 원점에서의 거리 은 0부터 까지, 양의 방향의 z축과 이루는 각도 는 0부터 까지, z축을 축으로 양의 방향의 x축과 이루는 각 는 0부터 까지의 값을 갖는다. 는 위도로, 는 경도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이 세 수치를 보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공간의 점을 찾을 수 있다. 원점 에서 만큼 z축을 따라 간다. 그 지점에서 xz 평면 안에 있으면서 z축에서부터 만큼 회전한다. 이 xz 평면 전체를 z축을 축으로 만큼 반 시계방향(+x축에서 +y축 방향으로)으로 돌린다. 구면좌표계라는 이름은 이 좌표계에서 이 단위구(單位球)를 표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이 좌표계가 구대칭을 기치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면좌표계와 원통좌표계는 평면 극좌표계를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며, 구면좌표계는 구대칭이 나타나는 문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와 같이 구대칭이 있는 경우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 때 구면좌표계를 사용한다. 아래 변환식을 통해 직교좌표계와 변환할 수 있지만, 변환식에서 사용하는 역삼각함수는 일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공간상의 각 점마다 하나의 좌표만 대응하는 직교좌표계와는 달리, 구면좌표계는 한 점을 나타내는 표현이 여러가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 0°, 0°), (1, 0°, 45°), 과 (-1, 180°, 270°) 는 모두 같은 점을 나타낸다. 세 좌표의 표시를 위한 여러가지 다른 약속이 존재한다. 국제 표준 기구의 지침(ISO 31-11)에 따라 물리학에서는 ( r , θ , φ )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점에서의 거리, 천정과 이루는 각도(천정거리), 방위각 등을 표시하고, (미국의) 수학에서는 고도와 방위각이 바뀌어 φ 와 θ 로 표시된다. 섬네일 좌표 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주어진 점을 P라 하자. 원점으로부터 P까지의 거리. z축의 양의 방향으로부터 원점과 P가 이루는 직선까지의 각 x축의 양의 방향으로부터 원점과 P가 이루는 직선을 xy평면에 투영시킨 직선까지의 각. 구면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다른 3차원 좌표계로 변환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직교좌표계에서 구면좌표계로 변환시 구면좌표계에서 직교좌표계로 변환시 :, or :, 원통좌표계에서 구면좌표계로 변환시 구면좌표계에서 원통좌표계로 변환시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면적 요소 부피 요소 기울기 발산 회전 라플라시안 직교 좌표계 원통 좌표계 적도 좌표계 초구면 좌표계 극좌표계 구면 조화 함수 분류:좌표계 |
잭슨 5 ()는 1964년에 결성하고, 잭슨 형제들로 이루어진 미국 인디애나 주 출신의 대중음악 그룹이다.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 매니저를 맡았으며, 멤버는 재키(1951년생), 티토(1953년생), 저메인(1954년생), 말론(1957년생), 마이클(1958년생)이며, 이 중 막내가 나중에 팝의 황제로 불리게 되는 마이클 잭슨이다.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여 "버블검 소울"이란 스타일의 음악을 유행시켰다. 1972년엔 에픽 레코드으로 계약사를 바꾸었으며, 모타운이 잭슨 파이브란 이름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잭슨스 (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다. 현재까지 약 3천만 장의 앨범을 팔았으며 1989년에 해체했다. 2001년에 잠시 재결성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도로 해체하고 2012년에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잭슨 파이브의 구성원은 모두 시카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개리의 작은 집에서 자라났다. 레비, 티토, 재키, 저메인, 라토야, 말론, 마이클, 랜디, 자넷으로 이어지는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를 키운 어머니 캐서린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고, 아버지 조셉은 블루스에 심취한 금속공장 직원이었다. 부부는 아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키우는 반면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어머니 캐서린은 젊었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클라리넷도 연주했다. 조셉은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과 함께 결성한 그룹 팔콘스로 활동하며 마을의 바와 클럽, 시카고와 인디애나 북부 지방의 대학 행사들을 휩쓸다가, 결국은 몇 달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다 그룹을 해체한다. 밤마다 아이들 모두가 아버지 곁에 모여 위대한 고전 팝송을 연주하는 일이 허다했다. 아버지 조는 자식들이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진짜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아주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맨 위의 세 형제 재키, 티토, 저메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그룹 더 잭슨 브라더스가 결성되었다. 세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군소리 없이 받아야 했다. 그러다 말론과 특히 마이클이 합류하면서 그룹은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어느날 꼬마 마이클이 꼭 제임스 브라운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고 놀란 어머니의 제안으로 그룹에 합류하게 된 마이클은 한동안은 봉고를 연주하다가 그룹의 싱어가 된다.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었는데도 몸과 목소리를 다루는 그의 재능은 이미 집안에서 가장 뛰어났다. 1969년경의 잭슨 파이브 1963년 말엽, 마이클은 다니던 학교의 연말 축제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다. 마이클은 검은 바지와 힌 셔츠를 차려입고 1959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막이 오른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중에서 〈Climb Ev ry Mountain〉을 부른다. 어린 꼬마의 매끄러운 목소리에 학부모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내가 터져 나갈 듯이 박수를 쳤다. 훗날 마이클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기가 막힌 느낌이었죠." 아버지 조셉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의 모습과 아들이 장내에 일으킨 여파를 지켜보았다. 그때부터 조셉은 개리 시와 주변 도시에서 열리는 온갖 콘테스트에 자녀들의 이름을 등록한다. 이들 그룹은 연령도 스타일도 다양한 사람들과 경합을 벌여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그 세계에서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도전자들이 된 잭슨 일행은 무엇 하나 거저 되는 일이 없는 만큼 의상이며 헤어스타일이며 액세서리며 이것저것 신경쓰기 시작했고, 조셈은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랐다. 그래서 주말마다 시카고로 가서는 흥행하는 공연들을 찾아냈자. 관중이 좋아하는 제스처며 음악이며 몸동작을 기억해두었다가 자식들이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해내도록 만들었다. 콘테스트를 거듭할 수록 잭슨 형제는 하루가 다르게 노련해졌고 창의력 역시 견줄 데 없을 정도로 발달했다. 공연마다 따라다니는 일부 극성팬들이 실증내지 않도록 연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꾸준히 신곡을 만들어내야 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승해서 상을 받는 만큼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었다. 집에서 연습이 끝나는 시간은 갈수록 늦어졌고, 조셉은 아들들의 명성에 어울리는 마이크며 악기들을 갖추어가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어쨌든 그런 희생이 다음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잭슨 파이브는 아마추어 콘테스트 순회를 계속해 나갔다. 로열 시어터 상에 심취한 잭슨 파이브는 경쟁자들에게 막대한 미해를 끼쳐가며 매주 새로운 곡을 들고 나왔다. 로열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것도 좋긴 했지만, 아버지 조는 음악의 신전이랄 수 있는 뉴욕의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편이 훨씬 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인디애나 주와 미시간 주에서 잭슨 파이브가 워낙 대단한 성공을 거둔 덕에 아폴로 시어터에서 예선 없이 곧장 본선에 진출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잭슨 형제는 두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전국 최고 가수들의 얼굴로 도배가 된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잭슨 파이브는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했다. 공연비로 당시 600달러를 받았고, 무엇보다 그룹 최초의 음반을 녹음할 수 있게 해준 값진 우승이었다. 아폴로에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 잭슨 일행은 아버지의 동료인 고든 키스 덕분에 처음으로 앨범을 취입할 기회를 얻었다. 고든 키스는 그 역시 음악에 심취한 사람이자 개리의 스틸타운 녹음 스튜디오 사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조는 집에 올 때 고든 키스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습해야 할 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손에 들고 왔다. 아이들은 그 곡의 멜로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실망스런 마음을 애써 감추고 연습을 시작했다. 조는 데모 테이프르 제작자에게 넘기라 갔다가는 저력 무렵이 되면 새로 연습할 노래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몇 주 후, 잭슨 일가는 최초의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키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코러스며 금과악기 연주자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악기를 연결하고 첫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녹음 작업은 주로 일요일에 진행되어서 앨범 전체 녹음을 끝내기까지는 일요일이 여러 번 지나야 했다. 조는 주중에 내내 쉬지 않고 아들들을 연습시켰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그룹은 마침내 그들의 첫 노래 〈Big Boy〉의 녹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사귀로 싶은 소녀의 마음을 노래하는 발라드 곡이었지만, 정작 그런 가사를 읊조리는 마이클은 자신이 노래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서둘로 음반을 준비하고 나자 이제 잭슨 가족이 거머쥔 각종 콘테스트의 막간이나 끝났을 때를 이용해서 싱글을 파는 일만 남았다. 그 첫 번째 싱글은 지방 라디오 방송곡에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1968년, 잭슨 파이브는 프로가 되어 돌아온 아폴로 무대에서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스타를 발굴하는 일이 맡겨진 모타운 실무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신동들에게 아무것도 제안하지는 않았다. 모타운의 스타인 바비 테일러가 시카고 공연을 기회로 잭슨 파이브의 실력을 떠벌려 오디션 제안을 받은 건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잭슨 일행은 처음 모타운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활량한 건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게다가 그들을 맞는 분위기는 다소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베리 고디는 자리르 옮기면서도 전혀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마이클은 한 치도 양보도 없는 냉정한 시선을 받으며 〈I Got The Feeling〉, 〈Tobacoo Road〉, 〈Who s Loving You〉 세 곡을 불렀다. 잭슨 파이브는 일이 성공적이었는지 어쩐지도 모른 채 개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틀 후인 7월 26일, 그 유명한 음반 회사에서 첫 계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1970년 《짐 내버스 쇼》에 출연한 잭슨 파이브모타운에서 보낸 처음 몇 달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잭슨 형제는 앨범 취입을 위해 개러와 디트로이트 사이에서 끝없는 줄타기를 했다. 마이클의 목소리는 채 변성기를 맞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잭슨 파이브의 레퍼토리라는 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년들에게 걸맞는 스타일과 노래를 찾아내야 했다. 여러 주가 훌쩍 지나갔서도 잭슨 파이브에게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그러자 고디는 다섯 소년을 그때부터 모타운의 본거지가 된 캘리포니아로 보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한동안 묵게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해서 다섯 형제는 유명한 가수의 집에서 지내게 되어 살짝 주눅이 들었다. 고디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는 이제 히트 퍼레이드에서 상위권에게 들어가게 될 싱글을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곡을 연달아 내놓게 될 거다." 다이애나 로스가 아이들에게 불쑥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어느 저녁 파티에 잭슨 파이브가 등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마이클의 나이는 11살이었지만, 나이가 어릴 수록 실력에 감탄한다는 상업적 전략에 따라 그의 나이는 8살로 표기되었고 잭슨 파이브 모두의 나이가 두 살씩 내려갔다. 1969년 8월 음박 저널계와 상류츨 인사들과 기자들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도착했고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Who s Loving You〉와 〈Zip-a-Dee-Doo-Dah〉를 감칠맛 나게 부르는 마이클의 목소리에 다들 넞을 잃었다. 이내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그 공연이 끝나고 채 며칠도 되지 않아 고디는 작곡가 다크 리처드로부처 원해 글래디스 나이트에게 줄 작정이었던 곡 〈I Wanna Be Free〉를 다이애나 로스의 무대에서 직접 보았던 잭슨 파이브를 위해 다시 손을 보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그 곡은 머지않아 잭슨 파이브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는 곡 〈I Want You Back〉이 된다. 그 뒤로는 내놓은 노래마다 연달아 성공을 거두었다. 잭슨 파이브는 4년 동안 11개의 앨범을 취입하고 순회공연과 텔레비전 방송을 오가며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살게 된다. 1977년경의 더 잭슨스 1979년, 잭슨 형제는 그 전해에 발매된 음반 《Destiny》거 거둔 성풍적인 성공에 이어 월드투어를 준비한다. 잭슨 파이브가 전곡을 작곡한 그 음반은 어린 형제들의 독립성과 예술적인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데스티니 월드투어를 준비하면서 조는 론 와이즈너와 프레디 테먼을 매니저로 고용한다. 잭슨 형제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공연을 펼치게 된다. 투어는 대성공이었다. 가장 높은 고음부를 처리할 때 목소리가 끊어지는 걸 감추기 위해 형들 중 한 명과 짜놓은 작은 전략을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이클이 노래하는 첫 입만 방긋거리면 그 소절은 말론이 대신 불렀다. 1984년, 조셉 잭슨은 잭슨 파이브가 새로운 순회공연을 하게 될 거라고 언론에 발표한다. 하지만 데스티니 투어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지 5년이 지난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마이클은 《Thriller》 앨범을 발매한 뒤 스타가 되어 새로이 맞게 된 자유를 맘껏 우릴 셈이었다. 마이클이 그 투어에 참여하기로 한 건 마지못해서였다. 첫 번째 난점은 바로 빅토리 투어라는 공연 제목이었다. 그 제목은 애초에 예정했던 것처럼 잭슨 파이브 활도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수투표로 빅토리 투어 쪽으로 결정되면서 논쟁은 끝나버렸다. 두 번째로 의견 충돌을 빚게 된 건 부유한 계층보다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이 더 많은 팬들을 위한 티켓 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40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라는 점이다. 언론이 나서서 잭슨 일가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지적하고 나서야 마이클의 의견을 따라 티겟 판매가를 절반으로 낮추었다. 투어는 1984년 7월에 시작되었다. 공연이 거듭될수록 다섯 형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리무진으로 제각기 이동했다. 한편, 여동생 자넷이 당시에 사귀던 남자 친구와 비밀리에 결혼해버리는 일까지 일어나 마이클은 벅찬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가 유럽 투어를 연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마이클이 우연히 알게 되면서 가족 관계는 부쩍 더 나빠졌다.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을 마이클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 소식이 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12월 9일, 미국 투어 마지막 날, 마이클은 결국 공연 마지막에 마이크를 잡고 그룹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자신은 이제 전격적으로 솔로 활동에 매진할 작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재키 잭슨 (1951년 출생) 티토 잭슨 (1953년 출생) 저메인 잭슨 (1954년 출생) 말론 잭슨 (1957년 출생) 마이클 잭슨 (1958년 출생 ~ 2009년 사망) 모타운 사에서 잭슨 5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1969) 《ABC》 (1970) 《Third Album》 (1970) 《Christmas Album》 (1970) 《Maybe Tomorrow》 (1971) 《Goin Back To Indiana》 (1971) 《Greatest Hits (앨범)》 (1971 후반) 《Lookin Through the Windows》 (1972) 《Skywriter》 (1973) 《Dancing Machine》 (1974) 《Moving Violation》 (1975) 《Anthology》 (1975) CBS에서 더 잭슨스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 《Joyful Jukebox Music》 (1976) 《The Jacksons》 (1977) 《Goin Places》 (1977) 《Frontiers》 (1978) 《Destiny》 (1978) 《Triumph》 (1980) 《Victory》 (1984) 《2300 Jackson Street》 (1989) 분류:마이클 잭슨 분류:모타운 음악가 분류:1980년대 음악 그룹 분류:1970년대 음악 그룹 분류:1960년대 음악 그룹 분류:영어 음악 그룹 분류:미국의 팝 음악 그룹 분류:미국의 R&B 음악 그룹 분류:미국의 보이 밴드 분류: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그룹 분류:인디애나주 출신 음악 그룹 분류: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분류:가족 밴드 분류:1989년 해체된 음악 그룹 분류:1964년 결성된 음악 그룹 |
야세르 아라파트 (, , 1929년 8월 4일 - 2004년 11월 11일)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LO)의 초대 수반(1996년 ~ 2004년)이었다. 최대 지파 파타(Fatah)의 지도자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1969년 ~ 2004년)이었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산 관리, 아내의 사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본명은 모하메드 압델-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محمد ياسر عبد الرحمن عبد الرؤوف عرفات القدوة الحسيني)로 예루살렘에서 부유한 상인의 일곱 아들 중에 한 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예루살렘의 후세이니가의 피를 물려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성장한 아라파트는 카이로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따고 졸업하였다. 1950년대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지배를 반대하는 게릴라 그룹 파타를 결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학생 시절에 이슬람 형제단과 팔레스타인 학생 연합에 가입하여 그 회장(1952년 ~ 1956년)을 지냈다. 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 위기 당시 군인으로 참전하였다. 1964년 아랍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대표하는 데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설립하였다. 1967년 이스라엘은 6일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을 물리치고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통치를 획득하였다. 대다수는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였다. 1969년 2월 3일 카이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국가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004년 사망할 때까지 지냈다고 한다. 파타와 다른 해방 기구 단체들은 여러 차례로 이스라엘군의 목표들을 공격하였고, 역전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게릴라 기지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유엔의 회원국이기보다 온건파 게릴라의 지도자로서 1974년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하여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그해에 유엔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대표로서 인정하였다. 198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기지를 둔 레바논을 침입하였다. 아라파트와 그의 지지자들은 레바논에 있는 자신들의 기지들을 떠나야 하였다. 그러고나서 튀니지로 옮겼다. 1991년 걸프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93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통치 지역들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창립에 서명하였다. 1990년대에 이스라엘-PLO 협정은 가자 지구의 대부분과 서안 지구의 많은 도시들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수로 이끌었다. 이스라엘군이 철수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이 지역들의 통치권을 얻었다. 1994년 아라파트는 가자 지구로 이주하여 팔레스타인으로부터 27년간의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해에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과 함께 평화적 노력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자치 정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에 올로프 팔메 상이 수여되었다. 2000년 이스라엘-PLO의 평화 교섭이 깨지고 양국 사이에 폭력적 사태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지위가 약해지자 아라파트는 2003년 자신의 어떤 행정적 임무들을 취하는 데 총리를 임명하였다. 2004년 11월 11일 프랑스 클라마르의 페르시 군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이집트 카이로에 안장되었다. 수반 직책은 라우히 파토우흐에게 넘겨주었다. Yasir Arafat Psychological Profile and Strategic Analysis 1989 Senate testimony Has the PLO abandoned terrorism? ABC News Arafat s Biography 분류:1929년 태어남 분류:2004년 죽음 분류:팔레스타인의 정치인 분류:팔레스타인의 군인 분류:팔레스타인의 혁명가 분류: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주의자 분류:팔레스타인의 망명자 분류: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분류:팔레스타인의 억만장자 분류:팔레스타인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자 분류:토목공학자 분류:파타 당원 분류:공화국영웅 수훈자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카이로 출신 분류:카이로 대학교 동문 분류:항공 사고 생존자 분류:팔레스타인 해방기구 |
나쓰메 소세키 (, 1867년 2월 9일 ~ 1916년 12월 9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영문학자이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 ()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꼽힌다. 소설,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상과 윤리관 등은 후대 일본의 많은 근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은 일본 지폐 천엔(千円)권에 담겨 있었으나, 현재 천엔(千円)권에는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담겨 있다. 현재는 해외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서 중국,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의 근대작가 중에서 가장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1867년 2월 9일(게이오 3년 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지금의 신주쿠 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도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3세쯤에 걸린 천연두의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는 에도 막부가 붕괴된 이후의 혼란기로,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에 의해 잠깐 생가로 되돌아왔다. 이후 양부모의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의 대립으로 인해 나쓰메 가로 복적된 것은 21세 때의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의 관계는 이후의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훗날의 부립 1중, 지금의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는 등으로 인해 2년 뒤에 중퇴했다. 1883년에 대학 예비문의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의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의 교사 등으로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가 돌고 있을 때에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것으로 우정이 시작되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의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의 아내 도세()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잇단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나는 것도 이때이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 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런던 체류 당시 나쓰메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있던 집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처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2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9세로 타계하였다. 소세키가 타계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와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 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진 1,000엔 지폐 나쓰메 소세키는 원래 지폐의 인물은 아니였다. 일본은 맨 처음 이토 히로부미를 1,000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해서 인쇄를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등의 주변국들과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게 되자 일본 정부에서는 1,000엔의 인물을 이토 히로부미에서 그 자리에 나쓰메 소세키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2004년 이후로는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담겨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905년 ~ 1906년) 《도련님》(, 1906년) 《풀베개》(, 1906년) 《이백십일》(, 1906년) 《태풍》(, 1907년) 《우미인초》(, 1907년) 《산시로》(, 1908년) 《갱부》(, 1908년) 《그 후》(, 1909년) 《문》(, 1910년) 《피안이 지날 때까지》(, 1912년) 《행인》(, 1912년) 《마음》(, 1914년) 《한눈팔기》(, 1915년) 《명암》(, 1916년) 《런던탑》(, 1905년) 《환영의 방패》(, 1905년) 《》(1905년) 《하룻밤》(, 1905년) 《해로행》(, 1905년) 《취미의 유전》(, 1906년) 《문조》(, 1908년) 《몽십야》(, 1908년) 《긴 봄날의 소품》(, 1909년) 평론 《문학론》(, 1907년) 《문학평론》(, 1909년) 수필 〈〉(1910년) 〈유리문 안에서〉(, 1915년) 강연 〈현대 일본의 개화〉(, 1911년) 〈나의 개인주의〉(, 1914년) 기행 〈〉(1905년) 〈만한 이곳저곳〉(, 1909년) 시집 등 《소세키 하이쿠집》(, 1917년) 《소세키 시집 인보부》(, 1919년) 신체시 〈종군행〉(, 1904년) 행인, 유숙자 역, 문학과지성사, 2001. 유리문 안에서, 김정숙 역, 민음사, 2000.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미요시 유키오 편, 이종수 역, 미다스북스, 2004. 명암, 김정훈 역, 범우사, 2005. 마음, 그 후, 서석연 역, 범우사, 1990. 나쓰메 소세키 단편선집, 김정숙 역, 삼신각, 1996. 이 외에는 개별 작품에 판본정보가 정리되어 있다. 에토 준, 《소세키와 그 시대》() 고모리 요이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원제 ) 이와나미 서점 마쓰야마 시 세설신어 한자성어 나쓰메소세키.com 나쓰메 소세키 연구 아오조라문고 작품 전문을 읽을 수 있음. 소세키 연구자 권혁건 교수 분류:1867년 태어남 분류:1916년 죽음 분류:나쓰메가 분류:일본의 소설가 분류:도쿄 대학 교수 분류:메이지 대학 분류:도쿄 대학 동문 분류:일본의 영문학자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무사시국 사람 분류:도쿄도 출신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와세다 대학 교수 분류:메이지 대학 교수 분류:구마모토 대학 교수 분류: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동문 분류:영국에 거주한 일본인 분류:19세기 시인 분류:일본의 시인 분류:니쇼가쿠샤 대학 동문 분류:도쿄 교육대학 교수 |
북한 (北韓) 또는 북조선 (北朝鮮)은 한국(조선)의 지역으로서 한반도(조선반도) 군사 분계선 이북의 지역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은 이를 전제로 한 단어다. 대한민국의 사전상 사전상 남한(南韓)은 대한민국의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北韓)은 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범위 = 남한(대한민국의 남쪽 지역) + 북한(대한민국의 북쪽 지역)」이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한 조선반도 전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로 규정하여 남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지역, 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어(조선어) 사전상 남한(남조선)과 북한(북조선)은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한국(조선) 내 지역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별개로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남한(남조선)은 대한민국을, 북한(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칭하는 말로도 많이 쓰인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이라고 불러,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부 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분류:한국의 지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또는 조선 (朝鮮)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며, 남쪽으로는 대한민국과,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접하고 있다.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평양말과 같은 서북 방언에 기초한 문화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부분 북한 (北韓)으로만 부른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북 지역에서 소련군에 의해 군정이 실시되었으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8년에는 한반도 총선거에 기초하여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이 자리에는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형식상의 다당제 체제이지만 사실상 조선로동당의 1당 독재 체제이며, 김정일, 김정은 차례로 집권하여 세습에 의한 독재 국가라는 비판이 있다. 주체사상은 1972년 사회주의헌법 개정에서 최초로 등장하였고, 1992년 4월 헌법 개정 때 소비에트 연방의 기초가 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계를 마련했다. 1998년 사회주의헌법 개정 때 공산주의 문구를 전부 삭제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국방위원장이 자국의 실권자임을 명시했다. 2013년 6월에는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보다 상위 규범인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이 39년 만에 개정되면서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 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관련 내용을 완전히 삭제하고 주체사상으로 대체했으며, 김일성 가문의 백두 혈통 계승을 명문화했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한국만이 한반도 합법정부이므로 국민들이나 정치권에서도 빨갱이 등의 멸칭으로 북한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지만 동국가 내에서는 자국에 대한 약칭, 혹은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조선’(朝鮮)이 사용되며, 중국 등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단지 ‘조선’이라고 하면 대개 1392년에 건국된 왕조 국가를 가리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와 자국에 대한 호칭의 구별을 위해 ‘리조조선’ 혹은 ‘리씨조선’(리조)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킬 때 대개 북한 (北韓)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쓰임은 동 단어의 한국어 사전상 의미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 북한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한국어 사전상 남한은 대한민국의 남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범위 = 남한 + 북한 이다. 요컨대 한국어 사전상 북한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밖의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본을 예로하에 동일본(東日本)/서일본(西日本) 구분처럼,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전제로 대한민국 내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地名)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북한 이라는 용어에는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보는 관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자국을 이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이라고 불러,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반부 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중화민국 등지에서도 "북한"()이라는 명칭이 통용된다. 일본에서는 "북조선"()이 약칭으로서 사용된다. 이 나라의 위치에 고대에는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더 정확하게는 현재 둥베이의 일부분도 포함했다).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 복속했다. 장수왕은 국내성에 있던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대동강 ~ 원산만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했으나, 곧 발해에 복속했다. 한편 그 이남 지역인 황해도 지역은 신라가 차지했다. 고려 때에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불렸으며,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승려 묘청은 한 때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실패하자 난을 일으켜 대위국을 세웠으나 곧 망했다. 한편 함경도 지역은 고려가 차지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여진족 등의 치하에 있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와 최윤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특히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宣川)·정주(定州)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맞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옛 대한제국의 38선 이북 지역은 소련군, 38선 이남 지역은 미군이 각각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平南建準委)를 세우자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적화(赤化)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한반도 북부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지고나서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신민당이 연합하여 북조선로동당을 만들고, 이후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해 조선노동당이 된다. 이후 북조선인민회의와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9월 9일 사회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에 취임했다. 한국 전쟁 - 폐허에서 구조 화물을 뒤지는 여인 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Il Sung Portrait-2.jpg|섬네일|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계열, 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공산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산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Jong-il on August 24, 2011.jpg|섬네일|김정일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0년대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갔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여 김정일(金正日)이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1994년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한다고 했을 때 전쟁 위기가 최고조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민군은 미군과 맞설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이 없었고 비축물자도 없었다. 전투의욕도 상실한 상태였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한편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7월 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으며 10월 13일 핵 실험을 실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직할시에서 만나 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한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수립된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 을 실시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대한민국 국적의 금강산 관광객이 관광 도중 살해되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에는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고, 5월에는 핵실험을 강행했다. 또한 2010년 3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연이어 11월에는 휴전협정 이후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여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Jong Un with Honor Guard portrait.jpg|섬네일|김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4개월 뒤인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신설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2012년 7월 1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정은에게 기존 대장 계급에서 2단계 높은 원수 칭호를 부여할 것을 결정했다. 원수 칭호는 이미 사망한 김일성·김정일에게만 부여된 대원수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이전까지는 리을설이 유일했었다. 원수 바로 아래 계급인 차수는 보직 해임된 리영호를 포함하여 현재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12월 1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은하 3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2013년 2월 12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리히터 규모 4.9 (미국 지질조사국은 리히터 규모 5.1)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동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민국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 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국방부 또한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 4월 26일, 대한민국의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내의 잔류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했다.). 12월 3일, 김정은은 정권 내 제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에게 정치적 숙청을 단행해 축출했다. 이어 12일, 사형을 선고하고 즉결 집행으로 장성택을 제거했다. 그러나 고모 김경희에 대한 처분은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2017년 09월 03일에 12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에서 6차 핵실험에 감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합중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를 시작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를 촉구를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대북 제재와 함께 포용정책을 병행하면서 김정은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하키팀 등에서 단일팀과 예술단 공연 등을 하면서 2018년 4월 27일에 대한민국과 정상회담을 하여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 Tower.jpg|섬네일|평양직할시에 있는 주체사상탑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시에는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직을 겸직하게 하고, 그 아래 내각 총리를 두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인 김두봉, 최용건이 국가원수직을 겸했으며,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정과 동시에 국가주석직을 신설해 초대 총리인 김일성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선되었으나 1994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해 국가주석직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주체사상과 "독재"로 점철되는 일당 독재 체제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 이념인 주체사상과 일반적인 공산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며, 권력을 부계 세습하는 점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의 소멸을 시사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배계급이 유교적인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사람의 지도자가 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은 조선로동당 규약과 헌법이 뒷받침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라는 적색파시즘적 이념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가원수이자 국방 전반의 최고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입법부 수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영남(金永南)이다. 2010년 김정일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고 김정일의 후계로 추대되고 있었으며, 2011년 김정일이 죽자 후계자가 되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정치 구조가 퇴폐하여 2009년에는 "모두가 찬성 투표하자"라는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 국가 운영 원칙은 국가는 당(黨, 조선로동당)이 “령도(領導)”하고 당은 수령이 “령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 전반의 체제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당은 전인민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체, 즉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정강정책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국가 최고권력기관은 최고인민회의며 헌법에 이러한 권리가 따로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다만 이러한 정치체계는 대통령 중심제도 의원내각제도 아니므로 "회의제"라 할 수 있다. 과거 소련의 최고 소비에트나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등도 동일한 체제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내각의 조직 및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위원장 1인, 부위원장 2인, 명예부위원장 2인, 서기장 1인)과 국방위원회위원을 선거로 선출한다. 산하 위원회로 법제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와 예산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를 설치한다. 국방위원회는 국방사업 전반을 관장하는 위원회로 행정상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다만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를 겸직해 국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권력 우위를 점했다. 실제로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추대연설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력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여 공산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령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며 우리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스러운 중책이라 함으로써 사실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국방위원회는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의 지도, 국방부문의 중앙기관 신설 및 폐지, 중요 군사 간부의 임명 및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 칭호 수여, 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의 선포와 같은 결정과 명령을 내며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 위원회 구성은 위원장 1인, 제1부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위원 5인이며 산하기관으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성을 둔다. *산하기관 * 국가보위성 ***인민무력성 관련 문서:한국 전쟁,6.25전쟁 내각은 과거에는 정무원으로 불린 기관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직 및 인사권을 통해 구성되며 헌법에 의해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의 헌법개정을 통해 내각으로 그 조직이 변경되었다. 내각은 내각총리 1인과 부총리 3명으로 구성된다. 2005년 5월 30일 금속기계공업성을 금속공업성과 기계공업성으로 분리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산하에 3위원회, 29성, 1원, 1은행, 2국을 두고 있다. 그 외에 필요에 따라 임명되는 무임소상도 임의로 구성되기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당제를 택하고 있다. 현재 여당은 조선로동당이며, 수십 년 간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로동당은 이름일 뿐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관리하며 야당으로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있으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한 형식적인 야당이며,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는다. 사실상 정치적 권한은 전무하다. 그 중 천도교청우당은 종교적 성격을 가진 유일한 당이다. 1대 김일성 2대 김정일 3대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통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동독,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하여 국제 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립과 동시에 지금까지 “혈맹”까지는 아니지만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련 붕괴 이후 소원해졌으며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조선인민군 일부를 파견받는 등 우호적이었으나 미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가 개선되고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괄목하게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등 제3세계 국가들과도 활발한 대사급 관계를 맺어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반미 국가인 쿠바, 시리아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독 수교국이지만, 대한민국과의 수교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수교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무기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우호적이다. 대한민국이 하나의 한국을 폐기한 이후 스웨덴, 스위스, 영국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이 조선을 승인하였다.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서방 국가다. 중화민국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교류가 드물었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는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대한민국과 미국과는 건국 이래로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인해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적대관계이다. 1983년 아웅 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이후 미얀마는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의 묘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결례에 대해 분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즉시 단절하였고, 이 사건으로 비동맹국 회의에서 발언권이 약화되었으며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때는 유고슬라비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폭파범들의 당시 종적을 조사해서 미국 측에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방화사건이 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단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경우 한때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의 친분으로 인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989년 말 차우셰스쿠가 유혈 혁명으로 총살되고 1990년 3월 루마니아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최근에는 이란의 핵 포기선언, 쿠바가 미국과의 수교를 선언, 잇따른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하여 중국과 러시아 이외의 국가와는 사실상 국교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 전쟁 후에도 많은 사건을 일으켰는데, 특히 수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대한민국에 ‘조선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였던 사건인 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이 있다. 또한 1974년 8월 15일의 문세광(文世光)에 의한 육영수 저격사건, 1983년에 발생한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서 대한민국에 대한 침투를 시도하였으며, 1976년 판문점에서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도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장 간첩 120명을 15개조로 나누어 울진과 삼척지구의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이 있다. 1987년에는 대남공작원 김현희를 이용하여 대한항공 858편을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1996년의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9년과 2002년에 황해 서북방에서 각각 발생한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 그리고 2008년에 금강산에서 여행 중이던 대한민국 관광객 박왕자가 피격당한 금강산 피격사건 등 여러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2010년에는 연평도 일대를 포격하여 군인과 민간인 3명이 사망하였다. 2015년에는 조선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목함 지뢰를 설치하여 대한민국 군인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적으로는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등의 인접국가들의 경제 지원과 해외자본을 유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금강산관광, 개성공업지구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된 것이다. 2006년 10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하여 남북 관계는 소원(疎遠)해졌으며, 각종 남북 협력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2007년 6자 회담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타결로 활발히 재개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얼어붙게 되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노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대한민국을 압박, 남북 관계의 차단을 경고해 왔으며, 결국 최근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로동신문의 논평에 대해서 각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체로 대한민국을 길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2008년 12월 1일부터 군사 분계선을 통과하는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경색되어 가는 남북관계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화를 제의했으며, 군사 및 실무차원에서 장비지원을 제의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계속 보이고 있자, 남측은 강경한 입장에서 조금씩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11월 15일에 남북관계의 회복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4박 5일의 평양 방문을 마친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대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이라고 발표했다. 민주노동당은 북측 고위급 인사의 말을 인용해서 현 남북 관계가 최악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24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 관광 중단, 개성공단 축소 등을 통보했다. 대한민국 통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선 희박하지만 배제 못한다고 발표했다. 2009년 11월 10일 인천광역시 대청도 인근 해상 북방 한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오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비정에게 대한민국 해군에서 경고를 하였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비정에서 공격을 가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반격을 가하면서 대청해전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함정이 반파되었다. 그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도발이라고 주장하며 가혹한 군사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였다. 2010년 3월 26일에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을 어뢰로 침몰시켰다. 2010년 11월 23일에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하였고, 이 포격으로 해병대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 본토로 피난하였다. 2008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2025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통일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했다. 대북인권결의안이 11월 21일에 통과되고 대한민국이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북측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말을 인용, 점점 대남압박 행동조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압박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매체를 통해 대한민국을 맹비난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은 경색되어 가는 남북관계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이명박 정부의 남북 관계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대북대책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했다. 야 3당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하루빨리 전환해야 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통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도발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2008년 12월 5일에 대한민국 통일부는 12월 1일에 남북간 육로통행의 차단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지원사업 및 경협은 활발하다고 발표했다. 조선신보는 2008년 12월 10일에 6자회담으로 참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협상태도를 비판했다. 반면에 국민행동본부 등 일부 보수단체들은 이런 북측의 비난행동의 맞대응으로 정상회담 때 중단하기로 한 전단을 살포하기로 하였다. 2009년 1월 17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총참모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과 전면대결태세에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선 대북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인민군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명을 통해 남측과 전면대결태세에 돌입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정치권은 반응이 엇갈린 상태이다. 남측에 위치한 서해 5도는 성명발표 뒤에도 평온속 긴장상태에 놓여 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한 단체가 한반도 위기를 주장했다고 조선중앙통신에서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성명을 통해 남북간의 기존 군사적, 정치적 합의사항을 무효로 한다고 선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기존에 있던 사항들을 폐기한다고 발표하면서 황해에 위치한 서해 북방한계선은 화약고가 될 가능성을 낳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에 직원을 30일이상 억류하고 있으며, 2009년 5월 1일에는 대남 입장을 밝혔다. 그러다가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여기자가 석방되었으며 곧이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으로 유씨가 석방되었다. 또한 조선인민군에 억류되었던 어선들이 귀환하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위급 인사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 과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그 밖의 통일부 장관, 기타 거물급 정치인들과 면담하면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2009년 9월달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 처음으로 이산가족상봉이 금강산에서 이루어졌으며 남북 관계에 순풍이 조금씩 불고 있었으나,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해 남북 관계가 또다시 얼어붙었고,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2017년에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잇따라 도발을 일으키며 남북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고 있다. 특히 연달아 중거리탄도유도탄을 발사하고 6차 핵실험을 강행한 바 있다. 김정은은 4월 9일 노동당 정치국회의를 주재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의 날짜와 장소를 처음 공개했다.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개최되는 북남수뇌상봉과 회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한반도 핵의 단계적 동시적 조치 주장에 동의를 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선 핵포기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미북 정상회담을 앞둔 외교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남북은 2018년7월14일 판문점에서 장성급 군사회담을 열고 동·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완전히 복원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서해 군 통신선은 복구됐으나 동해 군 통신선은 2011년 5월 북한이 통신선을 차단한 이후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후에 국방부는 서해지구 남북 군 통신선을 완전히 복구해 모든 기능을 16일부터 정상화했다고 2018년7월17일 밝혔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1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라고 규정하며, 국가보안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반(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조항이 평화 통일 원칙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4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도 있으며, 2000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직시하였으므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9년 10월 21일 293(IV)호 결의 또한 이를 확인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 수교하였다. 한국 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으며 이들 군대는 1958년 10월 26일에 철수했다.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1990년대 초 최악이었던 조중 관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로 훼손된 관계 회복에 나서 지금껏 모두 7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방중과 장쩌민·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거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한반도 정세의 핵심적 변수가 됐다. 천안함 사건으로 대북 경제협력을 단절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처로 경협 분야에서 북-중 경협이 남북경협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위화도와 황금평을 100년간 임대하였다. 2010년 12월 26일 중국은 나진항 4, 5, 6호 부두를 5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베이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역상이 1000명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8년 3월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로써 조중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가졌고, 김정은과 시진핑은 또한 북미정상회담 직후인 6월 19일 베이징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일본은 수교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에 나서려 했으나, 일본인 납북자 문제과거사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일 병합 조약에 대한 평가나, 배상문제·청구권문제 등에 대하여도 결말이 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62년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두 개의 정권"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시인해 왔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에 "한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면서, 일본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실체를 따로 취급하여 왔다. 한편, 배상 문제도 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나눈 적이 있다. 2002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배상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제 협력을 얻는 방법에 합의했다고 발표되었으나, 이후 수교 협상은 정지되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괴선박 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동에 대한 일본 여론의 반발과 핵 문제 등으로 고립이 심화된 데에 있다. 일본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 문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테러국가 지정해제를 받고자 하였으나, 미국은 오히려 엄격한 제재조치로 전환하였다. 1956년경, 박영빈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소련은 미국과 평화 공존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평화 공존 정책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격분하여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과 직접 전쟁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 빩은이들렇게 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를 단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에는 소련과의 상호 협력 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1996년에 효력이 상실되었다. 2000년에는 러시아와의 우호 선린 협력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는 군사 동맹 관련 조항이 삭제되었다. 베를린 소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1987년) 독일민주공화국 정부의 초청으로 칼 마르크스 대학(라이프치히)에 유학중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학생들 (1953년) 1990년 독일의 통일로 인해 평양 주재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이 폐쇄되었다. 폐쇄된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의 권리는 국제법상 공식적으로는 스웨덴 대사관에 귀속되었다. 1만6천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공관이었다. 2000년 대한민국 김대중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평양 주재 독일대사관이 세워졌다. 2002년 1월 서방국가로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상주 대사를 파견했다. 스웨덴과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했지만 대리대사가 이끌고 있다. 1992년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단교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민간 차원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건국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을 주적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많은 선전물에 미국을 적대시하는 등 미국과는 수교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최근 6.12 북미회담으로 한동한 관계가 좋아졌다가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2월 27일 제2차 북미회담에서 결렬된 이후 다시 사이가 악화될 지도 모른다. 2000년 12월 15일 스페인 정부는 성명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 한반도 화해와 정상화 과정에 기여할 것"이라면서 공식적으로 외교관계 수립하였다. 그러나 대사관 설립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한 국가들의 상주공관은 평양보다 베이징에 훨씬 더 많이 있는 실정이다. 1974년 2월 27일, 취리히에 통상대표부를 개설하는 등 대 스위스 경제교류 촉진책을 써왔고, 1974년 12월 19일에 스위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스위스의 인도적 대북 지원량이 1997년 들어 급증하자, 1997년 8월 5일부터 9일까지 발터 푸스트 스위스 외무성 인도주의협조총국장을 수석대표로 한 외무성대표단이 방문해 평양에 스위스 외무성 직원 1∼2명이 상주하는 사무소를 개설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공개 합의했다. 1998년 평양주재 스위스 외무성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2000년 1월 G7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2001년 6월 20일 마테오 피카리엘로 이탈리아 해외무역공사 서울 사무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경제 사절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최초의 이탈리아 경제사절단의 평양 방문으로, 이탈리아의 주요 은행 중 하나인 뱅카 나치오날레 델 라보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C.S.I 테오레마, 의류업체 오벰 등이 포함되었다. 2001년부터 이탈리아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학생과 의사, 연구원들을 이탈리아에 초청해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연간 20명 정도에게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평양에는 이탈리아 외교부 산하 개발협력처 평양 사무소가 있다. 평양의 광복거리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방장이 피자 재료까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원래의 맛을 추구하는 평양 최초의 이탈리아 피자가게가 2008년 12월 문을 열었다. 2009년 평양에 이탈리아 요리 전문식당이 하나 더 생겨 모두 3곳으로 늘면서, 피자와 스파게티가 평양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2010년 쇼팽 탄생 200돌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공동음악회를 열었다. 1972년 6월 파리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이어서 1984년 12월 그것을 일반 상주 대표부로 승격시킨 바 있는 이 때, 대한민국 정부는 윤석헌 주프랑스 대사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항의의 뜻을 표했었다. 또한 평양에 프랑스와의 합작투자 호텔을 건립하는 등 조선으로서는 드문 선물을 주면서 서방국가에 외교적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1988년 조선이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대사로 임명한 것을 두고 권력 계승을 둘러싼 갈등 문제와 관련시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만큼 헝가리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001년 7월 28일 주 런던 대사관이 임시 개설되었다. 2003년 4월 30일 최수헌 조선 외무성 부상이 주 영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런던 서부 주택가 일링의 거너스버리에 위치한 130만 파운드 짜리 저택을 매입해 대사관으로 개조했다. 서유럽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스웨덴에 이어 6번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외교공관이며, 개관식에는 최수헌 외무성 부상, 리시홍 대리대사, 주 영국 중국 대사, 영국 외무부 관계자, 하원의원 등 수십명이 참석했다. 개관식이 열리는 동안 대사관 앞에서 영국 인권단체인 세계기독연대(CSW·Christian Solidarity Worldwide)’와 ‘릴리즈 인터내셔널(Release International)’이 공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스웨덴은 반제국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197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1975년 3월에는 서방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평양에 대사관을 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은 대부분의 서방 국가 출신의 외국인(대한민국, 일본 제외)은 스웨덴 대사관이 보호한다. 예멘에서는 조선 의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병사(200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조직인 조선인민군은 제도상 로동당의 당군 이며, 선군정치 하에서 권력의 기반이다. 최고사령관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다. 조선인민군은 징집병이며 2002년 병력은 약 110만 명이상으로 추정된다. 부문별로는 육군 120만명, 해군 4만 6000명, 공군 8만 6000명으로, 병력면에서 세계 4위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비가 노후하며 장비를 움직일 자원이 부족하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 장비들이 질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사시 장비들이 전력으로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조선인민군은 대부분 식량부족이 심각하며 이는 민가에 악탈과 체력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이유 때문에 현재 조선인민군의 90%는 전투 불가능 상태이다. 평양-원산선 이남에 총전력의 70%를 배치하고 있으며, 170mm 자행포 및 240mm 방사포는 대한민국의 수도권 지역을 기습 선제 타격할 수 있다. 현재 이라크 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특수전 전력의 확충과 갱도 건설과 기만기 개발로 후방지역의 생존성 확보에 노력하고 있다. 백령도 인근 장산곶과 옹진반도, 연평도 근처 강령반도의 해안가를 비롯한 장재도, 무도, 대수압도 등에는 해안포 900여문이 배치돼 있다. 군항인 해주항 일원에만 100여문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해안포는 사정거리 27km의 130mm,사정거리 12km의 76.2mm가 대표적이며 일부 지역에는 사정거리 27Km의 152mm 지상곡사포(평곡사포)가 배치되어 있다. 또 사정거리 83~95Km에 이르는 샘릿,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도 NLL 북쪽 해안가에 다수 설치됐다. 조선 인민군은 로동 1호,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등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대포동 2호는 미국의 영토인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 3위에 준하는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기도 하다. MIG-21 등 전투기들을 무인 항공기(UAV)로 개조하였다. 이란을 통해 무인 정찰기(UAV) 도입을 해서 서해상에서 운용 중이다.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대기권 재진입 기술도 확보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10,000 ~ 13,000 km 이상의 ICBM 사정거리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만 km는 미국 서부 지역까지, 13,000 km는 미국 대부분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KN-08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엔진 성능개량 시험을 실시했다. 몇 기를 개발했는지는 확인 할 수 없다. TEL에 탑재되어 있는데 TEL은 정찰 위성이나 레이다 탐지 사각지역에 숨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위협적인 무기체계다. 150~250여 기가 실전배치된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탄도 미사일의 TEL도 27~40대로 파악되고 있다. 괌을 사정권에 둔 무수단 탄도 미사일 운용부대는 14대의 TEL을 보유한 것으로 분석된다. 조선인민군은 전시에 대비해 군 보관시설에만 150만t의 전시용 유류를 비축해 놓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스스로 세계에서 9번째 핵무기 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기정 사실로 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건국 초부터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80년대 후반 핵개발 의혹이 있는 시설에 대한 핵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NPT 탈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지만,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이후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맺어, NPT 잔류와 핵시설 동결을 선언하였다. 2003년 초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하면서 제네바합의를 파기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6년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몇 개의 플루토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의 핵폐기 요구에 대응하여 미·일·러·중·남·북 6자회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7년 초기 단계를 합의하였다. 절차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만간 핵시설을 불능화하게 된다. 기존의 핵무기에 대한 처리는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은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처음 핵을 보유한 국가로 지정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9년 3월 24일에 6자회담의 폐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7월 16일 김영남(金永南)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 이라고 하며 6자회담의 종료선언을 했으나, 9월 18일 김정일은 양자 및 다자회담의 틀에 대해 재언급하였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였고 판문점 전화를 차단하였다. 또한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105, 2016년 1월 6일 수소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며 그 진위 여부는 현재 밝혀지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으로 밝혀질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소탄 보유국이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1직할시, 2특별시, 9도, 3지구로 나뉜다.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며, 면적 상으로 국토의 1%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해당 부분은 6과에서 관리한다. 평양직할시 라선특별시 남포특별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자강도 량강도(양강도) 강원도 신의주특별행정구 금강산관광지구 개성공업지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아시아 대륙 동부 중앙에 있다. 국토의 9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대는 동경 135˚ 기준 자오선 표준시(UTC+09:00)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경계는 1948년 9월 9일부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8선(북위 38˚선)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로는 군사분계선이다. 북으로는 대략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인접한다. 국토 북단은 북위 43˚ 00 36˝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남단은 북위 37˚ 41 00˝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서단은 동경 124˚ 18 41˝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동단은 동경 130˚ 41 32˝ 라선특별시 우암리이다. 면적은 123,138 km²로, 한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영역과 거의 같다. 이를 따르자면 영토의 남단은 북위 33˚ 6 3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동단은 동경 131˚ 52 40˝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바뀌게 된다. 이 영토의 면적은 222,209.231 km²이며 한반도 본토를 제외한 섬은 5,974.655 km²이다. 섬을 포함한 남북의 최장 거리는 1,127.16 km, 동서의 최장 거리는 645.25 km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형도 한반도는 긴 지질 시대의 거듭되는 지각운동, 침식, 퇴적작용 등에 의해, 산지, 평지, 계곡, 해안, 고원 등 변화가 많은 지형이 되었다. 국토의 약 90%를 산지가 차지하여, 육지의 평균 표고는 440m이다. 많은 국토가 산지 속에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형은 백두대간인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서쪽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 묘향산맥(妙香山脈), 언진산맥(彦眞山脈), 멸악산맥(滅惡山脈) 등이 펼쳐져 있고, 함경북도에서 함경남도에 걸쳐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 등이 낭림산맥과 이어져 북부와 동부가 높고 서부와 남부로 오면서 점차 낮아진다. 이들 산맥으로부터 발원한 여러 개의 큰 강들은 서해 및 동해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강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산맥은 북부에 위치하는 랑림산맥, 최고봉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 위치하는 백두산(2744m)이다. 평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영토 면적의 약 5분의 1로, 서해안 연안이나 서해안에 도달하는 하천의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지만, 산지의 토양은 유기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 불모지이다. 주요 하천은 대개 산지의 수원지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간다. 가장 긴 압록강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이다. 다른 주요 하천은 대동강, 예성강, 청천강, 재령강 등이 있다. 두만강만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해로 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부분 대륙성 냉대 기후로 일부 지역에서는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냉대 지역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나고 온대 지역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 온대 하우 기후가 나타난다. 조선범(시베리아호랑이) 현재 한반도 전역에 10만여 종의 동식물이 분포하며, 식물계에서는 북쪽 함경북도 백두산의 경우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북방 침엽수림이나 북방계 식물류가 자생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에서 광물 자원이 풍족한 국가 중의 하나이며, 종류로는 철, 은, 납, 아연, 구리, 니켈, 코발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은 금속광물 19종, 비금속 광물 20종, 에너지 3종을 합한 40여 종에 달하며, 이 중에서 마그네사이트, 중석, 몰리브덴, 흑연, 중정석, 금, 운모 등의 광물은 세계 10위권 내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근거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서한만에서 하루 약 700배럴 정도의 경미한 양은 생산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과거의 다국적 석유 기업들의 탐사 결과에 따르면, 한때 의문시되었던 수십조원 규모의 대량의 원유의 매장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빨강)과 대한민국(파랑)의 전기 사용량 비교 in nkorea.jpg|섬네일|미국 항공우주국이 2000년에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부분의 지역이 어둡게 나타난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인당 명목상 GDP는 2012년 기준 583달러, 인구는 약 2500만명이며 수도 평양의 인구는 약 300만, 국내 총생산은 약 123억 달러로 추계되고, 이것은 남한 1인당 국민소득의 40분의 1, 국내 총생산이 남한의 80분의 1에 해당하며 2012년 UN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80위인 개발도상국이다. 그러나 경제 이외에 다른 요소들을 반영할 경우 사실상 후진국이다. 평양직할시의 위성 사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그 후의 통제경제는 일관해서 중공업의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를 중시해 왔다.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5개년 계획, 1961년 7개년 계획, 1971년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력을 보였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폐쇄적이고 선전선동을 앞세운 공산권 국가들이 경제성과를 대외에 과도하게 과장한 사례가 많은데 소련만해도 경제성과를 5배이상 허위로 대외에 알렸던 걸 감안할 때 60~7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개한 경제성과는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일제시대 건설된 산업시설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에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60~70년대까지 공업부분의 경제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을 시행했고, 1980년대 동구권과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노선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우호가로 거래하던 호혜가 사라졌고 소련과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원조와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당시 주요 1차 자원을 동구권에 의존해왔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이는 1차 자원 생산지 인프라를 구축하지않고 중공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큰 경제적 위기였다. 그리하여 1987년 제3차 7개년 계획과 여러 발전 운동-천리마 운동-자력갱생 등으로 계획경제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2003년의 국내총생산(GDP)은 228억 5,000만 달러로 추계된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개방과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상황을 이겨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은 계속해서 가중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은 1993년 공식적으로 계획경제의 실패를 자인했다. 2002년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식량난과 경제난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2002년 7월 1일에 7월경제관리조치를 실시하여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관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정부 관리들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에 파견하여 이른바 "자본주의 학습"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정은이 2009년에 경제관리조치를 무효화 시키면서 경제가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장마당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2004년부터 시장을 개장하여 시민들이 생활 소비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시장은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 거리 시장과 만경대 구역에 있는 칠골시장이 있다. 통일 거리 시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품 및 남한과 미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진품이 아닌 것들도 있다. 최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합작으로 물품량이 증가한 상태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었다. 1998년을 기점으로 대량아사 사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굶주린 서민들이 많은 실정이다. 1995년 이후 국제사회의 원조 없이는 주민들의 식생활을 책임질 수 없는 ‘구호경제’ 체제로 접어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북은 2008년 곡물 최소 소요량 520만t 가운데 380만t만 자체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족분 140만t은 남한이나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의존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측정하는 세계기아지수(GHI) 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08년 세계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18.8점으로 기아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한다. 해당 리포트에서 기아 상황이 악화된 10개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제외한 9개국이 모두 아프리카 나라들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최근까지도 식량난이 나아지지않고 있으며, 북동쪽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실정이다.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각하에 있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을 폐지하고, 민경협 산하에 있던 민족경제련합회(민경련)를 개편해 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로 옮기는 등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하거나 개편했다. 하지만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 개편한다는 설에 대해서 남한 정부나 전문가는 가능성이 낮거나 남북관계 차단의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북은 라면 대량생산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그 효용성은 의문이다. 201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2010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지수는 19.4점으로 20년 전인 1990년 때의 16.2점보다 굶주림 위험도가 20%나 늘었으며, 작년도인 2009년의 18.4점에 비해서도 1점 가량 오른 것을 볼 수 있다. 해당 연도에는 총 9개 국가들이 기아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기아율이 증가한 국가라는 불명예를 앉게 되었다. 201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중단한 대한민국과 미국 탓이라고 발언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의 월스트릿저널은 원조의 대가로 어뢰와 방사포공격으로 돌려받은 한국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2011년 10월, 유엔 산하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 발레리 아모스 국장은 "현재 북에 필요한 식량 530만t 가운데 100만t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북 어린이 3분의 1이 만성적인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일일 식량 배급량이 600g에서 200g으로, 북에 대한 외부 사회의 지원도 1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고 밝혔다. 2014년 미국 워싱턴의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는 11일 유엔이 정한 ‘세계 식량의 날’을 맞아 발표한 ‘2014 세계 기아 지수(2014 Global Hunger Index)’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굶주림 상태를 심각한 수준으로 평가했다. 세계식량정책연구소의 미셸 피에트로우스키 대변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시아에서 굶주리는 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2016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는데, 비록 5세 미만 아동의 발달장애율이나 사망률은 많이 줄었지만 전반적인 기아지수는 여전히 28.6점으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Metro.JPG|섬네일|평양 지하철도 1992년 개정된 공산주의 헌법 70조에 따르면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라고 규정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법적으로는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나 국가기관에서 배치한 데 따라 일해야 하며 그 기준이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성분, 노동력 배치계획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고위층 인재 채용과 관련된 부정부패가 일어나면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4년 1월부터 정치, 경제 과목 등의 시험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인사정책이 개선, 신세대 엘리트들이 출현하는 등 인력구조의 전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아파트 또는 문화 주택으로 부르며, 이는 크게 3층에서 4층까지 있는 콘크리트 고밀도 건축물을 말한다. 이 또한 공산주의 국가의 법에 따라 주택을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달 사용료를 내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남한 주택제도와 달리 가정 총노동 월급에서 전기료, 수도료 등을 충당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직업에 따라 주택의 구성이 달라진다. 당`정`기업소 간부들은 독립식 다층 주택으로 정원과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되어있는 곳에서 거주하는 반면, 말단 노동자 등은 방 1~2개와 부엌이 딸린 공영주택에서 거주한다. 또한 상위계층은 주택보급률이 굉장히 높은데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배정받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입사증"을 받고 이동허가를 받아 이사하는데 이를 받기 위해서 몇 년이 소요된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은 서류수정작업을 통해 거주지를 변경한다. 대표적인 주택지구는 평양시 중구역 아파트단지와 천리마 거리 아파트 단지, 함경남도 단천시 신단천동 주택단지와 황해북도 개성시 청년거리 아파트 단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흔히 경제문제에 비유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택건설에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요즘 정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식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택건설도 부진한 면이 없지 않다. 2009년 11월 30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년 만에 구 1000원을 신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하였다. 이는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한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처 이후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주민들이 보유해 암거래 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 자금을 끌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가구당 구화페 100,000원을 신화폐 1,000원으로 교환해주고 그 외에는 교환해주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서 한 사람당 신화폐 500원(구화폐 50,000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즉 4인가구인 경우 정부으로부터 지급 받은 2,000원과 1,000원(구화폐가 100,000원 이상이 있었을 경우임)을 합한 3,000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은 모두가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점과 구화폐가 단 10,000원도 없던 하위층의 경우엔 공짜돈이 생겼다는 점, 또 2-3,000원정도의 월급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하, 중상위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화폐 교환조건을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여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일의 실정을 숨기기 위해 박남기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초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조선로동당 전 계획재정부장이 남조선 간첩 혐의를 받아 숙청된 것으로 확인됐다. 2009년 대한민국의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현지에서 입수한 동영상에 의하면 심각한 경제난의 후유증으로 병사들이 필로폰을 밀매하는 것이 알려졌다. 군인, 민간인이 결탁한 조직적 거래가 확인되었으며 이것은 평양당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총 32분 분량으로 촬영된 이 동영상은 소문만 무성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마약밀매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반도 지역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한반도 북부에는 과거 퉁구스계 민족(말갈족·여진족 등)의 유입이 잦았으나, 한국 전쟁 이후 외부 민족 유입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현재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한민족이며, 매우 소수의 외국인 거주자(주로 중국인, 그 밖에 러시아인, 몽골인 등)가 있다. 그리고 1950년대~1970년대에 월북한 대한민국 주민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2012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458만 9,122명(출처:CIA The World Factbook)으로 추산되며, 인구밀도는 200명/km²이다. 인구는 대개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해안가 등에 집중되어 있다. 2004년 인구 증가율은 약 1%이다. 1950년대 이후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가속화되어 2002년 기준으로 총인구의 61%가 도시지역에 산다. 최대 도시는 수도인 평양으로, 2010년 인구는 251만4,692 명이다. 그 밖에 주요 도시로는 함흥, 청진이 이렇게 평양과 3대 대도시를 이루며 그 외 남포, 개성, 신의주, 원산 등이 있다. 2000년 8월에는 동해안의 경제 무역 도시인 라진과 선봉이 합쳐 인구 40만 명 규모의 라선직할시가 되었으며, 이 도시는 2010년 1월 라선특별시로 승격되었다.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한글로 표기된다. 표준어는 문화어라고 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방언에 바탕을 두고 있다. 표기상 한자의 사용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두음법칙(예 북 -녀자, 남 -여자)과 사이시옷(예 북 -시내물, 남 -시냇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모의 사전 배열 등에서도 대한민국과 차이가 있다. 어휘는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활용한 어휘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러시아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특히 고유어인 "동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예를 갖추어 상대방을 부르거나 지칭하는 일상적인 말로 자주 쓰인다. (예) 저기 녀성 동무, 평양역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리철진 동무, 속히 오시오. 판매원 동무, 이거 얼맙니까?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나 중국과의 경제교류 등의 교류강화로 중국어를 많이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는 소련 해체 이후 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문화어의 말미에 -니다 대신 -네다를 쓰는것이 널리 알려져있으나, -네다를 쓰는것은 황해도 사투리이다. 세계 유수의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태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인구의 0.85% 정도인 15만 4천여 명의 주민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이 재판 없이 이들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곳에서는 심문, 강간, 고문, 강제노동, 의료 서비스 배제, 강제낙태, 생체실험 등이 행해진다. 또한 이곳에서 그들은 결혼의 자유도 박탈당하며 턱없이 낮은 식량배급을 받고,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된다.. 또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아편 재배에 어린이를 동원하고 있는 실태를 지적하였으며, 同 위원회에 출석한 북측 대표단은 유사시 미성년 아동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할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평안남도 개천(14호 관리소)과 북창(18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15호관리소), 함경북도 화성(16호 관리소), 청진(25호 관리소), 회령(22호 관리소) 등 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은 대한민국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지역으로 교회의 수가 남한보다 더 많았으며 종교 활동도 더욱 활발했다.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천도교도 약 150만 명, 불교도 약 37만 5000명, 개신교도 약 20만 명, 천주교도 약 5만 7000명 등 총계 약 200만 명의 종교인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의 22.2% 수준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많은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탄압을 단행했던 이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종교를 민중의 아편 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으로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인간의 의식이 환상적으로 왜곡 반영된 ‘허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구체적인 내용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정되고 있다. 이는 종교탄압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자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한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는 “실제는 종교 활동에 대한 다양한 제약이 있다. 신앙을 가지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있다”라는 견해가 주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의 통일 사상인 주체사상이 사실상 종교를 대신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의 단계적 혁명 이론을 가르쳤던 황장엽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주체사상을 취급하지 않은 것 때문에 교수 지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종교를 믿는 신자들은 종교적 탄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건국 때부터 1960년대까지 종교를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은 「국내의 주된 종교로서 유교, 불교, 기독교, 제종교의 요소를 포괄한 천도교가 있다」라고 발표하고 있다. 다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종교 단체 목록이다. 이름 장소 정릉사 평양직할시 역포구역 룡산리 봉수교회 평양직할시 대동강구역 문수동 장충성당 평양직할시 선교구역 장충동 조선불교도련맹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카톨릭교협회 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 봉수교회에서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가 벌어진다. #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는 중국어나 영어 성서를 번역하고 조선어 성경을 보급한다. # 로마 가톨릭교회는 조선카톨릭교협회가 활동중이나, 교황청에 의해 승인받지 않은 단체이다. # 개신교 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교류 중이다. # 그러나 상술한 활동들이 실제로 진행 중인지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봉수교회는 수십년간 건물을 쓰지 않았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국가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을 말하며 시기는 대한민국과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2일까지로 대한민국의 신정(1월 1일)보다 오래 휴식을 취한다. 국가명절은 대표적으로 8개를 기념하는데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16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노동절(5월 1일), 조국 해방일(8월 15일), 공화국 창건일(건국일,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10월 10일), 사회주의헌법절(12월 27일)이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까지는 연속적인 축제기간이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의 의무 휴식을 위한 농업근로자절(3월 5일), 어부절(3월 22일), 탄부절(7월 7일)이 있고 이외에도 국제부녀절(3월 8일), 조선광복회 창건일(5월 5일), 철도절(5월 11일), 국제아동절(6월 1일), 조선소년단 창립절(6월 6일), 김일성 서거일(7월 8일),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7월 27일),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일(10월 17일), 학생독립기념일(11월 3일)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군사문화와 연관 짓고 있으며 농사나 공장에서의 물자 생산을 "농업전투", "공업전투", "생산전투" 등의 단어로 표현할 만큼 아주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인뿐만 아니라 철도공무원도 군대식 계급을 부여(역장 – 대위, 차장 – 소위, 개찰담당 – 상등병, 기관사 – 중사 등)할 정도이다. 문예활동은 당책 구현, 공산주의 선전, 공산주의적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와 주체사상 강화 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정책 또한 선전과 선동의 일환으로서 문학이나 예술을 이용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이른바 공산주의헌법 45조에 규정되어 있는 `민족적 형식에 공산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어야 한다 는 규정에 따라 공산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방법이 그 기조가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육정책은 주민들을 공산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투사형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우상화와 국방력 강화의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정치외교수단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며, 반미사상, 대남전략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다. 체육정책의 기준은 공산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들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일 개교한 평양체육대학과 1977년에 설립한 중앙체육학원, 그리고 73년부터 각 도에 1개교씩 설치한 고등전문학교를 두고 있으며,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에 체육학부가 있다. 최대의 체육시설은 김일성경기장이며, 그 밖에 지방도시인 혜산· 함흥· 사리원· 원산· 신의주 등지에 경기장을 두고 있다. 실내체육관으로는 배구· 농구· 탁구· 체조 등 11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는 원산· 남포· 함흥· 강서 체육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이며, 일제 강점기 1920년대 활동했던 카프라는 문단이 전신이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 사실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면서 지식인들을 개몽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60년대에 숙청당한 한설야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가입했다. 한설야의 작품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읽을 정도로 해금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저서 문학예술론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고쳐서라도 읽게 하면 좋다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문학 2003년 5월호는 한설야의 작품 《승냥이》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행적을 찬양하는 문화를 "수령형상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졌다. 이 문화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한편, 역사 문학이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문학, 외국 문학이 있는데, 역사 문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홍명희와 그의 손자 홍석중이다. 홍명희의 작품인 "림꺽정"은 조선 전기의 도적인 임꺽정을 그린 역사적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제국주의에 맞써 투쟁한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도 역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로써, 그도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소설로는 중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시인으로는 조기천과 백하와 신흥국 등 이 있는데, 조기천은 시 "백두산"과 "휘파람"으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흥시인 신흥국은 얼마 전 음력설에 풍경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본따 만든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은 당과 깊이 연관되어 당의 통제를 받으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예정책은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인데 한설야는 1953년 9월 26일 전국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보고에서 "우리의 문학예술은 당적인 문학예술"이라고 천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53년 10호, 125쪽). +평양의 문화단체 음악부문 피바다가극단 국립민속악단 보천보전자악단 미술부문 만수대창작단 조선미술가동맹 문학부문 조선문학가동맹 영화부문 조선기록영화촬영소 조선아동영화촬영소 문화 활동은 조선 정부에 보호되고 장려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역사 박물관이나 영화관, 도서관이 정비되고 있다. 정부는 국립의 교향악단, 극장, 무용단 등을 갖고 있다. 공연 단체로는 보천보전자악단(普天堡電子樂團), 왕재산경음악단(旺載山輕音樂團),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朝鮮人民軍功勳國家合唱團), 조선인민군군악단(朝鮮人民軍軍樂團), 조선국립교향악단(朝鮮國立交響樂團)등이 존재한다. 근래 들어서는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그리고 청봉악단 등이 창단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김정일 장군의 노래", 항일 투쟁을 소재로 한 혁명가극 "피바다" 등이 유명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가수 안재욱의 노래를 부르다가 처벌하는 경우가 있었다. 평양직할시에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윤이상 (尹伊桑)의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다.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래는 혁명가곡과 정책가요들이 많지만, 꽤 서정적인 노래도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다시 만납시다, 우리 민족 제일일세, 반갑습니다는 보천보전자악단의 단원인 여성가수 리경숙이 부른 노래로 조선민족제일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며, 기러기떼 날으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의 주제곡이다. 이밖에 혁명가요로 적기가, 총동원가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실미도라는 영화를 만들 때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쓰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소동이 있었다.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이미 부른 노래를 전자악기로 연주한 경음악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격대 말파리 달리네》, 통일아리랑, 민요 《바다의 노래》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데 애를 써서, 자신이 직접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일제강점기 때 생애를 그린 〈조선의 별〉, 1992년에 해외동포들의 행적을 그린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예술영화 〈온달전〉, 스포츠를 장려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만든 예술영화 〈가족농구선수단〉, 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 때 도적, 임꺽정을 배경으로 하는 예술영화 〈림꺽정〉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에서는 정책을 따르도록 선동하거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상향시키려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과학 영화"가 방송되고 있는데, 관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앙방송"의 8시 뉴스가 끝나기 전에 "과학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방송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 그리고 〈평양의 4계절〉와 〈강냉이오사리종이〉, 그리고 〈우리 생활에 필요한 콤퓨터상식〉와 〈우리나라의 최초의 철갑선-거북선〉, 그리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자〉와 〈3·26전선공장이 어떻게 모범기업이 되었는가〉, 〈조선의 천연기념물 클락새〉 그리고 〈룡정어를 많이 기르자〉,〈우리나라의 저작권소유법〉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아동영화"가 인기가 많다. 아동영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어린이가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그림을 그려서 만들거나, 인형극을 통해 만드는 경우가 있다(과학 영화도 컴퓨터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으로 활용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음). 아동영화의 내용은 도덕, 예절, 과학기술에 관해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아동영화는 《령리한 너구리》와 다부작 아동영화 《소년장수》이다. 그 중에서 《령리한 너구리》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과학의 원리로 쉽게 풀이해서 과학원리에 대해 좀 더 쉽게 설명한 것이고, "소년장수"는 "간약한 호비와 착한 쇠매의 결전"이 내용으로, 권선징악이 주요 내용이다. 이 만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린이들 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좋아하는 편이다. 이외에도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딸이 인삼을 찾아 험난한 일을 하는 《산삼꽃》과 교통질서에 대한 캠페인 만화인 《교통질서를 잘 지켜요》, 그리고 온갖 나쁜 일을 저질러 동물을 괴롭히다가 고슴도치에게 혼줄이 나는 《호랑이와 고슴도치》, 각도기를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연필포탄》,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꾀로 늑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승냥이를 이긴 너구리》, 돌고래를 훈련하여 경제활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려는 《곱등어를 기르는 소년》 등이 있다. 아동영화를 만드는 곳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평양만화영화제작소, 기록영화제작소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곳은 평양만화영화제작소이다. 이곳은 최근 컴퓨터를 이용해서 새로운 아동영화를 제작하는 중이다. 이 제작소에 대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에서 직접 기자들이 취재하기도 했다. 평양아동영화제작소는 평양 대동강 구(區)에 있다. 아동영화 "령리한 너구리"는 199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애니메이션박람회에서 우수상을 획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옥류관 음식은 평양냉면 (平壤冷麵)이나 조선인삼 (朝鮮人參)이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식당은 옥류관과 청류관, 평양메기탕집, 평양숭어국집 등이 있는데, 평양냉면과 평양온반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이다. 옥류관은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6.15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녁만찬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주 개를 잡아먹지 않으나,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락랑구역의 평양단고기집과 중구역의 고려단고기집이 있다. (보신탕을 단고기로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요리사에게 단고기로 부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난을 타파하고, 외화를 모으기 위해 해외에서 소수의 식당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계가 제일 많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당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해외의 식당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온 유학생이나 국내의 요리사들이 직접 그 식당에 가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식당들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주한 재중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손님들이 적은 편이다(대표적인 해외 식당은 "해당화"와 "목란관"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심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만든 김치를 파는 "평양김치대리소"라는 가게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부의 배급제도가 의생활에도 적용되었다.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되던 때에는 대다수 주민들이 인민반에서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카드를 제시해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 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의복 배급은 식량 배급보다 먼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옷감을 구한다. 작업복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과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여성은 양복이나 치마같은 것들이 많이 발전했고 머리모양도 파마를 하는 등 외국 문화를 따라갔다. 최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경공업분야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근시기 질좋은 경공업제품을 만들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갖추어졌다”며 평양양말공장, 신의주방직공장, 보통강신발공장, 평양방직공장 등을 예시했다. 또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나서는 모습까지 포착되면서 직물생산은 더욱 활기를 띄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록된 고구려 고분군이 평양직할시와 남포특급시(평안남도)에 있다. 이 유적은,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 (WHC)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세계 유산으로서 등록되었다. 고구려 고분군은, 선명한 벽화 고분을 포함하는 63기의 고분에서, 벽화는, 일본의 다카마쓰쓰가 (高松塚) 고분 이나 키토라 고분 벽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덧붙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 도 동시에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년간의 취학전 교육인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으며, 한국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소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 합계 12년간의 의무교육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유치원은 높은 반과 낮은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높은 반부터는 12년제 의무교육과정에 포함된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0~35,000개의 유치원과 탁아소가 있고, 약 2,500개의 고급중학교, 2,500여개 초급중학교와 5,000여 개의 소학교가 운영된다. 또한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서 약 1,00개의 분교가 운영하고 있다. 12년제 의무교육 체제에 따라 교육기관은 모두 정부가 운영한다. 그러나 유치원과 탁아소의 경우는 학교와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다. 탁아소의 경우 미혼모가 낳은 사생아도 관리되는데 이러한 사생아들은 국가에서 그 목숨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들을 혁명전사로서 활용한다. 고등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반면 대학의 경우 상위 25~30%의 인원만 입학이 가능하며 교육비는 모두 국가가 지급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토플 응시자 평균점수는 2006년의 경우 120점 만점에 평균 69점으로, 대한민국의 72점, 일본의 65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 학생들의 지능 선발 및 교육을 위해 과외 교육 기관인 학생소년궁전과 학생소년회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기관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운영되며, 평양직할시와 지방을 통틀어 약 2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면 대부분 이곳에 가서 오후 5시까지 과외 학습을 받고 하교한다. 평양직할시의 학생소년궁전은 대표적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다. 그중에서 평양학생소년궁전은 김일성 주석에 의하여 1965년에 세워지고, 평양시 중구역에 있다. 두 번째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1988년에 세워져 현재 만경대구역에 있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은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탑식으로 건설되어 있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 곡선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 외에 평양시 승호구역에 승호학생소년회관이 있고, 자강도에는 배움의 천리길 학생소년궁전과 평안북도 정주시에 정주학생소년회관, 그리고 황해북도 개성시에 개성학생소년궁전과 량강도 삼지연지구에 삼지연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고등교육의 중심 기관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1946년 창립)이며, 이 외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있다. 대학교는 약 280여 곳이 있으며 30만 명 이상이 배우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교 목록 참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과사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검열 적화통일 한반도 평화협정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대북송금 문제 개인숭배 벼랑끝 전술 이북5도위원회 알레한드로 페레스 *참고(숭대시보-북한의 선거제도와 의미, 무엇이 다른가?)http://www.s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153 *참고(대한지방자치학회 -통일한국의 선거제도에 관한 연구,제15권 제3호 통권44호p.299-326)https://www.earticle.net/Article/A206388 *참고(국민대 법학과-한국통일에 있어서 정당의 역할 및 제도 연구 동서독 간의 선거조약과 관련하여,한국교육학술정보원)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53804051 ,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 a554bf239c1d0c50ffe0bdc3ef48d419&outLink=N - 정부 공식 홈페이지(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북한편)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Official Homepage -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North Korea) - 정부 공식 홈페이지(2) 조선엑스포 내나라 사이트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 우리민족끼리 트위터 조선 통신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국영 통신사 조선의 오늘 - 관광안내 전문 사이트 김일성종합대학 -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통일방송 CIA - The World Factbook Korea, North CIA의 데이터 일본 외무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보 데일리 NK Images of North Kor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진 Musicals and Dramatic People 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Today The Daily NK 론리플래닛의 정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 북한전략연구 -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타 Foreign investment in North Kor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동영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분류:1948년 설립 분류:분단된 지역 분류:일본의 옛 식민지 분류:한국어권 분류:유엔 회원국 |
북위 38도 (北緯三十八度)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8도를 지나는 위선이다.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 태평양, 북아메리카, 대서양을 지난다. 특히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나며,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8선 (삼팔선, 三八線)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그은 군사분계선이다.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초안 1945년 7월에 미국 육군부(현재의 미국 국방부) 작전국(OPD)에서 처음으로 연합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미국이 경기도 · 강원도(함경남도 원산, 안변 포함) · 충청북도 · 경상남북도를, 소련이 함경남북도(원산·안변 제외)를, 영국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중화민국이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미국 합동전쟁계획위원회의 초안 1945년 8월 미국 합동참모본부 내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는 일본 주요 열도와 한국에 대한 연합국 관리 및 점령군 계획(JWPC385/1) 에서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대한 4국 분할점령 계획을 작성했다. 미국, 소련, 영국, 중화민국 4개국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서울, 청진, 원산, 평양, 군산, 제주 등 주요 전략지점에 연합군을 주둔시키고, 이후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한반도를 분할관리한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하지만 9월 22일 작성된 수정안 JWPC385/5 에서는 38도선 분할이 확실시되어 영국과 중화민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소련 양국의 분할점령안으로 바뀌었다. JWPC385/1 은 현실적으로 군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미국 군부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3부 조정위원회의 최종안 삼팔선 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 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한반도의 분할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해주항이 위치한 해주시의 룡당포(龍塘浦)는 38도선 이남이지만, 미·소군정은 이를 38선 이북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연천군을 파주군에, 양구군을 춘천군에, 인제군을 홍천군에, 양양군을 강릉군에 편입하고, 벽성군은 해주시의 서쪽 지역을 옹진군에, 동쪽 지역을 연백군에 편입시켰다. 소련군정은 38도선 이북의 춘천군 사내면(가평군 포함)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고, 개풍군과 장단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장풍군으로 통합하였으며, 옹진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벽성군에 편입하였다. 또, 포천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영평군으로 개칭하여 관리하다가 1946년 12월에 철원군에 편입하였다. 삼팔선과 현재의 군사분계선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38선과 비교해 서쪽 경계가 남하하였고 동쪽 경계가 북상하였다. 이에 따라 38선 서남쪽의 황해도 옹진군·연백군과 경기도 개성시·개풍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38선 동북쪽의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양양군·고성군은 대한민국에 속하게 되었다. 38선(1945.9.2 - 1950.6.25)과 현재의 군사분계선(1953.7.27 - )은 다르지만,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고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을 삼팔선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도 38선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홍천군 내면은 38선 분단에 따라 변경된 행정 구역이 유지되고 있고, 북위 38도선 이북인 화천군 사내면과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는 38선에 의한 분단 이전과 다른 행정 구역에 속해 있다. 본초 자오선에서 동쪽 방향으로 다음 지역을 지난다. 좌표 나라, 지역, 바다 비고 지중해 의 마레티모 섬 바로 북쪽을 지난다. 레반초 섬과 시칠리아 섬 지중해 메시나 해협 지중해 이오니아 해 - 의 케팔로니아 섬과 자킨토스 섬 사이를 지난다. 수도인 아테네를 지난다.약-4 km 에게 해 페탈리오이 섬과 에비아 섬 에게 해 의 안드로스 섬 바로 북쪽을 지난다. 카스피 해 아시가바트 바로 북쪽을 지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칭하이 성 간쑤 성 내몽골 자치구 닝샤 후이족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산시 성 (섬서성) − 약 5 km 내몽골 자치구 − 약 14 km 산시 성 (섬서성) 산시 성 (산서성) — 타이위안 시 바로 북쪽을 지난다. 허베이 성 — 스자좡 시 바로 남쪽을 지난다. 산둥 성 황해 의 백령도 바로 북쪽을 지난다. 황해남도(옹진반도) — 옹진군, 강령군 황해 옹진만 황해남도 — 해주시, 청단군, 연안군, 배천군황해북도 — 개풍군, 개성시, 장풍군 경기도 — 연천군, 파주시, 포천시, 가평군 강원도 — 화천군, 춘천시, 인제군, 양양군 동해 사도가 섬:— 니가타현 동해 혼슈 섬:— 니가타 현— 야마가타현— 미야기현 태평양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유타주 콜로라도주 캔자스주 미주리주 일리노이주 인디애나주 켄터키주 웨스트버지니아주 버지니아주 체서피크 만 메릴랜드주 버지니아주 대서양 아소르스 제도의 피쿠 섬과 상미겔 섬 사이를 지난다. 세투발 현 베자 현 - 베자 바로 남쪽을 지난다. 안달루시아 지방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안달루시아 지방 무르시아 지방 - 무르시아 바로 북쪽을 지난다. 발렌시아 지방 지중해 북위 37도 북위 39도 분류:위선 분류:남북 관계 분류:한국 전쟁 |
230px 모뎀 (은 정보 전달(주로 디지털 정보)을 위해 신호를 변조하여 송신하고 수신측에서 원래의 신호로 복구하기 위해 복조하는 장치를 말한다. 주로 컴퓨터 정보통신을 위한 주변장치로 많이 사용한다. 변조를 하는 이유는 전송선에 디지털 신호를 바로 보내면 신호 전달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같은 비트로 연속되면 전송특성상 신호 전달에 문제가 발생하므로 전송선의 특성에 맞추어 변조한다. 모뎀은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의 일종으로 컴퓨터의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어 전송하고,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 디지털 신호로 읽어낸다. 좁은 의미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전화선을 이어주는 주변장치이다. 초기 모뎀은 주로 전화선을 통한 데이터 전송을 위해 사용하였다. 개인이 사용하는 인터넷망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개인이 통신망에 접속하는 것이 비용측면에서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망을 통해 개인컴퓨터와 서버와의 통신을 하게 되었다. 개인 컴퓨터와 서버 간에, 개인 인증과 망 접속을 위해 PPP프로토콜을 통해 접속한다. 하이텔 같은 망이 대표적이다. 초기 모뎀이 전화망을 통해 전송되기 때문에 주파수가 제한된다. 따라서 전송 속도에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망은 음성을 전달하는 망이긴 하나, 가청 주파수 전체를 전달하지 않고 음성의 일부 주파수만 전송한다. 모뎀의 속도는 BPS로 나타내고 초당 비트 수를 의미한다. 한글 한 문자가 2바이트(16비트)로 되어 있으므로, 16BPS는 초당 한 글자를 전송하는 속도이다. 일반 음성 회선으로는 1990년대에 PC통신용으로 널리 쓰였다. 속도는 300, 600, 1200, 2400, 4800, 9600, 14400, 19200, 28800, 33600, 38400, 56000 bps가 있었다. 초기에는 컴퓨터와 아마추어 무선의 무전기(RIG)를 연결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선 모뎀이 있었다. 여기에는 간단한 저장 장치가 있어,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편지 등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1990년대 말에 들어와서는 휴대폰을 통한 자료 전송이 가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무선 인터넷이 도입되어 무선 모뎀을 사용하면 액세스 포인트 근처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이는 FM 진동수 대역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DSL용 모뎀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의 회선을 이용하는 HFC 방식의 동축 케이블, 광 섬유 케이블 방식의 FTTH 모뎀도 개발되어, 2000년대에 기존의 전화선을 통해서 초고속 인터넷을 값싸게 공급하는 주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재 인터넷의 속도는 수 MBPS에서 수십 MBPS에 이른다. 전화 접속 Hayes-compatible Modems and AT Commands from the Serial Data Communications Programming Wikibook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 ITU Data communication over the telephone network – no longer available, archived version Basic handshakes & modulations – V.22, V.22bis, V.32 and V.34 handshakes Getting connected a history of modems – techradar Data/FAX Modem Transmission Modulation Systems – baud rates and modulation schemes 분류:컴퓨터 통신 분류:컴퓨터 주변기기 분류:물리 계층 프로토콜 |
오픈 소스 (open source는 소프트웨어 혹은 하드웨어의 제작자의 권리를 지키면서 원시 코드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소프트웨어 혹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에 준하는 모든 통칭을 일컫는다. 어원에 대해서는 History of the OSI 자료에 따르면, 1998년 2월 3일에 넷스케이프 브라우저의 원시 코드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 공개할까하는 전략회의에서 붙여진 새로운 용어라고 설명되어 있다. 소스 코드를 공개한다고 해서 모두 오픈 소스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는 전체 비율로 보았을 때 극소수의 고객(주로 정부나 거대 다국적 기업 또는 대학교 및 연구소)들에게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소스를 공개했다. 오로지 보안 유지를 위해서만 소스를 직접 수정할 수 있으며, 그 수정본을 재배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것은 오픈 소스의 의의에 어긋나므로 이러한 경우는 오픈 소스라 부르지 않는다. 광의의 의미로는 이렇게 원래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유래했지만 현재에는 오픈 소스 방식이라고 칭하는 가치들인 공동참여,오픈교환,투명성등을 두루 일컫는 개념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방식을 일부분으로 포함 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목표로 표방하는 행위까지로 넓혀져 가고 있다.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을 컨트리뷰션이라고 한다. 버그 수정, 기능 추가, 소스 코드 수정, 코드 테스트와 같은 중요한 활동 이외에도, 오타 수정, 번역, 가이드 문서 작성, 디자인 작업, 의견 제시와 같은 사소한 활동도 컨트리뷰션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컨트리뷰션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사용하던 오픈소스를 개선한 경우 자신만 사용하면 버전업이 될 때마다 추가로 패치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컨트리뷰션을 한다. 둘째로 개인의 개발 실력 향상과 영어능력 향상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오픈소스 커뮤니티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 특히 개발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셋째로 오픈소스 활동은 공개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구직 활동 시 자신의 이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명성을 높이려고 기여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기여를 한다. 대부분 오픈소스 프로젝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사용자 컨트리뷰터 컨트리뷰션을 하는 모든 사람들 커미터 컨트리뷰션 내용을 리뷰하고 프로젝트에 반영할지 결정하는 사람. 없는 경우도 있음. 메인테이너 프로젝트 방향 설정, 관리하는 사람. 보통 커미터 중 일부가 맡으며, 없는 경우도 있음 저작자 프로젝트 만든 사람 또는 조직 이미 있는 오픈소스를 포크하여 새 프로젝트가 만들어지는 경우, 라이선스때문에 공개해야함 소프트웨어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외부 개발자들이 참여하도록 하면 더 다양한 환경에서 소프트웨어를 시험해보고 품질을 높일 수 있음. 사회 공헌을 위해. 프로그램의 신뢰성을 보장하는 방법이 될수있다. 이용에 비용이 들지 않거나 적다. 원하는 대로 변형 가능 보안 취약점이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오픈소스가 보안 측면에서 더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버그를 고칠 수 있다. 특정 벤더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비숙련 사용자들은 사용이 어렵다. 이미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가 있는 경우 호환성 문제가 발생 고객지원이 불리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패키지 목록 오픈 폰트 라이선스 SPARC -공개 CPU 아키텍처 RISC-V -버클리대학교 공개 CPU 아키텍처 비글보드 - 초소형(싱글보드) 컴퓨터 마더 보드 바나나 파이- 싱글보드 컴퓨터 마더보드 GP32, GP2X(F100, F200, Wiz) 판도라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오픈소스하드웨어 단체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 모질라 파이썬 레드햇- 오픈 소스란? 테슬라- "기술의 우수성을 증명하는것은 특허가 아닙니다." 구글 OSI-오픈 소스 이니셔티브 리누스 토발즈 리처드 스톨만 빌 조이 에릭 레이먼드 미겔 데 이카사 (Miguel de Icaza) 협업 팀워크 오픈 소스의 정의 공유 리더십( Shared leadership, 수평적 리더십) 자유 소프트웨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오픈 소스 라이선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자비로운 종신독재자(BDFL) 사유 소프트웨어 오픈 소스 라이선스 가이드 삼성전자 뉴스룸 - 소프트웨어도 맞들면 낫다? 갈수록 힘 얻는 ‘오픈소스’ 이야기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사회적 정보 처리 |
오일러 ϕ 함수의 그래프. ϕ(1)부터 ϕ(1000)까지의 값들을 나타낸다. 수론에서, 오일러 피 함수 (Eulerϕ函數는 정수환의 몫환의 가역원을 세는 함수이다. 즉, n 이 양의 정수일 때, ϕ( n )은 n 과 서로소인 1부터 n 까지의 정수의 개수와 같다. 예를 들어, 1부터 6까지의 정수 가운데 1, 5 둘만 6과 서로소이므로, ϕ(6) = 2이다. 1부터 10까지의 정수는 모두 11과 서로소이며, 1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가 아니므로, ϕ(11) 1이다. 양의 정수 의 오일러 피 함수 값 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여기서 은 몫환 의 가역원군이며, 는 최대 공약수이다. 1부터 80까지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다음과 같다. n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ϕ( n ) 1 1 2 2 4 2 6 4 6 4 10 4 12 6 8 8 16 6 18 8 n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ϕ( n ) 12 10 22 8 20 12 18 12 28 8 30 16 20 16 24 12 36 18 24 16 n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ϕ( n ) 40 12 42 20 24 22 46 16 42 20 32 24 52 18 40 24 36 28 58 16 n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ϕ( n ) 60 30 36 32 48 20 66 32 44 24 70 24 72 36 40 36 60 24 78 32 오일러 피 함수는 곱셈적 함수다. 즉, 만약 두 정수 이 서로소라면, 다음이 성립한다.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소인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이를 오일러 곱 공식 ()이라고 한다. 특히, 소수 의 거듭제곱 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이다. 특히 소수 의 경우 이다. 오일러 피 함수를 통해 항등 함수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증명하였다. 또한,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만약 양의 정수 이 서로소라면, 다음과 같은 합동식이 성립한다. 이를 오일러의 정리라고 한다. 오일러 피 함수는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군론에서는 순환군 의 가능한 생성원(generator)의 수는 이다. 이는 과 서로소인 임의의 수를 사용하여 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 n 각형이 작도 가능한 다각형인지, 즉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할 수 있는지는 이 2의 거듭제곱수인지와 동치이다. 즉, n = 2, 3, 4, 5, 6, 8, 10, … 이라면 = 1, 2, 2, 4, 2, 4, 4, … 이므로 정 n 각형을 작도할 수 있지만, 다른 값의 경우에는 작도할 수 없다. 특히, n 이 소수인 경우를 페르마 소수라고 한다. 오일러 피 함수는 암호학의 RSA 암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페르마의 소정리 조르당 피 함수 카마이클 피 함수 토션트 합 함수 분류:수론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
테레사 수녀 (,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는 인도의 수녀로, 1950년에 인도의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라는 천주교 계통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45년간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인도와 다른 나라들에서 헌신하였다.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 ()이다. 2016년 9월 4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70년대를 통해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 인도의 가장 높은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확장하여 그녀가 사망할 무렵에는 나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거처,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가 있었다. 그녀는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어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1910년에 오스만 제국령 북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1919년 시 의원 자격으로 정치 행사에 참가했다가 의문사하였다. 1928년에 아일랜드의 라스판햄으로 이주하여,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었고, 테레사로 개명하였다. 그 이후 인도로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로 이주하였다. 1947년, 인도 자치령이 독립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국호를 결정하자, 인도에 귀화하였고, 로마 가톨릭 계열의 선교 단체를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1952년에 8월 22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 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 Place of Pure Heart , 의 번역)로 불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개설하였고, 이때 테레사 수녀는 당시 콜카타 시청 측에서 제공한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 건물은 칼리 신전 뒤에 있는 건물이었으며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건물이 사용하기 편리했으므로 기꺼이 사용을 마음먹었다. 당시 힌두교도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건물을 이용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종교에 구애없이 복지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1955년에는 9월 23일 "때의 집"(시슈 브하반)이란 이름의 어린이 보호시설을 개설하였고, 1958년에는 이 시설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냈으며, 어린이들의 집에서는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았으며, 해외로 입양되었다. 갓난 아기는 로마 가톨릭 교도인 것을 알 수 있을 때만 세례를 주었다. 1968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커뮤니티인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를 개설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결과로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캘커타에서 8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Reagan presents Mother Teresa with the Medal of Freedom 1985.jpg|300px|섬네일|미국의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의 메달을 수여하는 모습 (1985년) 1980년 바라트 라트나(BR) 수훈. 1983년 영국 명예 메리트 훈장(honorary OM) 수훈. 1997년 9월 5일 캘커타에서 사망. 9월 13일 인도 국장으로 장례.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녀 반열에 오름. 2016년 9월 4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성녀 반열에 오름. 테레사 수녀는 부자들의 성녀라는 비평을 받았다. 《마더 테레사, 부자들의 성녀》라는 책에서는 테레사 수녀는 사회적 모순과 불의가 원인인, 사회문제로 보아야 할 가난을 하늘의 뜻이라며 왜곡하여 캘커타 민중들의 계급투쟁 전통을 방해했으며, 해방신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인 변화 같은 진보적인 신학들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부자들에게는 인도주의자, 박애주의자라는 찬양을, 민중들에게는 부자들의 성녀라는 냉소를 받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녀의 행적보다는 로마 가톨릭 자체의 보수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 바 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는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빈민 구제 활동에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는 그의 저서 《자비를 팔다》에서 테레사 수녀의 비리를 폭로했다. 히친스는 이 책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정치와 성녀 만들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 현상의 정치적인 면모를 파헤치며, 마더 테레사는 정치화한 교황 체제가 파견한 종교사업가라고 주장한다.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선교회 가 보여준 가난에 대한 방관적 태도, 기부금에 대한 불투명한 출처와 사용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 그리고 테레사 수녀가 결코 성녀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선전을 주도하는 인물이었다고 비판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매우 강경한 반종교주의자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을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반박하는 의견도 많이 나왔다. 테레사 수녀는 정치에 상당히 무지하였기 때문에 아이티의 독재자인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그의 아들인 장클로드 뒤발리에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분류:1910년 태어남 분류:1997년 죽음 분류:인도의 종교인 분류:북마케도니아의 로마 가톨릭 수녀 분류:인도의 로마 가톨릭 수녀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자 분류:인도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여자 노벨상 수상자 분류:막사이사이상 수상자 분류:알바니아계 인도인 분류:알바니아계 북마케도니아인 분류:북마케도니아계 인도인 분류:스코페 출신 분류:로마 가톨릭 성인 분류:인도의 로마 가톨릭 성인 분류:교황 프란치스코가 시성한 성인 분류: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한 복자 분류:알바니아의 로마 가톨릭 수녀 분류:다르질링 출신 |
윤보선 (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나왔다. 영국이 국왕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인 관계로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할때까지 에딘버러가 배출한 두 명의 대통령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친일파인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 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 (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 영국 신사 , 재야 대통령 으로도 불렸다. 종조부 윤웅렬(왼편 담배 피우는 이) 해위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1리 새말부락에서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봉하(李鳳夏))의 장녀인 이범숙(李範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였고,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은 당대의 고관이었다. 대한제국 시대 말기 개혁자 윤치호는 윤웅렬의 아들로 그의 당숙이었다. 좌옹 윤치호 윤보선의 10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선조 때의 형제 재상이었다. 9대조 윤흔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로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7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6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가계는 몰락하여 5대조 윤발(尹潑, 1728~1798)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고 사후에 증직으로 증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이 최종 관직이었고 사후에 증 이조참의와 증 의정부공찬에 거듭 추증된다. 그러나 윤득실이 일찍 사망하여 형제들은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윤보선의 증조부였던 윤취동의 대에 농토를 마련해 부농이 되고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종조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조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고, 당숙 윤치호가 다시 대한제국에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다시 가계를 일으킨 조부 대에 100칸의 집을 마련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윤치영이 태어났는데,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이범숙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 Bo-seon s parents-01.PNG|섬네일|right|200px|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 스스로 회고하였다. 그가 어려서 자란 안국동의 자택 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5월 16일 조부 윤영렬과 조모 한진숙의 회혼례식 사진 윤보선은 3백 석 이상을 걷는 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한 윤보선의 집은 증조할아버지 윤취동 이후 다시 아버지 윤치소가 이재와 수완에 밝아 대농토를 꾸렸다. 큰아버지 윤치오가 친구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막대한 빚을 졌지만, 아버지 윤치소의 재력으로 그의 집안은 거지가 되는 것을 면하였다. 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였던 그는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 을 기억하였다. 그 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이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총명하고 명석했던 그는 한편으로 아쉬울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성격적으로 다소 고집이 센 측면도 갖게 되었다. Chi-Yeong 1935.PNG|섬네일|140px|왼쪽|숙부이자 어린시절 친구인 윤치영(그러나 윤치영은 이승만의 측근이 되면서 그와 정치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충청남도 아산 향리에서 지내던 윤보선 그는 을사늑약 체결 사건 직후 한성부로 본격 이사하였는데 10세 때 집 근처에 있었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이 일어났을 때는 스스로 작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염려하게 하였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한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한일합방 후 귀국해서 1년간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고 철학박사라는 점에 이끌려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나 1950년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당색으로는 서인과 노론 계열이었는데, 서얼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윤치소나 조부 윤영렬로부터 가계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훈육받고 자란 그는, 양반가의 후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출소학교 5학년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 시절의 윤보선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1913년 윤보선은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스키치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 그는 게이오 의숙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2학기를 배우고 그만두었다. 모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토 히로유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던 그는 신념적으로 반일주의자, 반사회진화론 주장자가 되었다. 또한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사상은 비인간적인 견해라며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군주나 통치자가 아버지이고 백성, 국민은 자녀라는 주장에도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1913년 일본 정칙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그해 말 일본 게이오 의숙 의학부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드러내놓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학창시절의 그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15년말 게이오 의숙 2학년을 중퇴하고 부산항을 통해 되돌아왔다. 그는 어렵지 않은 유학생활을 하였다. 집에서 월 25원의 학비를 부쳐오므로 학업에 별다른 곤란은 없었으나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학업에 정진하기 힘들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고 한다. 귀국이후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는 신문에서 신해혁명 관련 기사를 찾아서 읽곤 했다. 그는 여운형을 만났는데,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려 하는 청년들을 중국으로 비밀리에 망명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집안에서 안다면 반대를 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며 자금을 모았다. 바로 상하이로 가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면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그는 아버지 윤치소에게 미국으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근처에 사는 어느 양반가의 자제도 기독교 집안이 된 뒤,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목사가 된 것을 그의 부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그에게 상하이로 갈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 가고자 희망할 때 중화민국에 있던 여운형이 귀국하였다. 그는 청년회관을 통해 여운형의 소재지를 파악, 그가 머무르고 있던 한성은행 사무원의 집을 찾아가 중국으로 갈 의향을 밝혔다. 그의 뜻을 들은 여운형은 윤보선의 망명을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혁명을 하러 상하이로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 윤치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신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 아버지 윤치소의 친구들 중에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목사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는 아들이 같은 과정으로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여권을 얻기 위해 상해를 경유해 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들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 이후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는 배편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가 출국한 뒤에야 그의 집안에서는 윤보선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승만이 궤변으로 그를 현혹하여 버려놓았다며 원망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당숙 윤치호, 아버지 윤치소, 백부 윤치오 등은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는데, 그가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에야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게 된다.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21.jpg|250px|right|섬네일|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스승인 신규식 1917년봄 상하이 도착 후 며칠뒤 항주에 요양중인 신규식을 찾아 갔다. 이후 신석우, 박찬익, 이시영, 이동녕 등 임정 요인들을 찾아가 다시 이들의 소개로 중국혁명의 중진들을 소개받았다. 상하이의 중국인 강도와 조선인 강도들의 존재를 염려한 신규식은 자신의 집, 상하이 시 어양리 5호에 있는 집 2층 다락방을 마련하여 그의 거처로 주었다. 1921년 영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 어양리 다락방에서 생활하였다. 1917년 신규식이 1912년에 설립한 신아동제사의 회원이 되었다. 이어 신규식, 김규식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淸年黨)에도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3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다. 당시 의정원 규약에는 만 23세 이상의 한국인 남녀는 의정원 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다 고 규정했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는 것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규식, 김규식, 여운형 등은 나이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그의 의정원 의원 피선거권을 관철시켰고, 심사 끝에 그는 경기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21세로 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19년 여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지시를 받고 국내 잠입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규식은 국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윤치소 등에게 자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띄웠고, 이들은 윤보선의 동생 윤완선 등에게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나, 노선을 바꾸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하기 직전 그는 중국 법무장관 서겸(徐謙)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서겸의 조카이자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변장 후 일본 경찰들을 피해 배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 국내에 잠입하면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국내로 잠입한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후 윤보선은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자금 조달 중책을 맡고 일단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차림새가 너무도 말쑥한 신사였다 고 한다. 윤치영이 도쿄 YMCA 회관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데 누가 찾는다고 해서 나가 보니 해위가 정말 말쑥하게 영국신사처럼 쏙 빼입고 거기 섰더라는 것이다. 그때 윤치영은 그곳에 있던 몇 사람과 2.8 동지회를 구성 해서 활동하였다. 2.8 독립 선언에 가담한 일로 윤치영은 일본 경시청의 감시를 받던 때인데 그렇게 정정당당히 나타나 너무나 놀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 걱정 마시라는 표정으로 빙끗 웃으며 들어와서는 포켓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주는데 그 때 중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서겸(徐謙)의 서한이었다고 한다. 서겸은 당시 중국 혁명정부의 법무부장관을 지냈는데 주일중국대사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사람은 내 조카인데 볼 일이 있어 일본으로 보내니 모든 여행길에 편리를 도와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그곳에서 공부하던 집안 사람들은 모두 떨었다고 한다. 윤일선 박사, 동생 윤완선 등도 교토에서 올라왔는데 일단 윤보선이 오라 해서 왔지만 그들도 떨었다고 한다. 그 때 윤완선은 형의 전갈을 들고 한국으로 들어가 부모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때 돈 삼천원을 마련해 와 윤보선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해위는 동생에게서 돈 삼천원을 받아 들고 다시 상해로 가서 이승만 박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경에 있는 백관수, 유억겸, 김준연, 김도연 등을 만나고 윤치영과도 만났다. 이들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자금을 싣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다시 피선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 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신규식, 이시영, 신익희 등의 충고로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 체류 중 신규식은 그에게 해위 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신규식이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준 것은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1920년 10월부터는 신규식이 1917년부터 창간하던 주간잡지 《진단》지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진단에는 장졔스, 쑨원, 천두슈 등 중국 명사들의 칼럼과 논문, 기행문 등도 수시로 발표되었다. 영국 출국 전까지 신규식의 진단지 발간과 편집일도 도와주었다. 1921년 6월 고국에 들러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영국으로 간다. 뒤에 그는 스승 신규식과 인척이 되는데, 이는 신규식의 아들 신준호와 그의 둘째 딸 윤완희의 결혼으로 사돈이 된다. 신규식의 딸 신명호는 다시 독립운동가인 민필호와 결혼하여 후일 민필호, 김준엽 등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에든버러.jpg|썸네일|오른쪽|180px|에든버러 대학 재학 중(1920년대)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3등 선실에 숨어서 42일만에 마르세유에서 하선,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탑승했다. 이후 정기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는 의학공부 중인 그의 당숙 윤치왕이 와 있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하물표를 발급받으려다가 거절당하고, 당숙 윤치왕(尹致旺)을 만나 영국에 도착했다. 당숙인 윤치왕이 공부하던 영국에서 체류하며 우드블록 대학에서 약 1년동안 영문학을 공부하고 중퇴하였다. 그 뒤 영국 글래스고의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버밍엄으로 건너가 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후 다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3개월간 수학하다가 다시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겼다.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선택·전공하였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 보다는 순수과학일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재학 중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려 2년간 병중에 있었다. 의사는 절대휴양을 위해 귀국을 처방하였으나,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으로 귀국권유를 사양했다. 이후 병으로 2년간 휴학하였다. 병으로 2년간 휴학한 기간을 합쳐 6년 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이후에도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하여 구주를 순방하였다. 대학재학 중 3년간 한반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수학하였으나 일본인 학생들의 접근을 피하고 멀리하였다. 영국 체류 중 그는 꾸준히 기금을 마련하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구미위원부로 100불씩 송금했다가 일본 경찰의 첩보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외 유학생 신분이었고 일본 조계나 일본 영사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으므로, 일본 경찰 역시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없었다. 윤보선은 신앙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해야 하느냐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를 구원해야 하느냐를 두고 오래 고민하였다. 결론은 신앙이 사회를 구원하여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는 적극 참여해서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윤보선은 영국의 대학과 석사학위 과정을 배우면서 정치인들과도 어울려서 지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거나 맡겨진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를 밥먹듯 했다. 에든버러 대학 유학 시절 6~7명의 일본인 유학생들과는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인들과는 대화 한마디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귀국 직후의 윤보선 윤보선은 1930년 12월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독립운동의 장소로 미국과 중국 상하이를 고민하던 중 졸업했으니 집에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집에는 졸업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 2년간 머물렀던 장덕수가 귀국후 윤보선 댁에 들러 아버지 윤치소에게 그의 졸업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아버지 윤치소를 비롯하여 문중에서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후 조선총독부 왜경으로부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집에서는 여비를 보내며 귀국을 독촉하였고, 귀국하기 싫어했던 그는 귀국 대신 구주 여행을 떠났다. 두 번째 여비를 발송했을 때도 유럽여행을 하다가 세 번째 여비와 함께 부자지정을 생각해 다시 여비를 보내나 다음에는 보내지 않는다 는 최후통첩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에 귀국했다. Chi-ho s Family 02.png|섬네일|right|300px|어머니 이범숙의 회갑연(1936년),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가 윤보선, 넷째 줄 가운데는 당숙 윤치호, 셋째 줄 가운데는 아버지 윤치소, 그 옆은 할머니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어머니 이범숙,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종형 윤영선, 오른쪽 끝은 숙부 윤치영 유학 6년 만인 1932년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부산역에 도착한 후, 안내원의 소개로 여관을 잡게 되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안내원의 집안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묵게 되었다. 당일 서울로 도착전보를 보내자,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딸 완구(玩求), 완희(玩姬) 등이 부산까지 내려왔다.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 그의 생활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한동안 몇몇 신뢰 가능한 지인들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로 방문, 이승만을 간간히 만나곤 했다 한다. 1937년 아내 여흥 민씨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10년 이상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1936년 어머니 이범숙의 환갑연을 기념하여 당숙 윤치호가 세운 신항리 감리교회에 특별히 1500원을 헌금하여 교회를 개축하게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감리교 신자임을 들어 참배를 거부했다. 1938년 5월에는 월성소학교에 평당 시가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에 칼럼, 기고문 발표 등으로 소일하였다. Chi-ho s Family-01.jpg|섬네일|right|300px|문중 회의에 참석한 윤보선과 윤치호(1943년), 세 번째 줄 왼쪽 끝 도포를 입은 이가 윤치호, 윤치호와 여성 사이로 보이는 네 번째 줄 왼쪽 끝 양복을 입은 남자가 윤보선 윤보선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이후 그는 외부출입을 줄이고 가택에 칩거생활하였다. 때로는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별장에 내려가서 지내기도 했다. 미니 골프장을 갖추고 석왕사(釋王寺)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 별장은 은둔하기에 너무나 좋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는 성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부친과 숙부들의 설득에도 고집을 부렸던 그는, 당시 그는 아내와도 사별한 상태였고 딸만 두 명 있었으므로 자녀들에게 가해질 불이익 같은 것에 쉽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1943년 2월 폐렴(肺炎)을 앓았다. 부친상 직전 아버지 윤치소가 있는 사랑방이 추운가 하는 걱정으로 야밤에 일어나 부엌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오한을 느낀 것이 그대로 폐렴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엽권연을 입에 물고 있다시피 할 정도로 애연가였다. 그러나 폐렴을 계기로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뒤 담배를 꼭 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는 금연을 하였다. 1942년 이후 숙부 윤치영이나 송진우, 김성수 등으로부터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접하였으나 그는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문중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거절했던 그는 바깥 출입으로는 기독교 선교 활동과 강연, 문중 종친회 관련 행사 이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철원군 어운면 월성리의 월성소학교에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후반 그는 집안에 칩거하면서 함경남도 안변군 사기리에 있는 문중의 별장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당숙 윤치호 1945년 8월 16일 그는 이인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국민당은 다시 원세훈의 고려민주당과 통합해 조선민족당이 되고 9월에 조직된 한국민주당에 흡수된다. 한편 그는 상하이에서 본 천두슈계의 중국 공산당을 목격한 적이 있어 평등주의와 폭력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1945년 8월 8·15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숙부 윤치영이나 부친 윤치소, 당숙 윤치호 등과는 달리 그는 친일경력도 없고 영어에 능통한데다가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정치에 투신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후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 참배령에 불응하는 등의 행동으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1945년 9월 송진우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위촉되어 임시정부 환영대회 개최 및 장소, 비용 부담 등에 참여하였다. 이에 1945년 9월 16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은 집과 기타 비용을 제공했고, 한민당의 회합은 윤보선의 집에서 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였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안동궁(安東宮) 또는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한민당 총무 선출에서 떨어지자 한민당은 그를 한민당 서울시지구당을 맡겼다. 이후 그는 한민당 중앙집행위원과 한민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45년 10월 미군의 한반도 상륙 뒤에는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직을 지냈다. 동시에 미군정청 행정자문위원과 미군정청 금융경제위원회의 고문도 겸직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초대 당수 송진우 9월 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개설하자, 그는 국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 9일 그의 5촌 당숙 좌옹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려 심한 비판 끝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도 아니었고 문중에서 창씨개명 할 당시 창씨개명하지 않았으며, 임시의정원과 임정에도 참여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12월 30일 송진우 피살 소식을 듣고, 그는 아침 6시경 제일 먼저 송진우의 원서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그 뒤 김구, 김성수 등의 주도로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소극적으로나마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였다. 5월 27일에는 한민당 지역유세대 조직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일대를 다녔다. 1946년 6월 15일 저녁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을 맡았고, 미군정청에서 임명한 경기도지사 고문직에 피선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에 지명되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지도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2월 4일에는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정부로 개편되자 남조선과도정부 농림부, 상공부 고문이 되었다. 1947년에는 우남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서정주 등과 함께 이승만 일대기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어떤 직위로든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보선은 사회단체 활동과 민중일보 사장직으로 만족하겠다며 번번이 사양하였다. 7월 4일 이용설 등과 함께 외국의 정세를 연구하는 국제정세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부터 1948년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영국 유학 경력을 인정받아 10월 8일에는 영국과의 친선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영협회(韓英協會)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1948년까지 재직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바로 빈소로 찾아갔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12월 13일에는 유엔 한국파견위원단(UN한위) 환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어 유엔의 한국위원회 위원들의 영접을 준비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 김구, 프란체스카 도너, 김병로, 엄항섭 등과 함께 회의에 참관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노선을 줄곧 지지해왔다. 19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타났을 때 그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다. 그 해 2월에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사실상의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단체를 조직한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출마를 위해 서울시당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충청남도로 내려갔다. 1948년 5월 10일 5·10총선거 때 고향인 충남 아산시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총선 낙선 이후 한동안 칩거하였다. 그러나 칩거 20일만인 5월 30일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비서관이 되어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되었으나, 7월 국회의장 비서실장 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그는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복귀하여 신문사 경영 활동을 하고 있었다. 7월 22일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그에게 장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민중일보사의 사주로 있겠다며 입각제의를 사양하였다. 초대 내각 구성을 놓고, 내각을 조직한 사람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자 그의 숙부였던 윤치영이었기 때문에 시중의 험담과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입각 제의를 모두 사양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호의를 거부한다며 서운한 의사를 나타냈으나 그는 향후 다른 직책으로 그를 도와주겠다며 안심시켰다. 1948년 8월 15일 윤보선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주중국 대사 권유를 받자 그는 가정 사정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을 통해 다시 주일본공사직을 요청했고, 윤보선은 자리를 회피하며 주일본공사직 요청은 불응하였다. 세 번째로 상공장관 임영신을 통해 미국 대사직을 권하며 국무회의에서 이미 결의되었다고 하였으나, 민중일보를 통해 할일이 많다며 이 역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 그의 외교관 파견을 종용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허정과 이기붕을 보내와 주 중화민국 대사, 주 일본 대사, 주 미국 대사직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1948년 12월 8일 서울에서 조직된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서울특별시장 재직 당시 48년 12월 윤보선은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다. 허정(許政)이 각의에 의해 서울시장 임명을 전해오자, 그는 서울시장직을 피하려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별장에 은둔하였으며, 이를 피하려 했으나 신문을 보고 서울시장 발령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 삼촌 윤치영(尹致暎)과의 관계를 고려, 시장직을 피하려 하였으나 숙질간일지라도 공과 사는 구별되는 것이니 구애받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시장으로 부임하였다. 신문기사에 서울시장 임명 기사를 보고 마지못해 내려와 서울시장직에 취임하였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 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 각 자치구 단위로 쓰레기를 수거하여 성과가 좋은 구에 포상을 내렸다. 동시에 시내 방역 소독 활동 역시 적극 추진하고 일일이 보고받고, 위생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청소상태 등을 직접 점검하여 청소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또한 동사무소에도 국문 보급반을 설치하게 하여 성인들에게 한글 정도는 동서기들이 직접 가르치게 했다. 또한 매점매석을 단속하고, 식량 배급을 1가구별로 받도록 정리, 기록케 하였다. 1950년대의 윤보선 그가 서울시장으로 부임할 무렵의 서울특별시는 거리에 쓰레기와 인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자동차나 열차, 전차에서 혹은 도보로 길에 투척한 쓰레기와 인분, 주취후 구토물로 몸살을 앓았다. 윤보선은 시장이 된 뒤 공무원과 단속요원, 경찰들을 통해 이들을 단속, 정리 및 정리를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시장으로서 제일의 당면과제는 다름 아닌 청소문제였다 라고 회상하였다. 그런데 시청에 가서 보니 그때까지는 청소가 큰 이권으로 화해서 각구에서 청소기재와 도구를 개인에게 청부를 주고 있었다. 이 청부를 맡은 개인들이란 꽤 유력자들이었고 그중에는 그와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책임수행은 않고 국고금만 축내며 이권화시키고 있었는데 모든 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이 청소권을 모두 회수해서 서울시의 직영으로한 후에 시장인 그가 직접 감독하여 전 시청직원이 총출동하고 각 구마다 책임제로 경쟁을 붙여 쓰레기 반출작업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버스 승강장과 철도역, 공원 등에 공중 쓰레기통을 설치하여 보급하였다. 당시 윤보선이 보급한 공중 쓰레기통이란, 말뚝을 박고 큰 양동이를 걸어둔 것이었지만, 이는 공중 휴지통 설치의 시발점이 된다. 후일 그는 이 청소작업은 단시일 내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출되는 쓰레기는 마치 폭풍에 씻겨 내려가는 형국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서울이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서의 나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만들어 한 때 청소시장이란 별명을 듣게까지 되었다. 고 회상하기도 했다. 청소문제를 수습한 후 그는 시민에게 다시 호소하여 재래의 자기 집 문전을 알뜰히 하는 미풍을 되살리도록 촉구하였다. 시민들의 호응은 말할 것도 없고 각 학교와 각 부인회 그리고 경찰관들마저 비를 들고 나서게 되어 청소작업은 명실공히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시정의 투명성을 선언하고, 서울시 시정사항을 일체 공개하고 공고문을 붙였다. 서울시 시정 공개는 이후 지방행정 사항을 공고, 공시하는 것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역사 이래로 신라, 고려, 조선왕조시대 이후에도 일부 교서만이 반포되었고 지방 수령의 행정사항은 대부분 공포되지 않았다. 청소 문제를 일단락 짓자 그는 그 다음 착수한 것은 서울시청이 복마전이라는 악명을 일소하는 것과 민원서류의 속결문제였다. 그는 이러한 지방 수령과 이속들의 독단적인 결정이 부정부패와 담합, 암투를 불러오는 요인이라 지적하고 모든 행정사항을 관보 또는 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의 게시판에 공개할 것을 지시, 시행하였다. 시정 사항이 공개되면서 복마전이라는 비아냥은 사라지게 되었다. Beijing 2.jpg|썸네일|오른쪽|140px|한국에 처음 보급된 초기 양변기와 유사한 형태의 좌식 양변기 서울시정이 복마전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자 그는 신생활운동을 본격 전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신생활 운동이라고 하였다.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꼭 실현을 보고자 했던 것인데, 그 실천단계에 들어설 때 상공부장관으로 발령이 나게 되어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라고 했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취임 초기부터 양복을 보급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취임 초 직원들과 구청, 동사무소 서기들을 통해 양복과 미국에서 반입된 의류들을 보급하였다. 이때 활동하기 편한 운동화도 시중에 보급하였다. 윤보선은 생활의 개량, 의복 개량, 위생상태 점검 등의 시정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재래의 가정생활에서 모순되고 불편한 여러 면을 의식주 전반에 걸쳐 개혁해 보려 했던 것인데 특히 한복의 개량과 주택의 개량이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한다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고 하였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 하겠다고 공포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재직 당시 관공서와 기타 공중화장실을 대부분 푸세식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교체, 개조하였다. 따라서 흉한 대소변 얼룩과 여름철 파리, 모기 등의 번식을 차단하고 주변에 대소변 악취를 대부분 제거하였다. 사람들은 버튼만 누르면 물이 나와서 변기가 흘러가는 것을 희한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또한 악취가 사라진 것을 놀라워했다. 윤보선은 자신이 1920년대, 30년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수세식 변기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것이 종전 이후 유럽에 보편화되었음을 설명했다. 서울시장 재직 때 보급한 수세식 양변기들은 6.25 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그의 수세식 양변기 보급은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비록 서울시에 한한 것이었지만 수세식 양변기는 그 후 윤보선이 대통령이 된 뒤 1960년에는 경기도로 확대 시행시켰다. 그리고 1982년 이후에 와서는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Deok Kui 1928 s.jpg|섬네일|160px|right|두 번째 부인 공덕귀, 신학자, 전도사 출신이었던 공덕귀는 그의 부인이자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다. 윤보선은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에서 서울특별시장으로 지낸 기간은 나의 역대 관직생활 중 가장 보람있고 만족스런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장직도 내가 선뜻 응해서 취임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서울시장은 당시 나로써는 퍽 떠나기 싫은 자리였다 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재직 중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윤명사(尹明師) 가 덕수교회 목사 최거덕(崔巨德)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宋昌根)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는 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 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박사 과정을 밟으려 유학하려던 공덕귀는 최거덕 등의 권고로 그와 결혼하였다. 공덕귀는 세 아이를 낳았는데, 곧 장남 윤상구를 낳고, 뒤이어 둘째 아이는 6.25 전쟁 중 대포 소리에 놀라 유산하였고 셋째 아들 윤동구를 연이어 낳아 주었다. 아들을 바라던 그의 어머니 이범숙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1949년 2월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이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민주국민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민국당원이 되었다. 민주국민당 창당 직후 그는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6월 상공부장관이 되면서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직은 사퇴하고 평당원이 되었다. 1949년 3월 12일 제9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3월 18일 고려역도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1949년 6월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전임 임영신 장관이 상공부내의 유력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일로 뇌물수수의 누명을 쓰고 물러났으므로 윤보선은 상공부장관직을 거듭 고사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임영신이 독직, 뇌물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아무도 상공부장관직에 쉽게 앉으려 하지 않았고, 윤보선 역시 누차 사양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상공부장관직을 임명하고 허정을 통해 통보하였다. 부인 공덕귀는 나는 어디 갔다 오다가 벽보를 보게 되었는데 "상공장관 윤보선"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고 하였다. 거듭된 정부의 요청에 공석으로 둘수 없다고 본 그는 상공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상공장관이 되던 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누구든 이권 운동을 한다면 나는 이 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장관직에 임했다. 그는 상공부 장관으로 출근하던 날부터 도시락과 함께 손 씻을 비누까지 싸들고 갔다. 그는 아내 공덕귀에게 부탁하여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고,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는 고집을 보였다. 전임 장관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는데도 정권 실세 유력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뇌물수수 누명을 쓴 것을 그는 늘 신경쓰고 각별히 염두에 두었다. 그는 사소한 종이 한장도 사적으로 쓰지 않았고, 비품과 치약 등도 손수 준비해서 다녔다. 또한 저녁식사나 선물 등도 일체 거절하였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라고 밝혔으며, 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라고 회상했다. 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그 동안 외자청을 거쳐 상공부로 와서 고무조합에 배정되어 오던 생고무를 금융조합 연합회가 이승만 대통령을 움직여 상공부 장관 재가 없이 임의로 처리했고, 그 명분은 짚신을 신는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신기겠다는 명분으로 처리되었다. 그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며 이권이 집약된 상공부장관직을 바르게 수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공부 일을 놓고 이승만과 의견이 엇갈리면서 고집센 이승만 대통령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사사로운 대접 한번 받아본 일이 없었으므로 이승만의 부당한 인사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1950년 2월 25일 대한축구협회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3월 23일 UN한국위원회의 초청으로 출국, 유엔을 방문하고 4월초에 귀국했다. 1950년 초부터 경전사장으로 있던 이태환을 미워한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려 하였으나, 윤보선이 볼때 해임이유가 없어서 취체역 회장으로 전임시켰다. 이에 이승만이 진노하여 그 후 책상에는 윤보선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라고 메모를 해 두었다 한다.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계 정당을 멀리하고 배척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그는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그는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결별 선언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그는 그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던 그는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9일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장관직은 5월 10일 국회에서 사직처리 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를 거쳐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에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충청남도 아산에서 민주국민당 공천으로 입후보,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그가 한민당 당원이고 이조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반감을 가진 유권자들이 존재하였다. 6월 한국 전쟁 직후 그는 관용차량으로 대전까지 내려갔다가 대구로 따라 이동했다. 그는 가족들을 두고 홀로 대전을 경유해서 피난지까지 내려갔고, 그의 가족들은 아내 공덕귀 등의 인솔로 그의 집안에 있던 자동차로 아산을 거쳐서 부산까지 피난했다. Syng-Man in 1956.jpg|섬네일|140px|오른쪽|이승만(집안 어른들과의 인연으로 그는 이승만을 존경했지만, 해방 이후 그의 무능력함과 측근들의 아부에 염증을 느끼고 결별하게 된다.) 1950년 6월 5일 허정, 이윤영, 김도연 등과 함께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1월에는 정부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의 1인으로에 피선되었다. 그해 1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12월 17일 부산에서 사회부장관 허정을 중심으로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가 결성에 참여,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 위원의 한사람에 위촉되고, 바로 협의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의 회장으로 초빙되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당시 정부와 국군의 과잉진압과 학살을 무조건 공비와 내통한 자들을 사살한 것이라며 합리화하는 이승만의 태도를 보고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이승만이 우익 단체들을 비호하느라, 사건을 비판하는 자들을 불순한 의도를 가진 공산주의자로 몰자, 윤보선은 억울하게 죽기만 하면 공산주의자로 환생하느냐며 이를 비판, 언쟁끝에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윤보선에게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으라고 했다. 1950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한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하여 주로 상이군경과 일반 전재민의 구호물자 공급,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관계 일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고 가는 곳마다 정부 비난의 소리가 높아만 갔다. 어느날 그는 장덕수의 미망인 박은혜와 함께 수영비행장에 갈 일이 있어 동행했다가 도중에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걸인 군상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옷은 다 해지고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얼굴은 모두 부어 있는 상태였다. 많은 청년들을 그토록 떼거지로 만들어 병들고 죽어가게 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들은 다수가 목숨을 잃고 살아 남은 사람들조차 굶주림과 병고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는 즉시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승만에게 목격한 대로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아! 윤 총재도 세상 사람들 모략에 걸렸군."하더니 장장 한 시간에 걸쳐 변명만 늘어놓았다. 나는 내심으로 이 박사도 이제 큰일났구나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그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발생이 가능한 일을, 그것도 직접 목격하고 보고하는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다니 원망하기에 앞서 불쾌감 마저 들었다."고 회상하였다. 1951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 자격으로 일본을 답방하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그해 2월 한정(덴마크) 문화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재야정치인이 되었다. 7월 18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퇴했다. 1954년 5월 10일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서울 종로갑구 후보자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3대 민의원 의원이 되었다. 그해 9월 국회에 농림업진흥의 긴급성에 관하여 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윤보선에 의하면 이대통령의 독재가 강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한다. 그는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개정이란 당치도 않은 억지를 써서 독재의 뿌리를 내리려 하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라는 평을 내리기로 했다. 이박사와는 정치적으로 하관 노릇을 했고 지난 날 혁명 선배로 애국하는데 도와 왔으나,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사태에서는 그와 일할 수 없다고 절실히 느껴 정치적인 결별을 하기로 작정했다. 1952년 9월 1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직했다. 윤보선에 의하면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윤보선은 회고하면 내가 이 박사와 결별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고 밝혔다. 결국 그는 이승만과의 오랜 감정대립 끝에 결국 그와 결별하였다. 그는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는 것도 내심 불만이었다. 이승만과 친위 세력의 한민당계열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도 그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의 독단에 의해 국무회의는 공전하기 일쑤라 흥미를 잃어오던 나로써는 사임해야 할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50년 5월 사임하고 말았던 것 이다. 한편 윤보선은 이승만이 한민당을 팽하고 독립촉성중앙회를 설립한 것, 그밖에 윤치영, 이인(李仁) 등을 중심으로 친위정당인 민주국민당을 조직되자 국민당을 편애한 것, 1951년에는 이범석, 이기붕 등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사상은 올바른 민주주의 사상이 아니라고 봤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대종교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불만이었다. 이승만이 당숙 윤치호의 문하생이라는 점과 아버지 윤치소, 삼촌 윤치성과의 친분관계, 당시 삼촌 윤치영이 이승만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갈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일민주의 사상, 국민 방위군 사건에 대한 편협한 대답과 부산정치파동에 반감을 가진 그는 공개적으로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1952년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4년 5월 서울 종로구 갑구에서 민의원 후보에 출마하였다. 그는 종로 갑구에서 처음 출마했기 때문에 무척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박순천씨가 여성이어서 전 유권자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동정표를 몰아줄 것인데 남자는 12명이나 되니 절대 불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일찌감치 당선자를 예상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선거를 하려면 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상대해야지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가 가당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종로 갑구에는 박순천, 주요한, 장후영, 유석현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13명이나 출마하여 전국에서 최대의 격전지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박순천과 주요한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조병옥.JPG|썸네일|왼쪽|180px|유석 조병옥,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가 된다. 3대 민의원 재직 당시 윤보선은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와 국회 외교분과위원을 맡았다. 3대 민의원이 된 후 그는 민국당의 원내총무에 지명되었지만 극구 사양하였다. 그런데 당에서는 그의 거부의사에 상관없이 원내총무에 앉혔다. 제3대 민의원이 된 후 그는 원내총무에 지명되고도 요양을 핑계로 부산으로 내려가 끝내 사퇴하고 만다. 그는 민주당 서울시 종로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신익희, 장택상, 조병옥 등이 술자리에 갈 때면 자신은 기독교 신앙인임을 들어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증조부 윤득실이 술을 즐겨서 가산을 탕진, 할아버지 윤영렬이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훈계한 것을 이유로 들어 술자리 참여를 거부했다. 회식과 술자리 불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회자화되고 언급되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자 국회의원들과 기독교 신앙인인 국회의원들도 회식이나 술자리에 참여하여 술을 마셨으므로 그의 술자리 참석 거부, 회식 거부는 독특한 취향으로 취급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그는 김도연 등과 함께 국회 경제분과 위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1954년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자 호헌동지회에도 참여하였다. 1955년 2월 김성수가 사망하자 그의 국민장 장례식을 지켰다. 6월 김형근(金亨根) 내무부 장관의 서울시내 판자집 철거 정책에 반대하여 김도연, 민관식(閔寬植), 임흥순(任興淳) 등과 상의한 뒤 판자촌 철거는 민생을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 창당된 후, 그는 민주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이어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 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조병옥, 김도연,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는 1954년에 제3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제4대, 제5대, 제6대 국회에도 진출하였다. 1955년 11월 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뚜렷하게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당내 신구파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내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1956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고, 1월 24일에는 신병을 이유로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직을 사퇴하고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 간사가 되었다. 5월 30일 민주당 중앙당 간사직을 사퇴했다. 1956년 9월 7일 서울 재동국민학교에서 특별 강연을 하였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어 경찰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당내 활동을 하면서 그는 민주당 구파였지만 특정 파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색채나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당무에만 전념했는데, 조병옥은 그에게도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번은 조병옥이 언젠가는 윤보선이 전면에 나서는 날이 올 것이다 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1957년 10월 19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중앙의 회의에서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다시 유임되었다.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을 거쳐 1958년 민주당 후보로 제4대 민의원 (종로갑) 후보에 출마하여 제4대 민의원의원(民議院議員)으로 활동하였다. 1955년 이래 그는 민주당 서울시지구당과 종로구지구당을 맡아보았다. 그런데 종로구 지구당은 그의 표현대로 당시 종로 갑구로 말하면 민주당으로선 가장 약한 지구당이어서 당원이 2백 명밖에 안 되었으며 그 당원도 대개가 이름만 얹어둔 정도여서 연차 지구당 모임을 갖자면 40명의 정족수를 채우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자발적인 후원자들의 존재로 당을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두고 "조직도 당원도 없는 그에게 언제나 선거 때면 몰표가 쏟아져 나오고, 그렇다고 당선시킨 후에는 무슨 이권운동이나 폐를 끼치려는 사람도 일체 없고 하다 못해 적은 돈이나마 보태 쓰라 고 금일봉을 보내오는 사람이 많았으니 어찌 평생을 두고 감사해 마지 않으리요."고 회상하였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신익희,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일약 민주당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1959년 6월 8일 4대 국회에서, 민주당 조경규와 함께 야당 몫의 부의장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같은 당의 조경규가 부의장에 낙점되었다. 이후, 민주당 당 상임위원에 추대되었고, 9월 8일 국회 각분야 상임위원을 선출할때 국회 외교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 초부터 민주당 신파에서는 그를 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고 주장하였으나 10월 13일 곽상훈, 장면 등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11월 2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중앙 위원회 회의에서 다시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재선출되었다. 4대 국회에서 그는 주로 세무, 재정 등에 대한 분야에 대한 질의, 안건을 제출하였다. 그러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과 함께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김도연과 유진산이 있었음에도 그는 유진산의 양보로 그는 구파 몫의 민주당 최고위원직에 선출되었다. 별로 야심이 없었으므로 민주당의 당내 주도권을 쥐려던 민주당 신파 인사들의 견제를 받지 않은 것도, 그가 구파로서 최고위직에 오르게 된 원인이었다.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를 다룬 기사. 1959년 11월 27일 서울 시공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구파 몫의 최고위원을 선출할 때 추가로 보선되었다. 12월 23일 민주당 원내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59년 정부로부터 서울시장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하였다. 1960년 곽상훈 등과 함께 김구(金九)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직접 커튼을 벗겼다.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이 사망하자 민주당 구파의 대부였던 유진산의 추천으로 조병옥(趙炳玉) 사후 구파 리더로 추대되었다. 유진산의 양보로 그는 구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윤보선은 당시 민주당 구파의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후에 민주당 구파의 주도권을 놓고 유진산, 유진오 등과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였다. 4월 학생 시위의 진상조사단이 각 정당별로 꾸려질 때 그는 민주당측 부정선거 규탄사태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마산과 부산, 창원 등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어 정부의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관련자 색출 처벌을 요청하였다. 1960년 4월 11일 그는 민주당의 마산시위 진상조사단장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마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우선 현지에 내려가 사태의 진상을 조사, 파악하고 자유당 정권에 강력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 그가 조사단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급히 조사단을 구성, 야당의원 세 사람을 동반하고 마산 현지로 내려갔다. 마산에 도착해 보니 온 시가지가 극히 혼란한 상태였다. 그것은 데모가 아니라 완전히 혁명이었다. 법에 의한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마산은 지배되어 있었다. 도착한 즉시 김주열이 안치된 병원에 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대로 있었다. 그를 단장으로 한 민주당 진상조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 시민들은 데모를 중지하고 몰려와 사태를 빨리 해결해 시민들을 희생시킨 경찰으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며 즉석 연설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마산시장과 경남도지사, 마산경찰국장, 그리고 법원 사람들을 만나 회의를 열고 군중에 대한 발포금지와 감금된 시민들을 석방할 것 등을 골자로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회의장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회의 결과가 빨리 발표되지 않자 무차별 투석을 가하고 전기를 끊는가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조사단은 다시 경찰서장과 지방법원 관계자들을 만나 해결책을 협의했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당시 내무부차관은 마산 시민의 1차 봉기 배후에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역시 공산당 조직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윤보선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마산 현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국회발언을 통해 그는 마산 시민 봉기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애국시민의 의거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윤보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4월 19일 그는 자유당의 국회의원들을 방문했다. 데모가 한참 서울 시내를 누비고 있을 때 그는 국회에 나가니 이재학(李在鶴) 부의장실에 자유당 의원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있었다. 불청객이었던 윤보선은 들어가서 거기서 한마디 했다. 그는 자유당 회의장에 이 말을 남기고 거리로 나와 시내를 둘러보았다. 이를 두고 자유당 의원들은 윤보선이 돌아다니며 데모대를 선동했다고 비난하였다. 자유당은 그가 불순한 목적으로 시위대를 선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나는 누군가에게) 데모를 선동한 일이 없다. 다만 상황을 살펴본 결과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더라. 고 응수하였다. 4 19의거 후 민주당 신파 대표인 장면 씨와 회동한 구파의 윤보선 1960년 제4대 국회는 제3차 개헌을 통해 의원 내각제(양원제)를 채택하고 해산되었다. 7월 29일의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대 국회 민의원 총선거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를 두고 원내활동도 적고 또 야당의원이라 선거구를 위해 해준 일도 별로 없는데 구민들의 지지와 동정이 컸다 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 해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08표를 얻은 윤보선은 29표를 얻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책임제 개헌 뒤 실권자가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그는 한때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민주당 신파가 그를 적극적으로 대통령으로 지지했다 한다. Kong s Family.jpg|섬네일|left|210px|부인 공덕귀와 두 아들과 함께 8월 19일 장면 총리인준 직후, 장면 총리의 예방을 받을 때 민주당 구파에서는 대통령에 윤보선을,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크게 야심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 신파 역시 윤보선을 지목했고 그는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구파의 당론에 따라 국무총리로 구파 출신 김도연을 지목했으나, 민주당 신파의 반발로 장면으로 교체한다. 8월 16일 윤보선은 구파의 집권계획을 따라,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목하였다. 8월 17일 인준 투표에서 김도연은 의원재석 224명 중 찬성 111표, 반대 112표, 무효 1표로 부결되었다. 18일 윤보선은 2차로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였다. 16일 표결에서 재석 225명 중 찬성 117표, 반대 107표, 무효 1표로 겨우 인준되었다. 장면은 훗날 이일을 놓고 도의상 신파인 자신을 지명하는 것이 도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느냐고 비판하였다. 8월 26일 경무대에서 장면 국무총리 등 3부 요인과 각료들로부터 제63회 탄신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8월 영국의 내각책임제를 지켜봤던 그는 국가원수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그러한 이유에서 민주당을 탈당을 했다. 내각출범 20일 뒤, 국무총리 장면은 개각을 단행하여 5명의 장관직을 구파로 교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내각책임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내각인사에 개입 구파에게 준 자리는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한편 그는 자신의 얼굴이 든 우표나 화폐 발행을 반대했다. 우표나 화폐 등은 죽은 사람이거나 공적이 뚜렷한 인물만 등재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반대 이유였다. 8월 경무대에서 특별히 그의 생일 기념 축하를 주관하였다. 그는 성대한 축하식 대신 간단한 파티와 주변 친지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하였다. 파티에는 장면 총리와 각료들 외에 어머니 이범숙,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윤일선, 윤영선 등 일족들과 김도연, 유진산 등의 당직자, 몇몇 친한 친구 등 소수만이 초청되어 간략히 하였다.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1960년 8월 29일 이른 아침, 휴가 겸 민정시찰을 나갔다. 비서실을 통해 전갈을 전달하자 총리 장면을 비롯한 각료들이 서울역에 집결하였다. 관 1호차를 탄 윤보선 부부는 서울역에 도착, 8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하여 전국을 순회했다. 이 일이 정치권에 알려지자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 나오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이며, 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장면은 뭐냐 는 비판이 나왔다. 이는 윤보선은 대통령직에서 월권을 한 것이고, 장면은 자기 밥그릇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 그는 민주당 구파의 의원들을 모아 그들과 각종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간 정치다툼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대립을 외면하였다. 민주당 구파에서는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윤보선을 두고 아군은 맞느냐며 공격했다. 장면 내각 출범 20일 마인 9월 12일 국방 권중돈, 부흥부 김우평, 교통부 박해정, 체신부 조한백, 보사부 나용균 등 구파 5명을 받아들인 개각이 단행되었다. 구파로서 처음부터 입각한 정헌주는 교통장관에서 국무원 사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윤보선은 구파에게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Korea Second Republic.jpg|섬네일|left|190px|제2공화국의 대통령인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10월 10일 장면 국무총리는 허정 과도수반 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경질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구파 입장을 대변하는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장면 내각에서 정치에 왜 관여하느냐며 비판하자, 윤보선은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 60년 10월 12일 신정부수립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동안 윤보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에 신파도 대통령직에는 윤보선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 장면은 청와대를 갖은 정략을 꾸미는 구파들의 참모본부로 여겼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그는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한편 그는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1960년 6월 15일에 제정된 제2공화국 헌법 61조 1항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군을 통수한다. 라고 되어 있었으나 장면 내각 출범 후에도 내각은 법률을 정하지 않았다. 1960년 가을 윤보선은 비밀리에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비밀리에 국방부장관실에서 의논하였다. 윤보선은 자유당 정권 때의 관료라고 해서 무조건 파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재가 있다면 가려서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결점, 단점을 찾기 보다 그 사람의 좋은 점과 재능을 살리는 것이 정치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당 시절의 인사나 과도 내각의 인사까지 해임시키는 장면 총리와 갈등하였다. 장면 총리의 내각 운영 태도를 답답하다고 여긴 그는 장면에게 그럴 것이면 총리 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장면은 어이없어 하면서 그 영감이 나더러 총리 직을 내려놓으란다 며 성토하였다.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Myun.jpg|썸네일|left|180px|장면 총리 인준 직후 곽상훈 민의원 의장, 장면 국무총리, 윤보선 대통령 s.jpg|섬네일|140px|right|장면(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이자 그의 정치적 경쟁자 중 한사람이었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윤보선은 전국 각지의 유적지 보존, 보호 사업에도 후원하고 기금을 마련하였다. 1961년 1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 참석하여 신년치사를 하였다. 그런데 윤보선은 시국을 국가적 위기 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한 개인, 한 당파가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 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장면 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장면 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하였다. 2월 27일 국토건설단 창단식에 국무총리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 1961년 3월 윤보선은 장면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3월 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을 하였다. 3월 23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에게 사퇴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나의 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장면 내각에서 민주당 신파 인사들만 채용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자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구파 인사들은 주로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모였고, 신파 인사들은 국무총리 장면의 관저인 반도 호텔을 중심으로 모여서 각자 자파의 정책을 의논하였다. 4월 19일 4·19 혁명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장면내각은 그의 참견이 지나친 간섭이라 비판했고 그는 이를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충고라며 맞받아쳤다. Coup Park Chung-hee.jpg|섬네일|250px|left|5·16 군사정변 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와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은 장도영으로부터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속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러나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수녀원에 숨어버렸다. 이제 그의 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선택권이 쥐어졌다. 하나는 그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을 상실한 장면 정부를 포기하고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윤보선을 찾아갔다. 박정희 1961년 5.16 군사정변.jpg|섬네일|210px|right|5월 20일 중앙청 광장에 선 장도영과 박정희 윤보선은 가족들만 피신시키고 나는 대통령이니 죽더라도 청와대를 지키겠다고 하고는 가족들만 피신시켰다.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린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군사 정변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아닌가 하고 힐책하였다. 박정희, 장도영 등이 각료들을 체포하고 청와대에 등장하자 체념한 그는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자탄하였다. 그러나 그가 놀라거나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현석호 등은 영원히 잊을수 없는 한마디 라며 그를 원망하였다. 한편 그는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에 나타나 위스키와 소주를 찾는 군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였다. 이때 바로 계엄군 사령관 장도영 중장이 사과를 하여 넘어갔다. 5·16 군사정변 후 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을 우려해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그는 여러 비판 중에도, 자신이 사퇴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적인 정부의 대표자로 나설 사람이 없으므로 국가전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대통령직 사퇴를 번복했다고 하였다. 1961년 5월 19일 햐야선언을 하였으나 5월 20일 번복하였다. 1961년 5월 19일 윤보선은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그의 사퇴 성명은 저녁 8시 30분 방송을 통해 공표되었다.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9시,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윤보선은 5월 20일 하야 번복 성명을 발표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종강식.jpg|섬네일|left|160px|1961년 2월 국토건설단 수료식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낮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와 장도영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저녁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경제정책의 틀을 수립하고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그를 명목상의 대통령에 앉히고 실권을 쥐려는 5.16 군부와 수시로 충돌하게 되었다. 하야발표.jpg|섬네일|1961년 하야 발표 기자회견을 위해 입장하고 있는 윤보선 대통령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윤보선이 아무리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 이라고 했다. 하야의 배경에 관련되어서는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인 안동장에 칩거하였다. 4·19 혁명으로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이 마땅치 않다면서 박정희가 나오게 해서 나왔어도 감시와 연금이 되풀이 되는 불행한 나날을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 공격의 선봉에 선 윤보선은 대통령(권한대행)과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군정 세력의 민정이양은 허구이며 군정 세력의 정권 연장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1962년 6월 29일 반공유격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안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허정은 각각 측근들을 데리고 서울시내에서 산책데모를 하였다. 1963년 3월 16일 낮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이에 그는 3.16 성명이 박의장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세상 만사가 그렇게 박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척척 될는지도 의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사고방식과 같다. 인간 개조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20년이고 30년이고 점진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이어 군인의 사명은 국방에 있으니 만큼 군인들은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윤보선의 말을 듣던 박정희는 노하며 오죽 당신네들의 과오를 못 참았으면 군인들이 일선에서 돌아 왔겠느냐 며 응수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이 화제를 돌려 논쟁을 막았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구 정치인 정치활동법 제한(정치정화법)을 강행하고 군정을 연장시키자 윤보선은 이윤영, 장택상 등과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진행해 나갔다. 장면이 병으로 정당활동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야당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러나 허정 등 일부는 그의 지도력에 반발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발표하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 였다. 한편 야당 인사들 중에는 그가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정일형 등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군사쿠테타를 방조하였다며 그의 리더십을 거절하거나 비판하는 인사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군정 반대와 박정희 퇴진 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므로 반대파들의 음해와 공격은 일시적으로 누그러졌다. 3월 20일 허정 등과 함께 서울시청과 을지로 주변, 주한미국 대사관 주변 등을 활보하며, 박정희의 군정연장에 반대하는 산책시위 를 했다. 3월 30일부터 윤보선과 함께 3차례 박정희와 조야영수회담을 개최하여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철회시켰다. 이후 그는 박정희를 군정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며 박정희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야당이 난립하게 되니까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통합야당으로 국민의당을 만들게 되지만 바로 깨져버렸고,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통합야당 국민의당 붕괴에는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 유진산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이 당시 유진산은 윤보선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민주구국선언대회 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 1963년 초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1963년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체되었던 신민당 및 민주당 구파 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세력이 참여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Jeong.png|섬네일|right|150px|허정(1960년대 초반 야당의 주도권을 놓고 그와 경합하였다.) 63년 7월 그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본래 야당 단일후보로 김병로가 지목되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해위(윤보선)라면 양보할 용의가 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고,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후보는 허정과 김도연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지만 사전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김도연이 포기를 선언해 후보경쟁은 다시 윤보선과 허정의 대결로 전환되었다. 허정은 5·16 군사 정변 당시의 그의 묵인을 지적하며 처신문제를 질타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국 대사 및 미국무성 관리들로부터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 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 허정은 그가 장면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정변을 묵인했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고, 윤보선은 자신이 군사 정변을 추인하지 않은 점과, 장면 내각 당시 데모와 부정 부패가 심했음을 들어 반박,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허정은 1963년 9월 24일 "혁명을 합법화시키고 정치정화법에 도장을 찍어놓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다, 출마한다고 하는 윤보선씨야말로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허정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상 자신이라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 뒤 허정은 그가 5.16 군사 정변에 호응한 점과 혁신 세력의 반발을 들어 김병로에게 후보자리를 양보하라고 종용하였으나 윤보선은 양보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고, 허정은 그가 독단적이고 고집에 세다며 질타했다.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서 경합하였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하면서 윤보선은 야당의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 뒤 최종 지명되어 출마, 유세 도중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3년 9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지방 유세에서 그는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 윤보선의 유세는 언론에 의해 사상 논쟁으로 묘사되었다. 공화당은 윤보선을 미국 상원의원을 역임한 존 매카시 의원의 사상에 사로잡힌 과격분자로 규정하고, 그의 주장은 얄팍한 술책이며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 박정희는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이라며 맞받아쳤고, 윤보선은 그가 친일파, 공산주의자라며 조국을 두 번이나 배신했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5대 대선 유세에서 그는 빈익빈이 민주화냐, 썩은 정치 뿌리뽑자고 호소하였다. 한편 유세중 기자들이 경제정책에 대한 공약을 집요하게 물어오자,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그는 당선된 뒤에 밝히겠다고 하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였다. 선거 운동이 한고비에 이르렀을 무렵, 9월 28일 윤보선 후보는 다시 전라북도 전주에서 "여순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는 연설을 통해 박정희 후보가 여순 사건에 관련됐다는 시사를 했다. 이로써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라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럼 공산주의를 가리킨 것이냐 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의로 공산주의 의혹을 부풀려 올리려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격을 금치 못했다. 김형욱을 필두로 하는 충성파와 민주공화당의 추종자들은 윤보선에게 강경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서둘러 즉각 고발조치를 취했다.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속히 윤치영 등이 그를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김준연은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하자고 하였다. 공화당 측에서는 윤보선이 김준연을 사주하여 흑색선전을 한다고 맞받아쳤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 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고 윤보선과 신민당을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무리들이라며 공격하고 나섰다. 1963년 9월 23일 윤보선은 전라남도 여수, 순천, 광양 지역을 돌며 선거 유세를 하였다. 그런데 9월 23일 박정희는 KBS 방송을 통해 윤보선을 공격,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하였다. 63년 9월 24일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 도착하였다. "기아·부패·실업·분열 등 군정의 5악을 몰아내고 민정으로 새 질서를 수립하자 "고 외치던 윤보선은 9월 24일 전주 유세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 윤보선은 "내가 할 말 그사람이 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지금은 민주주의와 가장된 민주주의, 즉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이질적 민주주의 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인데, 윤보선은 이어서 "9월 23일의 여수 강연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여순 사건 관계자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 사상이나 민주주의 사상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 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윤보선의 삼촌인 윤치영은 윤보선의 경쟁자인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이기도 했다. 9월 30일 윤치영은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일각에서는 윤보선의 의혹을 사상공세라고 비난하였고, 숙질간의 싸움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 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자 김준연은 고소 할테면 해보라며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한다. 윤보선은 김준연과 함께 박정희에게 과거 전력에 대해 속시원히 털어놓으라고 공세를 펼쳤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악수를 거절한다.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10월 2일 국민의당 허정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고, 10월 8일에는 자민당의 대통령 후보 송요찬이 사퇴함으로써 윤보선은 사실상의 야당의 단일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논쟁은 윤보선 후보에게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매카시스트로 몰아붙였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를 극우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그의 정견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도시민은 그의 사상 논쟁을 과거 보수 정치가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스파이로 매도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야당인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은 박순천, 이범석, 김병로, 장면의 자택을 각각 방문하였다. 허정과 변영태의 집 역시 방문하였으나,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10월 9일 안동 유세를 다녀왔다. 윤보선은 이 날 8천 청중 앞에서 "민주공화당은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 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북괴의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가 20만 달러를 가지고 왔는데, 김종필씨가 조선호텔에 모셔다가 황태성이 안에 따라 서울에 밀봉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놓고 공산당 식으로 점조직을 한 민주공화당이 어떻게 민주주의 정당이냐"하고 반문하면서, "공화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보선의 안동 발언은 막바지에 이른 선거 정국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나 사상 논쟁에서 윤보선이 손해를 본 것으로 분석한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경상도 · 전라도 쪽이 좌익이 강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8월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선거 13년 전 일이어서 그때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좌익으로 몰려 많이 죽고, 또 살아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몹쓸 고생을 하고 있던 터라, "윤보선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되면 큰일 나겠다. 여순 관계로 저렇게 몰아세우는 사람이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이 때문에 막판에 박정희 지지로 돌아섰다. 윤보선이 6·25 전쟁 당시 양민학살을 반대하여 이승만과 틀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감옥소에 들어가 있는 혁신계 일부도 한민당 간부였던 윤보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혁신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민당을 굉장히 미워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혁신세력의 혐오는 지속되어 차라리 윤보선이나 민주당 구파 계열을 지지하느니 박정희를 지지하겠다는 여론이 지속되었다. 6대 대통령 선거 때에도 그는 박정희의 전력과 사상이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고 공세를 했다. 이 때에도 박정희의 공산주의 경력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에 해당하는 4,702,640표를 받았고 민정당의 윤보선은 45.1%에 해당되는 4,546,614표를 받아 불과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공화당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위협을 받기도 하여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고,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 윤보선 내외를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2월 17일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한편 그의 숙부인 윤치영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그의 선거사무장을 지냈는데, 그는 끝내 수인사 조차 나누지 않았다. 윤치영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5대 대통령 선거당일 저녁 선거 결과가 중개될 때, 초반전에는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 서중석은 서울쪽을 먼저 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봤다. 10월 15일 선거 다음날인 10월 16일 새벽 3시경까지만 해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박정희가 추격해서 이겼다. 이 뒤부터는 박정희는 개표할 때 박정희 표가 많이 나올 쪽을 먼저 하고, 야당 표가 많은 데는 나중에 했다는 말도 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702,640표, 윤보선은 4,546,614표로 15만여 표 차이였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충청 남북도와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는 윤보선이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띄게 되었다. 서중석은 이를 두고 경상북도는 이때만 해도 몰표가 아니어서 박정희가 83만여 표였고, 윤보선 표도 54만 표나 나왔다. 충청북도도 그렇고, 두 지역은 여당 표가 많이 나오는 곳 이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윤보선은 스스로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 사상 논쟁은 얘기할 것이 없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막판에 개표 부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서중석에 의하면 그 당시 선거에서 공무원 가족, 경찰관을 포함해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표를 10퍼센트 내지 20퍼센트로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 라고 하였다. 대선 기간 중 윤보선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67년 5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사상 경력에 대한 공세가 있었다.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순 사건에 대해 변명하였다. 윤보선은 경상남도 진해에서 "대통령 선거 때 나는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조봉암과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63년 11월 윤보선은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64년초 한동안 칩거하였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 장택상·박순천·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후일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구파를 함께 이끌어오던 유진산과의 갈등 끝에 1964년 8월 유진산과 결별했다. 1964년 8월 윤보선과 유진산이 결별한 이후 민주당 구파는 양분되었다. 신언론법안 제정을 쟁점으로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가 민주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뢰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된 그는 대통령 박정희와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 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 이후 그의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의 감시요원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윤보선의 안동장 건너편에는 망루를 설치하고 그의 집 출입자에 대한 감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수 없다며 고집하였다. 또한 미국의 월남전 파병에 박정희가 호응할 것이라는 설이 정가에 돌자 그는 월남 파병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박정희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이후 장준하와 함께 월남 파병 반대 운동도 준비한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1965년 초부터는 한일협정 반대를 위한 야당 인사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자신이 만든 민정당을 민주당과 통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이 출범하자 총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박순천에게 패하여 당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낙선원인은 그에게 축출당했던 유진산이 복수차원에서 박순천을 당수후보로 밀었고 여기에 여당인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일부 대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등 복합적인 정치공작의 결과였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그의 강경노선을 누그러뜨릴수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것은 그들의 계산착오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자신의 약화된 입지를 만회하기위하여 더욱 더 강경한 투쟁의 칼날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에 대해 대부분 야당인사들의 생각은 원내외투쟁을 병행해야한다는것이었는데 윤보선은 다가오는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양자대결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서 초강경투쟁을 주도하면서 선명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라야한다는 의도에서 야당의원들의 전원총사퇴로 배수의 진을 칠것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대다수 야당의원들로부터 "우리가 해위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들러리냐"하는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그의 강경노선에 동조하는 윤제술,김도연,김재광,정성태,정일형,정해영,서민호 등 7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의원직사퇴후 그들과 함께 초강경 선명야당 신한당의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여기서도 자신의 당수직과 대통령후보직을 위협할수 있는 서민호와 김도연의 합류를 거부하는 옹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한동안 비록 의원직은 내놨을지라도 민중당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대선후보를 내지 못할것이라 보고 느긋한 태도를 나타냈다. 한동안 그랬지만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중당이 대선후보로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를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67년 대선이 박정희와 윤보선 그리고 유진오의 3자대결구도로 간다면 윤보선은 당선은 고사하고 참신성 등에 있어서 유진오에 밀려 3등으로 밀릴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윤보선은 민중당 측에 합당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유진오와의 회동을 제안하였고 민중당이 이를 받아들여 윤보선ᆞ유진오 간 회동결과 신한당과 민중당은 신민당으로 통합하고 당 대표에는 유진오,대선후보는 윤보선으로 하기로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 대통령의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윤보선과 장준하만 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후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 역시 국민을 쥐어짜는 경제 정책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 역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집권에 이익을 주려는 행위라며 월남 참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조속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64년 벽두부터 표면화되었다. 곧 도쿄에서 정치협상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월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 하였다. 64년 2월 22일 민정당에서는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代案)을 발표했다. 박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불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우리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는 것이다. 윤보선은 학생 대표자들과 면담,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시위 준비 작업을 독려하였다.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회장인 김덕룡(金德龍, 후일 국회의원)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 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윤보선은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현장을 돌며 학생들을 위문했다. 단식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다.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교대로 철여하면서 단식학생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윤보선은 그들 의대생, 간호학과 학생들도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 보았다. 사건을 주동한 이명박 등은 피신했고 주동자를 찾지 못하고 학생들 348명을 기소한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 등을 지목했다.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윤보선과 장택상은 정부가 보낸 사복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당했다. 윤보선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의로운 학생들이라며 손수 부인 공덕귀, 비서관, 함석헌 등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1965년 4월 30일 오후 방한 중인 마셜 그린 미 국무부 극동담당 부차관보는 서울 중구 정동의 미 대사관저에 윤보선 민정당 총재를 초대하여 한일회담과 관련한 요담을 했다. 그린 副차관보는 5·16 군사 혁명 때는 대리대사로서 당시 윤 대통령을 찾아가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軍(군)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동원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한 인연이 있었다. 윤보선은 김준연 등을 대동하고 마셜 그린 부차관보를 면담했다. 이날 민정당의 김준연 의원은 그린 副차관보를 ‘각하’라고 호칭하면서 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는데 요지는 박정희의 방미(訪美) 정상회담 계획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린 부차관보는 한일 국교회담의 조속한 정상하를 바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 하고 윤보선과 야당에게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한잃회담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마셜 그린은 본국에 돌아가면 한국의 이익을 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힘쓰겠다. 고 약속하였다. 윤보선과 마셜 그린의 회담을 불쾌하게 여긴 박정희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 사실을 보고한 박상길 청와대 대변인에게 "그 X버선인지 헌 버선(편집자 註-윤보선을 지칭)인지 하는 자가 하는 말을 나는 다 알고 있지. 새카만 일본 헤이타이(兵隊) 출신인 째그마한 내가 … 제까짓 게 뭘 알겠느냐, 이런 말 아니오?"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윤보선은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며 그것이 박정희 씨의 인격이고 수준이라고 응수하였다. 1965년 6월 22일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의 민주당이 민중당으로 통합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통합 민중당의 당대표로 경선에 나왔으나 유진산은 박순천 쪽을 밀어서 박순천이 당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당수가 출현한 것이었는데, 이는 전에 민주당 구파였던 유진산이 신파와 손을 잡은 결과였다. 한·일 협정 비준 반대투쟁에 나섰는데, 박순천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에 적극적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한 뒤로는 이상하게 돼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민중당 내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구별되는 뚜렷한 대립 노선이 노정되었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강경 노선은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 이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 전쟁 파병 정책은 박정희가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윤보선은 다시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불법선거라며 비판했다. 윤보선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공화당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65년 7월 22일 윤보선은 민중당 탈당을 선언했다. 7월 28일 윤보선은 정당생활을 청산할 뜻을 비치면서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게 탈당계를 제출했다. 윤보선의 탈당계 제출로 민중당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원외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강경파와 원내투쟁이 국회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 이라는 박순천 중심의 온건파의 대립으로 대여투쟁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박순천은 윤보선의 탈당계를 반려했고, 윤보선은 자신의 탈당계가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 의해 반려되자 정당법에 따라 소속 지구당인 종로구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9월 장택상, 함석헌, 이범석,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함께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 을 자처하였다. 1965년 8월 14일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국회를 떠나고 민중당을 떠났다. 윤보선 파는 민중당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고 비난했고, 당내에서 배척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내 온건파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한·일 협정 비준에 초강경투쟁을 벌이던 윤보선은 따로 나가서 당 하나를 만든다. 신한당이다. 1965년 한일 비준 파동이 발생한다. 이때 윤보선과 유진산은 갈등하게 된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하였다. 윤보선이 유진산과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강원용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지적을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지 않고 타인의 말만 듣는 것은 편견이라며 일단 유진산과 함께 움직였다. 한민당 때부터 함께 정치를 해왔고 같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지만 그러나 계속 노선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민정당에서 윤보선과 유진산이 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갈등을 벌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윤보선 측은 유진산을 박정희 정권과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해서 벚꽃의 일본말인 사쿠라 라고 하면서 권력과 내통하고 있는 사쿠라를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다. 유진산은 한편 그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라며 몰아붙였다. 윤보선과 유진산의 난타전은 계속되었고, 민주당 구파는 1965년말 6대 대선 준비기간 직전까지 양분된다. 민중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순천으로는 안되겠으니까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를 당수로 영입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민중당은 유진오를 당수로 모셔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고 해봤는데 실패하였다. 서중석은 유진오를 국민들이 잘 알지도 못했 고, 당시는 어두웠던 시대라 유진오를 알 만한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 는 단점을 지적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에 나올 것은 확실해졌다. 장준하는 주선을 해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4자 회담을 주선했다. 회담 결과 당수에는 새로 통합야당을 만들어서 유진오가 차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생긴 당이 신민당이다. 1960년대에 윤보선이 신민당을 할 때 유진산과 손을 잡자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그 사람과 손잡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윤보선은 원칙론을 고수했고 유진산은 타협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고 유진산은 오히려 윤보선이 1963년 3월과 4월 박정희와 면담 때 박정희의 구정치인 배격을 비판하고 잡토도 섞어야 된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조롱하였다. 민중당을 탈당하고 1966년 2월 28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운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으며 3월 30일 신한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그해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5월 26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신한당 지구당 창당 및 대선 예비주자로 유세를 개회하려 하였으나, 유세장소허가가 취소되고 강연은 좌절되었다. 윤보선은 정부의 야당탄압이라며 비판, 윤보선 총재를 비롯한 100여 명의 당원은 침묵시위를 벌였다. 한편 윤보선은 6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사상이 민주주의인가 이질적인 사상인가 의혹을 제기하였다. 1966년 5월 26일 오후 윤보선 총재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박정희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 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월남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한 때문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 주장의 허구성 및 국군의 월남파병을 청장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기자들이 기록을 주저하자 윤보선은 반복해서 재발언하였다. 윤보선의 발언은 화제가 되었고 국회와 검찰에서 다같이 문제가 되었다. 국회에서는 내무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집회불허사건에 대한 야당측의 비판이 제기됐고, 국회는 여야간 갈등으로 번졌으며 검찰은 윤보선 총재의 발언에 대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수사하고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그는 군사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이라며 바로 항의하였다. 윤보선의 비판 발언은 국회의 1966년 6월 7일에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와 1966년 6월 15일 열린 본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윤보선은 국회에 출두하였고,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은 북괴찬양이나 이적의 목적이 없는 정치적 발언에 법률적 추궁을 하는 것은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정치집회나 정당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하고 있는데 대한 시정대책, 반공법 적용의 남용문제 등에 관하여 질의가 있었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구속, 처벌하라고 비난하였으나 처벌받지는 않고 비난은 곧 가라앉았다. 1966년 여름부터 윤보선과 여러 야당 지도자들은 야당 성향의 도시 지식인과 중소상공인들로부터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서한과 요청을 수시로 받았다. 이후 야당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압력으로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범 야당 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한편 허정은 그의 대통령 후보자 선정에 불만을 품고, 5.16 군사정변의 원인제공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신민당 공천으로 6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로 추대되어 출마하였다. 1967년 3월 그는 장준하 등이 주선한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4자회담(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에 참여하였으나 의견차이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1967년 5월의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로 나왔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은 박정희가 나왔고 야당은 윤보선이 대표주자를 하게 되었다. 윤보선이 출마하자 그의 주변에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그의 선거를 도왔다. 강원용은 5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어 박정희의 재집권을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그를 돕는 일에 간접적으로 나마 나섰 다. 강원룡은 윤보선 후보에게 직접 자금을 전해 주지 못하는 기업인들을 대신해서 자금을 받아 전달해 주는 일을 몇 차례 맡아 했다. 따라서 강원룡 자신의 회고로도 국민들에게는 겉으로는 강원룡이 윤보선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 처럼 인식되었다. 1967년 5·3 대통령 선거의 유세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신민당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 경력을 집중 부각, 지적하였다. 윤보선은 이때는 사상논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박 정권이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부정부패 바로잡겠다", "썩은 정치 바로잡겠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당 일각에서는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전력이 다시 불거졌고, 박정희가 배신자임을 들어 신의없음을 지적하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를 서중석은 윤보선 하면 낡은 정치인, 늙은 정치인이 연상되어서 신선한 맛을 느낄수 없었 다고 평했다. 5대 대선 이후부터 시종일관 윤보선을 지지했으나, 윤보선은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6대 대선 유세기간 중 야당의 후보였던 그는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 며 여당 후보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 이라고 비판했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윤보선의 집안을 친일파 가문이라 공격하였고, 윤보선은 박정희와 공화당으로부터 친일파로 공격받은 것에 분노하였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경력을 들어 다시 공격했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선거기간 중 박정희의 일본군 경력을 예를 들며 공격했다. 윤보선과 민주당은 박정희를 향해 친일파에 공산주의자 경력까지 있으며, 히틀러 등도 긍정적으로 보는 박정희의 사상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며 공격하였다. 6·3 세대로, 저명한 교수 한 분은 "유세기간 중 경제 정책을 발표할 때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원조를 더 받아와 나라살림을 펴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때문에) 박정희는 미웠지만 그의 말은 전율할 만큼 감동으로 다가 왔어. 박정희를 지지하게 되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자립책이 비현실적임을 지적, 미국, 일본과 교류 없이 문을 닫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반론을 제기했다. 6대 대선에서도 박정희의 공산주의사상과 남로당 경력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의혹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선거는 윤보선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그해 5월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116만 표의 근소한 표차이로 패하여 낙선했다. 박정희는 농어민과 영세민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윤보선의 지지 지역은 수도권과 도심지역이었고, 박정희의 지지 지역은 농촌과 산촌 지역으로 나타났다. 이후 장준하와 함께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였다. 당시에 다른 이들도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과 장준하는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보선과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파병 강행은 국익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비판을 가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정권 치하에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 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장준하와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 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지지하였고 지원 유세를 다녔다. 한편 국민당의 총재였던 윤보선은 장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진보당에 참여했던 박기출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하였다. 장준하가 한때 김구의 비서였다가 이범석의 족청을 거쳐 장면에 의해 발탁된 인사였다는 점 역시 윤보선이 장준하를 탐탁치 않게 보는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부정적인 시각에 관계없이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도왔다. 한편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하였다. 강원용이 윤보선을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윤보선은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리고는 윤보선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원용은 다시 윤보선을 설득하였다.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고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윤보선은 신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유신에 의해 1972년 강제 해산당했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하자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성명을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긴급조치는 모두 무표라고 주장했다.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가 문제되어 목요기도회는 중단되고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되었다. 모임 참가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그들에게 회의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 73년 3월 23일 윤보선은 정구영, 지학순 주교 등 10명과 함께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윤보선은 비상군법회의로부터 민청학련사건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하였다. 다른 연루자들은 구속·기소되었으나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인 관계로 가택수사를 받았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1974년 11월 27일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을 선언하고, 함께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었을 때, 일부 야당지도자는 박정희의 독재를 들어 육영수 암살을 조롱하였으나 윤보선은 재판중임에도 육영수 피격사건에 대한 애도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 1974년말 윤보선은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결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의 대량 기자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3월 14일 동아일보 사태를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또한 그날 방송에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탄압한다며 공격하였다. 이어 같은날 3월 14일 단독으로 3ㆍ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3천 5백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 을 발표하였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대생 김상진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했다. 윤보선은 김상진을 김상진군은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논리정연하고 위정자의 오류와 잘못을 세련된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결코 감정을 앞세운 글이 아니라 사려깊은 논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으로 가득찬 애국적 충고문이었다 라고 평가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75년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 4월 22일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1976년 봄 제2공화국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정일형의 부인 이태영이 윤보선을 방문했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일어서 행동을 할 때라는 의견을 듣고, 그로부터 이태영, 정일형, 김대중 셋이 정일형, 이태영 부부의 사저에서 3·1절에 구국선언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을 입수 하였으나, 선언문이 ‘온건하긴 했으나 독재를 비판하는 강도면에서는 약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윤보선은 아내 공덕귀를 시켜 이태영을 만나, 서명문이 온건하다 하여 서명을 거절하였다. 며칠 뒤 문익환이 서명을 작성하여 그를 찾아왔다. 문익환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은 윤보선은 내용을 읽은 뒤 ‘강도가 높고 할말을 별로 빠뜨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며 문익환이 초안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1976년 3월 1일 새벽 윤보선은 명동성당에 도착, 앞자리에 앉아 70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정치범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고,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석하였다. 윤보선의 주변에는 감시인이 따라붙었고, 정부 당국자와 박정희의 측근들은 계속 박정희에게 윤보선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구속, 처벌해야 된다는 강경론을 펼쳤으나, 박정희도 그가 전직 대통령이자 야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파급효과를 두려워하여 그를 처벌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법정에 출두했다. 당시 삼복더위에도 단추 셋 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검사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한 존댓말로 응했다. 77세 노령에 전 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끌어갈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박정희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다. 재판정 앞에 선 그의 당당함과 깎듯함에 군정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박정희가 무리하게 고령자를 법정에 세웠다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 여론이 형성되었다. 윤보선은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독재행위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1976년 3월 1일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명동민주구국선언 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문익환, 함세운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700여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가택수사를 당하였고, 뒤이어 사실 왜곡 전파 , 헌법 왜곡 비방 및 폐지 선동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최고 징역·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량은 징역 8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법정구속되지 않았다. 5월 김대중은 3.1 민주구국선언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고, 윤보선은 공덕귀 및 이희호, 김홍일 등과 함께 김대중 석방 농성을 벌였다. 1977년 이후 그는 일본의 후쿠다 수상에게 유신체제를 비난하며 독재 정권에 협조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 화제가 되었다. 이는 방송에 보도되었고, 정부와 여당에서는 다시 그를 친일파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한편 그는 계속 김대중 석방구명운동에 동참했고, 1978년 김대중은 석방된다. 1977년 3월 22일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은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7년,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일본 후쿠다 수상에게 박정희 유신정권과 유착한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대한 정책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는 긴 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오랫동안 윤보선의 서신발송을 묵살하던 한국 언론은 뒤늦게 편지의 내용을 입수,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윤보선이 일본에 내정간섭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 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1977년 강희남, 문익환 목사 등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인사들을 면회하러 공덕귀, 양일동, 이희호 등을 대동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갔다가 거절당하고 되돌아왔다. 1977년 9월 광주 고법의 강희남 목사 첫 공판일에 방청객으로 참관하였으나,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9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과 공동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청계피복지부 노동조합 탄압에 붙여) 를 발표하였다. 1977년 12월 성명서 학생탄압을 중지하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최근 학원 사태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 를 발표하다. 1978년 1월 6일 재야인사들과 곧동으로 옥중에 수감중인 민주인사를 위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때 반유신 운동의 해외홍보를 위해 해외인사들과의 연대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 며 반대해버렸다.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문익환의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해 10월 17일 윤보선은 함석헌, 문익환 등 야당 및 재야인사 402명과 12개의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1978년 12월 7일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함께 성명서 12ㆍ12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 을 발표하다.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국민연합이 체제를 개편하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으로의 개편되었을 때 윤보선은 함석헌, 김대중과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4일 안국동 사저에서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였고, 3. 1절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이 됐다. 이후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영삼 제명 파동 소식을 듣자 그는 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며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10월 26일 그는 안국동 사저에서 박정희의 피격 운명소식을 접하였다. 1979년 10·26 사태로 현직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피살되자 그는 인과응보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후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를 예상하고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김영삼, 김대중에게 요구하였으나 결렬되었다.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서신을 보내 유신 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대의원 간선제로 최규하 총리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재야인사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기로 한다. 윤보선은 최규하의 대통령직 승계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적인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묵살당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의 재야인사 및 학생운동가들과 면담, 군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장을 실내에서 결혼식 형태로 하기로 정하고 연세대 복학생인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타계한 윤형중 신부의 성씨에 민주주의 정부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가상의 여성)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정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 종료 후 계엄군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1979년 11월 YMCA위장결혼사건으로 피체, 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벌써 80이 넘었다. 주목되는 점은 유신체제에서 민주화 투쟁과 관련된 윤보선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미국의 국무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11월 24일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석헌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윤보선 등은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는 대신 위장결혼식 참석자들의 형량을 낮추어줄 것을 탄원하여, 전원 형량이 감경되었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함석헌과 불구속되었던 윤보선은 법정구속되지는 않았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직 3부 요인과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할 때,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고, 바로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2월 28일 최규하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윤보선, 김대중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단행되어, 복권되었다. 9월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의 봄 당시 윤보선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불러 화합하고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이 모두 호응하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1980년 2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1980년 3월에 이르는 시기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정국을 관망만 했다. 그리고 4월 들어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63년 민정 이양 이후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각자 대권 행보에 나섰다. 또한 김영삼은 기타 야당 인사와 시민단체들에게 딱히 손을 내밀지도 않고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월 7일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거부했다. 윤보선은 다시 중재에 섰다. 4월 7일 윤보선의 중재로 두 사람은 4월 12일 윤보선과 함께 3자 회동을 했지만 대권을 향한 두 사람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윤보선은 다시 한번 힘을 합치라고 권고했지만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대권과 관련해 현충사를 참배하자 같은 날 김대중은 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현충사 부근 윤봉길 생가를 방문한다. 두 김씨에게 다시 한번 단일화를 추진시키려고 자리를 주선했지만 실패하자 윤보선도 더이상 이들과의 접촉을 단념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해 8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다. 그가 물러나자 민주당 구파는 장택상과 조병옥이 발탁한 김영삼이 영도하게 된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시절과는 달리 정부에 적극협력하여 국정자문회의등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줄곧 국정자문회의 의원을 지냈다. 1980년 초 전두환과 신군부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을 직접 방문, 면담하였다. 전두환 등은 윤보선에게 박정희정권의 부패상 등을 지적 자신들은 박정희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할테니 도와 달라 고 했다.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아온 데다가 기약 없는 민주화 운동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강원룡과 천관우, 지학순 등과 함께 국정자문회의 의원 직을 수락하는데 세간에서는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을 가리켜 변절자 윤천지강 이라는 비아냥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인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함께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남편을 말렸다. 그러나 말리는 공덕귀와 남편 윤보선 간에 고성이 오갔다. 윤보선은 아니 공덕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가 전두환의 독재에 협력하였다며 학생운동가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그는 학생운동가들의 반미주의적인 활동은 야당 운동, 학생 운동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후 줄곧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야당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윤보선은 공산주의 혁명론과 민족 해방론, 반미주의 사상을 가진 운동권을 극도로 불신하였다. 강원용은 이를 두고 윤보선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 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981년 4월 23일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4년, 이전에 민청학련에 연루되었던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하였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가 있었다. 전두환은 윤보선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그래서 윤보선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사면, 복권시키는데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 역시 관련자 사면복권에 활약을 하였다. 한편 1980년대 중반 일부 학생운동가들의 반미 시위에,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며 반미주의적인 경향에는 반대하였다. 학생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남북협상으로 태어날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생겨난 부산물로 여기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재야, 학생운동가들의 입장을 옹호하였지만 정부수립을 분단의 원흉으로 보는 시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곧 극우 세력과 학생운동가들의 날선 비난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방관하였다. 1985년 6월 제4회 전국사회복지대회준비위원회에서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에 선임되었다. 1985년 3월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12월 미국 US 국제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87년 6월 22일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6.10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작은 메모를 보냈다. 또한 강원룡, 신현확 등의 개신교 인사와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을 추천, 이들의 말을 듣고 시위대에 대응하라는 주문을 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를 지지하기도 했고, 1987년 12월 14일에는 대통령 선거에 즈음한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후 줄곧 노태우 정부를 지지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노태우 공개 지지 선언은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 실패,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과 함께 학생운동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숙부 윤치영의 구순기념논문 봉헌 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밖에 강원룡, 김수환 등의 강연회와 기독교단체의 운동에 적극 후원, 참여하기도 했다. 만년의 윤보선은 양복 한 벌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 양복은 어려운 중에 있던 자신을 찾아준 것을 감사히 여긴 디자이너 이정송이 재단해준 양복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는데 조카 윤남경에 의하면 1975년경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다 한다.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 1988년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88년 5월 잠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병세가 악화, 1989년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나, 동년 1989년 5월 14일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에 폐렴까지 겹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 안정을 되찾아 자택에 요양했으나 급성 신부전증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1990년 3월 말 다시 노환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한 뒤 투병하다가, 7월초 병환에 차도가 없자 퇴원, 임종을 위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1990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가족장(家族葬)으로 진행되었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에 위치한 가족묘에 5대조·부모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국립묘지 안장 의견에 대해 독재자와 함께 누울수 없다고 반대했다 한다. 상훈으로 인촌문화상 을 수여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92세였다. 사후 부인 공덕귀는 앞서 간 남편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집안에 상청을 차려두고, 거기에 남편의 사진과 촛대와 꽃을 두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매주 교회에 예배보러 나갈 때는 남편이 늘 앉았던 자리에 꽃을 갖다 놓곤 했다. 안동교회에 아버지 윤치소와 그의 사후 윤보선이 앉아있던 좌측 맨 앞줄의 왼쪽 끝 좌석은 윤보선이 앉던 자리라는 표석이 붙여졌다. 그의 사후에도 1997년까지 부인 공덕귀가 살던 그의 서울 안국동 사저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438호로 지정되었다. 윤보선의 생가 역시 1984년 12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12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의 생가에 아산시와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등의 주최로 윤보선 기념전시관이 열린 뒤, 바로 윤보선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998년 한때 건국훈장 추서 대상자로 한때 논의되었으나 곧 흐지부지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년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서울특별시 안국동 사저는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으로 후에 100칸을 넘게 되었다. 그의 안국동 사저는 한민당때부터 정계 거물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48년 9월 윤보선이 스스로 자신의 안국동 사저 별채를 한국민주당의 회합장소로 제공한 이래 계속 한민당과 민국당, 민주당의 주요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저를 이승만의 이화장이나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 박헌영의 혜화장에 비교하여 안동궁 (安東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주요저서 《구국(救國)의 가시밭길》 (한국정경사, 1967)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0) 농림업 진흥의 긴급성에 관하여(1954) 한성 교동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게이오 중학교 수료 일본 도쿄 세이소쿠 고등학교 졸업 영국 우드버그 대학교 철학과 중퇴 1930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 졸업 (고고학 학사)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 석사 1985년 12월 12일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85년 미국 US국제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무궁화 대훈장 인촌문화상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충청남도 선거구)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1937년 첫 부인 여흥 민씨 사별 1938년 2월 18일 조모 한진숙 상(喪) 1939년 11월 4일 조부 윤영렬 상 1944년 2월 20일 부친 윤치소 상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위원 1946년 민중일보 사장 1947년 민중일보사 사장 재선 1947년 우남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 1947년 한영협회 회장 1948년 이승만 국회의장 비서실장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충남 아산) 낙선 1948년 12월 8일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 1948년 12월 서울특별시 시장 1949년 상공부장관 1950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1950년 12월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 위원, 같은 날 협의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59년 민주당 상임위원 1960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다. 구파의 지도자 신익희 ,조병옥의 사망으로 구파의 지도자가 되어 신파의 지도자 장면과 대립하다. 1960년 국회의 간접선거로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다. 1961년 3월 청와대시국수습4자회담을 주최하였다. 1961년 3월 12일 서울 청량리 1동 동사무소 창고의 홍국직업소년학교에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과 함께 방문하였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교사로 일하던 이곳을 세상에 알리고자 석호필은 대통령에게 방문을 청하는 편지를 썼고, 윤보선은 스코필드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여 왔다.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다. 1961년 10월 26일 브라질 대사에 신임장 봉정을 봉정하고, 군대를 사열하였다. 1961년 10월 28일 농촌지도자들과 면담, 이어 적십자 청소년, 한미연합사령관 슈프 대장과 면담. 1961년 10월 28일 유엔의 날 축사 발표 1962년 3월 22일 정치정화법에 항의 하여 하야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입후보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1965년 1월 23일 외무부 장관 김용식을 만나 면담하다. 1965년 2월 19일 장택상 등과 함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를 주관하다. 1966년 신한당 총재 1967년 제6대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 출마 1969년 6월 18일 모친상 1971년 신민당 탈당,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박기출, 장준하 등과 국민당 창당, 국민당 총재 취임 1973년 유신 정권에 의해 국민당, 강제 해산당함 1974년 비상보통군사법회의에서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제소되었다. 1974년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 구형,항소 기각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5년 확정 1977년 항소 후 대법원에서 명동사건 상고 기각 원심 확정되었으나 이때 윤보선 등 고령자는 형집행 정지되었다. 1979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 1979년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었다. 1980년 1월 YMCA 위장결혼식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1980년 형집행 면제 1980년 2월 29일 복권되었다. 1981년 고령으로 정계 은퇴 1982년 1월 4일 국무총리 유창순의 방문을 받았다. 1983년 보신각 새종 중주(中鑄) 위원회 위원장 1983년 9월 2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린 고하 송진우동상 제막에 참석하였다. 1984년 3월 13일 고려청자헌납위원회 고문 1984년 4월 백사 이윤영 회고록의 서문을 짓다. 1985년 1월 17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낙준의 추모 예배에 참석하였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재선) 1987년 윤치영의 구순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1988년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 1989년 병으로 요양하였다. 1989년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 1991년 사후 회고록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2집 출간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았다. 윤보선은 항상 비서관과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 우리식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일민주의 등을 거짓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이고 타당하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매사에 상식을 강조하였다. 비서관 김준하에 의하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을 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마음가짐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상식이었다. 고 증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 을 헌법으로 대치한다. 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의 일이나 개인 생활이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준하 비서관은 이를 그의 첫 가르침 이라 회상하였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군사 정권 집권 초, 미국의 잉여농수산물 무상 지원을 시도하면서 야당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자 김병로 등은 반대했지만 윤보선과 장택상은 적극 동조하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군사 정권에서 도움을 요청한 밀사가 장택상을 방문하였다. 밀사는 장택상에게 정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장택상 가인 김병로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김병로는 장택상과 군사정권 인사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듣고 나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는 "비록 국민의 식량 문제라고 할지라도 미국 잉여 농산물이 한국에 때맞춰 들어오고 보면 이 군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좀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그자리에서 나와 즉시 안국동 윤보선댁을 찾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장택상이 김병로가 나의 도미하는 문제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더라 고 덧붙였더니 윤보선은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 면서 김병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으로 문제가 국민의 식량 문제인만큼 누구 심부름이든 가릴 것 없이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힘닿는대로 해결지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장택상이 정부대표 자격이 아니면 받아줄수 없다고 했고 결국 실패했다. 장택상이 기자회견까지 마치자 윤보선은 직접 환송한다고 자택까지 불러서 저녁 대접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에서는 장택상에게 취소됐다고 연락했고, 장택상과 윤보선은 분개했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정당을 초월해서 협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정권 기간 내내 그는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의 생존권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특히 식량이나 약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싸움보다는 일단 협력할 것을 역설했다. 윤보선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대단하였다. 강원룡에 의하면 윤보선 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 라고 지적했다. 강원용은 오히려 박정희가 좌익이며 위험 인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원용에 의하면 그는 한때 이범석과 가깝게 지냈던 김정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하였다. 그는 영국 생활과 유럽 생활 중 영수증을 잘 주고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은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바가지를 씌운다는 점과 적당히 바가지를 씌우는 상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내 딴에는 중요한 물건과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쳤는데, 내 수하물을 취급하는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하물표(영수증)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짐표를 요구했더니 하물취급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당신 짐은 글래스고에 가서 찾으면 되지 않소? 표는 무슨 표요?"하고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의심하고 경계하였다. 글래스고 시에 도착해서는 마중나와 있는 윤치왕에게 이를 걱정해서 말했더니, 윤치왕은 그를 이끌고 따라오라며 화물차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 윤치왕은 그에게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각자 자기 짐만 집어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남의 짐도 좋은것이 있다 싶으면 가져가는 조선인들의 습성을 봐온 그는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이 허술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고 한다. 그때 영국은 이만큼 탄탄한 사회구조에 이미 서 있었으니 10전어치 물건을 사고도 반드시 영수증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온 이 동양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게 보였을까. 하며 이를 오래도록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신적인 혁명부터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부도덕성과 비정직성으로 들었다. 윤보선은 조국의 근대화 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 와 정신적 근대화 역시 병행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의의 원칙에 기반한 의회주의, 보통선거,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부 구성을 이행할 것을 여러번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박정희와 그의 유신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 빈민권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되, 그 원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상식을 제시했다. 윤보선은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의 후유증이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이고 그릇된 사고와 의식, 타성과 풍조를 심었다고 진단했고, 국민들 스스로 씻어내고 정신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부패와 퇴폐의식을 조장했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를 남기는 등 한국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 3.1 구국 선언, 민주화 운동 단체 가입, 크리스찬아카데미, 민주화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날조한 사법살인으로 확인된 인혁당 사건,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민주화운동 탄압에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는 중앙정보부와 형사들의 감시, 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는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설립하여 헌당에 참여한 예장통합측 장로교회이다. 그의 집인 안동장 앞에도 중앙정보부는 3층 높이의 초소를 세워두고 그의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였다 한다. 윤보선은 이를 대단히 불쾌히 여기면서도 박정희가 죽고 난 뒤, 이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윤보선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1960년 8월 대통령 취임 후 취임기념우표 발행 건의가 들어왔으나 그는 살아있는 인물을 도안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였다 기념 주화의 발행에 대한 건의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각료에게 각하라는 명칭은 자제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얼굴이 도안된 주화 발행 역시 거부했다. 그는 우표와 화폐에는 나라에서 기념할 만한 인물을 넣는 것이 상식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다만 1960년 8월 27일과 1961년 8월 27일의 청와대에서의 대통령 탄신일 기념행사(의전에 의한 행사)는 수용하였다. 대통령 재직 중 청와대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다. 정원의 화단 가꾸기와 독서를 즐겨하였다. 그는 밥은 꼭 잡곡밥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흰 쌀밥으로만 식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콩, 보리, 팥, 조 등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식사를 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 16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대선 경쟁자이자 박정희의 제3공화국, 제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한다.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로도 평가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것 역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에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 는 평가도 있다.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반박정희 투쟁에 있어서의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비서관이었던 김준하는 평하기를 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군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 한다. 이어 김준하는 그가 지극한 효자였다고 평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도 그려진다. 한영우는 5.16 군사정변 당시 그의 묵인적 행동을 지적, 이 사건(5·16군사 정변) 중심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그는 한국민주당에서 민주국민당, 그리고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 야당에서 구파 계열을 대표하는, 한 파벌의 정치인일 뿐이다. 라고 보았다. 더한 지적도 많다. 친일파 집안의 덕으로 학창시절을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그가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친일파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윤보선은 자유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는 비판도 있다. 정대철은 그가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 고 평가했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식의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서중석은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와 제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김상진 할복 사건, 명동구국민주선언,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4.19 혁명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적어도 장면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정도의 양식은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그대로 대통령의 자리에 눌러 앉아 있었다. 고 비판했다. 허정은 그가 야당 대열에 복귀할 자격이 있느냐며 수시로 공격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도 1963년 1월 초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63년 1월 2일 김병로, 윤보선 등이 모여 민정당의 발기에 합의했다. 허정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윤보선 씨의 성급한 정치활동 재개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 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 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 고 기술하였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다가 되려 역공세당했다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한국 전쟁 당시 이른바 빨갱이 파문 과 연좌제 로 심한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윤보선의 매카시즘 대선 전략 은 과거의 상처만 되살린 꼴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도리어 박정희가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다 는 동정심을 가져 박정희에 지지표를 쏟았다. 결국 박정희는 15만표차로 당선 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 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6대 대선 당시 윤보선은 민중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고집하여 또다시 야당의 분열을 일으켰다 고 보는 시각도 있다. 7대 대선에서도 출마하였으나 후보사퇴를 피하려고 박기출에게 양보한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숙부 윤치영에게 수인사나 목례도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 점도 비판받고 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권위주의, 전체주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윤보선도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은 "권위주의적인 윤보선과 다툼을 싫어하는 장면의 대조적인 성격"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그를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고 평하였다. 그는 쉽게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자기 사람이 되면 각별하게 챙기고, 그의 가족의 생일, 기일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러나 김남 비서관의 결혼식에 장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으려다가 선우종원이 만류하는 바람에 참석하였다. 이것이 사람들 뒤에 들어가면서 그가 김남 비서의 결혼식을 기피하더라는 말들만 돌고 돌았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인물평이 있다. 한편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1960년 8월 29일 민정시찰 시 각료들을 불렀다가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명사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전까지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신사다.", "대부호 명문집 아들이다" 이렇게만 알았는데, 이주 잘못 안 것이었다 한다. 서중석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이 된 직후 내각 책임제하의 수반이었던 장면 국무총리와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서중석은 윤보선이 1960년 4·19 혁명이 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잘 몰랐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봤다. 서중석은 윤보선처럼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사람은 없다 며 그것을 보면 사람은 겉보기하도 다르 다고 평가했다. 깔끔하고 말쑥한 신사였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랫배가 나오지 않았고, 피부결이 늘어지지도 않았다. 눈가 주변에 약간의 주름과 검버섯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보이는 편이었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 탓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195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윤보선은 최기일을 면담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윤보선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나는 그이를 싫어했지만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그와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는 미장 그릴에서 점심 대접을 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후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 는 평을 내렸다. 윤보선 본인은 5·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16 군사정변을 추인 내지는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더 나가 학생혁명만 혁명이고 군사혁명은 혁명이 아니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 외에 지지는 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5월 16일 윤보선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미대리대사를 만났다.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미국대사 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윤보선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5.16 군사 정변이 터지자 그는 1군사령관 이한림 1군단장 임부택 등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국군 끼리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면서 진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의혹도 있다. 장면은 윤보선이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자신의 비서관들을 보내 진압을 만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군사정변 당시 장면의 포기로 사실상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 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 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 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이 제기하였다. 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 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 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에 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 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국무총리 장면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 고 반응했다고 한다. 장면은 윤보선이 비서관들을 보내 쿠데타 진압을 저지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장면은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서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 는 것이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눈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는 것이 장면의 주장이다.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을 진압하러 온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1961년 5월 17일 낮 11시 두 사람은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대통령은 그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나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현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매그루더 미8군사령부 사령관은 미국 합참의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장면의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은 후일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다. 박종률에 의하면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 이라는 것이다. 박종률에 의하면 당시 국방차관인 우희창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 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일행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 현석호는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올 것이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유원식도 같은 진술을 했다. 후에 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허정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사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 하고 힐문 조차도 했다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를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윤보선이 죽을 때까지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 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비서관을 지냈던 김준하에 의하면 그는 5·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김준하에 의하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덧붙였다. 김씨는“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고 증언하였다. 또 그는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 는 것이다. 또한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대학시절 고고학을 택한 이유로 그는 고고학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인간으로서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학문"으로 순수과학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 가운데 고고학을 택했다고 한다.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윤보선과 장택상은 박정희가 자신의 가계와 가난한 가정 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 1961년 1월 1일 신정때 한국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의 세배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두 장을 가져와 도안을 문제삼았다. 소가 도안된 우표는 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고, 색실로 꽃버선이 도안된 우표를 들고 와, 소(丑)을 내세워 윤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인쇄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 선우종원은 우표 샘플을 올리는 방법과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1961년 자신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 김상협의 결혼식이 있었다. 김상협은 조폐공사 직원이기도 했는데,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으로부터 결혼식 참석 부탁을 받자 그는 국무총리 참석하나요 라고 되물었다. 온다는 답변을 받자 그는 나는 안 가겠소 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선우종원은 저와 한직장에 근무하는 데다가 인촌 선생의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며 항의하여 가까스로 달래자 참석하였다. 1960년대 중반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쿠라 라고 공격했고 이는 유진산의 별명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계에서 여당과의 타협론을 벌이는 정치인에게는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윤보선은 풍수설을 맹신하였다. 윤보선이 1990년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를 미리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보선은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보선 외에도 이승만, 그의 당숙 윤치호도 단골이기도 했다. 사망 직전까지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것이었으나 전직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그는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초대될 수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 최초로 최면시술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 당시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문제로 류한평 박사 등의 상담을 받고 최면시술을 받기도 했다. 당숙 친일파 윤치호 그의 둘째딸은 그의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인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스승 신규식과는 사돈간이 된다. 또한 독립운동가 민필호, 신명호, 김준엽은 사위 신준호를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음악가 겸 방송인 남궁연은 그의 동생 윤완선의 외손자였다. 조부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조모 청주한씨 한진숙(韓鎭淑, 1851년 ~ 1938년 2월 18일), 한말 전라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 * 부 윤치소(尹致昭, 호는 동야(東野), 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 외조부 이재룡(李載龍, 중추원 의관 역임) * 모 이범숙 (李範淑, 호는 명사(明師), 본관은 전주, 1876년 10월 15일 ~ 1969년 6월 18일, 교회 권사이기도 했다.) ** 남동생 윤완선(尹浣善, 1901년 2월 18일 - 1970년 5월 23일) ** 제수 이순정(? - 1998년 7월 20일) ** 남동생 윤원선(尹源善, 1910년 10월 27일 - 1971년 12월 16일, 前 경기도지사) ** 제수 이진완(李辰琬, 1916년 - 1997년, 영선군 이준용의 서녀, 헌의대원왕 증손녀) ** 남동생 윤한선(尹漢善, 1912년 8월 21일 - 1972년 10월 14일) ** 제수 김정현(? - 2007년 8월 21일) ** 남동생 윤택선(尹澤善, 1914년 11월 20일 - 1998년 4월 6일)-서울 안동교회 장로 역임 ** 제수 이기화(1914년 5월 7일 - 1996년 5월 30일) ** 남동생 윤형선(尹瀅善, 1917년 4월 2일 - ?) ** 제수 이덕자 (윤형선의 첫 번째 부인) ** 제수 변은영 (윤형선의 두 번째 부인) ** 여동생 윤예경(尹禮卿, 1905년 6월 1일 ~ 2001년) - 이능섭 과 결혼 ** 여동생 윤의경(尹義卿, 1912년 9월 28일 ~ ?) - 오진영 과 결혼 ** 여동생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 ~ 2011년 3월 22일) ** 매제 이재영(李宰寧, 1918년 5월 4일 ~ 2006년 2월 19일), 역사학자 이병도의 조카, 이병묵(李炳默)의 아들 장인 민영철 (閔泳喆, 1864 ~ 1912, 첫 부인 여흥민씨의 아버지, 사촌동생 윤시선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 * 아내 여흥 민씨(驪興閔氏, 1894년 ~ 1937년) ** 장녀 윤완구(尹琓求, 1913년 12월 31일 ~ 2007년 3월 26일, 남흥우의 아내) ** 사위 남흥우(南興祐, 1913년 6월 7일 ~ 2012년 10월 6일) ** 차녀 윤완희(尹完嬉) 화가. 신준호의 아내, ** 둘째 사위 신준호(申俊浩, ? - ?),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의 장남 *** 외손자 신중수(1941년 ~ ), 독일 거주. *** 외손자며느리 이의균(1943년 ~ ) *** 외손자 신흥수(1943년 ~ , 해태유업 직판부장) *** 외손자며느리 양향숙(1950년 ~ ) *** 외손녀 신경수(1939년 ~ ) *** 외손녀사위 이동환(1938년 ~ , 미국 뉴저지에 거주) *** 외손녀 신문수(1944년 ~ ) 장인 공도빈 (孔道彬, 공덕귀의 아버지) 장모 방말선 (方末線, 공덕귀의 어머니) * 아내 공덕귀(孔德貴, 1911년 4월 21일 ~ 1997년 11월 24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부인) ** 장남 윤상구(尹商求, 1949년 10월 29일 ~ ) 기업인, 사회기관단체인, 건축자재 사업가. ** 장자부 양은선(梁恩仙, 1954년 ~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 손녀 윤영란 *** 손녀 사위 문윤회 *** 장손 윤일영 ** 차남 윤동구(尹同求, 1952년 7월 12일 ~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 차자부 최영선(崔映仙) 사돈 신규식(申圭植, 1880년 음력 1월 13일 ~ 1922년 양력 9월 25일) 사돈 조정완 사돈 신명호(申明浩 사돈 민필호(閔弼鎬, 1898년 2월 7일 ~ 1963년 4월 14일, 독립운동가, 사위 신준호의 매부) 사돈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 6촌 형 윤광선의 장인 사돈 민영철(閔泳喆, 1864년 ~ 1912년) - 큰아버지 윤치오의 딸 윤시선의 시아버지이자 본처 민씨의 친정아버지, 민영환의 6촌 동생 사돈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 - 8촌 매형 현정건의 동생이며, 큰아버지 윤치오의 후처 현송자의 6촌 동생 사돈 손정도(孫貞道, 1872년 7월 26일 ~ 1931년 2월 19일) - 당숙 윤치창의 장인 사돈 손원일(孫元一 , 1909년 5월 5일 ~ 1980년 2월 15일) - 당숙 윤치창의 처남 사돈 방일영(方一榮, 1922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 - 6촌 형 윤영선의 손녀사위 방상훈의 아버지 사돈 방응모(方應謨, 1883년 9월 29일 ~ 1950년 8월) 이순재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이순재 - 1989년 제2공화국 MBC 드라마 원근희 - 1989년 무풍지대 KBS 드라마 이순재 - 1993년 제3공화국 MBC 드라마 이순재 - 1995년 제4공화국 MBC 드라마 이순재 - 1995년 코리아게이트 SBS 드라마 이순재 - 1998년 삼김시대 SBS 드라마 이종구 - 2004년 영웅시대 MBC 드라마 이종구 - 2005년 제5공화국 MBC 드라마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올것이 왔다. 라는 말을 하여 유행시켰다. 당시 국방부장관인 현석호는 이를 두고 잊혀지지 않는 말 이라 했다. 민주당 신파 계열과 일부 재야 운동가들은 그의 이 발언을 문제삼았다. 이 발언은 그의 한민당 경력과 함께 일부 재야세력이 그를 미워하는 하나의 이유가 됐다. 대한민국 5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 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정신적 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총선 국회의원(충남 아산군) 1대 한국민주당 14.17% 7,069표 4위 낙선 제3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갑) 3대 민주국민당 32.35% 9,485표 1위 25px 제4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갑) 4대 민주당 63.20% 22,780표 1위 25px 제5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갑) 5대 민주당 81.85% 31,924표 1위 25px 제4대 대선 대통령 4대 민주당 82.2% 208표 1위 25px 제5대 대선 대통령 5대 민정당 45.09% 4,546,614표 2위 낙선 제6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6대 민정당 20.1% 1,870,976표 전국구 1번 25px 제6대 대선 대통령 6대 신민당 40.93% 4,526,541표 2위 낙선 제7대 대선 대통령 7대 국민당| 사퇴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한국정경사, 1967)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3:Between and Beyond》(한길사, 2003) 심지연, 《장면, 윤보선, 박정희(1960년대 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백산서당, 200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지동욱, 박윤희 옮김, 《한국 대통령 8인의 비극적 말로의 비밀》 (사람의 향기, 2003) 주돈식, 《우리도 조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사람과 책, 2004)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1:건국에서 제3공화국까지》 (들녘, 1998)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한승주,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종로서적, 1983) 현석호, 《한국인물대개 장면》 (박우사, 1972)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상산회고록》 (일신문화사, 1968)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상산회고록》 (강우출판사, 1967) 김준하, 《대통령과 장군:윤보선 대 박정희》(나남, 2002)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한국의 군정기 제2공화국 제1공화국 제3공화국 감리교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민주당 신민당 민중당 신민당 5·16 군사 정변 호헌동지회 김상진 할복 자살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YMCA 위장결혼식 사건 국정자문회의 동아일보 해평윤씨 홈페이지 해위 윤보선 기념사업회 “김형욱 ‘대통령 지면 윤보선 암살’ 명령”- 한겨레신문 윤보선대통령생가:문화재청 역대 서울 시장:2대 시장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1897년 태어남 분류:1990년 죽음 분류:아산시 출신 분류:호헌동지회 분류:대한적십자사 대표 분류: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후보 분류: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분류:조선귀족 거부자 분류:한국의 군정기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 분류:대한민국의 상공부 장관 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 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 분류:한국민주당 당원 분류: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 분류:민정당 분류:신민당 분류:국민당 (대한민국, 1971년) 당원 분류: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자 분류: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 분류:해평 윤씨 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동문 분류:에든버러 대학교 동문 분류:반파시스트 분류:테러 피해자 분류:범죄 피해자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
나도향 나도향 (羅稻香) (1902년 3월 30일 한성부 ~ 1926년 8월 26일)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 소설가이다. 본명은 나경손 (慶孫)이며 필명은 나빈 (彬)이다. 한성부 용산방 청파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이듬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여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작품 경향을 바꾸어 자연주의적 수법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하였는데,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많은 작품을 써서 천재 작가로 알려졌으나 폐병으로 인해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요작품으로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이 있는데,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작품들 중 《벙어리 삼룡이》,《뽕》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분류:1902년 태어남 분류:1926년 죽음 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분류:나주 나씨 분류:배재고등학교 동문 |
문소리 (1974년 7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연지초등학교(前) → 서울삼전초등학교 졸업 (1987년) 석촌중학교 졸업 (1990년) 잠실여자고등학교 졸업 (1993년)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 학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석사졸업 2011년 3월~ 건국대학교 예술학부 영화전공 초빙교수 2016년~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초빙교수 1974년 7월 2일 부산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시절에는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입학을 준비하던 무렵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오디션에서 여자 주인공인 윤순임 역으로 발탁되어 스크린에 데뷔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영화에 집중하였다. 문소리라는 이름을 대중에 알린 것은 《박하사탕》에 이어 2번째로 설경구와 호흡을 맞춘 2002년작 《오아시스》에서였다. 문소리는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에 걸려 자기 방 안에 갇혀 사는 여주인공 역할을 맡아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자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바람난 가족》에서는 옆집 고등학생을 유혹하는 변호사 부인 역을, 《효자동 이발사》에서는 이발사 부인을 연기한다.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영상예술학 영화제작 전공 과정)에서 《여배우는 오늘도》를 연출하고, 석사 학위 논문 「단편영화 제작보고서-연출을 중심으로-」를 썼다. 2003년 정재일의 뮤직비디오 〈눈물꽃〉에 출연했고, 이를 연출한 영화 감독 장준환과 2006년 12월 24일 결혼했다. 문소리는 진보신당의 당원으로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덕양구 갑 국회의원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하였으며 2011년에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 단일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멘토로 참여하기도 했다. 연도 영화 배역 감독 비고 1999년 박하사탕 윤순임 이창동 2000년 블랙 컷 미숙 이동하 단편영화 2001년 외계의 제19호 계획 처녀귀신 민동현 단편영화 봄산에 정우 이지행 단편영화 2002년 오아시스 한공주 이창동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여우상)제23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제10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제5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신인 연기자상)제29회 시애틀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2003년 바람난 가족 은호정 임상수 제2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제11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제41회 대종상 영화제 (여우주연상) 2004년 효자동 이발사 김민자 임찬상 2005년 사랑해, 말순씨 김말순 박흥식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본인 다큐멘터리 2006년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조은숙 이하 가족의 탄생 미라 김태용 제47회 데살로니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2008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한미숙 임순례 사과 현정 강이관 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울여자 목소리 홍상수 날아라 펭귄 송희정 임순례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나레이션 안해룡 다큐멘터리 디 엔드 백현진 단편영화 2010년 하하하 왕성옥 홍상수 제19회 부일영화상 (여우 주연상) 작은 연못 피난민 이상우 하녀 의사 임상수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 오성윤 다른 나라에서 금희 홍상수 2013년 분노의 윤리학 김선화 박명랑 스파이 안영희 이승준 2014년 관능의 법칙 조미연 권칠인 만신 70년대 김금화 박찬경 자유의 언덕 영선 홍상수 2015년 필름시대사랑 병원 청소부 장률 최고의 감독 문소리 단편영화 / 주연,연출,각본 동행 문소리 단편영화 / 주연,연출,각본 2016년 아가씨 이모 박찬욱 특별출연 가려진 시간 민경희 박사 엄태화 특별출연 2017년 특별시민 정제이 박인제 여배우는 오늘도 문소리 문소리 배우 / 연출 / 각본 1987 버스 위에서 선창하는 사람 (목소리) 장준환 특별출연 2018년 리틀 포레스트 엄마 임순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송현 장률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김지훈 2019년 배심원들 재판장 김준겸 홍승완 연도 제목 역할 비고 2007 태왕사신기 서기하 / 가진 2008 내 인생의 황금기 이황 2013 드라마 페스티벌 - 하늘재 살인사건 정분 2016~17 푸른 바다의 전설 사월 / 안진주 2018 라이프 오세화 《전체관람가》 (JTBC, 2017년) 《방구석 1열》 (JTBC, 2018년) LG유플러스 (2004년) 르노삼성자동차 SM5 (2004년) 남양유업 드빈치 (2009년) 다음카카오 (2015년) KB국민카드 (2016년) 년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02 제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 오아시스 제23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제10회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1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신인여우상 여우주연상 제5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여자신인연기자상 제3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 씨네21 영화상 올해의 여자배우 문화체육관광부 옥관문화훈장 (4등급) 2003 제29회 시애틀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오아시스 제13회 스톡홀름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바람난 가족 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11회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2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여우주연상 제4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 제6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여자연기자상 제2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씨네21 영화상 올해의 여자배우 2004 제41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제1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배우상 제1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최고의 여배우상 2006 제47회 데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가족의 탄생 2008 MBC 연기대상 여자 우수상 내 인생의 황금기 제29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16회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 2010 제19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하하하 제8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여우주연상 2012 제21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다른 나라에서 2015 제2회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 자유의 언덕 2016 제18회 정동진독립영화제 땡그랑동전상 최고의 감독 2017 제11회 아시안 필름 어워즈 여우조연상 아가씨 제54회 대종상 여우조연상 특별시민 제1회 더 서울어워즈 영화부문 여우주연상 여배우는 오늘도 제5회 마리끌레르 아시아스타어워즈 스페셜 어워드 제38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여우주연상 2018 제5회 들꽃영화상 극영화부문 감독상 제5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감독상 제23회 춘사영화제 여우주연상 제27회 부일영화상 신인감독상 제2회 더 서울어워즈 드라마부문 여우조연상 라이프 제38회 하와이국제영화제(BIFF) 할레쿨라니 커리어 어치브먼트상 여배우는 오늘도 제26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제38회 황금촬영상 촬영감독이 선정한 여자인기상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 분류:1999년 데뷔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 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 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분류:서울삼전초등학교 동문 분류:석촌중학교 동문 분류:잠실여자고등학교 동문 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 분류: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동문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부산광역시 출신 분류:1974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상 수상자 분류:남평 문씨 |
디지털 (은 아날로그를 다르속적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離散的)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용어는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digit에서 나온 것으로, 숫자를 세는 데 쓰인다. 디지털 컴퓨터에서는 모든 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한다. 문서와 통계 자료뿐만이 아니라 음성 자료도, 영상 자료도 이산적인 값으로 처리한다. 디지털 자료는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음악이나 화상과 같은 일정한 주기로 아날로그 자료 샘플을 채집하여 디지털로 변환하는 과정을 샘플링이라 한다. 이 때, 초당 샘플링 회수는 아날로그 주파수보다 2배 더 높아야 앨리어싱 현상(계단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품질은 필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이어주는 대표적인 기계로는 모뎀이 있다. 디지털 신호 아날로그 이진법 디지털 제어 디지털 패러다임 분류:디지털 미디어 |
헤르만 민코프스키 (, 1864년 6월 22일 - 1909년 1월 12일)는 러시아 제국 태생 독일 수학자이다. 수론의 문제를 기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푸는 기하학적 수론, 수리물리학, 상대성 이론 등에 업적을 남겼다. 러시아 제국 카우나스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후 본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취리히 시절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민코프스키는 n 개의 변수를 갖는 2차 형식(quadratic forms)을 연구하는 과정에 n 차원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과 관련된 것을 알아차렸다. 1896년 출판한 저서 《수의 기하학》()에서 수론의 문제들을 기하학적인 방법과 연관시켰다. 1902년 당시 수학의 중심지였던 괴팅겐 대학교에 오랜 친구였던 다비트 힐베르트의 도움으로 수학 교수직을 얻어 연구하였다. 1907년에는 특수상대성이론이 민코프스키 공간이라 불리는 비유클리드 공간을 이용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관없는 두 개체가 아니라, 합쳐져 4차원 시공간을 이루며, 그를 통해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대칭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이 기하학적인 방법은 나아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1908년 9월 21일 민코프스키는 제80회 독일 자연과학자 모임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는데, 이 연설은 지금도 유명하다. 1909년 괴팅겐에서 사망하였다. 민코프스키 거리 민코프스키 공간 민코프스키 평면 민코프스키 합 막스 플랑크 아르놀트 조머펠트 아인슈타인 분류:1864년 태어남 분류:1909년 죽음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유대계 독일인 분류: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동문 분류:기하학자 분류:유대계 리투아니아인 분류:상대성 이론가 분류:리투아니아계 독일인 |
화성 (火星은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이다. 4개의 지구형 행성 중 하나다.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동양권에서는 불을 뜻하는 화(火)를 써서 화성 또는 형혹성 (熒惑星)이라 부르고, 서양권에서는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따 Mars라 부른다. 오늘날 영어에서 3월을 뜻하는 March도 여기서 생겼다. 매리너 4호가 1965년에 화성을 처음으로 근접 비행을 하기 전까지 과학계 안팎의 사람들은 화성에 대량의 물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대의 근거는 화성의 극지방에서 밝고 어두운 무늬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60년대 중반 이전까지 사람들은 농업을 위한 관개수로가 화성에 있으리라 기대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실 20세기 초·중반의 공상과학 작가들의 상상에 영향받은 것으로, 1950년대 이후의 탐사선에 의한 관측으로 화성 운하는 존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물과 생명체의 발견에 대한 기대로 많은 탐사선들에 미생물을 찾기 위한 센서들이 탑재되어 화성에 보내졌다. 화성에서는 다량의 얼음이 발견되었고,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화성 표면에서의 액체상태의 물은 낮은 대기압으로 인하여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화성의 극관은 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극관에 존재하는 물은 화성의 표면을 11m 의 깊이로 뒤덮기에 충분히 많은 양이 존재한다. 2016년 나사는 화성 표면 안에 얼음이 존재할 것이라고 새로운 발표를 하였다. 화성의 자전 주기와 계절의 변화 주기는 지구와 비슷하다. 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푸스 화산이 있으며, 역시 태양계에서 가장 큰 계곡인 매리너스 협곡과 극관을 가지고 있다. 화성은 밤하늘에 붉은 빛을 띄며 맨눈으로 쉽게 관측이 된다. 겉보기 등급은 -2.91등급이며 태양, 달, 금성, 목성 다음으로 밤하늘에 가장 밝은 천체이다. Earth size comparison.jpg|섬네일|250px|right|지구와 화성의 크기 비교 화성은 붉게 타는 듯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표면적은 지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부피는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은 두 개의 작은 위성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대기권은 매우 얇으며, 표면의 기압은 7.5밀리바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 표면의 95%는 이산화탄소로 덮여 있으며, 이 밖에 3%의 질소, 1.6%의 아르곤과 흔적만이 남아 있는 산소와 2015년 NASA에서 발견한 액체 상태의 물이 포함되어 있다. 궤도선의 관측과 화성 기원의 운석에 대한 분석 결과에 의하면, 화성의 표면은 기본적으로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화성 표면의 일부는 지구의 안산암과 같이 좀 더 이산화규소가 풍부하다는 증거가 있으나 이러한 관측은 규산염과 같은 유리의 존재를 통해서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표면의 대부분은 산화철의 먼지로 덮여있다. 화성의 표면에 일시적이나마 물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화성 표면에서 발견된 암염이나 침철석과 같이 대체로 물이 존재할 때 생성되는 광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화성 자체의 자기장은 없지만, 과거 행성 표면의 일부는 자화된 적이 있음이 관측을 통해 밝혀졌다. 화성에서 발견된 자화의 흔적(고지자기)은 지구의 해양지각에서 발견되는 교대하는 띠 모양의 고지자기와 비교되어 왔다. 1999년에 발표되고 2005년에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로부터의 관측 결과의 도움으로 재검토된 이론에 따르면, 이들 지자기의 띠들은 과거에 있었던 화성의 판구조 활동의 증거일 수 있다. 극 이동(polar wandering)으로도 화성에서 발견된 고지자기를 설명할 수 있었다. 화성의 내부를 설명하는 이론에 따르면, 화성 핵의 반지름은 약 1,480km로 주로 철과 15~17%의 황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화철의 핵은 부분적으로 용융되어 있으며, 지구의 핵에 비하면 가벼운 원소의 함량이 약 2배정도 된다. 핵은 규산염질 맨틀에 둘러싸여 있다. 맨틀은 화성에서 볼 수 있는 많은 판구조 활동과 화산 활동을 일으켜 왔으나 현재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화성 지각의 두께는 약 50km이고, 최댓값은 125km정도이다. 화성의 지질 시대는 세 시대로 구분된다. 노아키안 시대 는 노아키스 테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성의 형성으로부터 38억~35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노아키안 시대의 표면은 많은 거대한 크레이터로 덮여 있다. 타르시스 벌지는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후기에는 엄청난 양의 액체 물에 의한 홍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헤스퍼리안 시대 는 헤스퍼리안 평원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 35억 년 전부터 18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헤스퍼리안 시대의 화성에서는 넓은 용암대지가 형성되었다. 아마조니안 시대 는 아마조니스 평원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8억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대이다. 아마조니안 지역은 크레이터가 거의 없으나 상당한 변화가 있는 지형이다. 올림푸스 화산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용암류가 형성되었다. 마스 익스프레스 오비터의 OMEGA 가시광-적외선 광물학 매핑 스팩트로메터 자료를 기초로 또 다른 시대 구분이 제시되고 있다. 화성의 좌표를 설정하기 위하여서는 자오선과 0점 고도가 정해져야 한다. 화성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해수면 이 없어서, 0점 고도면이나 평균 중력 표면이 임의의 지점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적도와는 달리 경도의 기준점은 임의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통된 규약을 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임의적으로 사이너스 메리디아니(Sinus Meridiani, 적도만( Equatorial Gulf )) 안의 분화구가 0점 자오선을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화성 지형의 몇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화성은 극 지방이 언 물과 이산화탄소를 포함하는 얼음 지대로 덮여 있다. 또한 화성에는 발레스 매리너리스(Valles Marineris) 또는 화성의 흉터 라고 불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협곡 지대가 있다. 이 협곡 지대는 4000km의 길이에 깊이는 7km에 이른다. 화성 북반구와 남반구 지형의 비대칭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북쪽 부분은 용암층이 흘러내림으로 인해 평평하고, 남쪽은 고지대에 오래전의 충격으로 인해 구멍이 파이고 분화구가 생겨나 있다. 지구에서 본 화성의 표면은 확실히 두 부분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먼지와 산화철이 섞인 모래로 뒤덮인 좀 더 창백한 부분은 한때 아라비아의 땅 이라 불리며 화성의 대륙으로 여겨졌고, 어두운 부분은 바다로 여겨졌다. 지구에서 보이는 가장 어두운 부분은 시르티스 메이저(Syrtis Major)이다. 화성에서 가장 큰 분화구는 헬라스 충돌 분지(Hellas impact basin)인데, 가벼운 붉은 모래로 덮여 있다. 화성 표면 지역의 이름을 짓는 작업은 국제 천문 연맹의 행성계 명명법 워킹 그룹 이 담당하고 있다. 화성의 석양. 스피릿 호 촬영 화성의 대기압은 0.7에서 0.9kPa로, 지구의 대기 밀도와 비교하면 1/100 정도로 매우 낮다. 대기가 적으므로 기압이 매우 낮고 물이 있더라도 기압 때문에 빨리 증발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과거의 화성은 물이 풍부하고 대기도 지금보다 컸으리라고 추측한다. 대기의 주성분인 이산화탄소가 얼어 거대한 극관을 형성하는 과정이 양극에서 교대로 일어나고 이산화탄소는 눈층을 형성하고 봄이 되면 증발한다. 아주 오래전 화성은 태양풍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자기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40억 년 전 화성의 다이나모가 멈추고 난 뒤에는 투자율이 높은 광물에 잔류자기가 남아있는 정도밖에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광물은 풍화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남반구의 고지의 일부에서만 고지자기를 관측할 수 있다. 태양풍은 화성의 전리층에 직접 닿기 때문에 화성의 대기는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있다고 여겨지나 그 양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와 마스 익스프레스는 화성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이온화된 대기의 입자를 탐지하였다. 화성의 궤도 이심률은 약 9%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태양계에서 이보다 더 이심률이 큰 궤도를 가지는 행성은 수성밖에 없다. 태양까지의 평균거리는 약 2억 2천만 km(1.5 천문단위)이며, 공전 주기는 686.98일이다. 화성의 태양일(솔; sol)은 지구보다 약간 길어서 24시간 39분 35.244초 정도이다. 화성의 자전축은 25.19도만큼 기울어져 있어서 지구의 기울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 결과 화성에서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계절이 나타난다. 하지만 공전 각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계절의 길이는 지구에 비해 약 2배정도 된다. 포보스(Phobos)와 데이모스(Deimos)가 화성의 위성이다. 이들은 늘 달 쪽으로 같은 면을 향하고 있다. 포보스의 화성 주위 궤도가 화성 자체가 도는 속도보다 빠르며 아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언젠가 미래에는 포보스가 화성 표면에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반면에 데이모스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고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두 위성은 모두 1877년 미국인 천문학자 아사프 홀(Asaph Hall)이 발견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스의 두 아들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 화성의 위성 이름 직경 (km) 질량 (kg) 평균 궤도 반지름 (km) 공전 주기 포보스 22.2 (27 × 21.6 × 18.8) 1.08×1016 9378 7.66 시간 데이모스 12.6 (10 × 12 × 16) 2×1015 23,400 30.35 시간 액체상태의 물의 존재를 가지고 생명가능성을 논의한다. 이러한 생명가능성을 논하는 곳은 생명가능지대의 안에 존재하는 곳이다. 태양의 생명가능지대는 금성을 넘은 곳 부터 시작하여 화성 부근 까지 존재한다. 화성은 근일점에 도착하였을때, 이 지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화성의 옅은 대기가 액체상태의 물이 화성의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막는다. 화성의 과거 물의 흐름은 생명거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근 연구는 화성에 존재하는 물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산도가 높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화성에는 자기권이 없기 때문에 강렬한 태양풍을 막을 수 없다. 또한 화성의 옅은 대기로 인한 낮은 대기압으로 화성의 표면에 액체상태의 물의 형태가 유지 될 수 없다. 지질학적으로 화성의 화산 활동은 종결되어 화성의 내부 화학물질이 화성의 표면으로 순환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화성의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증거로부터 미루어 볼 때 화성이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실제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바이킹 탐사선은 70년대 중반에 화성 표면에서 미생물을 탐지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여, 과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되고 있다. 존슨 우주센터 연구소는 화성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 AL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소량의 이들 분자는 화성에 생물이 사는 증거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들 원소는 화산이나 사문함화작용 같은 지질학적 작용에 의해서도 공급될 수 있다. 화성은 생물이 살기에 부적합한 특성 역시 가지고 있다. 화성의 위치는 태양의 거주 가능 지대보다 반 천문단위정도 멀리 떨어져 있고 물은 얼어 있다. 물론 과거에 물이 흘렀던 적이 있기는 하다. 화성에는 또한 자기권이 없으며 대기가 희박하며, 지각 열류량은 매우 적으며, 외부의 운석 또는 소행성들과의 충돌~ 또는 태양풍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낮은 대기압 때문에 얼음은 액체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화해버리며, 지질학적으로 사실상 완전히 죽은 행성으로 본다. {화산 활동이 없기 때문에 표면과 행성 내부 사이의 화학 물질과 광물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한편으론, 아직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대기에서 메탄이 검출을 든다. 그러나, 이는 지질활동이 멈춘 화성의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생명활동에 의해서만 공급되므로, 안면석이나 화성 피라미드와 같은 음모론적인 가설도 있으나 과학적인 의미로 주목받지는 못하다. 화성 탐사 바이킹 1호 착륙선이 전송한 사진1978년 2월 11일 Sol 556에서 촬영 지금까지 인류는 다수의 로봇 탐사선을 화성에 보냈고, 그중 몇몇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탐사의 실패율은 매우 높았다. 실패 사례 중 몇은 명백한 기술적 결함에 따른 것이었지만, 많은 경우 연구자들은 확실한 실패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사례는 지구-화성 "버뮤다 삼각지대" 혹은 화성탐사선을 먹고 사는 은하귀신(Ghoul)라는 농담을 낳았다. 화성 로봇 탐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사 시간대가 약 2년 남짓(화성의 공전 주기)의 기간을 주기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1960년 소련은 두 기의 탐사선을 화성궤도를 지나쳐 돌아오는 계획으로 발사하였으나, 지구궤도에 도달하는 데에 실패한다. 1962년 소련은 세 기를 더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두 기는 지구 궤도에 머물렀고, 나머지 하나는 화성을 돌아오는 동안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졌다. 1964년에 또 한번의 시도가 실패한다. 1962년에서 1973년 사이에, NASA(나사)의 제트 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는 내태양계(inner solar system)를 탐험할 10개의 매리너 우주선을 설계·제작하였다. 이 우주선은 금성, 화성, 수성을 최초로 탐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매리너 우주선은 비교적 작은 로봇 탐사선으로 아틀라스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각 우주선의 무게는 0.5톤을 넘지 않았다. 매리너 3호와 4호는 동일한 기체로, 최초로 화성을 지나치며 관찰하도록 설계되었다. 매리너 3호는 1964년 11월 5일 발사되었으나, 우주선의 윗부분을 덮은 뚜껑이 적당히 열리지 않았고, 화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3주 후 1964년 11월 28일 매리너 4호는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8개월의 항해를 시작한다. 매리너 4호는 1965년 6월 14일 화성을 지나며, 다른 행성의 근접 사진을 최초로 찍어냈다. 오랜 기간 동안 작은 테이프 레코더에 기록된 그 사진들은 달 모양의 분화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 분화구 들 중 몇몇은 서리가 덮여 추운 화성의 밤을 보여주었다. NASA는 계속해서 매리너 계획을 수행했다. 그들은 다음 발사 시간대에 근접 비행 시험을 또다시 수행하였다. 이 비행선들은 1969년에 화성에 도달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매리너 6호 와 7호를 참조하라. 다음 발사 때 매리너 계획은 두 대의 비행선 중 한 대를 잃는 사고를 겪었다. 살아남은 매리너 9호는 성공적으로 화성 궤도에 진입하였다. 매리너 9호가 화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과 두 대의 소련 인공위성은 행성 전영역에 걸쳐 먼지 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폭풍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화성 표면의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매리너 9호는 포보스의 사진을 찍었다. 폭풍이 화성의 표면 사진을 찍기에 충분할 만큼 가라앉았을 때, 전송된 사진은 이전 임무의 결과로 온 사진보다 더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화성에 한때 액체 형태의 물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거하는 첫 번째 사진이었다. 1976년에 두 대의 바이킹 호가 화성 궤도에 들어가 각각 착륙 모듈을 내려 화성 표면에 내려 앉았다. 이 임무를 통해 인류는 첫 번째 컬러 사진과 더욱 확장된 과학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화성 탐사 계획에서 발사한 우주선들은 바이킹보다 몇 년 일찍 수많은 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매리너 계획이 수행했던 것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마스 패스파인더는 1997년 7월 4일에 화성에 착륙하여, 소저너라는 매우 작은 원격 조정체를 움직여 착륙 지점 주위의 몇 미터를 여행하고, 화성의 환경 조건을 탐색하고 표면의 돌들을 수집해왔다. 다음 탐사는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Mars Global Surveyor)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임무는 20여 년간의 화성 탐사역사에서 첫 번째로 성공적인 것이었고, 1996년 11월 7일에 발사되어 1997년 9월 12일에 화성 궤도에 도달하였다. 1년 반 정도가 흐른 후, 회전 궤도가 타원형에서 원형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주선은 1999년 3월부터 기초적인 매핑 임무에 돌입했다. 우주선은 화성을 화성력으로 1년, 지구력으로는 거의 2년간 저고도에서 관찰했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호는 최근인 2001년 1월 31일 그 기초적인 임무를 완료하고 현재는 2단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탐사는 화성 표면, 대기권, 그리고 내부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지난 탐사 계획에서 거둬들인 모든 결과물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가져왔다. 이 가치있는 데이터들은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MOLA 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7월 31일 미국 국립항공우주국은 화성탐사선 피닉스가 화성에 물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했다. 피닉스는 2008년 11월 10일 임무가 종료되었다. 기원전 1600년경에 화성에 대한 관측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화성은 불과 같이 붉게 빛나고 다른 천체와 달리 하늘에서 이상하게 움직인다고 알려졌다. 바빌로니아인은 이미 기원전 400년경에 천문현상을 연구했었으며 일식, 월식과 같은 천문현상을 예측하기 위해 고도로 발달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달력과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들을 주의깊게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현상에 대해서 깊게 분석한다거나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빌로니아인들은 화성을 네르갈(Nergal, ‘위대한 영웅’ 또는 ‘전쟁의 왕.’ 원뜻은 ‘커다란 집의 주인’)이라 불렀다. 이집트인은 별이 “고정된” 듯이 보이며, 태양이 고정된 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하늘의 5개의 빛나는 천체가 고정된 별 사이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이집트인은 화성을 Har Decher(붉은 것) 혹은 죽음의 별 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인은 화성을 전쟁의 신의 이름을 따서 아레스(Ares)라고 불렀다. 로마에서도 이 이름을 그대로 번역하여 화성을 마르스(Mars)라고 불렀다. 화성의 기호는 마르스의 방패와 칼로 여겨진다. 조반니 스키아파렐리(Giovanni Virginio Schiaparelli, 1835년~1910년)는 1877년, 화성에서 "canali"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로 "운하들"을 뜻하며 영어로는 "canals, waterways" 가 된다. 당시 수에즈 운하도 건설되던 차 화성 탐사 열풍이 시작되었다. ※ 동양의 고대기록에는 낮에 화성을 본 것이 있으나, 검증결과 금성의 착오였으며, 화성을 낮에 맨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션 (2015) 존 카터(바숨전쟁의 서막)(2012) 미션 투 마스(2000) 레드 플레닛(2000) 화성 침공(1996) 화성의 유령들(2001) "초대규모 우주 프로젝트의 정치경제학" https://web.archive.org/web/20040606150615/http://www.transhumanist.com/volume4/space.htm 네이버 캐스트 - 화성 탐사로봇 생존기 화성에 저장된 얼음에 대한 이야기, BBC BBC 뉴스 업데이트 화성 탐사로봇이 지표면의 물을 발견 화성에서 물발견, 조선일보 실제비행거리 4억9천만km…궤도수정 5번, 조선일보 구글 마스 – 화성 표면을 대화식 화면을 통하여 제공 3D maps of Mars in NASA World Wind Guide to Mars – information about Mars and how to observe it. Nine Planets Mars page On Mars Exploration of the Red Planet 1958–1978 from the NASA History Office. Martian Law – a CATO white paper Computer Simulation of a flyby through Mariner Valley Mars Unearthed – Comparisons of terrains between Earth and Mars Ralph Aeschliman s Online Atlas of Mars Be on Mars – Anaglyphs from the Mars Rovers (3D) NASA/JPL OnMars WMS Server for Mars Data – Work as Google Earth client overlays Exploring Mars Image Center Mars Astronomy Cast episode #52, includes full transcript. BBC News Mars pictures reveal frozen sea Feb 07 ESA Prepares for a Human Mission to Mars Mars apparent relative size at opposition as seen by HST Mars articles in Planetary Science Research Discoveries Flight Into Mariner Valley – NASA/JPL/Arizona State University 3D flythrough of Valles Marineris Geody Mars – World s search engine that supports NASA World Wind, Celestia, and other applications 분류:지구형 행성 |
다비트 힐베르트 ( , 1862년 1월 23일~1943년 2월 14일)는 독일의 수학자이다.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에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을 공리화하였으며, 힐베르트 공간을 정의하여 함수해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전 수학계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사후에도 힐베르트 문제를 통해 수학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오토 힐베르트()와 마리아 힐베르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판사였다. 김나지움(독일의 고등학교)까지는 수학 이외의 과목에 흥미가 없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학교로 옮긴 후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1880년 힐베르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힐베르트는 하인리히 베버에게서 수론과 함수론 강의를 듣고,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불변식론을 접하였다. 힐베르트의 2년 연하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의 청강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고, 베버의 후임으로 원주율의 초월성을 증명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오고, 그와 같이 아돌프 후르비츠가 사강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후르비츠 세 사람은 평생 친구로 남았다. 힐베르트는 대수적 형식의 불변성에 대한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1884년 12월 구두시험을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힐베르트는 1885년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1886년 펠릭스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났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였다. 1888년 초에 힐베르트는 파울 고르단()을 만나 소위 "고르단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후 라차루스 푹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레오폴트 크로네커 등을 방문하고, 1888년 9월 귀향하여 고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힐베르트는 1892년 30세의 나이로 혼인하였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에는 e와 원주율의 초월성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발표하였다. 곧 뮌헨으로 떠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되었다. 1893년 독일 수학회에서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당시까지의 대수적 수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1895년 괴팅겐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수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래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공저로 계획되었는데, 민코프스키는 자신의 몫을 작성하지 못하였고, 1897년 4월 힐베르트는 자신이 작성한 부분만을 출판하였다. 이는 정수론에 대한 교재로서 수학계의 명성을 얻었다. 1898년 ~1899년 겨울 학기에는 기하학의 기초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그 강의록을 정리하여 《기하학의 기초》()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리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공리체계는 완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고,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성질을 제시하였다. 그 뒤 힐베르트는 기하학의 연구를 계속하였고, 또한 디리클레 원리의 결점을 보완하며, 변분법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세계 수학자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의 가장 큰 과제들을 선별한 23개의 힐베르트의 문제들을 발표하였다. 이 문제들은 20세기 수학의 주된 흐름을 예견하였고, 새로운 수학적 분야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1901년 힐베르트는 에리크 이바르 프레드홀름의 논문을 접하고, 적분방정식론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 내용은 1912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1902년 베를린으로부터 푹스의 후임자리를 제안받으나 거절하고, 그 대신 괴팅겐 대학교에 민코프스키의 자리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1908년 오랜 미제였던 웨어링의 문제를 증명하였다. 1909년에는 오랜 친구였던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수학뿐만 아니라, 힐베르트는 물리학의 공리화를 꿈꾸었다. 물리학의 공리화는 힐베르트의 6번 문제였고, 이 문제의 일환으로 힐베르트는 중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15년 11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출판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뒤 라위트전 브라우어르 등은 직관주의를 주장하였고, 고전적 수학의 귀류법 등 여러 증명법들을 배척하였다. 힐베르트는 직관주의에 대응하여 수학은 공리계를 통한 수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식주의를 주장하였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 해 쾌유하였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힐베르트의 묘비 힐베르트는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고, 같은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1931년에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여, 힐베르트가 꿈꾸었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공리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힐베르트는 불완전성 정리를 피하기 위하여,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80세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논문) "Über das Unendliche" 무한에 관하여, Mathematische Annalen 95, (1926)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Cantor)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수 없다." :독일어 Aus dem Paradies, das Cantor uns geschaffen, soll uns niemand vertreiben können. :영어 (번역) No one shall expel us from the Paradise that Cantor has created. (연설문) Königsberg에서 독일 과학자 물리학 모임에서의 연설.(1930년 9월 8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그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음) :독일어 Wir müssen wissen — wir werden wissen! :영어 (번역) We must know — we will know! 힐베르트 공리계 힐베르트 문제 힐베르트 공간 분류:1862년 태어남 분류:1943년 죽음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독일의 불가지론자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동문 분류:쾨니히스베르크 출신 분류:기하학자 분류:상대성 이론가 분류:프로이센주 출신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
HTML 은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 (라는 의미의 웹 페이지를 위한 지배적인 마크업 언어다. HTML은 제목, 단락, 목록 등과 같은 본문을 위한 구조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링크, 인용과 그 밖의 항목으로 구조적 문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미지와 객체를 내장하고 대화형 양식을 생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HTML은 웹 페이지 콘텐츠 안의 꺾쇠 괄호에 둘러싸인 "태그"로 되어있는 HTML 요소 형태로 작성한다. HTML은 웹 브라우저와 같은 HTML 처리 장치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자바스크립트와 본문과 그 밖의 항목의 외관과 배치를 정의하는 CSS 같은 스크립트를 포함하거나 불러올 수 있다. HTML과 CSS 표준의 공동 책임자인 W3C는 명확하고 표상적인 마크업을 위하여 CSS의 사용을 권장한다. Berners-Lee April 2009.jpg|섬네일|오른쪽|팀 버너스리 1980년,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계약자였었던 물리학자 팀 버너스리가 HTML의 원형인 인콰이어를 제안하였다. 인콰이어는 CERN의 연구원들이 문서를 이용하고 공유하기 위한 체계였다. 1989년에 팀 버너스리는 인터넷 기반 하이퍼텍스트 체계를 제안하는 메모를 작성했다. 버너스 리는 1990년 말에 HTML을 명시하고, 브라우저와 서버 소프트웨어를 작성했다. 그 해에 버너스리와 CERN 데이터 시스템 엔지니어 로버트 카일리아우와 함께 CERN측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CERN으로부터 정식으로 채택 받지 못했다. 버너스리의 개인적인 기록 에 1990년부터 "하이퍼텍스트가 사용되는 여러 분야의 일부"를 열거했고 백과사전을 그 목록의 첫 번째로 두었다. HTML 최초의 일반 공개 설명은 1991년 말에 버너스리가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문서를 "HTML 태그"( HTML tag )로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머릿글자로 이루어진 20개의 요소를 기술하였고, 상대적으로 HTML의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하이퍼링크를 제외한 HTML 태그들은 CERN 자체의 SGML 기반 문서화 포맷인 SGML GUID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이 요소 중 13개는 HTML 4 버전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HTML은 동적인 웹 페이지의 웹 브라우저를 통한 문자와 이미지 양식이다. 문자 요소의 대부분은 1988년 ISO 기술 보고서 9537 SGML을 이용한 기법 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SGML 개념의 일반적인 마크업은 단지 개별 효과 보다는 요소 기반이고 또한 구조와 처리의 분리(?)(HTML은 CSS와 함께 이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해 왔다.) 버너스리는 SGML 응용 프로그램이 되는 HTML을 고안해야 했고 그것은 공식적으로 IETF(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에 의하여 1993년 중반, HTML 규격에 대한 최초의 제안을 간행물로 정의했다. (버너스리와 덴 콘놀리에 의한 문법을 규정하는 SGML 문서 형식 정의(SGML DTD)가 포함된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HTML)" 인터넷 초안) 이 초안은 6개월 후 만료된다. 하지만 NCSA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인라인 이미지를 내장하는 사용자 정의 태그의 사례는 주목할 만 했고, 성공적인 프로토타입에 대한 표준을 기반한 IETF의 철학을. 마찬가지로 데이브 라그렛의 경쟁 인터넷 초안인 "HTML+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포맷)"은 1993년 말에 테이블과 기입양식 같은 요소들을 이미 구현하여 표준화 제안을 했다. 이후 1994년 초 HTML과 HTML+ 초안은 만료되었고, IETF는 HTML 작업 그룹을 설립해 1995년에 HTML 2.0을 완성한다. 최초의 HTML의 규격은 미래에 수행될 HTML 표준을 기반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RFC 1996년에 HTML 2.0은 HTML과 HTML+ 초안의 아이디어가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HTML 2.0 지정은 이전의 초안들로부터 새로운 버전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IETF의 후원하에 개발은 상충하는 이해 관계 때문에 지연되었다. 1996년부터 HTML 규격은 상용 소프트웨어 제작사의 투입으로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에서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00년부터 HTML 또한 국제 표준(ISO/IEC 15445:2000)이 되었다. 현재 W3C에 의해 발표된 최신 규격은 1999년 말에 발표된 HTML 4.01 권고안이며 2001년에 문제와 오류들이 수정되어 발표된 안이 최종 승인되었다. 1995년 11월 24일 HTML 2.0이 IETF의 RFC 1866로 발표되었다. 추보의 RFC의 추가된 기능 : 1995년 11월 25일 RFC 1867 (양식 기반 파일 업로드) : 1996년 5월 RFC 1942 (테이블) : 1996년 8월 RFC 1980 (클라이언트 측 이미지맵) : 1997년 1월 RFC 2070 (국제화) 2000년 6월, 이 모든 것들이 RFC 2854에 의하여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역사적인 것으로 선언됨. 1997년 1월 HTML 3.2 가 W3C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 이것은 1996년 9월에 폐쇄한 HTML 작업 그룹인 IETF와 같이 W3C에 의하여 배타적으로 개발되고 표준화된 첫 번째 버전이다. :HTML 3.2에서 여러 종류의 겹치는 확장 수학 수식을 완전히 제외 시키고 넷스케이프의 비주얼 마크업 태그의 대다수를 채택했다. 넷스케이프의 블링크 요소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마퀴 요소는 두 회사의 상호 협의 하에 누락시켰다. HTML에서 수학적 수식과 비슷한 마크업은 이후 MathML이 나올 때까지 14개월 동안 표준이 아니었다. 1997년 12월 HTML 4.0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은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 Strict(엄격) 사용이 중지된 요소를 금지한다. : Transitional(변이) 사용이 중지된 요소를 허용한다. : Frameset(프레임셋) 대부분 프레임 관련 요소에서만 허용한다. 처음에 코드네임 "쿠가" 에서 HTML 4.0은 다양한 브라우저 특정 요소의 종류와 속성을 채택하였지만 동시에 스타일시트에 찬성하는 세력의 반대로 넷스케이프의 시각적 마크업 기능을 단계적으로 제거하기로 했다. HTML 4는 ISO 8879 - SGML에 따른 SGML 응용 프로그래밍 언어다. 1998년 4월 HTML 4.0 이 버전이 증가되지 않고 조금 수정되어 재발표되었다. 1999년 12월 HTML 4.01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그리고 2001년 5월 12일에 그것에 대한 최종 오류 수정 사항 이 발표되었다. 2000년 5월 ISO/IEC 15445:2000 ("ISO HTML", HTML 4.01 Strict 기반)이 ISO/IEC 국제 표준과 함께 출시되었다. ISO에서 이 표준안은 ISO/IEC JTC1/SC34 (ISO/IEC 공동 기술 위원회 1, 소위원회 34 - 문서 표현과 처리 언어)의 범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2008년 중반, HTML 4.01과 ISO/IEC 15445:2000은 HTML의 대부분의 최근 버전이다. XML 기반 병렬 개발 언어인 XHTML을 통해 W3C의 HTML 작업 그룹은 2000년대 초중반에 성장하였다. 1991년 10월 HTML 요소 비공식적 CERN 문서에서 12개의 HTML 태그 목록이 대중에게 언급되었다. 1992년 7월 6단계 이후의 개정판과 함께 HTML DTD, 의 첫 번째 비공식 초안 1992년 11월 HTML DTD 1.1 (1.0 대신에 1.1을 RCS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첫 번째 버전 번호로 시작한다.), 비공식 초안 1993년 6월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 는 인터넷 초안(표준에 대한 간략한 제안)과 함께IETFIIIR 작업 그룹에 의하여 발표되었다. 그것은 한 달 후 IETF에 의해 6가지 추가 초안을 더한 두 번째 버전 으로 대체되었고 결국 HTML 2.0이 RFC1866을 주도했다. 1993년 11월 HTML+가 인터넷 초안과 함께 IETF에 의하여 출시되었고, HTML 초안과의 경쟁을 제안하였다. 1994년 5월 HTML+는 만료되었다. 1995년 4월 (1995년 3월에 저술) HTML 3.0 이 IETF 표준안으로 제안되었지만 이 제안은 이후 5개월 동안 진전이 없어서 만료되었다. 여기에는 데이브 라겟의 HTML+ 제안의 표와 복잡한 수학적 수식을 표시를 지원하는 것과 같은 특성의 상당부분을 포함했다. :W3C는 HTML3와 CSS를 지원하는 시험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아레나 브라우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HTML 3.0은 여러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2008년 1월 HTML 5 초안 작업은 W3C에 의해 발표되었다. 비록 문법은 SGML의 문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HTML 5는 난해한 SGML 문법과 호환되지 않는다. 그리고 HTML 5를 "html" 시리즈라고 명시적으로 정의되었다. XHTML은 XML 1.0을 이용하여 HTML 4.01을 새로 만든 독립된 언어다. XHTML 1.0 은 2000년 1월 26일에 W3C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 이후 2002년 8월 1일에 개정과 재발표를 하였다. 이것은 XML에 관하여 새로 작성된 HTML 4.0 과 HTML 4.01 같이 세가지 문서 형태를 사소한 규약과 함께 제공한다. XHTML 1.1 2001년 5월 31일에 W3C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XHTML 1.0 strict 기반이지만 사소한 변경 사항과 사용자 정의 기능을 포함하고, XHTML의 모듈화 으로부터 모듈을 이용하여 새로 작성되었다. XHTML 2.0 은 아직까지 W3C 작업 초안이다. W3C는 2009년 말까지 XHTML 2 그룹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XHTML 2.0 표준은 사라질 것이다. XHTML은 XHTML 1.x와 호환되지 않는다. 따라서 XHTML 1.0 에서 업데이트된 것 보다 XHTML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언어가 특성이 더 정확해진다. XHTML5는 HTML 5 초안에서 HTML 5와 함께 정의되었다. HTML 4 구문 강조 HTML 마크업은 HTML 요소 (엘리먼트와 그들의 속성()과 문자 기반 데이터 형태 와 문자 참조 와 엔티티 참조 를 포함하는 몇 가지 핵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또 다른 중요한 구성 요소로는 문서 형식 정의(DTD를 명시하는 문서 형식 선언()이다. 차기 HTML 5에서는 DTD를 지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레이아웃 모드로 지정된다 . Hello world 프로그램은 프로그래밍 언어와 스크립트 언어 그리고 마크업 언어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HTML에서의 Hello world 프로그램은 단 9줄에 불과하다 Hello HTML Hello World! (과 사이의 문자는 웹 페이지를 표현한다. 와 사이의 문자는 보여지는 페이지 내용이며, 와 사이의 문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웹 페이지를 표현하기위해 필요한 해더 정보를 담고 있다.과 사이의 문자는 웹 브라우저의 페이지 제목을 정의하는데 사용된다.)Hello world 프로그램을 최대로 짧게 만들고 싶다면 Hello world 이라고 해도 되지만, 웹 표준에 위배된다.이 문서 형식 정의는 HTML 5이다. 만약 로 선언하지 않은 경우 대다수의 브라우저는 "쿽스 모드"로 렌더링한다. HTML 문서는 완전한 HTML 요소 로 구성되어 있고, HTML 요소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다 "시작 태그"(Start Tag)와 "종료 태그"(End Tag) 와 같은 태그 한 쌍; 몇 가지 요소 속성 은 그 태그들 내에서 특성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문자와 그래픽 정보 콘텐츠 를 화면에 표현한다. HTML 요소는 태그의 사이와 포함되는 모든 것이다. 태그 는 꺾쇠괄호()로 둘러싸인 키워드이다. 보이는 내용 HTML 요소의 이름은 태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종료 태그의 이름은 슬래시 문자 ("/")로 시작된다. 보이는 내용 속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시작 태그의 기본값을 사용하게 된다. HTML의 머리부분 (...), 보통 제목은 의 안에 포함된다. 예제 제목 단락 1 단락 2 새 줄(), 와 간의 차이점은 br 은 페이지의 의미론적 구조를 변경하지 않는 줄바꿈(breaks a line)인 반면 p 는 단락으로 페이지를 구분한다. 이것은 줄바꿈을 포함하는 단락이다. 주석은 코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웹 페이지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구조적 마크업은 본문의 목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는 "골프"를 두 번째 수준의 제목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브라우저에서 이 장의 처음에 나오는 HTML 마크업 제목과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구조적 마크업은 어떤 특정한 렌더링을 표시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웹 브라우저는 요소 포맷팅에 대한 기본적인 스타일을 표준화했다. 텍스트는 캐스캐이딩 스타일시트(CSS)로 더 꾸밀 수 있다. 표현적 마크업은 기능에 관계없이 본문의 외관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는 시각적 결과 장치가 굵은 글씨 속에 있는 "boldface"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지만, 이것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무엇을 해야 할 지(예를 들어 텍스트를 크게 읽어주는 장치와 같은 )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는다. 와 과 같은 경우에는 보통 시각적 해석에 필적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본래가 더 의미론적이다. 즉, 각각 와 같이 할 수 있다. 음성 사용자 에이전트가 어떻게 후자의 두 요소를 해석하는 지 지켜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표현 상대와 맞먹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책의 이름을 강조하는 것이 스크린을 읽는 유저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화면에서 그러한 이름이 이탤릭체로 될 것이다. 대부분의 표현 마크업 요소는 스타일 디자인에 근거한 CSS에 호응해서 HTML 4.0 스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마크업은 다른문서와 연결시켜주는 문서의 부분이다. XHTML 1.1 버전을 통한 HTML은 본문속에서 하이퍼링크를 생성하기위해 anchor 요소()의 사용을 필요로 한다. 덧붙여, href 속성은 반드시 정확한 URL을 설정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HTML 마크업인 는 하이퍼링크로써 " 한국어 위키백과" 처럼 보일 것이다. * 하이퍼링크로써 이미지를 표현하는 예제 ** 줄바꾸기 단락바꾸기(한줄 떨어짐) :가로줄 ... ...을 가운데 정렬 ... ...의 폰트를 바꿈 ...... ...을 순서없는 목록으로 만듦(기본 까만동그라미) ...... ...을 순서있는 목록으로 만듦(기본 숫자) 표만들기 행(......에 넣는다) 열(... ...에 넣는다) 그 셀부터 숫자만큼의 오른쪽 셀을 병합한다 그셀부터 숫자만큼의 아래쪽 셀을 병합한다 대부분의 요소 속성들은 이름-값 형태이고, "="로 구분하고, 요소의 시작 태그 안에서 요소의 이름 다음에 쓰인다. 값은 외따옴표 또는 쌍따옴표로 둘러쌀 수 있다. 비록 어떤 문자로 구성된 값들이 HTML에서 인용부호 없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XHTML에서는 허용되지 않음), 그 값은 따옴표나 쌍따옴표 또는 쌍 인용부호로 둘러쌀 수 있다.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속성값을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이름값 쌍 속성과 대조하여, 요소 태그의 시작에 단순히 그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태그가 있다. 대부분의 요소는 몇 가지 일반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id 속성은 요소에 대한 문서 전체의 고유 식별자를 제공한다. 이것은 스타일시트에 의해 외관적인 특성을 제공하고, 브라우저에 의해 특정 요소를 처리하거나 스크립트에 의해 요소의 내용이나 외관을 바꿀 수 있다. 페이지의 URL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통 페이지 다음에 오는 요소에 대한 세계에서 유일한 식별자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https://en.wikipedia.org/wiki/HTML#Attributes 에 있는 ID 속성과 같다. class 속성은 유사한 요소를 분류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은 어휘적 또는 표현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휘적으로 분류는 미세 포맷에 사용된다. 표현적 목적으로 HTML 문서는 class="notation"과 같은 지정자에서, 이 class 값을 갖는 모든 요소는 문서의 주 텍스트에 종속된다는 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요소는 HTML 소스에서 나타났던 장소에 나타나는 대신에 함께 모여서 페이지에서 각주와 같이 표현된다. 작성자는 특정 요소에 표현적 속성을 지닌 style 비 속성 코드를 사용할 것이다. 단순하고, 특정한 또는 특수한 스타일 속성을 가진 애플리케이션에서는 너무 성가시긴 하지만, 스타일시트로 속성을 선택할 때는 요소의 id나 class 속성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간주된다. title 속성은 요소에서 숨겨진 뜻을 설명하는 글을 첨부하는 곳에 사용된다. 대부분의 브라우저의 이 속성은 자주 툴팁과 같이 참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축 요소(abbr)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속성을 설명하는데 쓰일 수 있다 ::HTML 이 예제는 대부분의 브라우저에서 HTML처럼 보인다. 이 단축에 커서를 가리키면 그 제목인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가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요소 또한 언어와 관련된 속성인 lang과 dir을 취한다. HTML은 스크립트 데이터와 스타일시트 데이터, 그리고 ID, 이름, URI, 숫자 길이의 단위, 언어, 미디어 기술자, 색상, 문자 인코딩, 날짜와 시간 등을 포함하는 속성 값의 종류를 위한 몇 가지 데이터 형태를 정의 내린다. 이러한 모든 데이터 형식은 문자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하여 분리되었다. HTML 문서는 문서 형식 선언 (비공식적으로, "doctype")으로 시작해야 한다. 브라우저에서 doctype의 기능은 렌더링 모드를 지시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쿼크 모드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doctype의 원래의 목적은 문서 형식 정의 (DTD)에 기반한 SGML 도구를 통하여 HTML 문서의 파싱과 유효 여부 확인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DOCTYPE에 대한 DTD는 DTD에 순응하는 문서를 가진 허용 또는 금지된 내용을 지정하고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문법을 포함하도록 지시한다. 반면 브라우저는 HTML을 SGML의 애플리케이션으로 수행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DTD를 읽지 않는다. HTML 5는 기술적인 제한으로 인해 DTD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HTML5에서 doctype 선언 는 DTD를 참조하지 않는다. HTML 4 doctype의 예제는 다음과 같다. 이런 선언은 엄격한 HTML 4.01을 만들기 위해 DTD를 참조한다. 이것은 선언적인 요소인 font 같은 요소는 포함하지 않으며, CSS나 span, div 요소는 유지한다. SGML 기반의 유효 확인자(validator)들은 문서를 적절히 해석하거나, 유효 여부 확인을 실행하기 위해 DTD를 읽는다.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이 doctype은 쿼크 모드에 반대되는 표준 모드를 활성화한다. 게다가 HTML 4.01은 임시적이고 프레임 단위의 DTD를 제공한다. HTML 문서를 다른 컴퓨터 파일과 같은 방법으로 전송할 수 있다. 하지만 HTML 문서들은 대부분 웹 서버에 의한 HTTP나 또는 이메일을 통하여 전송된다. 월드 와이드 웹은 주로 웹 서버에서 하이퍼텍스트 전송 프로토콜 (HTTP)을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로 전송되는 HTML 문서를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HTTP는 HTML 이외에도 이미지나 소리, 그리고 기타 내용물을 서비스하는 데 사용된다. 브라우저가 받는 각 문서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게 하기 위해, 다른 정보가 문서와 함께 전송된다. 이 메타데이터는 보통 MIME 타입 (예, text/html or application/xhtml+xml)과 문자 인코딩을 포함한다. (HTML에서 문자 인코팅 참조)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HTML 문서와 함께 전송되는 MIN 타입은 문서가 초기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X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문서는 잘 구성된 XML로 기대되며, 문법 오류는 브라우저가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동일 문서가 HTML에 관대한 브라우저에서는 성공적으로 출력될 것이다. W3C 권고안에서는 권고안 부록 C에 나오는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XHTML 1.0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다. 현재의 XHTML 1.1 작업 초안은 또한 XHTML 1.1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래픽 이메일 클라이언트는 단순 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어휘적 마크업과 형식을 제공하기 위해 종종 정의되지 않는 HTML 부분집합 사용을 허용한다. 이것은 색상 제목, 강조, 인용문, 인라인 이미지와 도표와 같은 인쇄정보를 포함한다. 그러한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HTML 이메일 메시지를 작성하는 GUI 편집기와 그것을 해석하여 보여주기 위한 렌더링 엔진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자 메일에서 HTML를 포함시키는 것은 호환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피싱 공격의 은닉을 도와줄 수 있고, 스팸 필터를 혼동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단순 텍스트보다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웹 문서의 가장 일반적인 파일 확장자는 .html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htm라고도 하며, DOS나 FAT와 같은 초기 운영 체제와 파일 시스템이 파일 확장자를 3자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HTML 애플리케이션 (HTA; 파일 확장자 ".hta")는 애플리케이션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위해 브라우저에서 HTML과 DHTML을 사용하는 윈도용 애플리케이션이다. 정상적인 HTML 파일은 웹 서버와 통신하면서, 웹페이지 객체와 HTTP 쿠키만 다루는 웹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에 제한된다. HTA는 완벽히 신뢰된 애플리케이션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파일의 생성/편집/제거와 윈도 레지스트리 엔트리에 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가진다. 그 까닭은 그것은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 외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HTA는 HTTP를 경유하여 실행되지 않지만, 실행 파일과 같이 다운로드가 될 수 있으며, 로컬 파일 시스템에서 실행된다. 몇 가지 위지위그(What You See Is What You Get, WYSIWYG) 편집기는 HTML 문서를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직관적으로 나타내고 편집기가 HTML 문서로 생성하여 더 이상 사용자가 HTML에 대한 광대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웹 페이지 편집은 위지위그 편집 방식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생성된 코드의 질이 낮았고 위지윔(What Your See IS What You Mean, WYSIWIM)방식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목소리 늘어났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었다. 위지위그 편집기는 다음과 같은 결함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제이다. 주로 의미와는 상반된 레이아웃에 의존하며, 종종 의도된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단순히 레이아웃을 복사만 하는 마크업을 사용한다. 종종 HTML의 케스케이딩 성질과 CSS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잡다하고 중복되는 코드를 생성한다. 종종 태그 수프라고 불리는 비문법적인 마크업을 생성한다. HTML 문서의 많은 정보는 레이아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모델은 그것의 위지위그 본질에 대해 비난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위그 편집기가 페이지를 작성하는데 편리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HTML에 대한 상세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위지위그 방식이 웹 저작을 지배하고 있다. HTML5 구문 분석 XHTML 동적 HTML HTML 편집기 마이크로포맷 웹 색상 CSS 팀 버너스리 Alt 속성 WHATWG s HTML Living Standard W3C s HTML 5.1, the upcoming version of HTML W3C s HTML5, the most recent finished specification (28 October 2014) W3C s HTML 4.01 specification (24 December 1999) Dave Raggett s Introduction to HTML Tim Berners-Lee Gives the Web a New Definition HTML4.01 규격 한국어 번역본 분류:마크업 언어 분류:W3C 표준 분류:ISO 표준 분류:1990년 도입 분류:오픈 포맷 |
웹 브라우저 (는 웹 서버에서 쌍방향 통신하는 HTML 문서나 파일과 연동하고 출력하는 응용 소프트웨어이다. 웹 브라우저는 대표적인 HTTP 사용자 에이전트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요 웹 브라우저로는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인터넷 익스플로러/마이크로소프트 엣지, 오페라, 사파리가 있다.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1990년에 팀 버너스 리가 발명하였다. 버너스 리는 W3C의 감독자로서 웹의 지속적인 발전을 감독하며, 월드 와이드 웹 재단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의 브라우저는 월드와이드웹으로 불리다가 넥서스(Nexus)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면서 대중이 사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Erwise이다. Erwise의 개발은 로버트 카이유가 시작하였다. 웹 브라우저는 웹 페이지를 가져오기 위해(웹 문서를 열기 위해) 대부분의 웹 서버가 사용하는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로 통신한다. HTTP를 이용해 웹 페이지를 가져올 뿐 아니라 웹 서버에 정보를 송신하기도 한다. 작성한 시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HTTP는 HTTP/1.1로 RFC 2616에 정의되어 있다. HTTP/1.1은 현 세대의 다른 브라우저와는 달리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완벽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 페이지들은 주소처럼 이용되는 URL(uniform resource locator)을 통해 장소가 정해지고, HTTP 접근을 위해 "http:"로 시작된다. 많은 브라우저가 FTP를 위한 "ftp:", HTTPS(암호화된 HTTP)를 위한 "https:"와 같은 다양한 URL 종류와 대응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웹 페이지의 파일 포맷은 보통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이 쓰이고 HTTP 프로토콜의 MIME "content type"에 의해 확인된다. 대부분의 브라우저는 HTML 외에 JPEG, PNG, GIF 이미지 포맷들을 지원하고, 그밖에도 플러그인을 통해 확장할 수 있다. HTTP의 "content type"과 URL 프로토콜 명세의 조합으로 웹 페이지 설계자들은 이미지, 애니메이션, 동영상, 소리, 스트리밍 미디어 등을 웹 페이지에 덧붙이거나 웹 페이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초기의 웹 브라우저는 단순한 HTML만을 지원했다. 독점적인 웹 브라우저의 빠른 개발로 HTML의 비표준 확장이 많이 이루어졌고, 웹 호환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현대의 웹 브라우저들은 모든 브라우저에서 동일하게 표시되어야 할 표준 기반의 HTML과 XHTML(HTML 4.01에서 출발한)을 지원한다. 부가적으로 유즈넷 뉴스나 IRC(Internet relay chat), 이메일 등을 지원하는 브라우저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NNTP, SMTP, IMAP 등의 프로토콜 지원이 포함된다. 브라우저 간의 차이는 그들이 지원하는 기능에 따라 구별된다. 오늘날 브라우저와 웹 페이지는 웹 초기에는 없었던 기능과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라우저 전쟁 때 브라우저와 월드 와이드 웹에는 확장 기능이 급속도로 무질서하게 생겨났다. 아래는 특징이 있는 기능에 대한 목록이다. HTTP, HTTPS HTML, XML, XHTML GIF, PNG, JPEG, SVG 등을 포함한 그래픽 파일 포맷 CSS 자바스크립트(DHTML) 쿠키 디지털 인증서 즐겨찾기 아이콘(파비콘) 플러그인 지원 북마크 관리자 다운로드 관리자 웹 구성물 캐시 플러그인을 통한 다양한 매체 지원 URL과 폼 데이터의 자동 완성 탭 브라우징 나라별 가장 흔히 쓰이는 웹 브라우저 ( StatCounter)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008년 말까지는 7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파이어폭스, 사파리, 구글 크롬 등 새로운 웹 브라우저들이 나오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계속해서 떨어져 2011년 12월, 38%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음으로 크롬 27%, 파이어 폭스 25%로 뒤따랐다. 그 후, 2013년 8월 18일 시점으로 크롬의 점유율이 43.17%로 1위이며,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5.03%, 파이어 폭스가 19.31%, 사파리 8.65% 오페라 1.14%의 순이다. 인터넷 인터넷의 역사 웹 애플리케이션 웹 브라우저 목록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웹 브라우저 연대표 브라우저 전쟁 모바일 브라우저 레이아웃 엔진 FOUC Browser timeline (1993-2001) evolt.org - Browser Archive Deja Vu (re-)creating web history Trio의 XHTML 1.0 기술 규격(한글) 분류:잉글랜드의 발명품 |
인터넷 익스플로러 (, IE )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웹 브라우저이다.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 체제에 이 소프트웨어를 기본으로 포함하기 시작하며 사용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9년 이후로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웹 브라우저가 되었고, 2002년과 2003년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5, 6 버전의 사용률이 정점에 이르러 95%에 달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이외의 플랫폼에서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지원을 중단하고,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 대체 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후기 버전의 출시에도 불구하고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이는 온라인 뱅킹 호환성 문제와 더불어 한국의 대다수 웹사이트 개발자들이 여러 웹 브라우저와 운영 체제들의 호환성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사도 사용을 권장하고 있지 않는 ActiveX를 무리하게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를 사용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것도 그 까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를 참고.) 다만 현재는 여러 대체 브라우저를 지원하는 웹사이트가 많아지고 어떤경우에는 아예 익스플로러만 지원하지 않게하는 웹사이트도 늘어나면서 지금은 그런 문제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엣지라는 브라우저의 발표로 현재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자리를 대체하게 됐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공개되지 않은 윈도우 97의 주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개념이 자리잡혀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윈도우 95의 연장선으로 그려나갔다. 이 프로젝트는 1994년 여름에 토마스 리어돈(Thomas Reardon)이 시작하여 벤자민 슬리브카(Benjamin Slivka)가 주도하였다. 소스 코드는 스파이글래스사에서 도입했다. 이 소스는 초기 상용 웹 브라우저였던 모자이크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때 맥 OS, 유닉스 등에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을 개발해 배포했지만 오래전부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를 위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개발하지 않았다. 맥 OS용도 2006년 1월 31일부터 개발하지 않고 있고 다운로드 또한 중지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 은 1995년 8월에 공개되었으며, 스파이글래스 모자이크의 수정된 버전이다. 버전 1은 윈도우 95 플러스 팩과 OEM 버전에 포함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5 는 몇 개월 뒤에 윈도우 NT용으로 개발되었으며 기본 표 렌더링을 지원하였다. 윈도우 1.0, 윈도우 2.0, 윈도우 2.1x, 윈도우 3.0,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 윈도우 95, 인터넷 익스플로러 2와 같이 지원이 2001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2 는 윈도우 95 OSR1, 윈도우 NT 4.0 영어판 두 곳에 포함되었으며. SSL 프로토콜 등의 기능을 지원했으며. 맥 OS도 지원했던 브라우저다. 윈도우 1.0, 윈도우 2.0, 윈도우 2.1x, 윈도우 3.0,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 윈도우 95, 인터넷 익스플로러 1과 같이 지원이 2001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3 은 1996년 8월 13일에 공개되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최초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되었다. 윈도우 95 OSR2, 2.1, 윈도우 NT 4.0 한글판에 기본 내장되어있고, 버전 3에서는 HTML 3.2 및 액티브엑스 제어와 자바 애플릿의 실행 환경을 갖추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에 견줄 만한 기능까지 만들었다.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 RTM과 같이 지원이 2004년 6월 30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4 는 1997년 9월에 공개되었으며, 윈도우 95 OSR2.5, 윈도우 98에 기본 내장되어 있다. 버전 4부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윈도우 NT 4.0 서버, 윈도우 NT 4.0 워크스테이션, 윈도우 2000 서비스팩 1과 같이 지원이 2004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5 는 1999년 3월 18일에 공개되었으며 5.0은 윈도우 98 SE에 5.01은 윈도우 2000에 포함되어 있다. 이 버전은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0년 7월에 나온 인터넷 익스플로러 5.5 는 인쇄 미리 보기, CSS, HTML 표준 지원, 개발자 API가 개선되었으며 128 비트 암호화를 지원한다. 이 버전은 윈도우 ME에 기본 포함되어 있었고, 윈도우 95에서 지원했던 마지막 버전이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 은 윈도우 XP 출시 몇 개월 전인 2001년 8월 27일에 공개되었다. 이 버전은 DHTML 향상, 콘텐츠 제한 인라인 프레임, CSS 수준 1, DOM 수준 1, SMIL 2.0의 부분 지원을 포함하고 있다. 2001년에 출시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이 포함되어 있다. 그 뒤에 버전 6.0 서비스 팩 1이 배포 되었으며, 이 버전은 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ME,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0 서비스 팩 2가 포함되었고, 이는 다른 운영 체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용이 쉬었으나 웹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보안상의 문제로 2006년 PC월드 전대 미문의 최악의 기술 25위 중 8위에 선정된 바가 있으며, IE6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또는 8로 업그레이드 하거나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애플 사파리 등 다른 브라우저 사용을 권고하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7 은 오랜 공백을 깨고 2006년 10월 18일에 공개되었다.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에는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버전 6에까지 제공되지 않던 탭 기능과 피싱 필터 등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었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 은 2009년 3월 19일 (한국시간)에 정식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 표준 모드"로 알려진 새로운 렌더링 모드를 포함하고 있다. 2008년 2월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의 개인 베타 버전의 공개에 대한 초대장을 제공하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액티브X 기능을 최소화시키기로 했으므로 액티브X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한국 사이트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며,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9 는 2011년 3월 14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웹 표준을 보다 준수하여 Acid 3에서는 95/100으로 이는 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8보다 높은 수치이다. 일부는 한국에서 호환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사이트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있다. 그리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9부터는 GPU 가속의 지원으로 CPU 뿐만 아니라 GPU도 함께 쓰고 이 기술이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서는 지원하기 힘들다는 문제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는 지원 대상에는 제외되었다.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만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을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비스타와 같이 지원이 2017년 4월 11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08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될 예정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라스베이거스의 MIX 11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을 발표하면서 최초의 플랫폼 프리뷰를 공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이 개발에 3주 정도 걸린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번 출시는 CSS3 그라디언트를 포함한 표준 지원을 더 개선한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스크톱 모드에서는 액티브X를 지원하지만 모던 UI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은 9와 달리 한국의 대부분의 웹에서 호환성 문제를 일으키며 급기야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으로의 업데이트를 막는 킷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기도 했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1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종료될 예정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1 빌드가 2013년 3월 유출된 윈도우 8.1 업데이트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빌드에는 탭 동기화를 위한 불완전한 매커니즘을 포함하며 자체 사용자 에이전트에서 "Gecko"와 비슷한 것으로 식별한다. 나중에 나온 빌드들에는 SPDY, 확장된 개발 도구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며 웹GL 지원도 제공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인터넷 익스플로러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1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윈도우 서버 2016용은 윈도우 서버 2016과 같이 지원이 2027년 1월 12일 종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윈도우 10용은 해당사항이 없다. 모든 지원이 종료된 경우 표시가, 일부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붙는다. 버전 연도 레이아웃엔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IBMOS/2 애플 맥 OS 유닉스HP-UX솔라리스 10, 서버 16,서버 19 8.1, 서버12 R2 8, 서버 12 7, 서버08 R2 비스타,서버 08 서버 03,서버 03 R2 XP Me 2000 98, 98 SE NT4.0 95 NT3.51 NT3.5 NT3.1 3.1x XPPC 7.6~9.2.2PPC 7.5.xPPC 7.1~8.168K7.1.2PPC 7.0.168K - 연도 - 2015~2018 2013 2012 2009 2006~2008 2003~2005 2001 2000 2000 1998~1999 1996 1995 1995 1994 1993 1992 1993 2001 1997 1994 1992 1991 1990s Edge 2015~2018 - IE11 2013~2018 트라이던트 7 SP1 IE10 2012~2013 트라이던트 6 SP1 IE9 2011 트라이던트 5 SP2 IE8 2009 트라이던트 4 SP1/2 SP2 SP3 IE7 2006 트라이던트 3.1 SP1/2 SP2/3 IE6 2001 트라이던트 6.0 SP1 6.0 SP1 6.0 SP1 6.0 SP1 IE5.5 2000 트라이던트 5.5 SP2 IE5.0 1999 트라이던트(윈도우)태즈먼 (맥) 5.01 SP4 98SE 16-bit 16-bit 5.2.3 5.1.7 5.01 SP1 IE4.5 1999 - IE4.0 1997 트라이던트 OSR2.5 16-bit 16-bit 4.01 IE3.0 1996 - OSR2/2.1 16-bit 16-bit 16-bit 윈도우16-bit 베타 IE2.0 1995 - OSR1 16-bit 16-bit 16-bit 16-bit 윈도우16-bit 2.0.1 IE1.5 1996 스파이글래스 IE1.0 1995 스파이글래스 Plus!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Internet Explorer Mobile)은 윈도우 모바일을 위한 웹 브라우저이다. 윈도우 모바일 5.0 이전에는 포켓 인터넷 익스플로러(PIE)라고도 불렸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윈도우 폰에서도 쓰인다. 다만 윈도우 10 모바일에서 보조프로그램으로 격하되고, 모바일에선 CPU 미지원으로 액티브X를 쓸 수 없다. 윈도우 서버 2003 이후부터 제공되는 보안 설정이 강화된 서버용 한정판이다. 1995년부터 2011년까지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과거에는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점유율이 가장 높은 브라우저였다. 그러나 파이어폭스, 오페라, 구글 크롬 등 다른 웹 브라우저들의 시장 점유율이 오름에 따라 2004년 90%에 육박하던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떨어져서 2008년에는 모든 버전을 합쳐서 60% 후반대를 유지하였다. 2011년 3월 14일 인터넷 익스플로러 9가 정식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의 시장 점유율은 반등하지 못하고 계속 하락세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날 스탯카운터 통계 기준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은 30% 후반대를 머물고 있다. 스탯카운터의 통계에 따르면 2011년 1월부터 8월까지 대한민국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 점유율은 매달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 9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처음으로 90% 아래로 떨어졌다. 2011년 12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버전별 점유율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이 46.48%로 가장 높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7 13.43%, 인터넷 익스플로러 9 13.06%, 인터넷 익스플로러 6 7.99% 순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전 세계에 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 한 브라우저의 점유율이 매우 높고, 구 버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점유율도 여전히 높기 때문에 웹 표준 문제가 지적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14년 4월 26일, 마이크로스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6부터 11까지 버전에서 "원격 코드 실행" 취약점을 발표했다. 2014년 4월 28일, 미 행정 부처인 국토안보부의 산하 컴퓨터 긴급 대응팀인, 미국 컴퓨터 긴급 대응팀 (이하, US-CERT)은 성명을 통해 주의보를 내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외부의 프로그램이나 사용자가 "시스템에 접근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취약하다라고 전했다. US-CERT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보안의 취약점으로부터의 공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이 사안을 검토하고, 버그를 고칠때 까지 다른 브라우저를 사용하라고 권고하였다. 영국 국립 컴퓨터 비상상황 대응 팀 (The UK National Computer Emergency Response Team) (이하, CERT-UK)는, 자문 발행물을 통해, 예상되었던 우려이며,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추가적인 단계의 백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백신을 최신상태로 유지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이버 보안 회사인 시만텍은, "Windows XP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웹 브라우저 목록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브라우저 전쟁 분류:인터넷의 역사 분류:사유 소프트웨어 분류:윈도우 구성 요소 분류:윈도우 웹 브라우저 분류:인간과 컴퓨터 상호 작용 분류:뉴스 애그리게이터 분류:1995년 소프트웨어 분류:FTP 클라이언트 |
1932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14년 만주국(滿州國) 대동(大同) 원년 1월 1일 - 조선상공회의소 설립인가 1월 8일 -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도쿄 사쿠라다몬 밖에서 일본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 1월 12일 - 제주 우도 잠녀들이 열악한 조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봉기(제주잠녀항쟁) 2월 - 조선혁명군이 중국혁명군사령관 리춘룬과 합작하여 한중연합군 조직 2월 23일 - 조선 최대의 농민조합이었던 용천소작조합 강제 해산 3월 - 단천, 성진에서 적색노조사건으로 관계자 다수 검거 3월 1일 - 만주국 건국 3월 11일 -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이 중국의용군과 합작하여 만주 신빈현에서 일본군 대파 4월 1일 - 한인애국단이 최흥식, 유상근 등을 중국 다롄에 파견해 일본 고위관리를 폭살 시도하다 검거 4월 11일 - 충청남도 아산에서 천연두 창궐로 100여명 사망 4월 12일 - 이광수 장편 이 에 연재 4월 29일 -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중국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의거 5월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본부를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전 5월 1일 - 조선어학회, 기관지 속간 6월 5일 - 충무공 이순신의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 봉안식 거행 6월 15일 - 제8대 사장으로 조만식 취임 6월 18일 - 국제 농구 연맹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설되었다. 7월 5일 - 살라자르가 포르투갈의 총리로 취임 7월 10일 - 방응모, 인수 7월 29일 - 경상북도 일대에 폭염으로 섭씨 41-42도 기록, 일사병으로 5명 사망 7월 30일 -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제10회 하계 올림픽이 개최 (~8월 14일). 7월 31일 - 나치,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됨. 8월 6일 - 제1회 베니스 영화제 개막. 9월 19일 - 한중연합군, 일본군과 제1차 쌍성보 전투를 벌임 9월 23일 - 네지드와 헤자즈 왕국이 합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국 9월 30일 - 충청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 10월 3일 - 이라크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10월 7일 - 조선경마령 공포 10월 10일 - 히로히토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가 일본 이치가와 형무소에서 순국 11월 6일 -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제7대 의회 선거 11월 7일 - 한국독립군, 제2차 쌍성보 전투에서 승리 11월 10일 * 김규식, 최동오 등이 상하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조직 * 조선총독부가 정신작흥운동 개시 11월 20일 - 통영운하와 통영해저도로 준공 11월 27일 - 황해도 해주구세요원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 발행 12월 3일 - 일본 농림성이 미곡법에 따라 한국미 50만 석을 매입할 것을 지시 12월 19일 - 윤봉길이 일본 가나자와 시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순국 12월 25일 - 한중연합토일군이 만주 동만에서 일본만주연합군 2천명과 격전해 대승을 거둠 12월 27일 - 조선어철자위원회 조직 덴마크에서 레고 그룹 설립. 1월 5일 -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작가 움베르토 에코. 2월 6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 쿠바의 혁명가, 아나키스트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2월 9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 히로오카 다쓰로. 2월 17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박성용. 2월 27일 - 영국의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5월 15일 - 미국의 정치가, 뉴어크의 첫 흑인 시장 케네스 A. 깁슨. 6월 21일 - 아르헨티나의 음악가 랄로 시프린. 7월 9일 - 미국의 정치가 도널드 럼즈펠드. 7월 20일 - 한국계 미국인 현대미술가 백남준. 8월 7일 - 에티오피아 육상 선수 아베베 비킬라 8월 24일 - 영국의 추기경 코맥 머피오코너. 9월 30일 - 일본의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10월 13일 - 미국의 수학자 존 G. 톰프슨. 10월 27일 -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래스. 10월 28일 - 구 소련의 정치인 블라디미르 이바시코. 11월 5일 - 대한민국의 승려 법정. 12월 4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최일남 1월 24일 - 독일의 히틀러 청소년단원 헤르바르트 노르쿠스. 3월 14일 -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 4월 5일 - 멕시코의 작곡가 구티 카르데나스. 4월 20일 - 이탈리아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 5월 18일 - 에른스트 폰 벨링, 독일 법학자. 8월 9일 - 캐나다의 수학자 존 필즈 9월 16일 - 웨일스 출신의 할리우드 무명 여배우 페그 엔트위슬. 10월 10일 - 독립운동가 이봉창 11월 17일 - 독립운동가 이회영 12월 19일 - 독립운동가 윤봉길 문학상 물리학상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2월 6일 정유 2월 계묘 대 3월 7일 정묘 3월 갑진 대 4월 6일 정유 4월 을사 소 5월 6일 정묘 5월 병오 대 6월 4일 병신 6월 정미 소 7월 4일 병인 7월 무신 대 8월 2일 을미 8월 기유 소 9월 1일 을축 9월 경술 소 9월 30일 갑오 10월 신해 대 10월 29일 계해 11월 임자 소 11월 28일 계사 12월 계축 대 12월 27일 임술 |
2000년 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며, 이 해는 20세기와 제2천년기의 마지막해이기도 하다. 21세기의 시작은 2001년 1월 1일이며,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문화적이나 상업적으로 연도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것에 의미를 두기 위해 2000년 1월 1일을 21세기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 등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 발표 또는 사실로 확정하기도 하였다. 단, 미국은 나중에 이를 수정하여 2001년이 21세기의 시작이라고 발표하였다. 1월 1일 -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축제가 전세계에 걸쳐 치뤄졌다. 제2천년기와 20세기는 시작이 되었다. 1월 3일 - 김대중 정부가 신년사를 발표했다. 재정경제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을 각각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로 승격시키고, 여성특별위원회를 여성부로 신설하기로 했다. 한편 초중고등학교에 컴퓨터를 전면 보급하는 등의 정보화 정책도 계속 추진키로 했다. 1월 5일 - 하나로통신에서 무료 인터넷 전화를 처음으로 서비스 개시했다. 1월 10일 - 미디어 그룹 타임 워너와 아메리카 온라인이 합병을 선언했다. 1월 12일 - 대한민국 16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 반대운동과 낙선운동을 추진하는 시민단체인 총선시민연대 가 발족됐다. 1월 13일 - 김대중 정부의 내각 개편이 단행되었다. 장관급 2명을 포함한 총 7명이 새로 내정됐다. 1월 15일 * 대한민국 선거법 개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일부 의원들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했다. * 새천년민주당의 예비 당 대표로 서영훈이 내정됐다. 1월 17일 - 새정치국민회의가 민주당과 합당을 공식 결의했다. 1월 20일 *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됐다. * 버스카드의 이용 범위가 서울 지하철로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교통카드 기능을 개시했다. * 불법자금 수수 의혹을 받던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재정담당관 볼프강 휠러가 자살했다. 이로 인해 헬무트 콜 명예총재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1월 22일 * 대구 신남네거리 지하철 공사 현장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3명이 사망하고, 대구 지하철 2호선의 공사가 전면 임시 중단됐다. * 2000년 선수협 파동 사건이 발생했다. 1월 24일 *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아이오와주에서 첫 후보 경선이 치뤄지면서 본격적인 대선전에 들어갔다. * 총선시민연대가 공천 반대 의원 명단 66명을 발표했다. 1월 27일 - 국회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총선에 적용될 선거구 개편안을 확정했다. 최종적으로 26~27개 선거구가 감축됐다. 1월 30일 - 민주노동당 창당. 2월 9일 - 미국 육군 제8군 용산기지에서 폼알데하이드 223리터를 한강에 무단 방류하다. 2월 11일 - 영국 정부, 북아일랜드 자치권 회수 및 직접 통치 개시. 3월 18일 -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 당선. 3월 26일 -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당선. 4월 1일 - 일본 총리 오부치 게이조가 혼수 상태에 빠짐. 4월 5일 - 모리 요시로가 일본 총리대신이 됨. 4월 13일 - 대한민국 16대 총선 - 한나라당 133석, 새천년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 4월 14일 -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켰던 정두영이 경찰에 체포되다. 4월 18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임수혁이 롯데 자이언츠VS LG트윈스의 경기에서 2회초 2루로 진루하다 심정부정맥으로 쓰러지다. 5월 14일 -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뇌경색으로 사망. 5월 29일 - 대한민국 제15대 국회 임기 종료. 5월 30일 -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임기 시작. 6월 13일 - 남북 정상 회담 개최 (~6월 15일) 7월 1일 - 대한민국, 의약 분업 본격 시행. 7월 2일 - 대한민국의 시외전화 지역번호가 16개로 개정. 7월 16일 * 동아시아에서 개기 월식이 관측되었다.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8.15이산가족 상호 방문단 명단 200명씩을 주고받았다. 7월 25일 - 에어프랑스 4590편 추락 사고 발생. 8월 2일 - 한미 대표, 한미행정협정(SOFA)를 다른 나라 수준으로 개정키로 합의. 8월 3일 - 수하르토 前 인도네시아 대통령 부패혐의로 공식 기소. 8월 5일 - 남한 46개 언론사 사장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초청으로 방북. 8월 8일 *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전 대통령 국고유용혐의로 기소. * 현대그룹 3차 소떼 방북. 8월 10일 - 현대그룹, 북조선과 서울-판문점-개성간 버스를 이용한 육로 관광 합의. 8월 11일 - 대한민국 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맞서 2차 총폐업 돌입. 8월 12일 - 러시아 해군 소속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바렌츠해에서 침몰. 승무원 118명 전원 사망. 8월 14일 -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4년 만에 재가동. 8월 15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북한 이산가족 200명 서울과 평양에서 반세기만에 혈육 상봉하였다. 8월 22일 - 일본 도쿄에서 제10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본 간 국교정상회담 개최. 8월 23일 - 태풍 프라피룬이 대한민국에 상륙. 8월 29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 개최. 9월 2일 - 대한민국 정부, 비전향 장기수 63명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송환. 9월 5일 - 투발루, 유엔 가입. 9월 1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용순 조선로동당 비서 서울 방문. 9월 12일 - 일본 태평양 연안 등에서 600mm이상의 비가 내려 인명/재산 피해가 속출하다. 9월 20일 * 한빛은행 외압 대출 의혹 사건 관련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사임. * 금강산에서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9월 22일 * 대한민국 정부, 금융구조조정 촉진 위해 공적자금 40조 추가조성안 발표. *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재일 조총련 동포 고향방문단 서울 도착. 9월 24일 - 사상 첫 남북 국방장관회의 참석위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을 단장으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 13명 판문점 통해 입국. 9월 25일 - 산마리노와 대한민국이 수교하였다. 9월 28일 - 대한민국 정부, 대북 식량 차관 제공안 공식 발표. 9월 30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3차 남북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 발표. 10월 4일 -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붕괴. 10월 5일 * 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에 의해 장례식을 치르다. * 10월 5일 - 서울에서 동북아 국제경찰청장회의가 열리다. 10월 6일 - 대한민국 의료계 4차 총파업.(~ 10월 10일) 10월 11일 - 워싱턴 D.C.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명록 국방부위원장과 올브라이트 국무부장관 회담. 10월 14일 -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 연구팀, 첫 영장류 복제원숭이 ‘테트라’ 탄생시킴. 10월 16일 - 대한민국과 미국, 적정 수준의 미사일 개발에 원칙적 합의, 사거리 300km미사일 생산 가능. 10월 22일 -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이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적 조작행위를 밝힘. 10월 중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청년영웅도로를 개통함. 11월 1일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유엔 가입. 11월 5일 - 일본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유물을 날조하여 일본의 선사시대 연대를 70만년 전으로 조작했음이 밝혀졌다. 11월 7일 -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를 누르고 승리. 최종 결과는 1개월 뒤 플로리다의 법원에 의해 결정됨. 11월 14일 - 정선선 마지막 비둘기호 열차가 영업 운행을 마침으로써, 비둘기호는 종운 되었다. 11월 11일 -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스키 휴양지 키츠슈타인호른 빙하 근처 터널 을 통과하던 산악열차에서 발생한 화재로 172명 사망. 1월 10일 - 명탐정 코난 1기가 한국에서 KBS 2TV를 통해 첫 방영되다. 1월 23일 - 2000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가 최우수 극영화상과 감독상, 각본상 부문에서 수상했다. 2월 17일 - 윈도우 2000이 출시되다. 2월 29일 - 서울 지하철 7호선 온수 ~ 신풍 구간 개통. 3월 31일 - 프로 야구팀 SK 와이번스 창단. 4월 1일 - 수도권 전철 노선 통합. 이날부터 철도청 소속 국철 노선들은 모두 서울 지하철 노선명을 따르게 된다. 5월 3일 - 부산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방송 개국. 5월 21일 - * 대한극장 철거. 이듬해 12월 17일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재관. 대한극장은 국내 최초의 대형 상영관이다. * 주러시아 미국 대사관이 착공 15년만에 완공되다. 6월 10일 - 유로 2000 대회 개막. (~ 7월 2일) 6월 22일 - 한국교육방송공사 창립. 7월 4일 - 대한민국에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되다. 7월 6일 - 2006년 FIFA 월드컵 개최국으로 이 선정되었다. 8월 1일 - 서울 지하철 7호선 완전 개통(신풍 ~ 건대입구 구간). 8월 7일 - 서울 지하철 6호선 봉화산 ~ 상월곡 구간 개통. 8월 1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국립교향악단, 사상 첫 남북 클래식 합동음악회 갖기 위해 서울 도착. 8월 20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국립교향악단 첫 서울 공연. 9월 10일 -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시입장 합의 발표. 9월 14일 - 윈도우 ME가 출시되다. 9월 15일~10월 1일 -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개최. 9월 17일 -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 마치고 개관. 9월 18일 - 임진각에서 분단으로 끊어진 경의선 연결공사 기공식 열림. 9월 19일 - 시드니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윤미진, 김남순, 김수녕 금-은-동 수상. 9월 27일 - 뇌과학연구사업단 이수영 교수팀 세계 3번째로 음성인식 반도체 칩 개발. 9월 28일 - 태권도 정재은, 시드니올림픽서 정식종목 채택 후 첫 금메달. 10월 1일 -충북선 청주공항역 개통. 10월 13일 -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다. 10월 22일 - SBS의 도전 1000곡 첫 방송. 11월 10일 - 서해대교 개통. 11월 14일 - 서울방송(SBS)이 CI를 새로 도입하다. 11월 15일 - 대한민국,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1월 20일 -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개통. 12월 8일 - 대전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방송 개국. 12월 15일 - * IMT-2000 사업자로 SK텔레콤과 KT가 선정됨. * 서울 지하철 6호선 전 구간(응암순환 ~ 상월곡) 개통 및 무정차역 4개(이태원 ~ 약수) 통과. 12월 23일 - 극동방송 표준FM 개국하였다.(주파수 FM 106.9MHz) (호출부호 및 출력 HLKX-SFM 5KW) 12월 30일 - 중화인민공화국 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 개항. 위키백과의 전신인 누피디어가 만들어짐. 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권은빈 (CLC). 1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세이 (위키미키). 1월 8일 - 미국의 배우 겸 가수 노아 사이러스 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석철 (더 이스트라이트). * 대한민국의 가수 이채연 (아이즈원). 1월 17일 - 대한민국의 래퍼 찬희 (SF9). 1월 19일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최다빈. 2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우림 2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민. 3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겸 방송인 정성영. 3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활 (더보이즈). 3월 17일 - 대한민국의 바둑기사 신진서. 3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현진 (스트레이 키즈).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산하 (아스트로). 3월 23일 - 중국의 가수 런쥔 (NCT). 4월 6일 - 미국의 배우 CJ 애덤스. 4월 9일 - 미국의 가수 재키 이베잉코. 4월 12일 - 대한민국의 래퍼 선우 (더 보이즈). 4월 13일 - 미국의 가수 낸시 (모모랜드). 4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태의. 4월 20일 - 일본의 축구선수 히라카와 레이 4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노 (NCT). 4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다빈. 5월 5일 - 중국의 아이돌 가수 쑨전니 5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인서. 5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진영 (워너원). 5월 18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라이언 세세뇽 5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양예나 (에이프릴). 5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지 (ITZY). 6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해찬 (NCT). 6월 7일 - 일본의 축구 선수 세코 아유무 6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유선. 6월 15일 - 대만의 첼로 연주자 어우양나나 6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현수. 7월 23일 - 일본 여성 아이돌 그룹 SKE48 팀E 와 러브 크레센도 와 무시카고 의 멤버 고토 라라 7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성유빈. 7월 30일 - 태국의 배우 겸 싱어송라이터 야니네 바이겔 7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새론. 8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채원 (아이즈원). 8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혜연. 8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향기. 8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민 (NCT). 8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보민 (골든차일드). 8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레이첼 (에이프릴). 8월 29일 - 일본의 배우 하마베 미나미 9월 8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김건희 9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형석. 9월 12일 -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 HKT48 팀TII의 멤버 사카모토 에레나 9월 14일 - 대한민국의 래퍼 한 (스트레이 키즈). 9월 15일 - 호주의 래퍼 필릭스 (스트레이 키즈). 9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승민 (스트레이 키즈). 9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도규. 10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루아 (위키미키). 10월 10일 - 중국의 가수 양양 (WayV).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수한. 10월 16일 - 일본의 배우 야기 유키. 11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준목. 10월 24일 -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 HKT48 팀H의 멤버 아키요시 유카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겸 방송인 김시은. 10월 31일 - 미국의 배우 밎 가수 윌로우 시미스. 11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유리 11월 8일 - 중국의 가수 겸 배우 왕위안 11월 10일 - 미국의 배우 매켄지 포이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시연 (프리스틴). 11월 20일 - 영국의 가수 코니 탤벗. 11월 28일 - 중국의 가수 겸 배우 이양첸시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원홍.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에릭 (더 보이즈). 12월 23일 - 일본의 아이돌이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 팀8와 팀B의 멤버 사카구치 나기사 12월 28일 - 브라질의 배우 겸 가수 라리사 마노엘라 12월 29일 - 중국의 가수 이런 (에버글로우). 찰스 먼로 슐츠 오부치 게이조 하페즈 알아사드 피에르 트뤼도 2월 - 대한민국의 유명한 진돗개 백구. (← 1988년) 2월 12일 - 미국의 만화가 찰스 먼로 슐츠. (← 1922년) 2월 23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스탠리 매슈스. (← 1915년) 4월 7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모아시르 바르보자 나시멘투. (← 1921년) 4월 19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김복동. (← 1933년) 5월 10일 - 일본의 성우 시오자와 카네토. (← 1954년) 5월 14일 - 일본의 제84대 총리 오부치 게이조. (← 1937년) 6월 10일 - 시리아 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 (← 1930년) 6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환성(NRG). (← 1981년) 6월 19일 - 일본의 제74대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 1924년) 7월 6일 -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 1911년) 8월 24일 - 스위스의 킥복싱 선수 앤디 훅. (← 1964년) 9월 2일 - 나치 독일 무장친위대의 장교 하인츠 하르멜. (← 1906년) 9월 14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순원. (← 1915년) 9월 28일 - 캐나다의 총리 피에르 트뤼도. (← 1919년) 11월 22일 - 체코의 장거리 육상 선수 에밀 자토페크. (← 1922년) 12월 24일 - 대한민국 시인 서정주. (← 1915년) 12월 25일 - 미국의 철학자 윌라드 반 오만 콰인. (← 1908년)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홍준우. (← 1945년) 경제학상 제임스 헤크먼, 대니얼 맥패든 문학상 가오싱젠 물리학상 조레스 알페로프, 허버트 크뢰머, 잭 킬비 생리학 및 의학상 아르비드 칼손, 폴 그린가드, 에릭 캔들 평화상 김대중 화학상 시라카와 히데키, 앨런 히거, 앨런 맥더미드 작품상 아메리칸 뷰티 감독상 샘 멘데스(아메리칸 뷰티) 남우주연상 케빈 스페이시(아메리칸 뷰티) 여우주연상 힐러리 스웽크(소년은 울지 않는다) 남우조연상 마이클 케인(사이더 하우스) 여우조연상 안젤리나 졸리(처음 만나는 자유)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2월 5일 계사 2월 기묘 대 3월 6일 계해 3월 경진 소 4월 5일 계사 4월 신사 소 5월 4일 임술 5월 임오 대 6월 2일 신묘 6월 계미 소 7월 2일 신유 7월 갑신 소 7월 31일 경인 8월 을유 대 8월 29일 기미 9월 병술 소 9월 28일 기축 10월 정해 대 10월 27일 무오 11월 무자 대 11월 26일 무자 12월 기축 소 12월 26일 무오 |
마이크로소프트 코퍼레이션 ()는 미국의 세계 최대의 다국적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기업이다. 기업명의 공식 약칭은 MS 이나, 대한민국에서는 마소 로도 불린다.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마이크로소프트 한국지사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양한 컴퓨터 기기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제품들을 개발, 생산, 판매, 관리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장 유명한 제품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라는 운영 체제이다. 1975년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위해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Micro-soft라는 이름으로 이 회사를 세웠다. 2006년 6월 15일 빌 게이츠는 2008년 7월 31일에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후 직접 세운 자선 단체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전력하겠다고 밝혔으며,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빌 게이츠의 대학 시절 친구인 스티브 발머가 사장직을 담당했다. 2009년경, 빌 게이츠가 그의 오른팔인 스티브 발머에게 회사의 최고 리더십을 양하는 과정에서 바통을 정확히 넘기는 방법에 관한 교본을 마련하기도 했다. 게이츠는 2000년 발머에게 CEO직을 넘겼다. 그러나 게이츠는 2008년 6월에야 회사의 일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그 2년 전에 미리 이 사실을 알려 대비토록 한 바 있다. 그렇지만 게이츠는 여전히 워싱턴 주 레이먼드에 있는 회장실의 주인이다. MS는 발머의 인도 아래 세계 최고 수익성을 갖는 강력한 IT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2008년 여름 게이츠 퇴장 이후 주가가 30%나 떨어졌는데 발머에게 갖는 불안감 보다는 세계 경제의 어려움 탓으로 그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 직원은 2013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0만 여 명이며, 인도, 중국, 영국 등에 컴퓨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5월 10일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전자회사 스카이프를 85억 달러(약 10조 원)에 인수하였다. 더불어 2013년 9월 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핀란드의 휴대전화 생산 업체인 노키아의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54억 4,000만 유로(약 7조 8,654억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13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가 12개월 안에 은퇴한다고 밝혔다. 2014년 2월 4일, 사티아 나델라를 CEO로, 존 W. 톰슨을 회장으로 임명했다. 2015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HPE와 클라우드 사업부문에서 협력을 한다고 밝혔다. 특히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집중하고 퍼블릭 클라우드 서비스는 MS와 같은 파트너 솔루션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현재, 마이크로소프트가 참여하는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폰 (모바일 운영체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사무용 제품군)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태블릿 기기)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북 (노트북 기기) 마이크로소프트 루미아 (휴대 전화) 마이크로소프트 빙 (검색엔진) 마이크로소프트 스카이프(인스턴트 메신저)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원(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통합 개발 환경) MSN (마이크로소프트 네트워크, 인터넷 포털) 마이크로소프트 엣지 (웹 브라우저) 마이크로소프트 코타나 (음성 인식) MS-DOS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윈도우 라이브 메신저 (인스턴트 메신저) * 2013년 3월부터 스카이프로 대체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통합 개발 환경) 마이크로소프트 포켓 피씨 (PDA용 운영 체제) 윈도우 CE(모바일 기기용 운영체제) 마이크로소프트 SQL 서버 마이크로소프트 익스체인지 서버 마이크로소프트 기타 서버 제품 (SMS, ISA, MOM, 등) 마이크로소프트 기업용 CRM 제품 마이크로소프트 셰어포인트 마이크로소프트 준 마인크래프트 IBM 호환 개인용 컴퓨터(PC)에 MS-DOS를 납품하였고, 때마침 PC의 성공에 힘입어 도스 시장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1995년, 윈도우 95라는 GUI 운영 체제를 출시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수많은 개인용 컴퓨터 주변기기 업체들로 하여금 윈도 전용 드라이버를 중심으로 개발하도록 유도했다. 자사의 MS-DOS 이외의 다른 도스와의 호환성도 인위적으로 버렸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또한 경쟁 업체들이 인터넷에서 앞서나감에 따라, 윈도 95용으로 별도 판매된 PLUS! 팩에 처음 제공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 98부터는 운영 체제에 포함하여 끼워팔기를 하여 비판을 받았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지나친 시장 장악으로 경쟁사들을 시장에서 도태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익스플로러는 점유율 95%의 독점 상태에까지 이르러서,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의 대체 브라우저가 등장하기까지 5년여동안 업그레이드가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을 포함하여 말 그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들은 Micro$oft 라고 비꼬기도 한다. 원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사용하던 말이었지만 밸브 코퍼레이션이 레프트 4 데드 관련 포럼에서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연도별로 크게 아래와 같은 로고를 사용했다. 맨 처음 사용된 초기의 로고는 1987년 9월까지 사용되었고, 로고의 이름은 blibbet이라고 불렸다. 그 뒤 1987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스캇 베이커(Scott Baker)라는 사람이 현재와 같은 모양과 형태를 갖춘 팩맨(Pac-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고를 만들었다. 1994년부터 "Where do you want to go today? (오늘은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라는 광고 캠페인이 진행되면서부터 1987년 디자인된 팩맨 로고 아래에 추가적으로 캠페인 문구가 삽입되었고 이 캠페인 문구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02년까지 각종 인쇄매체, TV 광고, 웹사이트 로고 등에 쓰인다. 2003년부터는 "Your potential, Our passion (당신의 가능성, 우리의 열정)"이란 슬로건 문자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가 다양한 장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슬로건이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10년까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2010년에 열린 비공개 MGX (Microsoft Global Exchange) 컨퍼런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새로운 슬로건인 "Be What s Next (다음의 무언가가 되자)"를 공개했다. 이 슬로건은 2011년부터 2012년 8월 22일까지 사용되었다. 이후 2012년 8월 23일 새로운 로고를 선보였다. 이 로고는 물결치는 4색깃발이 사각형 모양으로 바뀐 형태이다. logo (1987) + slogan (1994).svg|스캇 베이커가 디자인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팩맨 로고.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쓰였으며 1994년-2002년까지는 "Where do you want to go today?" 라는 슬로건과 함께 사용됨. logo (1987) + slogan (2006).png| "Your potential, Our passion." 이란 슬로건과 함께 사용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로고.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사용됨. logo (1987) + slogan (2011) horizontal.png|"Be What s Next"란 슬로건과 함께 사용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로고. 2011년부터 2012년 8월 22일까지 사용됨. logo (1982).svg|1982년부터 1987년까지 사용한 초기의 로고 logo (1987).svg|1987년부터 2012년까지 사용한 로고 8월 23일부터 새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로고. 물결치는 4색깃발이 사각형 모양으로 바뀌었다.이 사각형은 반시계 방향으로 오피스, 윈도우, 빙,엑스박스를 의미한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테크넷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분류:1975년 설립된 기업 분류:워싱턴주의 기업 분류:미국의 기업 분류:컴퓨터 기업 분류:빌 게이츠 분류:클라우드 컴퓨팅 제공자 분류:미국의 다국적 기업 분류:미국의 전자 기업 |
웹사이트 (는 인터넷 프로토콜 기반의 네트워크에서 도메인 이름이나 IP 주소, 루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일반 URL을 통하여 보이는 웹 페이지 (Web Page)들의 의미 있는 묶음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홈페이지는 엄밀히 말해 웹사이트를 지칭한다. 최초의 웹사이트는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CERN에서 만든 info.cern.ch이다.(지금도 CERN사이트 안에 존재함.) 웹사이트는 인터넷이나 랜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웹 서버 상에서 호스팅된다. 웹 페이지는 HTML/XHTML의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일반적으로 순수 문자열로 쓰여진 문서이다. 웹 페이지는 HTTP를 통하여 접속되며 가끔씩은 HTTPS를 통한 암호화를 사용하여 웹 페이지 콘텐츠를 이용한 사람들에게 보안과 개인 정보 보호를 제공한다. 사용자가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는 HTML 마크업 명령을 모니터에 표시하는 그대로 페이지 내용을 표현한다. 공식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웹사이트는 총체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을 이루고 있다. 월드 와이드 웹(WWW)는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 리가 만들었다. 1993년 4월 30일에 CERN은 월드 와이드 웹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HTML과 HTTP가 도입되기 전에 파일 전송 프로토콜과 고퍼 프로토콜과 같은 다른 프로토콜들이 서버로부터 개별 파일을 내려받는 데 쓰였다. 이러한 프로토콜들은 사용자가 탐색하고 파일을 내려받는 단순한 디렉터리 구조를 제공한다. 문서는 워드 프로세서 형식 등으로 형식화되지 않은 순수 문자로만 된 글자로 표현되었다.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 리가 만든 세계 최초의 웹 사이트로 CERN홈페이지 안에 Welcome to info.cern.ch!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이 웹 사이트에서는 개발자인 팀 버너스 리의 소개와 생애, 연구자료,스크린샷등,여러 CERN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그 후로, 약 24년 동안 전 세계 수억개의 사이트가 새로 생겼으며,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능으로 분류하면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개인 웹사이트 상용 웹사이트 정부 웹사이트 비영리 단체 웹사이트 포털 사이트 - 현관문이란 뜻으로 정보검색, 커뮤니티를 통합한 형태의 웹사이트이다. 검색 사이트 - 웹 크롤러가 수집한 많은 인터넷상의 웹문서중 사용자가 검색한 정보만 추출해서 보여준다. 전자상거래 사이트 - 인터넷을 통해 상품을 사고판다. 다운로드 사이트 - 소프트웨어나 바탕화면 등의 자료를 받는다. 정보 사이트 - 어떤 주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준다. 미러 사이트 블로그 인터넷 포럼 각각의 모든 웹사이트 또는 홈페이지는 특수한 단하나의 예약된 index.html 이라는 페이지를 갖고있다. 이는 최초 인트로 웹페이지이며 웹브라우저는 디폴트로 브라우저가 방문한 사이트(디렉토리)의 index.html 의 이름을 갖는 HTML파일을 우선적으로 읽어들이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index.html 파일은 일반적으로 태그와 하위의 태그로 영역 구획 및 여기에 콘텐츠를 넘겨주는 기능을 하는 간단한 구조의 그릇 역할처럼 설정되곤 한다. (https://developer.mozilla.org/en-US/docs/Web/HTML/Element/frameset) 월드 와이드 웹 협회 분류:영어계 외래어 |
하이퍼텍스트 (Hypertext는 참조(하이퍼링크)를 통해 독자가 한 문서에서 다른 문서로 즉시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주로 컴퓨터나 다른 전자기기들을 통해 표시된다. 하이퍼텍스트라는 낱말은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이자 철학자인 테드 넬슨이 처음 고안하여 쓰이게 되었다. hyper(건너 편의, 초월, 과도한) 와 text 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로서, 파생텍스트라고도 한다. 인터넷과 결합하여 HTML의 주된 구성요소가 되었다. 기존의 문서가 순차적이면서 서열형 구조라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 따라 그 차례가 바뀌는 임의적이면서 나열형인 구조를 가진다. 즉, 출판된 책처럼 작가의 의도대로 사용자가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문서들을 어떠한 행위(클릭)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등장은 검색엔진과 더불어 정보습득의 새로운 장을 인류에게 가져다 주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탄생케 하였다. 웹이라는 것은 컨텐츠들이 하이퍼텍스트로 묶인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가 쓰인 기술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HTML과 HTTP이다. HTTP는 하나의 프로토콜으로서, 이 통신규약을 이용해서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이 HTTP로 HTML 문서가 전달될 수 있다. 1941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에 영감을 준 것으로 간주되는, 갈림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89년, 당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과학자였던 팀 버너스 리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정보 공유 기능이 CERN 및 기타 학술 기관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 간에 사용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 부응하여 새로운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를 제안하였고 나중에 원형을 만들었다.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 옐로리스 더글러스(J. Yellowlees Douglas) 캐서린 하일리스(N. Katherine Hayles) 마이클 조이스(Michael Joyce) 조지 랜도우 (교수)(George Landow (professor))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 스튜어트 몰드롭(Stuart Moulthrop) 테드 넬슨(Ted Nelson) HTML 분류:미국의 발명품 |
두벌식 한글 자판. 문자 인코딩 (文字― 또는 줄여서 인코딩 은 문자나 기호들의 집합을 컴퓨터에서 표현하는 방법이며 복호화가 지닌 본래의 문자나 기호를 뜻하게 되는 부호를 문자 코드 (文字―라고 한다. 문자 인코딩의 대표적인 예로 전건을 길게, 또는 짧게 두드려서 라틴 알파벳을 나타내는 모스 부호가 있으며, 라틴 알파벳, 숫자, 특수 문자 등을 정수와 그에 대응되는 7비트 이진수로 표현하는 방법인 아스키(ASCII)가 있다. 컴퓨팅 초기에는, 아스키(ASCII, 1963년), EBCDIC(1964년)과 같은 문자열 세트가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자열 세트의 제한은 명백했으며 수많은 애드혹(ad hoc) 방식이 개발되었다. 한중일 계열의 동아시아 스크립트를 포함하여 다중 문자(언어) 지원이 시급했다. 문자 집합 (character set, charset) 또는 문자셋 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글자들의 집합을 정의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문자 집합을 여러 문자 인코딩에서 쓸 수도 있다. 특히 집합 안의 문자들에 음수가 아닌 정수들을 배정한 것을 부호화된 문자 집합 (coded character set, CCS)이라 한다. 문자 집합은 ASCII와 같이 더 이상의 문자가 추가될 수 없기도 하고, 유니코드와 같이 문자가 계속 추가될 수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과 문자 인코딩은 어떤 문자를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나타낸다는 데서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 역사적인 이유로 MIME이나 그에 기반한 시스템은 문자 집합("charset")을 문자 인코딩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문자 인코딩 형태 (character encoding form, CEF)는 특정한 문자 집합 안의 문자들을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일정한 범위 안의 정수(코드값)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유니코드 코드 포인트를 8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8이나, 16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16,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문자 인코딩들이 포함된다. 문자 인코딩 구조 (character encoding scheme, CES)는 문자 인코딩 형태로 변환된 코드값을 옥텟 기반의 시스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옥텟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문자 인코딩 형태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으며, 8비트 이상의 숫자를 사용하는 UTF-16과 같은 문자 인코딩 형태의 경우 엔디안을 지정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ISO 2022와 같은 복합 인코딩이나, SCSU와 같은 압축 방법 등이 속한다. ISO 646 * ASCII EBCDIC * CP37 * CP930 * CP1047 ISO 8859 * ISO 8859-1 서유럽 * ISO 8859-2 서유럽 및 중앙유럽 * ISO 8859-3 서유럽 및 남유럽 (터키어, 몰타어, 에스페란토어) * ISO 8859-4 서유럽 및 발트 해 국가 (리투아니아어, 에스토니아어, 라프어) * ISO 8859-5 키릴 문자 * ISO 8859-6 아랍 글자 * ISO 8859-7 그리스 글자 * ISO 8859-8 히브리 글자 * ISO 8859-9 서유럽 (개정된 터키어 문자 집합 포함) * ISO 8859-10 서유럽 (개정된 노르딕어를 위한 문자 집합 및 완전 아이슬란드 문자 집합 포함) * ISO 8859-11 타이어 * ISO 8859-13 발트어, 폴란드어 * ISO 8859-14 켈트어 (아일랜드 게일어, 스코틀랜드어, 웨일스어) * ISO 8859-15 유로 기호 및 ISO 8859-1에 대한 다른 항목 추가 * ISO 8859-16 중앙 유럽, 남유럽어 (폴란드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헝가리어, 알바니아어, 로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CP437, CP737, CP850, CP852, CP855, CP857, CP858, CP860, CP861, CP863, CP865, CP866, CP869 MS 윈도 문자 집합 * Windows-1250 라틴 글자를 이용하는 중앙 유럽 언어 (폴란드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헝가리어, 슬로베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로마어, 알바니아어) * Windows-1251 키릴 문자 * Windows-1252 서양어 * Windows-1253 그리스어 * Windows-1254 터키어 * Windows-1255 히브리어 * Windows-1256 아랍어 * Windows-1257 발트어 * Windows-1258 베트남어 맥 오에스 로만 (Mac OS Roman) KOI8-R, KOI8-U, KOI7 MIK ISCII 인도 TSCII 타밀어 VISCII 베트남어 JIS X 0208 일본어 * Shift JIS (마이크로소프트 코드 페이지 932는 Shift_JIS의 파생) * EUC-JP * ISO-2022-JP JIS X 0213는 JIS X 0208의 확장판. * Shift_JIS-2004 * EUC-JIS-2004 * ISO-2022-JP-2004 중국어 간체자 GB * GB 2312 * GBK (마이크로소프트 코드 페이지 936) * GB 18030 대만 Big5 (더 잘 알려진 종류가 마이크로소프트 코드 페이지 950) 홍콩 HKSCS 한국어 * KS X 1001은 2바이트 한국어 문자 인코딩 표준이다. * EUC-KR * ISO-2022-KR 유니코드 (UTF-8도 참조) ANSEL 또는 ISO/IEC 6937 문자 인코딩의 목록 문자 집합(문자 집합의 목록) 제어 문자 코드 페이지 Character sets registered by 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 Unicode Technical Report #17 Character Encoding Model |
Foundation Servers-8055 35.jpg|썸네일|right|250px|위키미디어 재단의 서버 뒤에서 볼 수 있는 오페라 서버 랙 서버 ()는 클라이언트에게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컴퓨터(server computer) 또는 프로그램 (server program)을 말한다. 특히, 서버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를 서버 소프트웨어 (server software)라 한다. 주로 리눅스 등의 운영 체제를 설치한 대형 컴퓨터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버는 프린터 제어나 파일 관리 등 네트워크 전체를 감시·제어하거나, 메인프레임이나 공중망을 통한 다른 네트워크과의 연결, 데이터·프로그램·파일 같은 소프트웨어 자원이나 모뎀·팩스·프린터 공유, 기타 장비 등 하드웨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서버는 사용자(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의하여 서비스를 하는데 이와 같이 구성된 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 이상의 응용 프로그램을 상호 협력적인 환경에서 운용하는 분산처리 형태를 의미한다. 즉, 서비스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처리하는 서버와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처리방식이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다. 클라이언트의 수가 5~20대 정도인 소규모 LAN의 경우에는 한 대의 서버로 충분히 모든 서비스를 소화할 수 있으나, 대규모 LAN의 경우에는 여러 대의 서버를 배치하고, 파일 관리는 파일 서버, 프린터 제어는 프린터 서버, 인터넷 등의 외부와의 교환은 통신 서버가 담당하는 등 각각 역할을 세분하게 된다. 컴퓨팅에서의 "서버"(server)라는 용어의 이용은 대기행렬이론에서 비롯한 것으로,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켄들의 기호를 선보인 논문 에서 "서비스 와 함께 눈에 띄게 사용되었다. 와 같은 초기의 논문들의 경우 "전화 교환원"과 같은 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된다. 컴퓨팅에서 "서버"는 적어도 RFC 5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RFC는 ARPANET(인터넷의 선구자)을 기술하는 최초의 문서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용자"와 대비되고 있고 두 가지 종류의 호스트와는 구별하고 있다 "서버 호스트", "사용자 호스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 서빙(serving)이라는 용어 또한 RFC 4와 같은 초기 문서들로 거슬러 올라가며, "serving-host"와 "using-host"를 대조하고 있다. 잘 알려진 서버 운영 체제로는 이를테면 FreeBSD, 솔라리스, 리눅스 등이 있다. 유닉스는 본래 미니컴퓨터 운영 체제였으며 전통적인 미니컴퓨터를 서버가 대체해감에 따라 서버는 효율적인 유닉스 기반의 운영 체제가 되었다. 서버 지향 운영 체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서버 환경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GUI를 사용할 수 없거나 선택적으로 사용 가능 다시 시작 없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다시 구성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능 중요한 데이터를 온라인 상에서 주기적으로 백업하는 고급 백업 시설 다른 볼륨이나 장치 사이의 투명한 데이터 전송 유연하고 고급적인 네트워킹 기능 유닉스의 데몬 및 윈도의 서비스와 같은 자동화 기능 고급 사용자, 리소스, 데이터, 메모리 보호를 비롯한 꼼꼼한 시스템 보안 애플리케이션 서버 카탈로그 서버 통신 서버 컴퓨팅 서버 데이터베이스 서버 팩스 서버 파일 서버 게임 서버 메일 서버 미디어 서버 인쇄 서버(프린트 서버) 사운드 서버 프록시 서버 웹 서버 인터넷의 전반적인 구조는 클라이언트 서버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동작하고 있으면서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는 수백만 대에 이른다. 인터넷 서버가 제공하는 수많은 서비스 가운데 다음을 포함한다 월드 와이드 웹 도메인 이름 시스템 전자 우편 FTP 파일 전송 채팅 및 인스턴트 메시지 음성 대화 스트리밍 오디오 및 비디오 온라인 게임 P2P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 홈 서버 FTP 서버 데이터 센터 baas.io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 필요로 하는 서버의 기능을 일반화/정형화하여 API로 제공하는 서비스 분류:컴퓨터 네트워킹 분류:전산장비 |
섬네일 전자기 유도 (電磁氣誘導)는 자기장이 변하는 곳에 있는 도체에 전위차(전압)가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처음으로 수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발생한 전압은 자기 선속의 변화율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법칙은 자속밀도가 변화하거나, 도체가 일정하지 않은 자속밀도가 퍼져있는 공간을 움직일 때 적용할 수 있다. 전자기유도는 발전기와 전동기 등의 전기 구동기의 바탕에 있는 법칙이다.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은 전자기 유도에 의한 유도 기전력의 크기는 단위 시간당 자기 선속의 변화율과 코일의 감긴 횟수에 비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기전력으로 단위는 볼트(V)이고, N은 전선이 감긴 횟수, 는 자기 선속으로 단위는 웨버(Wb)이다. 이 법칙에서 자기선속의 변화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는 면적의 변화와 자기장의 세기 변화가 있다. 이 중 하나만 변화하면 자기 선속의 크기는 변화하며 유도 기전력이 발생할 수 있다. 유도 기전력을 강하게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선속의 변화율 값을 키우는 방법이 주로 사용 되는데, 다른 요소 값을 고정한 후에 면적의 변화율이나 자기장 세기 변화율의 크기를 크게 하여 큰 전력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변화율이라는 것인데, 자기 선속이 커도 변화율이 작으면 큰 기전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전자기 유도에 의해 발생하는 기전력의 부호는 렌츠의 법칙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회로에 유도된 전류의 방향은 유도된 기전력을 발생시킨 자기장의 변화를 상쇄하는 방향이다.즉, . 회로에 기전력이 유도되고 유도된 전류가 흐르면 회로 주변에 다시 자기장이 형성되는데 그 자기장의 방향은 최초 기전력을 유도했던 자기장의 변화를 상쇄하는 방향이 된다 로렌츠 법칙을 활용하여 기전력을 새로운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F는 로렌츠 힘을 나타낸다. 이는 직선이나 원형 전류 또는 솔레노이드에 의한 자기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참고 맥스웰 방정식 섬네일 발전기는 전동기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석 연료나 수력, 원자력 등으로 얻은 높은 열은 물을 끓이는데 사용되고 여기서 얻은 증기는 터빈을 돌리게 되는데, 이 때 회전하는 터빈에 코일을 연결시키고 그 주위에 자석으로 코일 내부를 통과하는 자속을 매 시간 변화시킨다. 이로부터 코일에는 유도 전류가 흐르고 기전력을 얻을 수 있다. 영구 자석이 도체 또는 그 반대로 이동하는 경우, 기전력이 생성된다. 와이어가 전기 부하를 통해 연결되는 경우, 전류는 흐르고 전기 에너지가 생성된다.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맥스웰 방정식 전동기 발전기 변압기 Magnet Academy 분류:전자기학 분류:마이클 패러데이 분류:맥스웰 방정식 |
코드분할다중접속 (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CDMA )은 이동 통신에서 코드를 이용한 다중접속 기술의 하나이다. 1996년 한국에서 최초로 상용화되었다.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1996년에 세계 최초로 CDMA를 기반으로 한 이동통신 서비스를 상용화하였다. CDMA는 미국의 퀄컴에서 기술규격을 개발하여, 1989년 샌디에이고에서 최초로 CDMA 기술을 이용한 통화시험에 성공하였다. 1993년 CDMA 기술 규격인 IS-95A가 정립되었으며, 1995년 9월 홍콩에서 허치슨텔레콤에 의해 상용화하였다. 1997년에 이르러 전 세계 가입자 수는 700 ~800백만이었다. 1998년 LG텔레콤(현.LG유플러스)은 CDMA 데이터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999년 전 세계 가입자는 5000만명으로 늘었다. 2000년 CDMA 2000 1x EV/가 3세대 이동통신 규격으로 국제시장에 출시되었지만, KT의 경우, 3G WCDMA 가입자 수요가 많아, 4G LTE 주파수 재배치 문제에 기인하여, 2012년 3월초에 2G CDMA 서비스를 강제 종료하였다. 코드분할다중접속은 코드를 이용하여 하나의 셀에 다중의 사용자가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동통신은 제한된 주파수 대역을 활용하여 다수가 통신을 하므로 다중접속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코드분할다중접속 이외의 기술 중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기술로는 GSM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분할다중접속(TDMA)가 있다. 코드분할다중접속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코드화한 신호를 대역 확산하여 전송한다. 단말기는 확산된 신호를 디코드하여 복조함으로써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다중접속의 종류와 개요 다중접속(Multiple Access)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 다수의 사용자가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다중접속은 기술 규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기술 별 다중 접속의 대략적 개념은 오른쪽 그림에서 참조할 수 있다. 시분할다중접속(TDMA, T ime D ivision M ultiple A ccess), 주파수분할다중접속(FDMA, F requency D ivision M ultiple A ccess)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C ode D ivision M ultiple A ccess) TDMA는 GSM의 기반기술로 상용화되었다. CDMA는 대한민국 등에서 사용된다. 주파수 사용의 효율성이 낮은 FDMA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대역 확산 기술은 일반적으로 전송할 정보신호의 대역폭보다 훨씬 큰 대역폭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보의 다중화와 고속처리가 가능해진다. 대역확산에는 주파수를 변조하는 주파수 도약과 동일 주파수 내에서 변조되는 직접 확산의 방식이 있다. CDMA는 직접확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s(t)Acos(ωet+Φ) s(t) 확산용 코드 Acos(ωet+Φ):신호 위 수학적 표현의 통신상 의미는 결국 비교적 큰 신호인 통신 신호를 아주 작고 무작위적인 코드신호로 곱하여 변조시킨다는 것이다. 신호 변조의 개념도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아래의 그림에서 제일 위는 전달하고자 하는 신호를 가운데는 코드를 나타낸다. 제일 아래는 두 신호를 XOR시킨 결과 변조된 신호이다. 이렇게 변조된 신호가 송출되게 된다. 코드에 의한 신호 변조 변조에 사용되는 코드가 다르면 변조된 결과도 다르게 되므로, 사용자마다 다른 확산용 코드를 부여하여 하나의 주파수 대역 내에서 여러 명의 사용자가 통신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다중화라 한다. 다중화에 사용되는 코드는 되도록 백색잡음과 같이 무작위적이어야 한다. 코드가 일정한 경향을 가질 경우 충분히 많은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하면 혼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DMA에서는 상호상관(Cross-Correlation)이 거의 없는 일종의 무작위 신호를 코드로 사용한다. 이 코드를 생성하는 기술의 특허는 퀄컴이 소유하고 있다. CDMA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개인간의 간섭/보안에 강하다. 코드화된 특정 사용자의 신호는 다른 사용자에게는 잡음으로 인식된다. 셀(cell, 무선 통신에서의 기지국-단말기 간의 통신 단위) 설계가 쉽다. 코드화된 신호를 직접 확산함으로 인접 기지국 사이의 신호 간섭이 적다. 소프트 핸드오프가 가능하다. 단말기 소비전력이 적은 편이다. 레이크 수신기(지연이 있는 신호를 구분할 수 있는 수신기)를 사용할 수 있다. 단말기와 기지국 간에 시간이 정확하게 동기화되어 있어야 한다. 실제적으로는 몇 개의 채널(파일럿, 동기, 통화 등)로 구분되어 있어서, 파일럿 채널을 통해 단말기와 기지국 사이에 기본적인 확인을 하고 동기 채널에서 코드 동기화를 하여 통화채널로 음성 데이터를 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존의 IS-95 방식에서 현재는 CDMA2000과 같은 보다 고속의 데이터 통신을 위한 방식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근본 기술에 대한 칩셋 설계와 관련 기술 특허는 퀄컴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이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이동 통신 무선 네트워킹 퀄컴 PN Sequences The Third Generation Partnership Project 2 (3GPP2) The Third Generation Partnership Project (3GPP) CDMA Development Group (CDG) Radio-Electronics.Com 분류:이동 통신 |
블루투스 로고 블루투스 ()는 1994년에 에릭슨이 최초로 개발한 디지털 통신 기기를 위한 개인 근거리 무선 통신 산업 표준이다. ISM 대역에 포함되는 2.4~2.485GHz의 단파 UHF 전파를 이용하여 전자 장비 간의 짧은 거리의 데이터 통신 방식을 규정하는 블루투스는, 개인용 컴퓨터에 이용되는 마우스, 키보드를 비롯해, 휴대전화 및 스마트폰, 태블릿, 스피커 등에서 문자 정보 및 음성 정보를 비교적 낮은 속도로 디지털 정보를 무선통신을 통해 주고 받는 용도로 채용되고 있다. 블루투스는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정보기기 사이에, 전파를 이용해서 간단한 정보를 교환하는데 사용된다. 당초에는 에릭슨을 필두로, 인텔, IBM, 노키아, 도시바 등의 5개 회사가 프로모토로서 규격의 책정에 참가했으며,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3COM, 루센트 테크놀로지 등의 4개 회사가 추가 참여했다. 현재는 3COM과 루센트 테크놀로지 대신, 애플, Nordic Semiconductor가 추가되어, 총 9개 회사가 프로모터 기업으로 참가했다. IEEE에서는 규격명 IEEE 802.15.1 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현재 블루투스는 Bluetooth Special Interest Group (SIG)을 통해 관리되고 있다. 이 그룹에는 전기통신, 컴퓨터, 네트워크, 가전 등의 분야의 30,000사 이상의 기업들이 멤버에 가입되어 있다. 블루투스 SIG는 규격의 개발을 감시, 규격의 인증 프로그램의 관리 및 트레이드마크의 보호를 관장하고 있다. 장비 제조사가 블루투스 장비로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SIG에서 제정한 표준 규격을 만족해야 한다. 블루투스 라는 이름은 10세기 경 처음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통합한 덴마크의 하랄드 블라톤(Harald Blåtand) 국왕의 별칭이 파란 이빨의 왕 으로 불렸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Blåtand를 영어식으로 번역한 단어가 블루투스(Bluetooth)이다. 블루투스 이름의 아이디어는, 1997년 인텔 출신의 Jim Kardach 라는 시스템 엔지니어가 제안하였다. 제안했을 당시에, 그는 Frans G. Bengtsson의 역사 소설 The Long Ships 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바이킹과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하랄드 블라톤 왕이 스칸디나비아를 통일했던 것처럼, 난립하는 여러 무선 통신 규격을 통합하자 는 염원이 담겼다고 한다. 블루투스의 로고는, 북유럽의 룬 문자(옐링 거석의 비석에서 찾을 수 있는)로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름의 앞글자 8px (H)와 8px (B)를 결합한 모양에서 유래한다. 1994년 - 에릭슨의 사내 프로젝트로 개발 시작 1998년 - 에릭슨 포함 5개 회사가 Bluetooth SIG를 설립. Bluetooth 라는 이름을 발표 1999년 7월 26일 - 블루투스 사양서 1.0 버전이 발표됨 2003년 11월 - 버전 1.2 발표 2004년 11월 - 버전 2.0 + EDR 발표 2007년 3월 28일 - 버전 2.1 + EDR 발표 2009년 4월 21일 - 버전 3.0 발표 2009년 12월 17일 - 버전 4.0 발표 2011년 6월 21일 - 애플과 Nordic Semiconductor가 이사회에 추가 2013년 12월 4일 - 사양서 버전 4.1을 발표 2014년 12월 3일 - 버전 4.2을 발표 2016년 12월 8일 - 버전 5를 발표 PANs의 산업 표준중 하나인 블루투스는 ISM 대역인 2.45GHz를 사용한다. 버전 1.1과 1.2의 경우 속도가 723.1kbps에 달하며, 버전 2.0의 경우 EDR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를 통해 2.1Mbps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블루투스는 RS-232, 유선 USB를 대체하는 개념이며 이는 와이파이가 이더넷을 대체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암호화에는 SAFER을 사용한다. 장치끼리 믿음직한 연결을 성립하려면 키워드를 이용한 페어링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이 없는 경우도 있다. 1.0과 1.0B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제조사들이 그들의 제품 간의 상호 호환성을 가지게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과 1.0B는 또한 핸드셰이킹 과정에서 블루투스 하드웨어 장치 주소(BD_ADDR)를 반드시 전송해야 하므로 프로토콜 수준에서의 익명(IP와 같은 주소 없이)의 연결(rendering anonymity)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블루투스 환경에서 제공 되도록 계획한 소비확대정책(Consumerium)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큰 제한사항이었다. 블루투스는 2.4Ghz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무선 랜(802.11b/g/n)도 2.4Ghz대의 주파수를 사용한다.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므로 동시사용에 따른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양 제품의 초기 보급 시에는 그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블루투스의 버전업과 연결 특성 상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블루투스는 해당 주파수 대역에서 비어있는 채널을 찾아 데이터를 전송하기 때문에 간섭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즉시 다른 빈 곳으로 전송하게 된다. 음성기기의 사용 시 아주 잠깐의 지연현상이 발생하지만 체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기기의 거리가 1cm 이하로 근접해 있을 경우 간섭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무선랜과 블루투스 두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기기의 경우에는 두 장비가 하나의 안테나를 사용하게 되는데, 서로 번갈아가며 데이터를 전송하는 사용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애초부터 그 간섭을 최대한 줄이게끔 되어 있다. 2002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고, 1.0B의 많은 문제점들을 수정하였다. 이 외에 비 암호화 채널(non-encrypted channels)을 지원하였고, Signal Strength Indicator (RSSI)를 수신 받을 수 있게된다. 이 버전은 1.1 버전과 호환되며 주요 향상 점은 다음과 같다 빠른 접속과 가까운 거리에서의 주파수 간섭 및, 먼 거리에서의 분산스펙트럼(frequency-hopping spread spectrum)에 대비하였다. 실제 전송 속도는 1.1과 같은 723kbit/s이다. 패킷의 오류나 재전송에 따른 음성이나 음원신호의 quality손실을 막는 Extended Synchronous Connections (eSCO)를 지원하게 되었고, three-wire UART를 위한 Host Controller Interface (HCI)를 지원하게 되었다. 2005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다. 2004년 10월에 표준화가 된 이 버전은 1.1과 호환되게 하였다. 주된 향상 점은 3.0Mbit/s의 향상된 데이터 속도(Enhanced Data Rate, EDR)를 지원하게 된 점이다. 이로써 다음의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평균 3배, 최대 10배의 데이터 전송 속도(Data Transfer Rate) 향상(실제 전송 속도 2.1Mbit/s)과 Duty Cycle감소에 의한 저 전력 소비, 또한 multi-link scenarios의 단순화로 사용할 수 있는 대역폭이 늘어났다. 이론상의 전송 속도는 3.0Mbit/s이고, 실제 data전송 속도는 2.1Mbit/s이다. Special Interest Group (SIG)에 표준화가 된 "블루투스 2.0 + EDR"은 많은 업체들이 사용하는 EDR과 표준화되지 않은 "블루투스 2.0"를 포함한다. 앞에 명시된 기술을 보여주는 HTC TyTN pocket PC phone과 다른 블루투스 2.0 without EDR의 기술은 추가적인 문제점들을 수정한 버전 1.2와 거의 같다. 많은 제품들이블루투스 2.0을 지원한다고 명시하지만 실제로 EDR을 지원하는지는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1.2버전과 완벽하게 호환이 되는 핵심 표준화 버전인 블루투스 2.1은 블루투스 SIG에 의해 2007년 7월26일 채택되었다. 이 기술은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확장된 질의 응답 장치들을 연결하기 전에 좀 더 나은 장치를 걸러내기 위해 질의 과정동안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정보에는 장치의 이름, 장치가 지원하는 서비스 목록, 날짜나 시간, 공유정보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스니프 서브레이팅(Sniff subrating) 기술 저 전력 모드일 경우, 특히 비대칭 전송(asymmetric data flows)으로 연결되어 있을 경우 전력소비를 줄일 수 있다. 휴먼 인터페이스 장치들이 가장 이익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적어도 3배에서 최대 10배까지 배터리의 수명을 증가시킬 수 있다. 부호화 일시 중지/재개(Encryption Pause Resume) 암호를 다시 설정했을 경우, 장치 간에 더욱 강력한 암호화로 최소 23.3시간 이상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 안전하고 간편한 공유 보안의 강화와 사용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블루투스 장치 간의 공유 기술이 근본적으로 향상되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블루투스의 사용에 있어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NFC 코퍼레이션 NFC 라디오 인터페이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자동적으로 안전하게 접속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수 센티미터 이내로 헤드셋을 NFC를 포함한 블루투스 2.1 전화로 가져가기만 하여도 접속할 수 있게 되고 또 다른 예로는, 휴대 전화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디지털 액자에 가깝게 가져가는 것만으로 디지털 사진을 디지털 액자로 업로드할 수 있게 된다. 블루투스 3.0은 2009년 4월 21일에 발표되었다. 블루투스 3.0의 큰 특징은 802.11 PAL(Protocol Adaptation Layer)를 채용해서 속도를 최대 24Mbps로 향상시켰다. (+HS 가 붙어있지 않은 제품에서는 이와 같은 High Speed 연결을 지원하지 않으며 3.0에서 추가된 기능만을 지원한다.) 그리고 블루투스 기기간에 대용량 그림, 동영상, 파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PC를 모바일 기기와 동기화를 할 수 있고 프린터나 PC로 많은 사진을 내려받을 수 있다. 추가된 점으로 내장된 전력 관리 기능을 통해 전력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 Bluetooth SIG는 블루투스 사양서 버전 4.0(Bluetooth Smart)을 2010년 6월 30일에 채택하였다. 이 사양에는 클래식 블루투스(Classic Bluetooth), Bluetooth high speed 와 Bluetooth low energy 프로토콜이 포함되었다. Bluetooth high speed 는 Wi-Fi 를 바탕으로, 클래식 블루투스는 기존의 레거시 블루투스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한다. 한편, 종래의 버전과 비교해 대폭적으로 소비전력을 낮춘 Bluetooth Low Energy 는, Bluetooth SIG 공개자료에 의하면, 버튼형 전지 1개만으로도 수년간 구동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전송 속도는 1Mbps로, 데이터 패킷 사이즈가 8 - 27옥테드로 매우 작아졌다. 가전제품 등에 탑재된 센서와의 데이터 통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양으로, 기존 3.0+HS과 방향성을 달리하여, 제품 제작자는 3.0+HS 및 4.0을 별도로 목적에 맞춰 채용하는 식이 되었다. 블루투스 SIG는 2013년 12월 블루투스 4.1의 새로운 기능을 발표했다. 블루투스 4.1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공존성(coexistence) 향상- 블루투스와 LTE 무선이 서로 통신 상태를 조정해 가까운 대역폭으로 인한 간섭 현상을 줄여준다. 더 나은 연결(better connections) - 블루투스 연결 장치끼리의 거리가 증가해 잠시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 4.1 블루투스 장치는 거리 내로 되돌아올 시 자동으로 재연결된다. 데이터 전송 개선(improved data transfer) - 블루투스를 사용하는 악세서리 장치(헬스 기구) 등과의 통신 전송 상태를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하였다. 개발자에게 더 많은 유연성 제공(more flexibility to developers) - 앞으로 있을 웨어러블 기기 붐에 대비한 업데이트로, 블루투스 연결을 통해 웨어러블 기기가 스마트폰의 주변장치이자 동시에 다른 장치와의 허브 역할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장래를 위해 사물 인터넷(The Internet of Things) 을 위한 새로운 IPV6 사용 표준도 들어가 있다. 4.2 버전은 2014년 12월 2일 발표되었다. 이 판에는 사물인터넷 지원을 위한 특징을 도입했다. 주요한 개선 사항은 다음과 같다. 데이터 패킷 Length Extension에 저전력 보안 접속 확장된 스캐너 필터 정책을 가진 Link Layer Privacy 스마트홈 지원을 위한 블루투스 저전력 사물인터넷용으로 IPv6나 6LoWPAN을 통해 인터넷에 직접 접속할 수 있다. 오래된 블루투스 하드웨어는 4.2를 데이터 패킷 Length Extension으로 받아들이고, 펌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보안을 개선했다. 2016년 6월 16일 런던에서 개최한 미디어 이벤트를 통해 블루투스 5가 블루투스 SIG에 의해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은 주로 부상하는 사물인터넷 기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017년 4월에 블루투스5가 지원되는 삼성 갤럭시 S8를 출시했다. 마켓팅을 위해 소숫점 이하의 숫자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용자 편의를 위한 마켓팅을 단순화시키기 위함이다. 주요 개선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Slot Availability Mask (SAM) 데이터 전송 속도가 2Mbit/s PHY for LE 길어진 도달 거리† High Duty Cycle Non-Connectable Advertising LE Advertising Extensions LE 채널 선택 알고리즘 #2 †데이터 전송 속도가 2Mbps, 1Mbps, 125kbps가 되었고, 2M와 1Mbps는 예전처럼 도달 거리가 100m, 125kbps는 도달 거리가 400m가 되었다. 블루투스는, 여러 종류의 장비로의 통신에 사용되는 규격인 이유로, 장비의 종류에 따라 규정되는 각각의 별도의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이들 프로토콜의 사용법을 프로파일 이라는 용어로 표준화하고 있다. 통신하고자 하는 장비와 장비 간에, 동일한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그 프로파일을 이용한 통신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프로파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GAP (Generic Access Profile) 블루투스 장비의 접속/인증/암호화를 규정하는 프로토콜. SDAP (Service Discovery Application Profile) 다른 블루투스 장비가 제공하는 기능(프로파일)을 참조하는 용도의 프로토콜. DUN (Dial-up Networking Profile) 휴대전화 등을 통해 인터넷에 다이얼 업 접속을 할때 사용되는 프로파일 FTP (File Transfer Profile) 컴퓨터 사이의 데이터 통신을 위한 프로파일. 참고로 파일전용 프로토콜 FTP와는 관계 없음. HID (Human Interface Device Profile) 컴퓨터 마우스 또는 키보드 등의 입력장비와 무선으로 연결하기 위한 프로파일 HSP (Headset Profile) 블루투스를 내장한 헤드셋과의 통신을 위한 프로파일. 모노 음성 수신 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의 쌍방 통신도 규정. HFP (Hands-Free Profile) 차내 또는 헤드셋을 통한 핸즈프리 통화를 위한 프로파일. HSP 기능에 추가로 통신의 발신/착신 기능을 규정. A2DP (Advanced Audio Distribution Profile) 음성을 리시버가 달린 헤드폰(또는 이어폰)으로 전송하는 프로파일. HSP/HFP가 모노 음성인 것에 반해, 스테레오 고음질 음성을 지원. AVRCP (Audio/Video Remote Control Profile) :AV기기의 리모콘 기능을 구현하는 프로파일 블루투스는, 통신에 이용되는 전파의 강도를 클래스 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블루투스 지원 장비는, 어떤 장비든 한 클래스로 분류된다. 쌍방이 같은 클래스일 필요는 없다. +블루투스 클래스 클래스 출력 도달 거리 Class 1 100mW 100m Class 2 2.5mW 10m Class 3 1mW 1m Class 4 0.5mW ~0.5m 블루투스는 2.402 GHz ~ 2.480 GHz 대역의 마이크로파 무선주파수 스펙트럼을 사용하며 이는 암을 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비전이성 방사선이다. 블루투스 무선이 내뿜는 최대 전기 출력은 클래스 1 장치의 경우 100 mW, 클래스 2 장치의 경우 2.5 mW, 클래스 3 장치의 경우 1 mW이다. 클래스 1의 최대 전기 출력 조차, 가장 전력이 낮은 휴대전화 보다도 수준이 더 낮다. UMTS 및 W-CDMA은 250 mW를, GSM1800/1900은 1000 mW를, GSM850/900은 2000 mW의 출력을 낸다. 블루투스 규격 블루투스 자습서 GNU/Linux에서 블루투스 프로그래밍 소개 분류:스웨덴의 발명품 |
1947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29년 2월 - 북조선 인민위원회 수립. 2월 25일 - 프로이센 해체. 2월 28일 - 중화민국 타이완 섬에서 2·28 사태 발생. 3월 1일 - 대한민국 서울 남대문에서 좌,우익 세력 집회도중 충돌. 38여명의 사상자 발생. 3월 1일 - 제주 3·1절 발포사건. 3월 12일 - 트루먼 독트린 발표 5월 21일 - 서울 덕수궁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6월 21일 - 대한민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8월 8일 - 파키스탄 국기 채택. 8월 14일 - 파키스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 8월 15일 - 인도,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해 독립 8월 28일 - 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 9월 9일 - 첫 번째 버그(사진) 발견 하버드 대학교가 만든 마크 II 컴퓨터의 계전기에서 나방이 발견되다. 첫 번째 버그 9월 17일 - 유엔 총회 한국 문제 정식 상정 9월 18일 - 미국 중앙정보국(CIA) 발족 9월 21일 - 군정기 반공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 결성(단장 지청천) 9월 26일 - 소비에트 연방,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군 동시 철수 제의 9월 30일 - 예멘, 파키스탄 유엔 가입 10월 5일 - 소비에트 연방 등 동구 9개 공산국, 공산당 정보기관인 코민포름 결성 10월 18일 - 미소 공동위원회 무기한 휴회. 1월 8일 - 영국의 음악가, 예술가 데이비드 보위. 1월 18일 - 일본의 영화 감독 기타노 다케시. 1월 21일 - 중국의 반체제 인사 레비야 카디르. 1월 22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 호시노 센이치. 1월 25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토스탕. 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창식 2월 3일 *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 * 미국의 가수 멜라니 사프카. 2월 7일 - 미국의 성우 웨인 올와인. 2월 8일 -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방화범 김대한. 2월 11일 - 일본의 정치인 하토야마 유키오. 2월 1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근태. 2월 20일 - 아이슬란드의 기업인 에게르트 마그누손. 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항선. 2월 27일 -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앨런 구스 2월 28일 -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 3월 2일 - 러시아 수학자 유리 마티야세비치. 3월 25일 - 영국의 가수 엘튼 존. 3월 26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조영래. *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의 부인 김윤옥. 4월 1일 - 프랑스 수학자 알랭 콘. 4월 12일 - 미국의 작가 톰 클랜시. 4월 15일 - 영국의 기업인 마틴 브로턴. 4월 18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시종. 4월 25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요한 크라위프. 5월 1일 -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 감독 김인식. 5월 4일 -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 출신 정치가 김진표. 5월 27일 * 슬로베니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브란코 오블라크. * 대한민국의 소설가 곽의진. 6월 19일 - * 인도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 * 대한민국의 배우 윤여정. 6월 23일 - 캐나다의 경제학자 스탠리 웡. 7월 3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로프 렌센브링크. 7월 11일 - 자메이카의 싱어송라이터 겸 기타 연주자 존 홀트. 7월 13일 - *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가수 허경영(호적상 출생년월일은 1950년 1월 1일). * 영국 찰스 왕세자의 배우자 카밀라 왕세자비. 7월 19일 - 영국의 대중음악가수, 퀸 의 멤버 브라이언 메이. 7월 29일 - 미국의 기업인 스탠 크론케. 7월 30일 - 미국의 영화배우, 정치인 아널드 슈워제네거. 8월 3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황우여. 8월 24일 - 브라질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 9월 3일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조동진. 9월 21일 -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 9월 25일 - 대한민국의 지휘자 금난새. 9월 27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딕 아드보카트. 9월 3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혜숙. 10월 26일 - 미국의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 11월 8일 - 미국의 가수 미니 리퍼턴. 11월 9일 - 대한민국의 작가 오정희.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대중 가수 윤형주.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손학규.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비평가 홍세화.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톨릭 성직자 이기헌. 러시아의 기업인 블라디미르 로마노프. 캐나다의 기업인 리처드 페디. 알 카포네 한 판 메이헤런 1월 25일 - 미국의 마피아 알 카포네. 3월 9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 권동진. 7월 19일 - 한국의 정치가 여운형. 8월 8일 - 러시아 제국의 장군 안톤 데니킨. 10월 4일 -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12월 2일 - 한국의 정치가 장덕수. 12월 28일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탈리아 왕국 국왕. 12월 30일 - 영국의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네덜란드의 화가 한 판 메이헤런. 문학상 물리학상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1월 22일 신축 2월 계묘 대 2월 21일 신미 윤2월 소 3월 23일 신축 3월 갑진 소 4월 21일 경오 4월 을사 대 5월 20일 기해 5월 병오 소 6월 19일 기사 6월 정미 소 7월 18일 무술 7월 무신 대 8월 16일 정묘 8월 기유 소 9월 15일 정유 9월 경술 대 10월 14일 병인 10월 신해 소 11월 13일 병신 11월 임자 대 12월 12일 을축 12월 계축 대 1948년 1월 11일 을미 |
역사 (歷史, 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이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또한 역사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들 중 후대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며 명예와는 미래에서 잊히지 않고 이어 전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 연구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역사적 자료를 탐색한다. 이 자료들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되는데, 1차 사료는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문서, 기록 등이다. 히스토리아(Historia, 역사의 우의(寓意, allegory). 니콜라오스 기시스작 (1892년) 영어의“히스토리"(history) 는 고대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 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 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어근은 영어의 wit , wise , wisdom , vision , idea , 산스크리트어의 베다 ( veda ), 슬라브어의 videti , vedati 등에 남아있다.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 hístōr )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 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는 historia 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다.(반면 과학은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이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진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인다. 형용사 historical 은 1661년에, historic 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 은 1531년에 등장한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한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 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 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 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다.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된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 된다.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참 과거"를 참칭하는 가짜 주장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으로 보기도 한다.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한다.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이 된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인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다. 이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 처럼 서로 겹치기도 한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한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한다.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진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다. 수메르 문명 인더스 문명 요하 문명 황하 문명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히타이트 문명 고대 그리스 문명 고대 로마 문명 페르시아 제국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페니키아 카르타고 폴리네시아 문명 아스텍 문명 잉카 문명 한국의 역사 일반적으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 즉 역사가 글로써 기록되지 않고 그 역사를 유물로써 알 수 있는 시대다.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문자가 발명된 후 인류가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긴 시대를 일컫는다. 밑의 시기 구분은 서양 역사관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다. 고대사:문자 발명(BC3000년경)~서로마제국 멸망(AD476) 중세사:서로마제국 멸망(AD476)~동로마제국 멸망(AD1453) 르네상스:14C~16C 문예부흥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 근세사:르네상스와 근대를 연결하는 시기, 한국사에서는 조선 건국(AD1392)~18C 근대사:17C~20C 현대사:20C~현재 미래사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남극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는다. 날씨의 패턴,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을 참고해야 한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지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일들이 많다. 세계의 역사 역사 연표 역사의 반복( Historic recurrence) * 반복 (키르케고르) 대폭발(빅뱅) 빅 히스토리( Big History, 대역사) *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 Big History Project) 거시사( Macrohistory) 미시사( Microhistory) 사회순환이론( Social cycle theory) 역사철학 계량경제사 History & Mathematics Historical Dynamics and Development of Complex Societies. Moscow KomKniga, 2006. 링크 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 ()는 인터넷에서 컴퓨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쓰이는 통신규약(프로토콜)의 모음이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 중 TCP와 IP가 가장 많이 쓰이기 때문에 TCP/IP 프로토콜 슈트라고도 불린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는 1960년대 말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수행한 연구개발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TCP/IP는 패킷 통신 방식의 인터넷 프로토콜인 IP (인터넷 프로토콜)와 전송 조절 프로토콜인 TCP (전송 제어 프로토콜)로 이루어져 있다. IP는 패킷 전달 여부를 보증하지 않고, 패킷을 보낸 순서와 받는 순서가 다를 수 있다.(unreliable datagram service) TCP는 IP 위에서 동작하는 프로토콜로, 데이터의 전달을 보증하고 보낸 순서대로 받게 해준다. HTTP, FTP, SMTP 등 TCP를 기반으로 한 많은 수의 애플리케이션 프로토콜들이 IP 위에서 동작하기 때문에, 묶어서 TCP/IP로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은 보통 네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5 응용 계층 DNS, TFTP, TLS/SSL, FTP, HTTP, IMAP, IRC, NNTP, POP3, SIP, SMTP, SNMP, SSH, 텔넷, ECHO, 비트토렌트, RTP, PNRP, rlogin, ENRP, … 4 전송 계층 TCP, UDP, DCCP, SCTP, IL, RUDP, … 3 인터넷 계층 IP (IPv4, IPv6) 2.5 ARP ARP, RARP 1,2 네트워크 인터페이스 계층 이더넷, Wi-Fi, 토큰링, PPP, SLIP, FDDI, ATM, 프레임 릴레이, SMDS, … 두 모델은 관련은 있으나 서로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가장 큰 차이는 계층의 수이다. 앞의 모델은 네 계층, 혹은 (링크 계층을 물리 계층과 데이터 링크 계층으로 나눈다면) 다섯 계층 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OSI 모델은 일곱 계층을 사용한다. OSI 모델이 더 잘 맞는 경우는 SSL이나 TLS를 설명할 때이다. 보통 SSL이나 TLS는 TCP의 상위에, 그리고 HTTP나 SFTP, 그 밖에 stunnel이나 VPN 위에서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보다는 하위에 있는 세션 계층 프로토콜로 쓰인다. 7 응용 계층 HTTP, SMTP, SNMP, FTP, 텔넷, SSH & Scp, NFS, RTSP 6 표현 계층 XDR, ASN.1, SMB, AFP 5 세션 계층 TLS, SSL, ISO 8327 / CCITT X.225, RPC, 넷바이오스, 애플토크 4 전송 계층 TCP, UDP, RTP, SCTP, SPX, 애플토크 3 네트워크 계층 IP, ICMP, IGMP, X.25, CLNP, ARP, RARP, BGP, OSPF, RIP, IPX, DDP 2 데이터 링크 계층 이더넷, 토큰링, PPP, HDLC, 프레임 릴레이, ISDN, ATM, 무선랜, FDDI 1 물리 계층 전선, 전파, 광섬유, 동축케이블, 도파관, PSTN, 리피터, DSU, CSU, 모뎀 분류:컴퓨터 네트워킹 분류:컴퓨터 통신 분류:인터넷 프로토콜 분류:통신공학 분류:통신 분류:인터넷의 역사 |
인트라넷 (intranet)은 인터넷 프로토콜을 쓰는 폐쇄적 근거리 통신망이다. 인터넷을 조직 내 네트워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인트라넷은 근거리 통신망(LAN)을 기반으로 데이터 저장장치인 서버를 연결하고 PC에 설치된 인터넷 검색 프로그램을 통해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방화벽을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거나 제한하여 보안을 유지한다. 인트라넷은 1994년 수많은 단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인터넷 근거리 통신망(MAN) 인트라웹 포털 사이트 엑스트라넷 서버 광명망 분류:컴퓨터 통신 |
프레디 머큐리 (,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 (), 1946년 9월 5일 ~ 1991년 11월 24일)는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퀸의 리드 보컬로 잘 알려져 있으며, 4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보컬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워크 (vocal work)를 남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곡들로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 t Stop Me Now〉 등이 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불사라 ()였다. 가계나 이름, 외모 등의 면에서 일반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을 가졌으며 8세기에 무슬림들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의 후손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의 뭄바이로 보내져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으며, 이 시기부터 프레디(Freddy; Frederick의 애칭)라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학창시절 프레디는 헥틱스(Hectics) 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그 때는 리드 보컬을 맡지 않고 키보드를 연주했다. 1964년에 잔지바르에서 아랍인과 인도인을 규탄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영국으로 완전히 이주하였고, 프레디는 1969년에 런던의 일링 칼리지(Ealing College, 현 웨스트 런던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본명을 인도식 이름인 파로크 불사라 에서 영어식으로 프레드릭 불사라 로 개명했다. 그후 1970년 프레디 머큐리 로 개명한다 프레디는 1960년대 후반 아마추어 밴드 아이벡스(Ibex)에서 리드 보컬로 활약했는데, 후에 퀸의 앨범에 수록되는 〈Stone Cold Crazy〉와 〈Liar〉의 기본이 되는 곡을 이 시기에 작곡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팀 스태플(Tim Staffell),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는 밴드 스마일에서 활동하였는데, 보컬 팀 스태플이 험피 봉(Humpy Bong)으로 이적하기 위해 스마일에서 탈퇴하자,프레디는 브라이언과 로저와 함께 퀸을 결성하였으며, 베이시스트로 존 디콘을 직접 선발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퀸 활동을 잠시 쉬면서 프로듀서 리처드 울프(Richard Wolf)의 작업에 참여하고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재개봉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85년에는 솔로앨범 《Mr. Bad Guy》를 발매하였고, 영국 음반 차트 6위에 올랐다. 싱글발매된 〈I Was Born to Love You〉는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1988년에는 오페라 가수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é)와 협업하여 솔로 2집 《Barcelona》를 발매한다. 동명의 앨범 수록곡인 〈Barcelona〉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선택되었으나, 프레디의 사망 이후 주제가 선정이 취소되고 호세 카레라스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Amigos para Siempre〉로 대체되었다. 올림픽 주제가 선정 과정에 힘입어 《Barcelona》는 1992년 재발매되었고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6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수록곡 〈Barcelona〉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2위까지 올랐다. Mercury Statue Montreux.jpg|섬네일|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스위스) 1990년 퀸과 함께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되어버린《Innuendo》레코딩을 시작한 후 공적인 자리에서 사라진 듯 했던 그는 1991년 11월 자신이 에이즈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에이즈와의 투쟁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지 하루 뒤인 11월 24일 자신의 집에서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45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1992년 4월 20일 부활절. 그를 추모하기 위한 거대한 공연이 영국 런던 웸블리 경기장에서 거행되었으며 퀸의 나머지 멤버들과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조지 마이클, 익스트림, 건즈 앤 로지스, 메탈리카 , 밥 겔도프 , 로버트 플랜트 등 최정상급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콘서트는 전세계 TV로 생중계되어 약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하였다. 1995년에 《Made in Heaven》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에는 〈A Winter s Tale〉 뿐 아니라 퀸의 미발표 곡들, 1991년 《Innuendo》 발매 이후에 녹음한 곡들,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하기 2주 전 녹음한 곡 〈Mother Love〉, 그의 솔로곡들을 나머지 퀸 멤버들이 편곡한 곡들 등이 담겨졌다. 2011년 프레디 머큐리 출생 65주년을 기념하여 구글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스페셜로고와 모션그래픽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2012년 8월 13일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1986년 웸블리 콘서트 당시 실황 중계 영상의 홀로그램으로 등장하여 세상을 떠난지 20년 만에 못다했던 올림픽 공연을 이루었다.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17473 프레디머큐리라는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현재 퀸의 활동을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으로 다시금 큰 인기를 얻고있다 《Mr. Bad Guy》(1985년) 《Barcelona》(1988년) 《The Freddie Mercury Album(The Great Pretender)》(1992년) 《The Solo Collection》(2000년) 《Lover of Life, Singer of Songs》(2006년) 프레디 머큐리의 채널 - 유튜브 분류:1946년 태어남 분류:1991년 죽음 분류:에이즈로 죽은 사람 분류:인도계 영국인 분류:이란계 영국인 분류:퀸의 일원 분류:영국의 록 가수 분류:영국의 록 기타 연주자 분류:영국의 록 키보드 연주자 분류:영국의 하드 록 음악가 분류:영국의 헤비 메탈 음악가 분류:영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분류:영국의 조로아스터교도 분류: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 분류:양성애자 음악가 분류:브릿 어워드 수상자 분류:구자라트주 출신 |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 1844년 2월 20일 - 1906년 9월 5일)은 통계역학과 통계열역학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과학적 모델에 대해 대단히 논쟁이 심할 시기에 원자론을 주창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볼츠만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1844년에 빈에서 태어났다. 볼츠만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George Boltzmann)은 세무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베를린에서 이주한 시계공이었다. 어머니인 카테리나 파우에른파인트(Katharina Pauernfeind)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었다. 볼츠만은 양친으로부터 가정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15세에 린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에 볼츠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863년 빈 대학교에 입학해 물리학을 공부해 1867년 기체운동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요세프 슈테판의 조수가 되어 2년간 일했다. 볼츠만에게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업적을 소개한 것은 슈테판이었다. 볼츠만은 그의 나이 25세가 되는 1869년에 그라츠 대학의 이론물리학(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869년의 몇 달간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로베르트 분젠과 레오 쾨니히스베르거와, 1871년에는 베를린에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 연구를 했다. 1873년 볼츠만은 빈 대학의 수학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76년까지 일했다. 볼츠만과 그라츠 대학의 동료들, 1887년. (서 있는 왼쪽 사람부터) 네른스트, Streintz, 아레니우스, Hiecke, (앉아 있는 왼쪽 사람부터) Aulinger, Ettingshausen, Boltzmann, Klemenčič, Hausmanninger 1873년에 볼츠만은 그라츠의 교사 양성 대학의 여학생이었던 헨리에테 폰 아이겐틀러를 처음 만났고, 1876년 7월에 헨리에테와 결혼해 슬하에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볼츠만은 다시 그라츠로 돌아와 실험물리학과의 학장을 맡았다. 그의 제자 중에는 아레니우스 식으로 유명한 스반테 아레니우스와 열역학 제3법칙으로 유명한 발터 네른스트가 있었다. 볼츠만은 그라츠에서 14년간을 일했으며, 이 당시에 통계 물리학의 기본 개념을 발전시켰다. 1887년에는 그라츠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볼츠만은 1890년 독일에 있는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894년에는 다시 빈 대학으로 돌아와 요세프 슈테판의 자리를 이어 이론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볼츠만은 빈 대학의 여러 동료들과 친해지지 못했는데, 특히 당시 빈 대학의 철학 교수이자 과학사 교수였던 에른스트 마흐와 원자론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곧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초청으로 1900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이직했다. 마흐의 퇴임 이후에 볼츠만은 1902년에 다시 빈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칼 프르지브람(Karl Przibram),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같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에서 볼츠만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가르쳤다. 볼츠만의 자연철학에 관한 강의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그 시대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장 큰 강의실도 모자라서 사람들은 계단사이에 서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볼츠만의 철학 강의 때문에 황제들이 궁전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린츠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다. 1906년 9월 5일, 볼츠만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근방의 두이노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우울증이 원인이었다고 추측되지만, 명확한 자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볼츠만의 기체분자운동론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들과 에른스트 마흐와 물리화학자인 오스발트같은 과학자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반대했다. 1890년대 동안 볼츠만은 원자론자들과 비원자론자 모두가 원자에 대한 논의 없이 물리학을 할 수 있도록 타협안을 만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해결 방법은 원자는 곧 "Builder"라고 하는 헤르츠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원자론자들은 그 그림이 실제 원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원자론자들은 그림 자체가 실제 원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집단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오스발트나 순수 열역학의 옹호자들은 볼츠만의 원자와 분자에 관한 가정과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 해석 때문에 기체분자운동론과 통계역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백여년에 걸쳐 볼츠만의 과학은 다른 철학적 반대에 계속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흐의 학생과 구스타프 야우만 등을 포함한 물리학자들은 헤르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것은 모든 물리적 운동은 궁극적으로 전자기적 운동이며, 전자기적 운동은 원자와 분자 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1900년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볼츠만의 운동론과 열역학 2법칙의 통계적 해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볼츠만을 깊게 우울하게 만들었다. 1901년 빈 대학의 마흐가 사직을 한 후, 볼츠만은 다시 빈으로 돌아가 그의 물리학의 철학적 반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한번 낙담하게 된다. 1904년에 세인트 루이스의 국제 물리학 회의에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볼츠만은 물리학 부문에 초청받지 못하고 "응용수학" 분과에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다른 물리학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의 관점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가까운 것으로,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된 철학사상을 계속 이어받고 그래서 그러한 인습을 과학자들이 극복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905년에 볼츠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 철학자 브렌타노와 광범위하게 뜻을 같이했다. 그는 과학에서 좀 더 철학의 실재를 반박하기 위해서 좀 더 명확하게 철학에 정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접근에 있어 또 다시 낙담했다. 이듬해 1906년 그의 정신 상태는 매우 나빠졌고, 그는 은퇴하고 말았다. 그는 같은해 9월에 자살했다. 볼츠만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기체의 분자 속도에 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포함한 기체분자운동론에 관한 것이다. 맥스웰-볼츠만 통계역학과 에너지에 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는 고전 통계 역학의 기초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양자 역학에 맞지 않는 여러 현상에 적용가능하며, 온도의 의미에 대해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의 확립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에 대한 그의 믿음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미국의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 그리고 1808년 존 돌턴의 원자 발견의 이후로 대부분의 화학자와 공유되었다. 그는 분자와 원자에 관해서 독일 물리학지 편집자와 긴 논쟁을 벌였다. 볼츠만이 죽고 2~3년 뒤에 페랭의 브라운 운동 연구에서 아보가드로 수와 볼츠만 상수가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작은 물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에 납득시켰다. 그의 업적으로는 볼츠만 인자라고 불리는 분배법칙을 들 수 있다. 이 법칙은 종래의 분자들의 속도에 관한 맥스웰 분배법칙을 확장시켜 외적인 힘의 작용을 외적인 힘의 작용을 함께 고려하여 얻은 것으로 분자들의 에너지가 주로 절대온도가 플랑크상수의 곱으로 주어지는 열적인 에너지 근처에 분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또 슈테판-볼츠만 공식을 유도해냈다. 흑체의 단위표면적에서 방출되는 모든 파장의 빛에너지의 총합이 흑체의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1879년에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하고, 이를 1884년에 이론적으로 유도해내었다. 이것은 20세기 양자론이 등장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플랑크의 말을 인용하면 "엔트로피와 확률이 로그로 연결된다는 것을 처음 진술된 것은 볼츠만의 기체분자이론에서였다." 그 유명한 엔트로피 S에 관한 식은 여기서 = 1.3806505(24) × 10−23 J K−1 는 볼츠만 상수이다. W는 거시상태의 기회의 빈도,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계의 거시적인 상태에 상응하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를 말한다. W는 아래의 식을 이용하여 구해낼 수 있다. 이는 열적인 평형상태에 있는 계에 대하여 열역학적인 성질을 구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엔트로피는 계의 주어진 거시적인 상태에 해당하는 가능한 모든 미시적인 상태의 수의 대수를 취한 양에 비례함을 나태낸 것이다. 이 관계식은 모든 미시적인 상태들의 사전확률이 같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이 가정을 보완하기 위하여 볼츠만은 에르고드 가정을 도입하였다. 이 가정에 의하면 하나의 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가능한 미시적인 상태를 두루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볼츠만 방정식은 이상기체의 동역학을 묘사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이전에는 기체분자들이 평형상태에 도달해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었으나, 볼츠만은 그러한 가정을 배제하고, 비평형상태에 있을 경우 어떻게 평형상태로 변화해 나갈 지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볼츠만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는 주어진 시간에 따른 물질의 위치와 운동량의 분포 함수이며, F는 힘, m은 물질의 질량, T는 시간이며, v는 물질의 평균속도를 의미한다. 이 방정식은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확률 분포의 시공간 미분을 나타내고 있다. 좌변의 첫항은 분포 함수의 시간 미분을 나타내고, 두 번째 항은 위치 미분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 항은 물질에 주어지는 어떠한 힘의 효과를 나태내고 있다. 우변은 충돌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빈에 있는 볼츠만의 무덤. 그의 상반신과 엔트로피식이 보인다 원칙적으로, 위 방정식은 적절한 경계조건이 주어진다면 완벽하게 기체들의 총제적인 동역학을 보여준다. 1차 미분 방정식은 믿을 수 없게 간단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f는 멋대로인 물질의 분포함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에 주어지는 힘 또한 본포함수의 속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볼츠만 방정식은 적분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그것을 풀기 위해 몇 년을 노력했다고 한다. 충돌항에 관한 모양은 얼추 맞다. 그러나 이상기체에 관한 볼츠만 방정식의 Chapman-Enskog 확장이 더욱 더 정확하다. 볼츠만은 여러 해 동안 그의 방정식을 이용하여 열역학 제 2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H정리이다. 그의 충돌항에서 그가 만든 핵심 가정은 "분자 혼돈"()이다. 가역성을 깨버린 그의 가정은 제 2법칙을 함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연론적인 가정이었고, 볼츠만의 겉보기 성공에 불과했다. 결국 요한 요제프 로슈미트와의 로슈미트의 역설에 관한 긴 논쟁은 결국 그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1970년대에 코헨과 도르프만은 높은 밀도에서 볼츠만 방정식의 체계적 확장이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따라서 밀집된 기체와 액체의 비평형 통계역학은 그린-구보 관계(Green-kubo relations), 파동이론 그리고 다른 접근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볼츠만 두뇌 볼츠만 메달 분류:1844년 태어남 분류:1906년 죽음 분류:자살한 사람 분류: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분류:열역학자 분류:빈 대학교 동문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빈 출신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
만화 (漫畵, 는 시각 예술의 일종으로, 일반적으로 말풍선이나 자막 형태의 글과 그림의 조합을 이루어 생각을 표현한다. 초기에는 캐리커처로써나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많은 하위 장르를 가진 예술 매체로 발전했다. 만화는 종종 그림의 컷이 나란히 연결된 형식이다. 대화, 서술, 음향 효과 기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말풍선, 짧은 해설, 의성어 등의 방법을 사용하며, 컷의 크기와 배열로 묘사의 속도를 조절한다. 만화와, 유사한 형태의 삽화는 만화에 쓰이는 가장 흔한 이미지 제작의 수단이다. 사진 소설은 사진 그림을 사용하는 형태이다. 만화의 흔한 형태로는 연재 만화, 시사 만평, 만화책 등이 있다. 20세기말 이후, 그래픽 노블, 코믹 앨범, 단행본 등의 합본이 점차 흔해졌고, 21세기 들어 인터넷상의 웹 만화가 확산되었다. 만화의 역사는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왔다. 20세기 중반, 만화는 미국, 유럽(특히 프랑스와 벨기에), 일본 등에서 유난히 번창했다. 유럽의 만화는 1830년의 로돌페 퇴퍼(Rodolphe Töpffer)의 연재 만화로 거슬러 올라가며, 땡땡의 모험 등의 1930년대의 연재 만화와 만화책의 성공에 힘입어 널리 확산되었다. 미국의 만화는 20세기 초 신문 연재 만화의 등장으로 대중 매체로 부각되었다. 뒤를 이어 1938년 슈퍼맨이 나타난 이후로 슈퍼히어로 잡지 형태의 만화책 장르가 유행했다. 일본에서는 12세기부터 만화가 시작되었음을 제시한다. 일본의 현대적인 만화는 20세 초에 등장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시기에 테즈카 오사무와 같은 만화가의 인기와 함께 만화 잡지와 만화책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만화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저급 문화로 취급받았으나, 20세기 말로 진행되면서 대중과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만화의 기원은 만화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는데, 15세기 유럽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컷과 그림 안의 말풍선을 가진 현재의 만화 형식 및 만화 라는 단어 자체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만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며, 또한 만화의 매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학자들 중 윌 아이스너는 그림과 단어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만들거나 생각을 각색하는 것 이라 정의했다. 그는 1996년에 만화를 최종적으로 만화책 등에서 삽화와 말풍선이 순서에 따라 나열된 것 으로 정의했다. 《만화의 이해》(1993)에서 스콧 매클라우드는 아이스너의 연속예술이라는 표현을 만화의 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정보를 전달하거나 보는 이에게 미적인 반응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림과 그밖의 형상들을 의도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것(juxtaposed pictorial and other images in deliberate sequence, intended to convey information and/or to produce an aesthetic response in the viewer)"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는 패밀리 서커스나 풍자 만화와 같은 한컷 만화를 만화가 아닌 카툰으로 분류한다. 그 반면, 코믹스 저널은 "20세기 최고의 만화 100선"이라는 기사에서 수많은 카툰 및 캐리커처 작가들의 한컷 작품을 포함시켰다. 문화를 크게 고맥락(high 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 context) 문화로 구분된다. 일본과 한국, 중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맥락 문화에 속하는 나라들인데, 고맥락 문화란, 민족적으로 동질을 이루며 역사, 습관, 언어 등에서 볼 때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 즉 맥락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집단주의와 획일성이 발달하는 문화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깊은 인간관계로 묶여있으며 멤버 간에 공유하는 정보가 많으며 간단한 메시지라도 깊은 의미를 갖기 쉬운 문화이다. 또한, 언어 코드보다 컨텍스트(context 비언어코드,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환경, 인간관계)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고맥락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언어적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많고 비언어행동에 있어서는 미묘한 것이 많이 존재한다. 반면에, 저맥락 문화는 다인종,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이 대표국이며, 멤버 간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의 비율이 낮아 개인주의와 다양성이 발달하는 문화를 가진다. 저맥락 문화에 속하는 미국만화는 정교한 그림체와 짧은 이야기 구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선악의 확실한 구분과 수많은 말풍선을 사용한 스토리 전개, 소설식 설명구조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처럼 동서양의 만화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서양독자들은 처음 망가를 접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식 이야기 관습에 당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 특유의 느긋한 스토리 구조와 속도조절을 위해 사용되는 감성적 이미지들, 말없는 칸들은 서양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색하며, 감정을 나타내는 많은 기호들과 소리와 움직임뿐 아니라 상황과 심리적 상태까지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그림문자들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표현매체로서 받아들여진다. 한국 만화 생태계의 기본 구조는 창작-제작-유통-소비 의 흐름을 가진다. 창작 단계는 개인 창작, 공동 창작, 수입 라이선스 만화로 나뉘며 제작 단계는 온라인과 만화전문 출판사, 일반 출판사, 대여점용 출판사 등의 출판으로 나뉜다. 이 밖에도 신문, 동인지 시장, 모바일 등도 제작 단계에 포함된다. 만화 산업은 다양한 제작 단계와 패키징 과정을 거쳐서 제작되며, 하나의 콘텐츠가 동시다발적으로 가치사슬을 만들며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 콘텐츠는 기획에서부터 다수의 가치 사슬에서 활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온라인이라 하면 보통 웹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웹툰 작가들은 개인창작 위주로 활동한다. 혼자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경우 또한 있다. 웹툰은 대개 규모가 큰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가 된다. 포털 사이트에 연재가 되기 위해서 작가들은 수많은 노력을 통해 정식 연재를 하게 된다. 웹툰은 만화 연재 수에 따라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와 계약을 맺어 일정한 원고료를 받고 포털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포털 사이트 방문 횟수를 늘리기 위한 포털 사이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이버 라는 포털 사이트가 있다. 네이버에서는 무료로 이용자들에게 요일별 웹툰을 제공한다. 요일당 평균 24개 정도의 웹툰을 제공하며 작가들과 계약을 맺어 원고료를 제공하고 웹툰을 무로료 제공하고있다. 신문 만화는 전통적으로 시사만화 의 영역이었다. 1개 신문에 적어도 네 칸 만화와 한 칸 만화가 동시에 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네 칸 만화 지면을 폐지할 정도로 시사만화의 창작·제작환경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으로 신문의 판매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로 대여점용 성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과 협조해 적은 비용 혹은 무료로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인쇄 만화 일반적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만화책을 통틀어 설명한다. 코믹 스트립 신문이나 잡지에 주로 4컷 정도 분량으로 수록 만화책 단행본으로 발행된 만화가 그려진 책이다. 인터넷 스마트폰 및 컴퓨터 일상화가 된 지금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에서 즐길 수 있는 만화를 표현한다. 시사 만화 시사에 맞는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만화 유머 만화 예술성과 웃음을 지향하는 만화 학습 만화 아동이나 청소년의 학습을 돕기 위해 그려진 만화 한국 만화 ex) 키드갱, 열혈강호, 타짜, 짱 일본 만화 ex) 신의 물방울, 원피스, 슬램덩크, 크로우즈 중국 만화 (홍콩 만화) ex) 영연천사, 용호문, 싼마오 유랑기 미국 만화 ex) 마블 코믹스(아이언 맨, 헐크 등), DC 코믹스(슈퍼맨, 배트맨) 유럽 만화 ex) 뫼비우스, 아스테릭스, 피터팬, 스콜피온 웹툰 애니메이션 |
인터넷 프로토콜 ( IP , I nternet P rotocol은 송신 호스트와 수신 호스트가 패킷 교환 네트워크(패킷 스위칭 네트워크, Packet Switching Network)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사용하는 정보 위주의 규약(프로토콜, Protocol)이며, OSI 네트워크 계층에서 호스트의 주소지정과 패킷 분할 및 조립 기능을 담당한다. 줄여서 아이피 (IP)라고도 한다. IP의 정보는 패킷 혹은 데이터그램이라고 하는 덩어리로 나뉘어 전송된다. IP에서는 이전에 통신한 적 없는 호스트에 패킷을 보낼 때 경로 설정이 필요없다. IP는 비신뢰성(unreliability)과 비연결성(connectionlessness)이 특징이다. 비신뢰성은 흐름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보낸 정보가 제대로 갔는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전송과정에서 패킷이 손상될 수도 있고, 같은 호스트에서 전송한 패킷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고, 같은 패킷이 두 번 전송될 수도 있으며, 아예 패킷이 사라질 수도 있다. 패킷 전송과 정확한 순서를 보장하려면 TCP 프로토콜과 같은 IP의 상위 프로토콜을 이용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표준 프로토콜은 인터넷 프로토콜의 4번째 판인 IPv4이다. 그러나 IPv4는 주소공간 고갈 문제를 겪고 있어 조만간 6번째 판인 IPv6가 대중화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7, OS X, 리눅스 등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대부분의 운영 체제는 IPv6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다음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IP 주소 (ip address)체계이다. IPv4 IPv6 관련 버전은 현재 IPv4와 IPv6가 있다. IP 버전 0부터 3까지는 실험적인 버전으로,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사용되었다. 다음의 IEN(Internet Experiment Note) 문서들은 현대 버전의 IPv4 이전의 인터넷 프로토콜 버전을 기술한다 IEN 2 ( Comments on Internet Protocol and TCP ) IEN 26 ( A Proposed New Internet Header Format ) IEN 28 ( Draft Internetwork Protocol Description Version 2 ) IEN 41 ( Internetwork Protocol Specification Version 4 ) IEN 44 ( Latest Header Formats ) IEN 54 ( Internetwork Protocol Specification Version 4 ) IP 주소 인터넷 IP 패킷 자기 IP 주소 보기 분류:인터넷 표준 |
수론에서, 페르마 소정리 (Fermat小定理는 어떤 수가 소수일 간단한 필요 조건에 대한 정리이다. 추상적으로, 소수 크기의 유한체 위의 프로베니우스 사상이 항등 함수임을 의미한다. 가 소수이고, 가 정수라고 하자. 페르마의 소정리 에 따르면, 법 에서 와 는 서로 합동이다. 위 식은 일 때 자명하게 성립한다. 만약 일 경우, 양변을 약분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이는 모든 소수가 만족시키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즉, 페르마의 소정리에 나타난 합동식을 만족하는 수가 반드시 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를 만족하면서 소수가 아닌 를, 를 밑수로 하는 카마이클 수 라고 부른다. 피에르 드 페르마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페르마는 이 정리를 언급했을 뿐, 정확한 증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현재 기록상 남아 있는 증명 가운데 최초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것이다. 페르마의 소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합동식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 증명 방법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a와 서로소인 소수 p에 대해 a, 2a, 3a, ..., (p-1)a인 p-1개의 수를 살펴보자. 이 수들을 p로 나눴을 때 나오는 나머지는 모두 다르다. # 증명 귀류법으로, 서로 같은 나머지를 가진 두 수, ia와 ja가 있다고 하자(0 또 0 이제 집합 를 정의하자. 이는 첫 번째에 가정한 p-1개의 수들의 집합이다. 또한, 집합 를 보자. 이는 p와 서로소인 수를 p로 나눌 때 생기는 모든 나머지들의 집합이다. 처음에 했던 증명에 의해, A와 B의 크기는 같다. 따라서, 이다. 양변을 로 나누면, 을 얻는다. 이 정리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이용하여, 소수가 아닌 정수 n에 대해서까지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n이 자연수, a가 n과 서로소인 자연수일 때, 이 성립한다. 식에서 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나타낸다. 유한체 이론에서 다항식의 나눗셈에 관련된 결과를 통해 페르마의 소정리를 일반화할 수도 있다. 표수가 인 유한체 에 대하여, 다음 두 명제가 성립한다. # 기약 다항식 에 대하여, 라면 이다. # 인 두 양의 정수 에 대하여, 를 인 k차 기약 다항식 들의 수라고 하자. 그렇다면 :: ::이다. 여기서,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따라 C(p, k)를 얻는 일반적인 공식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분류:수론 정리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
《 AKIRA 》()(국내수입명 폭풍소년)는 오토모 가쓰히로가 창작한 일본의 만화이다. 고단샤가 발행한 만화 잡지 주간 영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화(1988년) 및 게임화도 되었다. 근미래의 황폐한 세계를 그린 SF 작품으로, 치밀하고 현실적인 묘사나 연출 등이 화제가 되었으며, 만화와 영화 모두 대히트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기술을 가져왔다. 이후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준 영향도 크다. 원작인 만화판은 만화계의 두 번째 혁명 이라고도 일컬어진다(첫 번째는 물론, 데즈카 오사무). 제목인 AKIRA는 오토모 자신이 팬으로 삼고 있으며 큰 영향을 받은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유래한다. 붓으로 쓴 제목은 만화가인 히라타 히로시가 쓴 것이다. 단행본은 주간지와 같은 대형판 사이즈와 절단면에 채색을 하는 등, 이목을 끄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의 만화가 뫼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작자의 치밀한 묘사로서는 이 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 국외에서는 아메리칸 코믹의 스태프가 채색한 외국어판이 유통되었으며, 이것을 일본어로 역번역한 것이 《국제판 AKIRA》 및 《총천연색 AKIRA》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발매됐다. 영화는 제작비에 10억 엔을 건 대규모 작품으로, 치밀한 작화나 음악, 파괴 영상 등으로 당시의 애니메이션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제작 기법으로 애프터 레코딩가 아닌 프리 스코어링을 채용했다. 또, 통상적으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서 인물의 입의 움직임은 3종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음의 수와 같은 5종류로 그려졌다. 일본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평가나 수출의 증가에 공헌했다. 비디오화가 될 때에 많은 컷을 손보거나, 음악과 관련해서도 손을 보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본 작품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서양의 대중시장으로 폭발적으로 넓힌 마일스톤이 되어 해외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2009년 여름에 공개할 예정인 실사영화 제작이 계획되어 있다. 제작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감독은 로리 로빈슨, 워너브라더스 배급이다. 하지만 원작이 워낙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많은 탓에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오기란 쉽지가 않았고 각본마저 제작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다가 2013년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 198X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는 1988년이라고 나온다.) 도쿄는 신형 폭탄에 의해 붕괴되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여, 세계는 황폐되어 가고 있었다. 2019년. 도쿄 만에 떠오르는, 동경 23구를 본뜬 인공 도시 네오동경의 어둠에 버려진 고속도로. 폭주족 소년들이 들어와서 질주한다. 그중 한 멤버인 데쓰오는 백발의 소년과 접촉 사고를 일으켜 중상을 입는다. 백발의 소년은 정부의 초능력 연구 기관에서 반정부 게릴라(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빠져나오게 된 초능력자 다카시였다. 데쓰오는 다카시와 함께 연구 기관에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초능력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극장판과 원작에서는 인물의 설정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양자의 공통 사항을 기술하고, 특히 극장판과 원작에서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그 점을 설명한다. 키네다 쇼타로(金田正太郎) 본편의 주인공으로 자칭 건강 우량 불량 소년 . 우수한 운동신경을 갖고 있으며, 하시리야 (走り屋)로서는 배짱있는 질주를 한다. 그 민첩함이나 도망치는 속도는 군대조차도 잡을 수 없을 정도다. 자기 전용으로 개조한 바이크(도난품)를 몰고, 나날을 목적 없이 폭주 행위에 낭비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중상위권으로, 의외로 머리가 좋다. 세부적인 개조나 튜닝은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모터에 대해서는 밝지 않다. 폭주족 팀의 리더격으로, 동료나 하시리야(走り屋) 사이에서의 인망도 두텁다. 원작에서는 직업훈련학교의 보건부(保健婦)와 관계를 가진 듯하며, 임신시켜도 별로 개의치 않거나, 흥분제와 같은 약물을 일상적으로 섭취하고 있는 묘사도 있지만, 극장판에서는 생략되었다. 케이를 구한 일로 반정부 게릴라와 얽히게 된다. 데쓰오와는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이자 비호하는 입장의 친구로서 지내고 있었다. 능력에 각성하여, 약물에 빠진 테츠오가 리더가 된 폭주족 팀 크라운 과의 항쟁에서 테츠오를 몰아 넣고 총구를 들이대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으나, 눈 앞에서 야마가타가 살해당하자, 이것을 계기로 데쓰오를 향한 복수를 다짐한다. 극장판에서는 데쓰오와 함께 아키라의 힘에 말려든다. 원작에서는 게릴라의 일원으로서 게이나 지요코와 행동을 같이 했지만, 각성한 아키라의 힘에 삼켜져, 이야기 중반에는 무대에서 일단 자취를 감춘다. 후에 지구의 존재도 뒤흔드는 아키라와 데쓰오의 힘의 발동하던 도중에 제3차 세계 대전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이름의 유래는 《철인 28호》의 주인공 가네다 쇼타로. 사건의 종료 후에는 게이, 지요코, 가이 등과 함께 대동경제국 을 아키라, 데쓰오에게서 계승한다. 클리닝점을 경영하는 양친과 장애를 가진 남동생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남동생의 간병 피로로 쓰러져 알코올 의존증에 걸리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에게 부양 책임이 없으므로, 양호 시설 입소했다. 그 후는 기숙제 중학교에 입학하지만, 다음 해에 비행에 빠지고, 더구나 경찰사태까지 일으켜 퇴학. 직업훈련학교에 편입해서 바이크 팀을 결성한다. 2003년 9월 5일생. 시마 테츠오(島鉄雄) 가네다의 소꿉 친구. 가네다 팀과 폭주 도중 타카시와 충돌사고를 일으킨 것을 계기로 초능력에 각성했다. 능력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아키라에 대적하는 힘을 손에 넣어 세계를 농락한다. 이름의 유래는 《철인 28호》의 등장인물로 쇼타로의 친구인 시키시마 데쓰오. 2004년 7월 29일생. 야마가타(山形) (한국:야마가토) 가네다 팀의 특공대장 같은 존재. 팀에서 2번째로 키가 크다. 2003년 11월 9일생. 카이(甲斐) 키가 작고, 러프한 복장의 가네다 일행과는 달리, 유일하게 자켓에 타이와 같은 전통적인 모습을 좋아하여, 팀 내에서는 착실한 편이다. 2004년 1월 8일생. 조커(ジョーカー) 폭주족 팀 〈크라운〉의 리더로, 가네다 일행의 대항세력. 카오리(カオリ) 원작에서는 난민이자, 데쓰오의 놀이 상대로서 연행되어 데쓰오의 시녀가 된다. (에니판에서는 후에 테츠오를 돕다 폭주한 테츠오의 거대화된 장기에 압사한다.) 류(竜) 케이가 속한 반정부 게릴라 그룹의 리더. 본명은 류사쿠(竜作). 가네다를 그룹에 들인 것도(굳이 말하자면 게이의 우유부단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류다. 케이(ケイ) 반정부 게릴라의 소녀. 오빠의 선배인 류와는 같이 호흡을 맞춘 콤비. 2002년 3월 8일생. 치요코(チヨコ・본명 불명・원작만) 반정부 게릴라의 무기조달・연락원으로, 거한의 여성. 게이를 친 딸처럼 소중히 생각한다. 대령(大佐) (본명은 시키시마 대령) 아미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으로, 동결된 아키라의 최고 관리자이기도 했다. 성(姓)은 시키시마(敷島). 1977년 11월 15일생. 닥터(ドクター)(본명은 오니시 박사. 닥터는 별칭) 대령 밑에서 아키라를 시작으로 하는 넘버즈의 연구 관리를 담당하는 인물이지만, 현상의 관측에 열중한 나머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데쓰오의 폭주를 허용하고 만다. 작품에서 최연장자. 원작에서는 아키라 각성 시의 냉각액 누수로 동사(凍死). 극장판에서는 데쓰오의 능력 데이터 수집에 혈안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아키라의 힘의 개방에 말려들어 관측 트레일러 채로 압사(圧死)한다. 네즈(根津) 정부 야당에 소속하는 정치가. 표면적으로는 미야코 교단의 힘을 배경으로 정계 공작을 행하고(원작) 뒤로는 게이의 반정부 게릴라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지도하고 있다(원작・극장판 공통). 원작에서는 다카시를 사살하고, 이것이 2번째로 아키라가 폭주하게 된 계기가 되어, 그로 인해 깨진 자갈과 함께 소멸한다. 극장판에서는 아미가 숨긴 아키라의 정체를 거머쥠으로서 정치적 우위에 서는 것을 획책하고, 그 결과 대령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실각하여, 혼란한 상태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한다. 지바현의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학업은 우수. 모 대학의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아키라에 의한 동경 붕괴를 만난다. 그로부터 3년간은 암거래상으로 활동했으며, 뒷세계 사람들에게 이름이 퍼지게 된다. 대학이 사업을 재개한 즈음에 복학하고, 졸업 후는 변호사가 된다. 30세를 전후하여 정계에 진출한다. 1964년 12월 11일생. 타카시(タカシ) 26호라고도 불린다. 초능력 각성 전에는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하지만 3인의 점술사 넘버즈 중에서는 가장 성격적으로 어리고, 밖으로 나가 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이야기 초반에 게릴라의 안내에 따라 시설에서 탈주했으며, 데쓰오가 초능력을 각성하는 방아쇠가 된다. 원작에서는 네즈의 오발로 사망하지만, 그 충격로 아키라가 폭주. 이번엔 네오동경 붕괴의 방아쇠가 된다. 1980년생. 일정 이상의 힘을 가진 실험체에게는 번호가 붙여지는데, 손바닥에도 이 번호가 새겨 있기에 넘버즈 라고도 불린다. 키요코(キヨコ) 25호라고도 불린다. 초능력을 각성하기 전까진 다른 넘버즈와 같이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미래 예지는 93 ~ 95%의 확률이며, 네오동경 붕괴도 예지했다. 신체적으로는 매우 약해서누운 채로 스스로 움직이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초능력으로 자신의 침대나 자기 자신을 뜨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최초로 테이를 정신력으로 조종하여 테츠오에 대항하지만 실패했으며, 다음 번에는 그 도주를 도와주거나 했다. 1979년생. 마사루(マサル) 27호라고 불린다. 초능력을 각성하기 전 평범한 어린이었을때의 모습을 보면 가장 어른스럽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부유하는 의자에 앉아 이동한다(하지만 앉지 않은 장면도 존재함). 3인의 넘버즈 중에서는 어른에 대한 동경도 강하여, 수트에 넥타이 모습에서 매번 등장했다. 성격적으로도 안정적이다. 1980년생. 미야코(ミヤコ) 아키라를 받드는 종교를 지도하는 노파. 일찍이 아키라의 힘을 눈앞에서 보고 실명하였지만, 강한 감응력으로 타인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작에서는 가사 상태인 채 파기된 전 넘버즈(19호)로, 네오동경 붕괴 후에는 메인 캐릭터들에게 많은 조언을 주고, 데쓰오와도 직접 대결한다. 하지만 극장판에서는 완전히 엑스트라 취급으로, 모브 신에 몇 번 등장하는 정도다. 아키라(アキラ) 이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소년. 28호라고도 불린다. 1982년(극장판에서는 1988년)에 각성하고 동경 붕괴를 일으켰기 때문에 지하에서 냉동되어 아미의 감시하에 있었다. 원작에서는 지하에서 끌려나와 각성한 후, 다카시의 죽음을 계기로 폭주하고, 네오동경 붕괴를 초래했다. 극장판에서도 각성해 네오동경 붕괴를 일으켰다. 극장판에서는 조사를 위해 몸을 토막 내 냉동되어, 종반에 부활한다. 원작에서는 통상의 냉동 수면으로, 비교적 빠른 단계에 부활하지만, 몽유병처럼 반자각 상태인 채로 언제 폭주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위의 인간에게 놀림 당한다. 영 매거진에서 1982년 12월 20일호부터 1990년 6월 25일호에 걸쳐 연재되던 도중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인해 일시 중단됐다. 전 120화. 1984년, 제8회 고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 수상. 2002년, 아이즈너 상 최우수 국제 아가이브 프로젝트 부문 및 최우수 국제 작품 부문을 수상. 또, 그 이전의 1992년에 올 컬러 국제판 AKIRA가 최우수 채색 부문을 수상했다. AKIRA 제1권 1984년 9월 21일 발행 AKIRA 제2권 1985년 9월 4일 발행 AKIRA 제3권 1986년 9월 1일 발행 AKIRA 제4권 1987년 7월 10일 발행 AKIRA 제5권 1990년 12월 11일 발행 AKIRA 제6권 1993년 3월 23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집 1988년 10월 7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2집 1989년 3월 17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3집 1989년 6월 23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4집 1989년 10월 20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5집 1990년 2월 20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6집 1990년 5월 31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7집 1990년 8월 31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8집 1990년 12월 10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9집 1991년 4월 20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0집 1991년 9월 20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1집 1992년 6월 20일 발행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2집 1996년 9월 20일 발행 총천연색 AKIRA 제1권 2003년 12월 6일 발행 총천연색 AKIRA 제2권 2003년 12월 6일 발행 총천연색 AKIRA 제3권 2004년 1월 16일 발행 총천연색 AKIRA 제4권 2004년 2월 16일 발행 총천연색 AKIRA 제5권 2004년 3월 16일 발행 총천연색 AKIRA 제6권 2004년 4월 16일 발행 AKIRA CLUB 1995년 6월 9일 발행 아키라・아가이브 2002년 10월 발행 1988년 제작. 상영 시간 124분. 70mm프린트. 제작비 약 10억 엔. 총 셀화 매수 약 15만 장. 1988년 7월 16일 도호계에서 공개 1990년 12월 25일 전미 공개 2001년 3월 20일 디지털 수정판이 뉴욕에서 공개 2001년 10월 31일 DVD판이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2001에서 공개 프로듀서 스즈키 료헤이, 가토 슌조 감독 오토모 가쓰히로 조감독 다케우치 요시오, 사토 히로아키 각본 오토모 가쓰히로, 하시모토 이조 작화감독 나카무라 다카시 작화감독보 모리모토 코지 미술감독 미즈타니 도시하루 미술 에비사와 가즈오, 이케하타 유지, 오노 히로시 설정・레이아웃 와타베 다카시, 다나카 기요미 색지정 야마나 킨에다, 이케우치 미치코, 다나카 세쓰코 하모니 다카야 노리코 촬영감독 미사와 가쓰지 작곡・지휘・음악감독 야마시로 쇼지 음향감독 아케타가와 스스무 녹음 세가와 데쓰오 효과 구라하시 시즈오 편집 세야마 다케시 원화 후쿠시마 아쓰코, 이노우에 도시유키, 우루시하라 사토시 애니메이션 제작 도쿄 무비 신사 제작 아키라 제작위원회 캐릭터 목소리 출연 일본어판 목소리 출연 영어판 목소리 출연 영어판(DVD판) 가네다 이와타 미츠오 캠 클라크 조니 용 보시 대령(大佐) 이시다 다로 토니 보브 제이미슨 K 프라이스 류(竜) 겐다 뎃쇼 스티브 클레이머 로버트 버프홀츠 게이 고야마 마미 라라 코디 웬디 리 데쓰오 사사키 노조무 장 라바슨 조슈아 세스 닥터 스즈키 미즈호 워트니 헬드 마시 마사 가이 구사오 다케시 밥 버건 맷 K 밀러 야마가타 오쿠라 마사아키 토니 보브 마이클 린지호그 가오리 후치자키 유리코 바버라 굿슨 미셸 러프 기요코 이토 후쿠에 멜로라 하트 샌디 폭스 마사루 신토 가즈히로 밥 버건 코디 매켄지 다카시 나카무라 다쓰히코 바버라 굿슨 모나 마셜 미야코 기타무라 고이치 스티브 클레이머 - 네즈 오타케 히로시 토니 보브 마이크 레이놀즈 AKIRA(1988년 12월 24일, 패밀리 컴퓨터, 타이토) AKIRA PSYCHO BALL(아키라 사이코 볼)(2002년 2월 21일, 플레이스테이션2, 반다이) 본작에서 AKIRA(28호)가 철인 28호의 오마주인 것은 분명하다. 또, 이것은 주인공인 가네다(쇼타콘의 어원인 가네다 쇼타로)나 데쓰오(철인을 비꼬고 있음)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본 작품은 일본에서도 1960 ~ 70년대에 유행한 서브컬처인 사이키델릭 문화(마약 문화・히피 문화와도 관계 있음)의 영향이 작중에 있다고 보인다. 이것은 주인공이나 크라운 등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흥분제(이것은 가네다의 자켓의 등에 그려진 캡슐에도 관계 있음), 더욱이 초능력자가 복용하는 치사량에 달하는 위험한 약물 등의 관련성을 밝혀내는 서브컬처 연구자도 적지 않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가네다가 다루는 가네다의 바이크 를 시작으로, 다른 모든 개성적인 바이크는 카울부터 프레임 레이아웃에 이르기까지 세미 이지 오더 시스템(semi-easy order system)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차륜 안에 설치된 상온 초전도 모터를 통해 양륜구동을 실현하고, 전력은 가솔린 엔진에 의한 발전(영화 앞부분에서 데쓰오가 제멋대로 찾아왔고, 원작에서는 가네다가 약을 연료 탱크에 숨기고 있음). 또, 보디의 이곳저곳에 붙여진 스티커는, 1980년대 회고 붐에 의한 유행인 것 같다. 하지만 조커가 타는 대형 아메리칸은 현재와 같은 가솔린 엔진의 후륜구동차라는 설정이며(그의 취미), 큰 머플러가 몇 개씩이나 나와 있다. 제원 전장 - 2947mm 전고 - 1171mm(실드 포함) 전폭 - 831mm 시트고 - 340mm 최저지상고 - 76mm 휠베이스 - 2194mm 타이어 사이즈 전18인치 후19인치 최고속도 243 km/h 건조중량 - 154 kg 발전형식 - 상온초전도발전기 최고발전량 - 83.0 kW 엔진 회전수 - 12500rpm 최대전압 - 12000V ABS 대장애물용 레이다 오토나비 시스템 단행본 4권이 간행된 후에 영화판의 제작이 개시됐으며, 원작 만화의 연재는 장기간 휴재되었다. 5권의 간행까지 실로 3년간을 필요로 했지만, 영화의 세계적인 히트로 발매된 "국제판 AKIRA"(해외에서 발매된 원작 영어판의 역수입)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미발매된 5권의 전반에 상당하는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었다. 국제판은 1권당 수록화가 일본의 것보다 적었는데, 일본에서 5권으로 발매되기에는 부족한 화수라도 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4권의 권말에는 5권의 광고가 게재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5권이 최종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연재 재개 후에는 장기에 걸쳐 정력적으로 연재가 계속되었으며, 5권은 사전 정도의 두께가 되는 게 아닐까 예상되었지만, 결국 5권과 6권으로 나뉘면서, 6권이 최종권이 되었다. AKIRA 공식 사이트(반다이 비주얼) A.D.2019 - 《AKIRA》 팬 사이트. Akira(Akira - Katsuhiro Otomo, 1995) 분류:사이버펑크 분류:일본의 만화 분류: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분류:일본의 SF 영화 분류:2002년 비디오 게임 분류:1988년 비디오 게임 분류:1988년 애니메이션 영화 분류:폭주족을 소재로 한 작품 분류:오토모 가쓰히로의 작품 분류:21세기를 배경으로 한 만화 |
아니메 (), 애니메 또는 재패니메이션 ()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일컫는다. 주로 기존에 연재되는 동명의 인기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되며, 장면의 대부분은 셀 애니메이션 방식이 사용된다. 아니메 는 영어 단어 animation(애니메이션) 이 변형된 형태이다. 다른 언어에서, 이 용어는 일본에서 온 애니메이션이나 다채로운 그림, 활기찬 캐릭터와 판타지적 주제를 가진 일본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가진 애니메이션을 의미한다. 초기 일본의 상업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이후에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은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캐릭터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경우 1960년대에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에서 나왔으며,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거대한 국내외 시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장에서, 텔레비전 방송으로, 직접 홈 미디어로, 인터넷으로 배포되었고, 다양한 대중의 수요를 잡기 위해 다양한 장르로 나뉘었다. 아니메는 원래 일본에서 애니메이션(Animation)을 지칭하는 약자였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중 60% 이상을 제작할 정도로 거대해진 오늘날에 아니메 는 각국의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여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권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또는 줄여서 "일본 애니", "일애니"라고 하고 있어 아니메란 용어의 비중이 낮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새로 나온 기술에 반응하여 시간에 적응해 온 독특한 제작 방법과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예술의 형태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움직임에는 초점을 덜 맞추고, 패닝, 줌과 앵글 샷을 비롯한 카메라 효과의 사용과 더불어 주위 환경의 사실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다양한 예술 형태가 사용되었으며, 강조된 감정 표현이나 현실적인 크기의 눈을 포함하여, 등장 인물의 조화와 특징은 꽤 다양하다.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430여 회사가 있는데 그 중 유명 회사는 스튜디오 지브리, 가이낙스, 토에이 애니메이션 등이 있다. 국내 시장을 나눠먹고 있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DVD 판매량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외국어 더빙이 증가함에 따라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어서 일본 밖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많아지기는 했지만, 팬과 산업계 모두 이를 단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할 뿐이다. 현재는 일본 아니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라는 평이 주로 작품성측면에서 많이 나돌고 있지만 해외수익성 면에서는 어느때보다 전성기이다. 방송영상컨텐츠수출액에서 일본 아니메는 k-pop에 조금 밀리지만 10,13년 때보다 17년 현재 많이 따라잡았고 특히 k-pop은 일본을 필두로 주로 아시아에서 수익이 90%이상 북미,유럽은 10%도 채 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일본 아니메는 북미,유럽 수익이 35%가량 될 정도로 세계적 범용성 측면에서는 k-pop보다 크게 앞서고 있다. cell 1917.jpg|섬네일|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 (1917년) 일본 애니메이션의 탄생 배경은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대전 특수를 맞이해 경제 부흥을 맞아 해외 문화를 탐닉하던 시대였다. 특히 영화는 대중오락으로 정착되며 영화 스타가 등장하던 시기였고, 닛카쓰, 덴카쓰 등의 영화사들도 설립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이제 막 제작되기 시작했던 미국 (존 랜덜프 브레이)과 프랑스 (에밀 콜)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일본에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모카와 오텐, 고치 준이치,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삼인방은 영화사들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아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하고 분석, 기법을 연구한 뒤 1916년부터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1917년 1월 시모카와 오텐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인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 이야기》를 제작하였는데 칠판에 분필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조악하고 단순하였지만, 훗날 시모카와는 기초적인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기타야마 세이타로는 1917년 5월 《원숭이와 게의 전투》를, 고치 준이치도 6월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를 제작하였다. 이 세 작품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들로 항상 언급된다.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경우 일본에서 최초의 애니메이션 독립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제작소를 설립하기까지 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설비가 파괴되면서 제작을 중단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공백기를 맞았지만, 위기를 딛고 발전을 계속하였다. 기타야마 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 기술자 출신이었던 야마모토 사나에는 1925년 야마모토 만화제작소를 설립, 《노인을 버리는 산》을 시작으로 정부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였고,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 출신의 무라타 야스지는 1926년 첫 작품 《기린의 목은 왜 긴가》 이후 무타라 프로덕션 을 설립하여 컷 아웃 방식의 교육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작, 전쟁 전 최다 작품을 만들어내 달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오후지 노후로는 1929년 일본 최초의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제작하였으며, 마사오카 겐조는 1932년 셀 방식을 이용해 제작된 본격적인 발성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세상》으로 기술을 한층 진보시켰으며, 수년 뒤 《거미와 튤립》을 제작해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와중에 1927년 단편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하는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비롯한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1930년부터 일본에 연이어 수입된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 애니업계는 수입 작품에 비해 비싼 제작비, 엉성한 움직임과 스토리 등으로 경쟁력이 낮았고, 각 영화사들은 흥행 실패를 예감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손을 떼었다. 극장에서 물러난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정부 주관의 교육·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 사회는 군부독재 시절로 서서히 접어들며 1931년 중일 전쟁 발발, 1933년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에 맞춰 전의를 고조시키기 위한 선전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여럿 의뢰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세오 미쓰요의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 《모모타로·바다의 신병》, 오후지 노부로의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 야마모토 사나에의 《스파이 격멸》 등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하는 등 군국주의 색채가 짙었지만,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려 했으며, 《모모타로·바다의 신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은 전후 애니메이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GHQ는 신속한 점령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홍보를 활용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1945년 가을 야마모토 사나에, 무라타 야스지, 마사오 겐지 등을 중심으로 100여명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소집되어 신일본동화사가 설립되었다. 마사오카 겐조는 봄꽃의 평화를 강조하는 《벚꽃》(1946)을 제작하였으나 극장가에 공개되지는 않았고, 《버려진 고양이 도라짱》 (1947) 등을 제작하였지만 GHQ가 바라던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진척되자 디즈니의 역할을 염두에 두었던 GHQ도 이내 포기, 신일본동화사는 1947년에 해산되었다. 신일본동화사의 세 사람은 같은해 일본만화영화사를 설립하나 무라타 야스지만 남고, 무라타는 세오 미쓰요를 불러들여 《임금님의 꼬리》 (1949)를 제작하나 배급사 도호에서 내용 문제를 이유로 비공개 처리, 일본만화영화사는 큰 투자금을 보전하지 못하여 파산하였다. 이외에도 전쟁 전에 활약하던 작가 대부분은 패전의 충격과 사회격변에 순응하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업계를 떠나던 실정이었다. 야마모토 사나에, 마사오카 겐조는 도호의 투자를 받아 일본동화 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는 모리 야스지, 후쿠이 에이치 등의 인사도 들어와 있었다. 이후 도호의 관련사를 흡수해 투자를 늘려 회사명을 니치도 (日動) 영화로 바꾸고, 1995년에는 도에이의 위탁으로 단편 《흥겨운 바이올린》을 제작한 것을 계기로 도에이가 니치도영화를 매입, 도에이 교육영화 소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삼으며 1956년 7월 도에이동화 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였다. 도에이동화는 기존의 가내수공업 방식을 타파하고 미국식 분업 제작시스템을 차용,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1957년 13분 분량의 첫 작품 《새끼 고양이의 낙서》를 발표한 뒤, 1958년 10월에는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을 개봉하였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영상으로 인기를 끌며 절찬리에 상영된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메이터 지망생을 낳게 되었다. 이후로도 도에이는 《원숭이 소년 사스케》 (1959), 《서유기》 (1960) 등을 공개하였다. 한편 1952년 〈철완 아톰〉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다, 도에이동화 측에서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서유기》의 제작협력 의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애니메이션의 기본을 배웠다. 1961년 도에이동화에서 퇴사한 데즈카는 사카모토 유사쿠, 요코야마 다카이치 등과 함께 도쿄 후지미다이에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 을 설립하였다. 실험작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1962)을 계기로 데즈카 프로덕션은 무시 프로덕션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이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던 1950년대부터는 애니메이션 환경의 변화도 이뤄졌다. 1953년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고, 1959년에는 주간 단위의 만화잡지들이 창간되어 어린이들은 매주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제작한 무시 프로덕션은 앞으로의 방향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으로 설정하고, 철저한 상업적 작품을 기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가의 제작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니메이션 표현을 생략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을 도입하고, 에피소드 방식의 미국 애니와는 다른 재미있으면서 복잡한 스토리 , 즉 이야기와 세계관에 충실한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무시 프로덕션의 첫 정기작품은 탄탄한 이야기와 세계관을 쌓아가고 있던 〈철완 아톰〉으로 결정되었고, 1년 간의 제작 끝에 1963년 1월 1일 저녁 6시 15분, 후지테레비에서 《철완 아톰》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철완 아톰은 당시 엄청난 시청률로 인기를 구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캐릭터 상품 권리, 최초의 팬클럽 설정 등 여러가지 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철완 아톰》의 성공에 주목한 TV 방송국과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속속 참가하였다. TCJ 스튜디오는 1963년 한 해에 《신선부락》, 《철인 28호》, 《에이트맨》을 제작해 방영 개시하였는데 모두 공상과학 장르에 속해 SF 작가가 각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도에이동화는 《늑대소년 켄》을 제작하였지만 그간 장편애니에 집중한 탓에 비효율적인 제작방식이라는 문제를 겪기도 했다. 1964년 데즈카 오사무는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을 기획하였는데 이미 방영되던 《철완 아톰》이 첫 대상이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정글 대제》를 풀 컬러 애니메이션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기동전사 건담》과 《우주전함 야마토》등의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수용층이 어린이에서 청소년은 물론 성인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80년대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VTR)가 보급됨.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인 지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고, 일본 애니메이션 중의 인기도에서 2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며,1986년 드래곤볼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 시작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과 1993년부터 시작한 농구만화 슬램 덩크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애니메이션 작품 제작비의 70~80%를 차지하는 인건비가 상승하고, 일본의 버블 경제(잃어버린 10년)가 무너지면서 경제 침체로 이어져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판매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극장판 말 그대로 극장 상영용으로 만들어진 작품. 일반 영화와 비슷한 상영 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전문적으로 극장을 목표하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종종 인기 있는 TV 시리즈나 OVA가 극장판화되기도 한다. 대규모 스튜디오와 자금이 동원되므로, 상당한 걸작들이 많다. 주요 감독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이 있다. OVA(Original Video Animation) 제작된 작품은 VCR용 카세트를 비롯한, DVD, 블루레이 디스크의 형태로 판매된다. 소규모 고정 지지층을 가진 장르물이나 소수의 작가들이 모여서 만드는 소규모 작품 등을 취하는 형태이다. 과거에는 자금력이 부족하여 그림의 수준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현재는 OVA 시장 자체가 상당히 커짐에 따라 TV판 이상의 수준을 보이기도 한다. TV 시리즈 TV 방영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작품. 시간 제한 문제로 초기 작화와 후기 작화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많다. (한국 드라마의 날림 현상과 비슷하다.) 재패니메이션의 가장 근간이 되는 제작 방식이다. 대개 TV사의 발주를 각 제작 스튜디오에서 주문을 받아 만들어지는 형태가 되므로, 인기가 없어서 광고가 잘 들어오지 않는 시리즈물의 경우엔 1쿨/혹은 1기(=13주. 1년의 1/4 기간으로 보통 일본 TV사의 방송 프로그램 개편 패턴) 단위로 잘려 나가게 된다. :분류:NHK의 애니메이션 :분류:TBS 계열 애니메이션 :분류:TV 도쿄 계열 애니메이션 :분류:TV 아사히 계열 애니메이션 :분류:UHF 애니메이션 :분류:닛폰 TV 계열 애니메이션 :분류:마이니치 방송의 애니메이션 :분류:선라이즈 작품 :분류:일본의 애니메이션 :분류: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분류:일본의 웹 애니메이션 :분류: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 :분류:후지 TV 계열 애니메이션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화풍, 애니메이션 기법, 생산, 제작에 있어서 다른 형태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형태를 띈다. 시각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원화가, 감독, 원작가, 스튜디오에 따라 그림체가 상당히 다르다. 어느 한 그림체가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애니메이션 기법과 캐릭터 디자인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일반적 애니메이션 제작과 마찬가지로 콘티 작성, 목소리 녹음, 캐릭터 디자인, 셀 제작 등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1990년대 이후 애니메이터들은 점차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의 효율성을 올리기 위해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후지 노부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기를 개척한 사람으로, 실험적이었고 흑판에 그린 그림, 종이를 잘라 만든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 실루엣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셀 애니메이션은 점차적으로 유명해져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모치나가 타다히토, 카와모토 키하치로, 무라타 토모야스가 만든 스탑 모션 인형극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독립 단편 영화를 제외하고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들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셀 애니메이션과 섞은 공각기동대,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작품이 있다. 셀을 제작하는 주요 회사인 후지필름은 셀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산업 전반에 셀을 모아야 한다는 충격을 주었고 서둘러서 디지털 작화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 시기가 오기 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pose to pose approach를 사용하는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추세는 비싼 원화를 덜 사용하고 중간에 동화를 많이 끼워넣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기존의 사용했던 장면을 재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선구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중점을 두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프레임을 조금 줄여서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단점을 정성을 들인 작화로 극복하는 등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한 기법은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장치의 개념으로서도 사용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장면은 삼차원 뷰를 달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배경은 작중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구이다. 배경은 항상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에서 배경을 따 오는 경우도 있다. Oppliger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모든 스타급 캐스팅을 합쳐서 매우 강한 감동을 자아내는 드문 매체라고 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화적 효과는 미국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마치 카메라가 찍은 것과 같이, 패닝, 줌, 원거리/단거리 샷과 같이 영화같은 샷을 사용하는데, 현실에서는 만들기 까다로운 훨씬 동적인 샷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사 녹음을 먼저 하고 동화 작업을 하는 북미 애니메이션과 달리 동화 작업을 끝낸 다음에 대사를 녹음한다. 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입 모양과 대사가 맞지 않는 오류도 생길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신체의 비례는 현실계의 신체 비례를 정확하게 반영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제작자는 머리 높이를 비례의 기본적인 단위로 생각한다. 머리 길이는 다양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키는 7등신에서 8등신 정도이다. 캐릭터 디자이너는 신체가 상당히 변형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몸의 비례를 의도적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몸은 작은데 머리는 큰 균형에 맞지 않는 캐릭터가 있으며 이 경우 2등신에서 4등신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짱구는 못말려 같은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신체 비례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예이며, 서양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관습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눈 크기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눈이 큰 아니메 캐릭터는 베티 부프와 같은 초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테즈카 오사무가 눈이 상당히 큰 캐릭터를 그린 것이 시초이다. 테즈카는 일본 만화애니 역사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테즈카가 만든 상징적 예술 스타일과 캐릭터 디자인은 사람 감정 전체를 눈 모양을 통해서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작자는 눈 색깔을 다양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밝은 음영, 색조, 어두운 음영을 섞어서 눈 색을 표현한다. 문화 인류학자 Matt Thorn은, 일본 애니메이터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스타일의 눈이 다소 외국인같은 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눈이 다 큰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사실적인 눈 크기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캐릭터의 머리카락 색도 현실적이다.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미리 정해져 있는 표정을 그리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지 않게 생생하고 다채로우며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과장되어 있으며 머리카락의 과장된 움직임은 액션과 캐릭터의 감정을 시각적 효과로 강조하는 데에 쓰인다. Poitras는 만화 표지 일러스트의 머리카락 색을 조사했는데, 눈을 사롭잡는 그림과 다채로운 색채는 어린이용 만화에 매력적이라고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 국내 시장에서 제작되기는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인종이나 국적은 항상 정의되는 것은 아니며,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같이 의도적으로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특정한 감정과 생각을 이미 정해져 있는 표정 그림을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서양 애니메이션과 다르다. 또한, 그러한 특징에는 특정한 감정과 기분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사용하는 고정된 도해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종종 과장되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전형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인데, 남캐가 화를 낼 때에는 코피가 난다. 순간적으로 단순그림체가단순해질때도있다.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땀을 그린다거나, 부끄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붉게 그린다거나, 집중해서 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게 표현하는 것 같은 다양한 시각 기호가 사용된다.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의 오프닝, 엔딩곡은 J-Pop이나 락 음악에 속해 있으며, 때때로는 유명한 밴드의 곡이 사용되기도 한다. 작중 스토리를 마음에 두고 가사를 쓰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시장도 목표를 해서, 주제를 살짝만 내비치는 곡도 나타나며 아예 줄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곡도 나오기도 한다. 음악은 작중에서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배경 음악은 줄거리 노선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단지 애니메이션 장면을 꾸미기 위해 사용된다. 몇몇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에 쓰인 음악을 전부 모아서 OST 앨범을 발매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타겟 연령층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동 만화, 소녀 만화, 소년 만화, 청년 만화, 여성 만화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소녀 만화와 소년 만화는 다양한 성별의 독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남녀 어린이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애니메이션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성인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 전개 속도가 느리고 줄거리 복잡성이 더 크기도 하며, 성인이 좋아할 만한 주제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성인 애니메이션 작품 중 일부는 일본에서 "R18"로 분류가 되는데, 이러한 애니메이션을 헨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조적으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르의 하위 장르로, 성적 행위를 직접 묘사하지는 않으면서 성적인 주제나 암시가 들어가 있는 엣치 라는 것이 있는데 전형적으로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나 하렘 애니메이션에 이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청소년 계층과 성인 계층에게 인기가 많아서 애니메이션에 판치라를 비롯한 엣치 요소를 넣는 것은 팬 서비스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류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분류와 달라서 간단한 특징으로 분류할 수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대해 책을 쓴 Gilles poitras는 전쟁과 평화를 전쟁 소설로 여기게 하는 것과 유사하게 건담 0080 과 그것의 복잡한 전쟁 묘사를 거대 로봇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을 비교했다. SF는 일본 애니의 주된 장르이고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이나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철인 28호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도 있다. SF의 하위 장르 중에는 메카물이 잇는데 건담과 같은 작품이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장르 애니메이션 중에은 일본의 옛 이야기에서 소재를 따 온 이누야샤 와 같이 동서양의 전통과 설화에 기반한 작품이 있고, 위그드라실이라 불리는 컴퓨터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옮겨 온 스칸디나비아 여신을 묘사한 오! 나의 여신님 이란 작품도 있다. 애니메이션의 장르는 일반적인 경우도 있는데, 드레곤 하프와 같이 판타지와 코미디가 섞인 작품, 카리오스트로의 성과 같이 범죄 애니메이션에 익살스러움을 첨가한 경우도 있다. 다른 하위 장르로는 마법소녀, 하렘, 스포츠, 무술, 문학의 애니화, 전쟁 등이 있다. 동성애를 다룬 장르도 있다. 원래 용어에는 외설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야오이(남성간 동성애)와 백합(여성간 동성애, 百合)는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작품을 설명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동성애 성향이 있는 캐릭터는 재미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성애 캐릭터를 진지하면서도 공감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picture.jpg|섬네일|일본 오타쿠 문화의 중심지인 아키하바라 역대 최고 시청률은 다음과 같다. # 《마루코는 아홉살》 1990년 10월 28일 (후지 TV) 39.9% # 《사자에상》 1979년 9월 16일 (후지TV) 39.4% # 《닥터슬럼프》 1981년 12월 16일 (후지TV) 36.9% # 《명랑 개구리 뽕키치》 1979년 2월 23일 (닛폰TV 방송망) 34.5% # 《만화 일본 옛날이야기》 1981년 1월 10일 (TBS) 33.6% # 《루팡3세 최종회》 1978년 12월 8일 (닛폰 TV 방송망) 32.5% # 《터치》 1985년 12월 22일 (후지TV) 31.9% # 《내일의 죠 》 1980년 3월 13일 (닛폰 TV 방송망) 31.6% # 《도라에몽》 1983년 2월 11일 (TV아사히) 31.2% # 《게게게의 키타로》 1986년 3월 22일 (후지TV) 29.6% 일본의 웹 애니메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의 방영 횟수순 목록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 (AMV) 박인하 (2009)《월트 디즈니 VS 미야자키 하야오》. COVER STORY | 콘텐츠 왕국 日本 06 - 애니메이션 사랑 짱구도 못 말려 , 주간동아 2009년 9월 23일 21세기를 여는 포성 문화전쟁 (16) 일 만화영화, 동아일보 1994년 6월 16일 분류:1917년 도입 |
백로 (白露)는 24절기의 15번째로 태양 황경이 165도가 될 때이다. 양력으로는 9월 7일 내지 9월 8일에 해당한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 하여 백로라 한다. 백로는 이슬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밤에 기온이 떨어지고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등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 장마가 물러가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지만, 간간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으로 말미암아 곡식이 줄기째 부러지고 해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千石)을 늘인다"고 하여 백로에 비가 오는 것을 풍년이 들 조짐으로 보았다. 분류:절기 분류:9월 |
Circulation 2.png|섬네일|300px|right|열염순환 해양학(海洋學 은 바다(해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질학, 물리학, 생물학, 화학 그리고 이들 각 분야의 학문을 바다와 그 주위에 적용할 공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분야를 포함한다. 해양학의 세부학문으로는 해양지질학(海洋地質學), 물리해양학(物理海洋學), 해양생물학(海洋生物學), 화학해양학(化學海洋學), 해양공학(海洋工學) 등이 있다. 해양지질학은 지구 내부의 성분, 지각의 변동, 해저퇴적물의 특성, 고기후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해양지질학은 순수 학문분야를 넘어 지진예측이나 지하자원의 분포를 분석하는 실용적인 학문에도 영향을 주는 학문분야이다. 물리해양학은 파랑역학, 해류, 해양-대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최근 물리해양학은 공해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예측이 중요해짐에 따라 학문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해양생물학은 해양생물의 분포와 특성, 해양-대기의 상관관계로 인한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해양생물로부터 유용한 물질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화학해양학은 해양의 용존 고체 및 기체와 이들 성분이 해양에 미치는 지질학적·생물학적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해양공학은 석유 플랫폼, 선박, 항만 등 해양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구조물의 건조·설계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또 항해의 안전성 제고에 대한 연구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리해양학 화학해양학 생물해양학 지질해양학 음향해양학 해양수산부 한국해양학회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해양연구원 국립해양조사원 국립수산과학원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인천대학교 인하대학교 군산대학교 경북대학교 부경대학교 |
안나 린드 (2002년) 안나 린드 (, 1957년 6월 19일 ~ 2003년 9월 11일)는 스웨덴의 정치가이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환경부 장관, 1998년부터 2003년 암살당할 때까지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스톡홀름 태생이며, 1982년 웁살라 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총선 이후에 예란 페르손 내각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적 능력과 인기로 사회민주당에서 페르손의 뒤를 이을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녀는 쇠데르만란드주(Södermanland)의 주지사였던 보 홀름베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안나 린드는 2003년 9월 10일 오후 4시 정각 직후에 스톡홀름 시내 누디스카 콤파니엣(Nordiska Kompaniet) 백화점에서 쇼핑 중 칼을 든 한 괴한에게 공격을 받아 가슴과 배, 팔 등을 찔리고 말았다. 당시 관례에 따라 경호원은 곁에 없었으며, 공격직후 카롤린스카(Karolinska)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어 9시간에 걸친 1차 수술을 받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2차 수술에 들어가지만 다음날 아침 5시 29분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후 암살범은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가 미야일로 미야일로비치가 체포되어 범행을 자백,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안나 린드는 스웨덴에서 지난 10년 동안 암살된 두 번째 정치인이며, 19세기부터 따지면 3번째이다. 전 총리 올로프 팔메도 1986년 알 수 없는 범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린드는 생전에 스웨덴의 유로화 채택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녀의 암살은 유로화 사용에 대한 국민투표(9월 14일)가 있기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났다. 암살 사건 이후에 유로화 도입 찬반 진영은 찬반 유세 활동을 중지했지만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실시하여 스웨덴 국민은 유로화 채택을 반대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분류:1957년 태어남 분류:2003년 죽음 분류:스웨덴의 외무장관 분류:스웨덴의 암살된 정치인 분류:웁살라 대학교 동문 분류:스톡홀름 출신 |
에드워드 텔러 (, , 1908년 1월 15일 ~ 2003년 9월 9일)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 물리학자이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 헝가리를 떠나 독일에서 고등교육을 받는다. 1930년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괴팅겐에서 2년을 보내고, 1934년에 유대인 구출 위원회(Jewish Rescue Committee)의 도움으로 독일을 탈출한다. 잠시 영국에 머물다가, 닐스 보어가 있던 코펜하겐에서 1년을 지낸다. 1935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41년까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여기서 그는 조지 가모프를 만난다. 1942년 브릭스 위원회(Briggs committee)에서 근무하면서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스 앨러모스 과학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문에 소속되어 핵분열을 이용하는 핵폭탄에서 핵융합을 이용하는 핵폭탄(수소폭탄)으로의 발전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1946년에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 시카고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49년 소련의 핵폭탄 개발 성공 이후 1950년 로스 앨러모스로 돌아와, 수소폭탄 계획에 참여한다. 그와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실제 작동하는 수소폭탄의 설계를 제출하였지만, 그 계획을 지휘하는 장이 되지 못한다. 그는 로스 알라모스를 떠나 1952년 새로 설립된 캘리포니아 대학 방사선 연구소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 지부에 참여하게 된다. 1954년 보안 청문회(security clearance hearings) 때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난하여 사이가 나빠진다. 1958년부터 1960년에 걸쳐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의 소장이 되고, 그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근무한다. 그는 지치지 않는 핵개발론의 옹호자였으며, 지속적인 핵개발을 주장했다. 레이건 정권에서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가 논의되었을 당시, 그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의 한 명이었다. 1975년 퇴직 후 죽을 때까지 레버 모어 연구소의 명예소장이었으며, 또한 후버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003년 9월 캘리포니아 주 스탠포드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Conversations on the Dark Secrets of Physics》 (1991년) 《Better a Shield Than a Sword》 (1987년) 《Pursuit of Simplicity》 (1980년) 《Energy from Heaven and Earth》 (1979년) 분류:1908년 태어남 분류:2003년 죽음 분류:미국의 물리학자 분류:헝가리의 물리학자 분류:미국의 불가지론자 분류:헝가리의 불가지론자 분류:헝가리계 미국인 분류:유대계 미국인 분류:맨해튼 계획 관련자 분류:핵물리학자 분류:이그 노벨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발명가 분류:헝가리의 발명가 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분류: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분류:괴팅겐 대학교 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교수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유대계 헝가리인 분류:헝가리의 장애인 분류:슬로바키아계 미국인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부다페스트 출신 분류: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 동문 |
1979년 퀸의 투어에서 브라이언 메이 (, CBE, 1947년 7월 19일 ~ )는 영국의 음악가이자 천체물리학자이다. 록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로, 독특한 기타 음색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만든 수제 기타 레드 스페셜로 유명하다. 그가 작곡한 히트곡으로는 〈We Will Rock You〉, 〈Tie Your Mother Down〉, 〈Who Wants To Live Forever〉,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등이 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제4대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Liverpool John Moores University) 총장을 지냈다.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연주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그만의 기타 음색은 많은 사람들이 카피를 시도하지만 완벽히 같은 음색을 따라하는 것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는 다양한 종류의 기타를 연주했는데 주로 레드스페셜을 연주한다. 레드스페셜은 그가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와 함께 디자인한 기타로, 18세기에 화로로 썼던 나무로 만들었다. 레드스페셜에 대한 그의 설명을 《Queen In Their Own Words》(믹 마이클 저, 1992)의 62페이지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 큰 넥을 좋아합니다 - 두껍고, 평평한 거요. 핑거보드는 러스틴 플라스틱 코팅으로 칠했고요. 트레몰로는 자전거 안장에 다는 주머니로 만들었는데, 끝부분의 놉은 뜨개질용 바늘로, 스프링은 낡은 오토바이의 벨브 스프링으로 만들었답니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독창성은 메이가 오묘하고 독특한 사운드 효과를 낼 수 있게 도왔다. 예를 들어 〈Procession〉이란 노래에선 오케스트라를 흉내낼 수 있었고, 〈Get Down, Make Love〉에서는 신시사이저로 착각할만한 특이한 사운드 효과를 연출했다. 또한 〈Good Company〉에선 트롬본, 피콜로등을 흉내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수제 기타와 함께 플라스틱 피크 대신에 영국의 6펜스 동전을 사용하는데, 동전이 딱딱하기 때문에 연주하면서 컨트롤하기에 더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메이는 어린 시절에 클리프 리처드와 더 섀도스의 팬이었는데, 이들은 메이가 거칠고 빠른 곡을 즐겨 연주하도록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퀸의 코러스에서 그는 보통 낮은 음의 배킹 보컬을 맡았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노래 중 〈Some Day One Day〉, 〈All Dead〉, 〈Leaving Home Ain t Easy〉, 〈’39〉와 같은 노래에선 직접 보컬을 맡기도 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후, 2개의 솔로 앨범(《Back to the Light》, 《Another World》)을 내기도 했다. 메이는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진학하여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행성간 먼지의 속도에 따른 빛의 반사에 대해 연구하였다. 1970년대 초 퀸 활동이 성공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가, 2007년 10월 황도광에 대한 박사 논문(A Survey of Radial Velocities in the Zodiacal Dust Cloud)을 완성하여 2008년 5월 14일 졸업하였다. 2007년 11월 17일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임되어 2008년 취임하였고, 2013년까지 재임하였다. 메이는 동료 프레디 머큐리, 로저 테일러, 존 디콘과는 달리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마약이나 문란한 여성 관계 등과도 거리가 멀었다. 술은 아주 가끔 마시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기네스, 가장 좋아하는 리큐르는 베일리스다. 그는 꽤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자살을 기도할 정도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고백했었다. 그 당시 그는 아내와 이혼했고,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프레디의 건강 악화로 라이브 투어까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가 애연가였기 때문에 메이는 담배를 싫어하며 특히 실내에서의 흡연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담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종종 글 중에 내비치곤 한다. 메이는 2000년 11월 18일 배우 애니타 돕슨과 재혼했으며, 그에겐 3명의 자녀가 있다. 2005년 12월 6일, 브라이언 메이는 음악 산업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 분류:1947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퀸의 일원 분류:영국의 록 가수 분류:영국의 록 기타 연주자 분류:영국의 하드 록 음악가 분류:영국의 헤비 메탈 음악가 분류:영국의 물리학자 분류:영국의 천문학자 분류:영국의 대학 교수 분류:영국의 저술가 분류: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분류: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동문 분류:런던 출신 음악가 분류:스코틀랜드계 잉글랜드인 분류:잉글랜드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
PDA들. 오른쪽부터 트레오, 클리에, 팜 Vx, 팜 IIIe 팜 ( palm )은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PDA이다. 저렴한 가격, 휴대성과 실용성이 두드러진다. 2010년 4월 28일에 HP는 팜을 US $12,000,000,000에 인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단종 모델 "파일럿 5000"을 비롯한 초기 모델에서는 팜 파일럿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더 이상 팜 파일럿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파일럿()은 1996년 팜 컴퓨팅(, 팜 컴퓨팅은 U.S. 로보틱스의 한 사업부였고 이후 U.S. 로보틱스는 3Com에 합병된다)사에서 생산된 첫 번째 세대의 PDA였다. 출시 당시 파일럿은 간결한 디자인과 수많은 응용 소프트웨어 덕분에 미국 내에서 폭발적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만 년필로 유명한 파일럿 펜사에서 제기한 상표권 침해 소송으로 인해 1997년 두 번째 세대인 팜 파일럿이 탄생하였다. 1998년 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팜과 PDA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파일럿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제프 호킨스와 도나 더빈스키, 그리고 에드 콜리건이었다. 이들은 팜 컴퓨팅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의 원래 목적은 그래피티()라 불리는 필기 인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위한 것이었다. 팜 컴퓨팅이 3Com에 합병되자 설립자들은 팜 제품에 대해 깊게 관여하지 못하게 된 것에 분노했고, 1998년 6월 3Com을 떠나 핸드스프링()사를 설립하게 된다. 호킨스는 팜을 떠날 때 팜 OS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 팜 호환 기종인 핸드스프링 바이저()를 생산하였다. 3Com의 팜 컴퓨팅 사업부는 이후 2000년 팜()사로 분사하였고, 이후 핸드스프링과 합병하였다. 2003년에는 하드웨어를 생산 판매하는 팜원()과 소프트웨어를 라이센스하는 팜소스()로 분할되었다. 2005년에 팜원은 다시 팜으로 개명하였고, 팜소스는 일본의 액세스()사가 인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팜 기기들은 초기 모델에서 점점 진화하였다. 초기 모델은 당시에 인기 있었던 모토로라 드래곤볼 프로세서()를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ARM 아키텍처를 채택한 모델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또한 PC와의 연결도 직렬 RS-232C 케이블에서 USB 케이블로 바뀌어 동기화 속도도 향상되었고 심지어는 PC의 하드 드라이브로 인식되게끔 하는 라이프 드라이브() 모델까지도 생산되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스마트폰으로의 진화도 본격화되어 트레오 600/650() 모델이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650은 휴대폰과 통합되어 스마트폰 형태를 가진 모델로 휴대전화 기능은 물론, 전자우편, SMS 등의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1997년 말 한메소프트가 파일럿 5000을 최초로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세스컴, 코오롱정보통신, 팜잇에서 수입, 판매하였으나 대부분 사업을 철수하였다. 파일럿 5000 1996년 2분기에 발표되었고, 팜 OS가 탑재된 팜 파일럿의 최초 PDA 모델이다. 한메소프트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최초 수입된 모델이 파일럿 5000이었다. 운영 체제 팜 OS 1.0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디스플레이 160 X 160 픽셀 해상도 메모리 128KB(1000)/512KB(5000)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데스크톱 PC 윈도 3.1 또는 윈도 95/ 매킨토시 지원 1997년 1분기에 팜 파일럿 퍼스널과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을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인 파일럿 5000에 백라이트 기능을 추가하고, 메모리 용량을 늘렸다.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의 경우 최초로 TCP/IP 인터넷 통신 프로토콜과 전자우편 연동기능을 지원하였다. 운영 체제 팜 OS 2.0 / 2.0.5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메모리 512KB(퍼스널)/1MB(프로페셔널)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크기 길이 4.7 인치, 폭 3.2 인치, 두께 0.7 인치, 무게 6.0 온스 1998년 1분기에 적외선 통신을 통한 비밍() 기능을 갖춘 팜 파일럿의 3세대 PDA인 팜 III가 발표되었다. 팜 III는 플래시롬()을 탑재한 최초의 모델이었다. 이에 따라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졌다. 운영 체제 팜 OS 3.0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메모리 2MB 무선통신 적외선(IrDa) 통신 지원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출시가격 $399.99 1999년 발표되었다. 직전의 팜 III 모델과의 차이점은 메모리뿐이다. 운영 체제 팜 OS 3.0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메모리 4MB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IrDa) 통신 지원 팜 V모델은 1999년 1분기에, Vx 모델은 같은 해 4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파일럿 모델 중에 가장 뛰어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경우 CEO들이 많이 사용하여 CEO 모델이라고도 불린다. 운영 체제 팜 OS 3.3(V)/3.5(Vx) (Vx의 경우 초기 모델은 3.3)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V)/20MHz(Vx) 메모리 램 2MB(V)/8MB(Vx), 플래시롬 2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4비트 그레이, 백라이트(Backlit) 무선통신 적외선(IrDA) 통신 지원 배터리 리튬이온(Li-Ion) 충전지 3.3V 크기 길이 11.4cm (4.5인치), 폭 7.8cm (3.1인치), 두께 1.0cm (0.4인치), 무게 113g (4온스) 팜 최초의 무선 연결이 가능한 모델이다. 오른쪽 후면에 안테나가 있어 이를 플립식으로 올리면 무선통신이 가능해진다. 무선통신 서비스는 일반 TCP/IP 기반의 서비스가 아닌 웹클리핑()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서비스였다. 미국에서만 이용이 가능했다. 월 $9,99의 표준서비스(50KB 제공)와 $24.99의 확장서비스(150KB 제공)가 있었다. 운영 체제 팜 OS 3.2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 메모리 램 2MB, 플래시롬 2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크기 길이 8.3cm(5.25인치), 폭 13.3cm(3.25인치), 두께 1.9cm(0.75인치), 무게 190g(6.7온스) 출시가격 $599.00 1999년 3분기에 팜 III 시리즈 중 저가 모델로 발표되었다. 플래시롬이 없어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 이후에 발표된 팜 IIIe SE(Special Edition) 모델은 투명 외장으로 되어 있다. 운영 체제 팜 OS 3.1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메모리 램 2MB. 플래시롬 없음.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출시가격 $149 팜 IIIxe 팜 III 모델 시리즈와 메모리용량을 제외하고는 같은 사양을 가졌으며, 2000년 1분기에 발표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3.1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메모리 램 8MB. 플래시롬 없음.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팜 파일럿 최초의 컬러 스크린 모델 팜 IIIc 팜 파일럿 최초의 컬러 디스플레이를 갖춘 모델이다. 2000년 1분기에 출시되었다. 1999년 모토로라는 256컬러를 지원하고 33MHz에서 동작하는 VZ 드래곤볼 프로세서를 발표했지만, 팜 IIIc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운영 체제 팜 OS 3.5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 20MHz 메모리 램 8MB. 플래시롬 2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TFT 256 컬러 디스플레이 배터리 리튬이온 내장 충전지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출시가격 $449.00 팜 VII에 이은 후속모델로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반적으로 사양이 확장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3.3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20MHz 메모리 램 8MB, 플래시 메모리 2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16단계 그레이스케일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크기 길이 8.3cm(5.25인치), 폭 13.3cm(3.25인치), 두께 1.9cm(0.75인치), 무게 190g(6.7온스) 출시가격 $499.00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IIIe를 대체하는 저가 모델로 지금까지의 팜 파일럿 모델과는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스틱 플립커버가 있어 액정 화면을 보호할 수 있었으나 작은 액정 화면은 단점으로 지적되었었다. 아울러 PC와 연결되는 USB 케이블은 제공되었으나 크래들()이라 불리는 거치대는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운영 체제 팜 OS 3.5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 메모리 램 2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크기 길이 11.84cm(4.55인치), 폭 7.92cm(3.12인치), 두께 1.83cm(0.72인치), 무게 124.7g(4.4온스) 출시가격 $149.00 2001년 1분기에 발표되었고, 이전 모델인 팜 m100에 비해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 또한 크래들도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3.5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 메모리 램 8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크기 길이 11.84cm(4.55인치), 폭 7.92cm(3.12인치), 두께 1.83cm(0.72인치), 무게 124.7g(4.4온스) 팜 파일럿의 새로운 고급모델로 2001년 팜 m500과 팜 m505가 나란히 발표되었다. 두 모델의 차이는 디스플레이의 컬러 표시 여부이지만, 팜 파일럿 최초로 SD와 멀티미디어카드(MMC)가 지원되는 확장슬롯이 채택되었다. 전체적으로 팜 파일럿의 흥행 모델이었던 팜 V 시리즈의 뒤를 잇는 외형을 가졌으나 출시 당시 가격이 비싼 편이었고, 디스플레이 화면이 어둡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이 모델부터 팜의 새로운 PC 연결방식인 범용커넥터()가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해 2001년 코오롱정보통신이 팜 m500과 m505를 정식으로 수입판매했었다. 한글 입출력을 위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한팁() 3.1이 제공되었다. 한국 출시가는 m500이 56만원, m505가 66만원, 저가 모델로 m105가 25만원이었다. 운영 체제 팜 OS 4.0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메모리 램 8 MB. 플래시 메모리 4MB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m500)/65,000+ 컬러 스크린(m505)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어댑터 입력 120VAC 60Hz 11W, 출력 5.0VDC 1.0A 크기(m500) 길이 11.41cm(4.49인치), 폭 7.67cm(3.02인치), 두께 1.17cm(0.46인치), 무게 118g(4.162온스) 크기(m505) 길이 11.38cm(4.48인치), 폭 7.70cm(3.03인치), 두께 1.27cm(0.50인치), 무게 136g(4.8온스) 출시가격 $399.00(m500)/$449.00(m505) 2001년 1분기에 에 발표되었다.이전 모델인 팜 m100/m105와 같은 외형을 가졌으나 확장슬롯과 함께 USB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운영 체제 팜 OS 4.0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메모리 램 8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확장슬롯 1개의 SD/MMC 슬롯 배터리 AAA 건전지 2개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크기 길이 4.82인치, 폭 3.1인치, 두께 0.872인치, 무게 5.31온스 출시가격 $249.00 팜 m130 2002년 1분기 출시되었으며, m125와 같은 외형을 가졌지만, 컬러 스크린을 지원했다. 컬러를 지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던 모델이었다. 운영 체제 팜 OS 4.1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메모리 램 8MB, 롬 8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확장슬롯 1개의 SD/MMC 슬롯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머 충전지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크기 길이 11.38cm(4.8인치), 폭 7.70cm(3.1인치), 두께 1.27cm(0.9인치), 무게 157g(5.4온스) 출시가격 $279.00 어댑터 입력 120VAC 60Hz 11W, 출력 5.0VDC 1.0A 2002년 1분기에 팜 VII의 후속 모델로 발표되었다. 무선데이터 통신은 북미지역에서만 서비스가 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4.1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메모리 램 8MB, 플래시롬 4MB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흑백 LCD, 백라이트 확장슬롯 1개의 SD/MMC 슬롯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크기 길이 4.65인치, 폭 3.06인치, 두께 0.61인치, 무게 5.9온스 출시가격 $449.00 일종의 팜 m505 개선모델로 2002년 발표되었다. 가장 큰 개선점은 디스플레이가 더 밝아지고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운영 체제 팜 OS 4.1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메모리 램 16 MB. 플래시롬 4MB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어댑터 입력 120VAC 60Hz 11W, 출력 5.0VDC 1.0A 크기 길이 11.38cm(4.48인치), 폭 7.70cm(3.03인치), 두께 1.27cm(0.50인치), 무게 136g(4.8온스) 출시가격 $399.00 팜의 새로운 저가 모델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외형을 가졌다.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이전 저가 모델인 m100이나 팜 IIIe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다. 확장슬롯의 부재와 백라이트가 없음에도 과거 "단순한 팜(Simply Palm)"을 잘 지킨 모델이었다. 운영 체제 팜 OS 4.1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 16MHz 메모리 램 2MB. 마스크롬 2MB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3.7V, 600mAh) 크기 길이 4.4인치, 폭 2.9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3.8온스 출시가격 $99.00 팜 최초로 슬라이드 방식과 팜 OS 5.0 버전을 채택한 모델이다. 텅스텐 T에서 T는 텅스텐()을 의미하며,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320 X 320의 높은 고해상도와 블루투스를 지원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양으로 출시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5.0 프로세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OMAP1510 (ARM925 코어(144MHz) + C55x DSP (200MHz)) 메모리 램 16MB. 플래시롬 4MB(US), 8MB(Int l)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오디오 스피커, 스테레도 헤드셋 잭, 모노 마이크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PC 연결 USB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900mAh) 크기 길이 4.0인치(최대 4.8인치), 폭 3.0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5.6온스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텅스텐 T와 함께 출시되었다. 모델명에서 W가 무선()의 의미하듯이 이동전화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음성통화와 문자 서비스 기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음성 통화는 헤드셋을 이용해야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동전화 서비스는 AT&T Wireless를 통해 제공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4.1.1 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메모리 램 16MB. 플래시롬 8MB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오디오 스피커, 스테레오 헤드셋 잭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GSM/GPRS 음성/데이터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PC 연결 USB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500mAh) 크기 길이 4.8인치, 폭 3.07인치, 두께 0.65인치, 무게 6.4온스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팜의 보급형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으나 블루투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운영 체제 팜 OS 5.2.1 프로세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OMAP310(ARM) 144MHz 메모리 램 16MB (13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셋 잭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PC 연결 USB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900mAh) 디지털 카메라 640 x 480 해상도(0.3메가픽셀) 크기 길이 4.5인치, 폭 2.9인치, 두께 0.67인치, 무게 5.3온스 어댑터 AC 어댑터 120VAC, 60Hz 출시가격 $299.00 팜 최초로 무선랜(Wi-Fi)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팜 최초로 인텔 CPU가 사용된 모델이기도 하다. 큰 배터리 용량과 메모리 용량, 그리고 미려한 화면이 장점이나 2.5mm 모노 헤드셋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5.2.1 프로세서 인텔 PXA255 XScale 400MHz 메모리 램 64MB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TFT 컬러 스크린 오디오 모노 스피커, 2.5mm 모노 헤드셋 잭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IEEE 802.11b 무선랜(Wi-Fi)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PC 연결 USB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500mAh) 크기 길이 4.8인치, 폭 3.07인치, 두께 0.65인치, 무게 6.3온스 어댑터 AC 어댑터 120VAC, 60Hz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출시가격 $499.00 텅스텐 T를 잇는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체적으로 텅스텐 T와 사양이 유사하나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고, 화질이 개선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5.2.1 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1510 (ARM925 코어(144MHz) + C55x DSP (200MHz)) 메모리 램 32MB, 플래시롬 8MB(US)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TFT 컬러 스크린 오디오 내장 마이크,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PC 연결 USB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900mAh) 크기 길이 4.0(4.8인치)인치, 폭 3.0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5.6온스 어댑터 AC 어댑터 120VAC, 60Hz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휴대전화 기능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핸드스프링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같은 해 10월 핸드스프링과 팜의 합병으로 팜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팜원에서 계속 판매되었다. 휴대전화 기능과 PDA가 합쳐진 PDA폰은 이전 모델에서도 종종 출시되었으나 이 모델만큼 시장에서 성공한 모델은 없었다. 팜 파일럿 계열의 PDA를 다시 중흥시킨 모델이다. 트레오 600 모델도 휴대전화 표준에 따라 세분되어 있는데, 싱귤라 와이어리스(), T-모바일() 등은 GSM/GPRS 모델을 지원하고, 스프린트()에서 CDMA 모델을 지원한다. 운영 체제 팜 OS 5.2.1H 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1510 (ARM925 코어(144MHz) + C55x DSP (200MHz)) 메모리 램 32MB (2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CSTN 컬러 스크린 오디오 폰 스피커/마이크,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MIDI 전화 벨소리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GSM/GPRS 음성/데이터 또는 CDMA 음성/데이터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PC 연결 USB 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3.7V, 900mAh) 크기 길이 11.2cm, 폭 6.0cm, 두께 2.2cm, 무게 168g(GSM)/175g(CDMA) 어댑터 AC 어댑터 120VAC, 60Hz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디지털 카메라 640 x 480 해상도 (0.3 메가픽셀) 출시가격 $700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되었으며 팜 OS 5를 채택한 새로운 저가 자이어 모델이다. 자이어 21, T3, TE는 모두 10월 1일에 출시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5.2.1 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311 ARM (126MHz) 메모리 램 8MB (7.2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오디오 내장 마이크, 모노 스피커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PC 연결 미니 USB 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크기 길이 4.4인치, 폭 2.9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3.8온스 어댑터 AC 어댑터 120VAC, 60Hz 키패드 2개의 하드버튼, 상하 스크롤 버튼 출시가격 $99 텅스텐 T2 이후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된, 가상 그래피티와 320X480 해상도의 LCD를 채택한 고급 모델이다. 화면 회전기능인 가로보기와 세로보기가 지원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5.2.1 프로세서 400MHz 인텔 XScale 메모리 64MB (52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320X320(슬라이드를 닫았을 때), 320X480(슬라이드를 열었을 때)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900mAh) 오디오 내장 마이크,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크기 길이 4.3 인치(닫았을 때)/5.2인치(열었을 때), 폭 3.0 인치, 두께 0.66 인치, 무게 5.5 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2003년 10월 1일 자이어 71, T3와 함께 발표되었다. 저렴한 가격임도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와 단순한 외형으로 인해 많은 인기를 모았다. 운영 체제 팜 OS 5.2.1 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311 ARM (126MHz) 메모리 32MB (28.6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840mAh)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PC 연결 USB 크기 길이 4.5 인치, 폭 3.1 인치, 두께 0.5 인치, 무게 4.6 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출시가격 $199.00 팜 자이어 31 2004년 4월 28일에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이었던 자이어와 자이어 21에 비해 SD/MMC 확장 슬롯을 지원하고 160X160 해상도이지만, 컬러 스크린을 장착하였다. 이전 모델과는 달리 인텔계열의 CPU를 사용하였다. 운영 체제 팜 OS 5.2.8 프로세서 200MHz 인텔 ARM CPU 메모리 16MB (1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STN 컬러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900mAh)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PC 연결 미니 USB 크기 길이 11.17cm(4.4 인치), 폭 7.36cm(2.9 인치), 두께 1.52cm(0.6 인치), 무게 116.23g(4.1 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출시가격 $149.00 2004년 2분기에 출시되었다. 자이어 71의 개선 모델로 여러 부분에서 사양이 늘어났으며, 블루투스 기능이 내장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5.2.8 프로세서 312MHz 인텔 PXA270 ARM CPU 메모리 32MB (2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950mAh)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PC 연결 미니 USB 디지털 카메라 1280 x 920 해상도(1.2메가픽셀), 2배 디지털 줌, 동영상 기능(320 x 240 해상도) 크기 길이 11.6cm(4.6 인치), 폭 7.5cm(2.95 인치), 두께 1.7cm(0.67 인치), 무게 136g(4.8 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출시가격 $299.00 텅스텐 T3의 후속 모델로 2004년 10월 4일 출시되었다. 외형은 텅스텐 E와 유사하지만, 기존 모델들과의 큰 차이는 160MB의 플래시램()을 가지고 있어 데스크톱 PC와 연결되었을 때 USB 드라이브로서 동작한다는 것이다.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 프로세서 416MHz 인텔 XScale 메모리 256MB (215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플래시램 160MB 디스플레이 320X480 해상도. 65,000 컬러의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300mAh)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PC 연결 USB 크기 길이 4.76 인치, 폭 3.08 인치, 두께 0.61 인치, 무게 5.1 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출시가격 $399.00 트레오 600의 뒤를 이은 모델로 2004년 10월 25일에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보다 향상된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용량,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큰 인기를 끌었던 모델이었다. 휴대전화 서비스는 CDMA의 경우 스프린트()에서, GSM의 경우 싱귤라 와이어리스()와 AT&T Wireless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5 프로세서 312MHz 인텔 PXA270 ARM CPU 메모리 램 32MB (2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컬러 TFT 컬러 스크린 오디오 폰 스피커/마이크, 2.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MIDI 전화벨소리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GSM/GPRS 음성/데이터 또는 CDMA 음성/데이터 확장 슬롯 1개의 SD/MMC 슬롯 PC 연결 USB 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 (1800mAh) 크기 길이 11.3cm, 폭 5.9cm, 두께 2.3cm, 무게 178g 어댑터 AC 어댑터 120VAC, 60Hz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디지털 카메라 640 x 480 해상도 (0.3 메가픽셀), 2배 디지털 줌, 반사경, 비디오 녹화기능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텅스텐 E의 후속모델로 블루투스와 비휘발성 메모리가 추가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 프로세서 200MHz 인텔 XScale CPU 메모리 32MB (26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PC 연결 USB 크기 길이 4.5 인치, 폭 3.1 인치, 두께 0.59 인치, 무게 4.7 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출시가격 $199 내장된 팜 라이프드라이브 팜 모델 최초로 소형 하드디스크인 4GB 마이크로드라이브가 내장된 모델이다.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으며, 블루투스와 무선랜이 내장된 최상급 모델이다. 정식 명칭은 팜 라이프드라이브 모바일 매니저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연결하여 USB 드라이브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사양의 모델이나, 기존의 팜 모델에 비해 동작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8 메모리 32MB 램, 4GB 마이크로드라이브(3.85G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프로세서 416 MHz 인텔 XScale ARM CPU 디스플레이 320X48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지원, IEEE 802.11b 무선랜(Wi-Fi) 오디오 스피커, 표준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660mAh) PC 연결 USB 2.0 크기 길이 121mm (4.76인치), 폭 73mm (2.87인치), 두께 19mm (0.74인치), 무게 190g (6.8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어댑터(US) AC 어댑터 108~132VAC, 60Hz 어댑터(Int l) AC 어댑터 100~240VAC, 50~60Hz 출시가격 $499 $100 미만의 가격이 책정된 PDA 초보자를 위한 저가 모델이다. 자이어와는 다른 제품 라인이다. 고급 모델인 팜 TX와 함께 2005년 4분기에 출시되었다.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 메모리 32MB 램(20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프로세서 200MHz ARM CPU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백라이트, STN 컬러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오디오 스피커 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900mAh) PC 연결 미니 USB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2개의 하드웨어 버튼 크기 길이 10.31cm(4.06인치), 폭 6.86cm(2.7인치), 두께 1.52cm (0.6인치), 무게 96.4g (3.4온스) 데스크톱 PC 윈도 98/NT/2000/Me/XP, 맥 OS 9.1 또는 맥 OS X 10.1.2, 10.2.6 어댑터(US) AC 어댑터 108~132VAC, 60Hz 출시가격 $99 2005년 4분기에 출시된 고급 모델이다.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9 메모리 128MB (100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프로세서 312 MHz 인텔 프로세서 디스플레이 320X48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블루투스 1.1 지원, IEEE 802.11b 무선랜(Wi-Fi) 지원, 적외선(IrDa) 통신 오디오 스피커, 표준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1250mAh) 크기 길이 12.09cm, 폭 7.82cm, 두께 1.55cm, 무게 148.83g 데스크톱 PC 윈도 2000/XP, 맥 OS X 10.2.8 ~ 10.4 출시가격 $299.00 700w는 팜 파일럿 최초로 팜 OS가 아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모바일 운영 체제인 윈도 모바일 5.0을 탑재한 PDA 폰이다. 700w의 후속모델로 700wx가 출시되었으며, 이 모델은 700w와 비교해 사용자 가용 메모리가 두 배로 증가되었고 외관색이 짙은 회색점만 다르다. 700v는 보다폰용으로 유럽에서 출시된 모델명이다. 운영 체제 윈도 모바일 5.0 메모리 128MB 플래시 롬 (62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프로세서 312 MHz 인텔 XScale PXA 272 ARM CPU 디스플레이 2.5인치 240X24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블루투스 1.2 지원, 적외선(IrDa) 통신, CDMA 1xRTT와 EVDO 오디오 스피커, 표준 2.5밀리미터 스테레오 헤드폰잭, 음성녹음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1800mAh) 크기 길이 4,4인치, 폭 2.3인치, 두께 0.9인치, 무게 180그램 데스크톱 PC 윈도 2000/윈도 XP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디지털 카메라 1.3 메가픽셀 출시가격 $499.00 트레오 650의 뒤를 이은 모델이다. 전체적인 외형은 트레오 700w로 거의 같다. 운영 체제 팜 OS 5.4.9 메모리 128MB 플래시 롬 (60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프로세서 312 MHz 인텔 엑스스케일 PXA 272 ARM CPU 디스플레이 2.5인치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블루투스 1.2 지원, 적외선(IrDa) 통신, CDMA2000 1xRTT와 EVDO 오디오 스피커, 표준 2.5밀리미터 스테레오 핸드프리 헤드셋잭, 음성녹음, MIDI, MP3, WAV 벨보리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1,800mAh) 크기 길이 129밀리미터, 폭 58밀리미터인치, 두께 58밀리미터, 무게 180그램 데스크톱 PC 윈도 2000/XP, 맥 OS X 10.2.4 ~ 10.4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디지털 카메라 1.3 메가픽셀 1280x1024 해상도, 352X288 해상도의 비디오 캡처기능 2007년 1월 발표된 팜 트레오 700w/wx의 후속 모델로 윈도 모바일을 장착했다. 프로세서 300 MHz 삼성 프로세서 운영 체제 윈도 모바일 5.1 포켓피씨 폰 에디션 디스플레이 LCD 240X240 해상도 메모리 128 MB 플래시 메모리 (60 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크기 길이 111밀리미터 x 폭 58밀리미터 x 두께 22밀리미터, 무게 154그램 확장 슬롯 미니 SD 무선통신 쿼드밴드 GSM/EDGE, 트라이밴드 UMTS; 블루투스 1.2 오디오 2.5밀리미터 스테레오 헤드셋잭, 스피커폰 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1,200mAh) 키패드 QWERTY 키보드, 5방향 키패드 디지털 카메라 1.3메가픽셀 해상도 팜 파일럿의 핵심을 이루는 팜 OS는 2바이트 문자코드체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한글을 입력하거나 출력하기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대한민국의 수입사들을 중심으로 팜 OS용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번들 형태로 판매되었고, KPUG에서 필명 오마르 로 활동하는 개인 개발자에 의해 KOSPI라는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까지 개발되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한메한글 포 팜파일럿 세스한 한팁 디오펜 포 팜 OS KOSPI (프로그램) 팜 위키 한국 TREO 세상 팜 파일럿 홈페이지 분류:PDA |
이 예는 그림의 일부를 크게 확대했을 때의 장면이다. 여기서 각 화소가 사각형으로 되어 있음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화소 (畵素) 또는 픽셀 (; picture element에서 유래)은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표준 디스플레이 해상도는 크게 다음과 같다. 이름 해상도(메가픽셀) 가로 x 세로 CGA 0.064 320×200 EGA 0.224 640×350 VGA 0.3 640×480 SVGA 0.5 800×600 XGA 0.8 1024×768 SXGA 1.3 1280×1024 UXGA 1.9 1600×1200 메가픽셀 (줄여서 MP, Mpx)은 100만 화소를 가리키며 영상의 화소 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요소의 수나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디스플레이 요소의 수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2048x1536 센서 요소는 3.1 메가픽셀 (2048 x 1536 = 3,145,728)를 가진다는 말과 같다. 많은 디스플레이와 영상 획득 시스템들은 여러 이유로, 다른 색의 채널들을 하나의 소재에서 보여 주거나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화소 그리드는 표시되는 단일의 색 영역이나, 일정한 거리에서 보이는 느낄 수 있는 색으로 나뉘게 된다. 컴퓨터 화면에서는 화소 단위보다 세세하게 표현할 수 없다. 벡터가 아닌 비트맵 방식의 사진이나 그림을 확대하면 거칠게 각져서 두드러진 화소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줄이기 위해, 화소의 모서리를 주변의 색과 비슷하게 바꾸어 색을 매끄럽게 바꾸는 것을 앤티에일리어싱(anti-aliasing)이라고 한다. 앤티에일리어싱 클리어타입 불량 화소 픽셀 아트 A Pixel Is Not A Little Square Microsoft Memo by computer graphics pioneer Alvy Ray Smith. Square and non-Square Pixels Technical info on pixel aspect ratios of modern video standards (480i,576i,1080i,720p), plus software implications. 120 Megapixel is here now A lot of information about MegaPixel and Gigapixel. 분류:컴퓨터 그래픽스 |
대마젤란 은하의 별 생성영역. Nebula.jpg|섬네일|초신성 잔해의 하나인 게 성운 천문학 (天文學은 별이나 행성, 혜성, 은하와 같은 천체와, 지구 대기의 바깥쪽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예를 들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우주의 시작 및 진화, 천체의 운동, 물리, 화학, 기상, 진화 등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선사시대의 여러 문명들은 피라미드, 스톤헨지 같은 천문학적 유물들을 남겼으며, 바빌론, 그리스, 중국, 인도, 이란, 마야문명 같은 동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밤하늘에 관한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망원경이 발명됨으로써 천문학은 현대 과학으로 발전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천문학은 측성학, 역법, 천체 항법, 그리고 심지어 점성술까지 수많은 분야들을 포함했었는데, 현대의 천문학은 보통 천체물리학 (astrophysics)을 의미한다. 20세기에 들어와 천문학 분야는 관측 분야와 이론 분야로 크게 나뉘었다. 관측 천문학은, 천체에 대한 자료를 얻고, 이를 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두며, 이론 천문학은 천체와 천문학적 현상들을 컴퓨터나 해석적인(analytical) 방법으로 설명하는 모형을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이 두 분야는 상호 보완적이며, 이론 천문학은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하고, 관측 천문학은 이론 결과를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한다. 천문학은 여러 자연과학 분야 중 아마추어들의 공헌이 아직도 큰 분야 중의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특히 혜성·소행성·초신성 같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현상()들을 발견하고 관측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천문학()은 점성술()과 혼동되어서 안된다. 비록 점성술은 천문학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현재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다. 점성술은 천체들의 하늘에서의 위치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체계로서, 자연과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천문학의 영어 낱말 astronomy 은 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stron ( ἄστρον )과 법칙, 문화를 뜻하는 nomos ( νόμος )에서 유래했는데, 문자 그대로 "별의 법칙"(또는 별의 문화)를 의미한다. 천문학은 점성술학(인간의 사건이 천체의 위치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두 분야가 공통된 근원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완전히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엄밀한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천문학은 "지구 대기 밖의 물체들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천체물리학은 "천문학의 한 분야로서 천체 및 천문현상의 물리적, 운동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학 개론서인 "물리적인 우주( The Physical Universe )"에서처럼 "천문학"은 우주·천체·천문현상을 정성적으로 기술하는 분야를, "천체물리학"은 이러한 대상을 보다 물리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는 분야을 의미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측성학 같이 전통적인 천문학에 가까운 분야도 있는 반면, 대부분의 현대 천문학 연구는 물리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므로, 천문학은 실제로는 천체 물리학으로 불릴 수 있다. 여러 대학이나 연구소는 주로 역사적인 이유나, 구성원들의 가지고 있는 학위 등에 따라서 종종 천문학과나 천체물리학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들어 천문학과가 역사적으로 물리학과와 같이 붙어 있었다면, 주로 천체물리학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 저명한 천문학 저널로는 유럽의 천문학과 천체물리학(Astronomy and Astrophysics)과 미국의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 저널(The Astrophysical Journal), 천문학 저널(The Astronomical Journal)이 있다. cœleste.jpg|섬네일|17세기 네덜란드 지도제작가 프레데리크 더빗이 만든 성도 그리스의 해시계.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기원2-3세기)에서 발견됨.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동·서양의 양쪽에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사와 날씨 예견 그리고 해양, 지리 관측과 측량이 그 주요 동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스톤헨지처럼 천문학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이 건설되기도 했다. 제사 같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이러한 천문대들은 1년의 길이를 재거나, 매해 일정한 시기에 농사를 짓고, 수확하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는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천문관측은 높은 건물 같은 곳에서 맨 눈으로 이루어졌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특히 메소포타미아, 중국, 이집트, 그리스, 인도, 마야 문명 등에서 천문대가 만들어졌고, 우주의 본질에 탐구가 시작되었다. 초기 천문학은 오늘날에는 측성학으로 알려진, 하늘에서 별과 행성들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관측으로부터, 행성의 운동, 태양, 달, 지구의 본질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를 지구중심설, 천동설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바빌론에서 수학·과학적 천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월식이 사로스라는 주기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이 후 다른 문명에서 발달할 천문학적 전통의 기반을 닦았다. 바빌론 이후의 천문학에서의 중요한 발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천문학은 천문 현상에 대해 이성적이고 물리적인 답을 구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는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지구의 크기를 계산하였고, 달과 태양까지의 상대적 거리를 측정하였다. 한편 그는 처음으로 지동설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세기에는 히파르쿠스가 세차를 발견하였고 달의 크기와 거리를 계산하였으며, 어스트로랩(astrolabe)이라고 불리는 천문기구를 발명하였다. 히파르쿠스는 또한 방대한 1020개 별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북반구의 대부분의 별자리는 이러한 그리스 천문학에서 유래했다. 반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하였고, 당시의 천문학을 집대성한〈알마게스트〉를 남겼다. 천동설은 기독교의 교리에 더 부합하였으므로, 중세에 들어서는 이 책은 천문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졌고,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천동설이 널리 믿어지게 된다.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천문학도 중세 유럽에서는 13세기까지 거의 정체 되었지만, 이슬람과 다른 지역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약 9세기 초에는 이슬람 지역의 최초의 천문대가 등장했다. 964년에는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 수피(Azophi)가 안드로메다 은하를 발견하고, "Book of Fixed Stars"라는 책에서 이에 대해 서술하였다. 역사상 기록된 가장 밝은 초신성인 SN 1006가 이집트 출신 아랍 천문학자인 Ali ibn Ridwan과 중국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1006년에 관측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천문학에 많은 공헌을 한 유명한 천문학자로는 Al-Battani, Thebit, Azophi, Albumasar, 알비루니, Arzachel, Al-Birjandi등과 Maragheh, Samarkand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이 있다. 이 당시의 아랍 천문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많은 항성이름들(예를들어, 베가, 알골)을 도입하였다. 또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팀북투의 유적들도 과거에 천문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도 식민지 시대 이전에 천문학 관측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moon phases.jpg|섬네일|right|upright|갈릴레오가 그린 달 표면의 울퉁불퉁한 모습. 17세기를 전후하여 발명된 망원경으로 천문학은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발전된 역학, 전자기학 및 상대성 이론과 같은 현대 물리학의 업적은 천문학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우주 공간에서 우주를 관찰·탐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르네상스 기간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안했으며, 이는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좀 더 확장되고 발전되었다. 갈릴레이는 처음으로 천문학에 망원경을 도입하였다. 케플러는 마침내 행성들이 태양을 초점에 놓는 타원궤도를 공전하는 정확한 태양계 모형을 고안해 냈지만,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는 마침내 뉴턴이 천체역학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뉴턴은 또한 새로운 방식의 반사 망원경을 고안하기도 했다. 망원경의 크기과 성능이 향상되면서 많은 천문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천문학자 라카유에 의해 방대한 별의 목록이 만들어졌으며, 허셜은 방대한 성운·성단목록을 제작했고, 1781년에는 처음으로 새로운 행성인 천왕성을 발견하게 된다. 1838년에는 베셀이 백조자리 61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함으로써 처음으로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다. 18-19세기 중에는 오일러, 클레로, 달랑베르등이 삼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써 달과 태양의 위치를 보다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이러한 노력을 더욱 발전시켜서, 달과 행성의 섭동으로부터 질량을 추정하기도 했다. 분광학과 사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천문학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프라운호퍼는 1814–15년에 태양의 스펙트럼에서 약 600여개의 어두운 띠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1859년에 키르히호프에 의해 각기 다른 원소들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다. 분광학을 다른 별들에 적용함으로써, 별들이 태양과 같은 천체이며, 다만 온도, 질량, 크기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정립되었다. 20세기에 들어 하늘에 보이는 은하수가 별들의 집합인 우리은하라는 사실이 확립되었고, 이어서 우리은하 밖의 외부 은하, 그리고 우주의 팽창이 발견되었다. 현대 천문학은 또한 펄서, 퀘이사, 블레이져, 전파은하 같이 특이한 천체들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관측들은 이를 중성자별·블랙홀로 설명하는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허블의 법칙, 우주의 원소 함량 등의 관측이 지지하는 대폭발 이론의 등장으로, 물리적 우주론은 20세기 들어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주 망원경의 발전으로 지구 대기에 흡수되어서 그동안 관측 할 수 없었던 전자기파의 영역을 통한 관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천문학에서의 모든 정보는 주로 천체로부터의 가시광 영역의 빛, 또는 일반적으로 다른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감지하고 분석함으로써 얻어진다. 관측천문학은 전자기파의 파장대별로 나눌 수 있다. 지상에서 관측이 가능한 파장대의 빛도 있지만 어떤 영역대는 높은 고도의 지역에서나 또는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일종인 거대전파간섭계(VLA) 전파천문학은 약 1mm보다 긴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전파천문학은 관측천문학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관측된 전파를 개개의 광자로 다루기보다는 파동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짧은 파장 영역의 전자기파와 달리, 전파의 세기(amplitude)뿐만아나라 위상(phase)을 측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어떤 전파는 열적 발산의 형태로 천체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관측 가능한 대부분의 전파는 싱크로트론 복사의 형태이다. (싱크로트론 복사는 전자가 자기장 주변에서 진동할 때 생성된다. 적외선천문학은 적외선 영역대(가시광의 붉은색 빛보다 파장이 긴 대역)의 빛을 감지하고 분석하는 분야이다. 근적외선(1-3μm)을 제외하고는, 적외선 영역의 빛은 대기에 의해 대부분 흡수되고, 지구대기 또한 많은 양의 적외선을 내뿜는다. 그 결과, 적외선 관측은 높은 고도의 건조한 곳에 위치한 천문대, 또는 우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적외선을 이용하면 행성이나 원시 행성 원반같이 온도가 매우 낮아서 가시광선을 거의 내지 않는 천체들을 관측할 수 있다. 파장이 긴 적외선은 가시광선을 쉽게 가로막는 성간먼지를 투과할 수 있으므로 우리은하의 중심부와 분자구름 깊은 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젊은 별들을 연구하는데 유용하다. 어떤 분자들은 적외선에서 특히 강한 방출선을 내는데, 이를 이용하여 성간물질의 화학을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적외선 분광학으로 혜성에 존재하는 물분자를 검출하기도 한다. Keck Subaru and Infrared obervatories.JPG|섬네일| 마우나케아 천문대의 스바루 망원경(왼쪽), 켁 망원경(가운데 2개) 가시광선과 근적외선 관측에 쓰인다.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사 적외선 망원경(NASA IRTF)은 근적외선 관측에만 쓰인다. 광학천문학(가시광선 천문학)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천문학 분야이다. 오랫동안 광학 영상은 손으로 그려져 기록되었으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는 사진이나 건판을 주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디지털 검출기, 특히 CCD 카메라(빛을 전하로 변화시켜 이미지를 얻어내는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 가시광영역은 400 나노미터에서 700 나노미터로, 근자외선(400나노미터에 가까운 자외선 영역)과 근적외선(1μm에 가까운 적외선영역)의 관측에도 같은 기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10 나노미터 에서 320 나노미터 영역대의 자외선 파장을 관측하는 천문학이다. 이 파장대의 빛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천문대는 지구대기층이 얇은 높은 고도, 또는 우주에 세워져야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뜨겁고 파란 별들로부터 나오는 열복사와 방출선들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분야이다. 우리은하 밖의 다른 은하에 위치한 푸른 별들은 몇몇 자외선관측의 주요 관측대상이 되어 왔다. 자외선영역의 또다른 관측대상으로는 행성상 성운, 초신성 잔해,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그러나, 자외선은 성간 먼지에 의해 쉽게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 관측은 소광(extinction)을 정확히 보정해 주어야 한다. X-선 천문학은 엑스선 파장대의 빛을 내는 천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전형적으로 X-선은 매우 뜨거운 천체들로부터 싱크로트론 복사, 제동복사(), 그리고 흑체복사()의 형태로 방출된다. X-선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높은 고도로 띄우는 풍선, 로켓, 비행선을 이용하거나 우주망원경 형태로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X-선 천체로는 엑스선 이중성, 펄서, 초신성 잔해, 타원은하, 은하단,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감마선 천문학은 가장 짧은 전자기 파장대의 천체를 연구하는 천문학 분야이다. 감마선은 콤프턴 감마선 천문대(Compton Gamma Ray Observatory)와 같이 인공위성에 의해, 또는 대기 체렌코프 망원경(atmospheric Cherenkov telescopes)이라 불리는 특화된 망원경을 사용하여 관측된다. 체렌코프 망원경은 감마선을 직접적으로 검출하진 않지만, 감마선이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었을 때 생성되는 가시광 영역의 반짝임(체렌코프 복사)을 감지한다. 대부분의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는 감마선 폭발이다. 감마선 폭발은 짧은 시간 동안 강한 감마선을 방출하고 금방 어두워지는 천체이다. 그 외에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로는 펄서, 중성자별, 활동은하핵이 있다. 전자기파(빛)이외에도 중성미자, 중력파등을 이용하여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또한 탐사선을 이용하여 달이나 혜성같은 지구밖의 천체에서 직접 시료를 채취하기도 한다. 뉴트리노는 주로 태양 내부나 초신성 폭발에서 만들어지며,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Cosmic ray)이 차례로 붕괴하거나 대기의 입자와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는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으므로, 지하시설에 위치한 커다란 용기에 많은 양의 물과 얼음을 채워 놓고 이들이 뉴트리노와 아주 가끔 반응할 때 나오는 미세한 빛을 검출하는 방식으로 관측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 검출기로는 SAGE, GALLEX, Kamioka II/III같은 특별한 지하 시설이 있다. 중력파 천문학은 새롭게 발생한 천문학의 분야로서, 블랙홀, 중성자별등으로 구성된 쌍성들이 내는 것 같은 중력파를 검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까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IGO) 같은 관측소가 만들어졌고, 2016년 중력파 검출에 성공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행성과학자들은 직접적인 관측을 위해, 우주탐사선을 행성에 보내거나 시료를 채취해서 돌아오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탐사선이 행성을 지나쳐 가면서 사진을 찍거나, 행성표면에 직접 착륙해서 실험을 수행하기도 하고, 표면에 탐사선을 충돌시키고 이 때 발생하는 물질들을 원거리에서 관측하기도 한다. 측성학()는 천문학뿐아니라 자연과학에서 가장 오래된 분야중의 하나로써,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학문분야이다. 역사적으로 해, 달, 행성, 별들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항해나 달력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측성학은 행성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중력의 섭동에 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이는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천체역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지구근접천체를 추적함으로써 이러한 혜성이나 소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비껴가는 위험한 경우를 예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까운 별들의 연주시차를 측정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것은 우주의 크기를 가까운 곳 부터 먼 곳까지 차근차근 정립해나가는 소위 우주 거리 사다리를 구성하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다. 또한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재는 일은 별의 절대 광도같은 물리량을 정확히 잴 수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별들의 시선속도를 재는 것과 함께 고유운동을 재면 별들의 3차원적인 운동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은하 내의 천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연구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는 별의 궤도가 예상과는 달리 약간 흔들거리는 현상()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이러한 별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외계행성을 찾는 방법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론 천문학자들은 천체나 천문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적인 모형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 모형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각각 장점이 있다. 해석적인 모형은—다시말해 어떤 문제를 수식으로 서술하는 방법—어떤 현상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며, 수치적인 모형은 매우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기본 물리 법칙으로부터 계산해 냄으로써 어떤 현상이 존재할 수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론 천문학자들은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연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관측자들은 여러 이론들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려줄 관측 자료들을 모으거나 실험을 계획하게 된다. 새로운 관측 자료가 얻어지면, 이론 천문학자들은 이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 꾸준히 모형을 바꾸고 발전 시킨다. 만약 자신의 이론이 새롭게 얻어진 관측 자료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관측 결과를 맞출 수 있게 모형을 약간 수정할 수 있지만, 만약 이론이 아주 많은 관측 자료와 모순된다면, 그 모형은 폐기되기도 한다. 이론 천문학의 주제로는 천체 역학, 별의 진화, 은하의 형성과 진화, 우주의 거대 구조(Large-scale structure), 우주선의 기원, 일반 상대론, 물리우주론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 천문학은 다양한 물리법칙·이론들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상대론은 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주 거대 구조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며, 중력파와 블랙홀등을 연구하는 데 바탕이 된다. 현대 이론 천문학은 급팽창 이론, 암흑 물질, 그리고 기본적인 물리법칙들을 바탕으로 하여 ΛCDM 모형을 정립하였고, 이는 현재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현대 천문학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주제이다. 다음은 이론 천문학에서 어떤 물리 법칙을 바탕으로, 어떤 실험.관측 결과에 기반하여, 이론적인 모형을 만들고, 이로써 어떠한 현상을 설명 또는 예측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물리 현상 실험·관측 이론적인 모형 설명·예측 중력 전파망원경 자체 중력에 묶인 계 항성계 핵융합 분광학 별의 진화 별의 에너지원과 중원소들의 형성 대폭발 허블 우주 망원경, COBE 우주의 팽창 우주의 나이 양자 요동 우주의 급팽창 우주의 평탄 문제(Flatness problem) 중력붕괴 X-선 천문학 일반 상대론 은하 중심의 블랙홀 별의 CNO 반응 무거운 별의 에너지원 trace big.jpg|left|섬네일|TRACE 우주 망원경이 태양의 광구를 자외선에서 촬영한 것. 미국 항공우주국 제공. 태양은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8분 거리에 있으며 가장 연구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항성이고 전형적인 G형 분광형을 지닌, 46억 살의 주계열성이다. 태양은 변광성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흑점 주기로 알려진, 주기적인 밝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11년 주기에 걸쳐 흑점의 숫자가 변화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흑점은 강력한 자기장 활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태양 표면의 다른 곳에 비해 온도가 낮은 지역이다. 태양은 나이를 먹으면서 밝기가 천천히 증가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주계열성으로 생애를 시작했을 때에 비해 지금 40퍼센트 정도 더 밝다. 태양은 탄생 이후 지구의 생태계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밝기가 변해 왔다. 예를 들어 마운더 극소기로 인해 중세에 작은 빙하 시대 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의 바깥 표면을 광구라고 부른다. 광구 위에는 채층으로 불리는 얇은 지대가 존재한다. 채층 위에는 코로나가 형성되어 있으며, 온도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태양의 중심부에는 핵이 있으며 핵융합 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충분히 뜨겁고 압력 또한 크다. 중심핵 위에는 복사층이 있는데 여기서 플라즈마는 에너지 플럭스를 복사 형태로 전달한다. 복사층 위에는 대류층이 존재하는데 이 곳에서는 에너지가 물리적인 가스 교환 형태를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태양의 대류층이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며, 이 자기장으로 인해 태양 표면에 흑점이 생겨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플라즈마 입자로 이루어진 태양풍은 태양으로부터 꾸준히 우주 공간으로 흘러 나와서 태양권계면까지 이어진다. 태양풍은 지구의 자기권과 반응하여 밴 앨런대를 형성하고, 지구의 자기력선이 대기로 내려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로라를 형성한다. 행성천문학은 행성, 위성, 왜행성, 혜성, 소행성, 기타 태양을 공전하는 다른 천체들, 그리고 외계 행성 집단들을 연구 대상으로 다룬다. 태양계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으며, 과거에는 관측 도구로 주로 망원경을 이용했으며 최근에는 우주 탐사선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련의 탐사로 인해 태양계의 형성과 진화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하여 발견되고 있다. black spot at the top is a dust devil climbing a crater wall on Mars. This moving, swirling column of Martian atmosphere (comparable to a terrestrial tornado) created the long, dark streak. NASA image . 태양계는 내행성, 소행성대, 외행성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내행성계로 일컫는 지구형 행성들로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있다. 바깥쪽을 공전하고 있는 외행성계는 가스 행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왕성 너머로는 카이퍼대가 존재하며, 가장 바깥쪽에는 최대 1광년에 이르는 거리까지 오르트 구름이 펼쳐져 있다. 행성들은 원시 태양을 두르고 있던 원시행성계원반에서 생겨났다. 중력에 의한 끌어당김, 충돌, 강착 과정을 통하여 원반에 있던 물질들은 큰 덩어리들로 자라났으며 이후 원시행성들로 진화했다. 태양풍에 의한 복사압으로 인해 덩어리로 뭉치지 못한 물질들은 쓸려 나갔고, 자기가 지닌 가스 대기를 잃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천체들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행성들은 계속 커지거나 또는 극심한 충돌로 인해 자기가 갖고 있던 물질을 방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극심한 충돌의 증거는 달이나 수성 등에 있는 많은 충돌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원시행성들 중 일부는 충돌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행성들은 충분한 질량을 획득한 뒤, 무거운 물질은 행성 중심부로 가라앉고 가벼운 물질은 위에 남는, 행성 구별화(planetary differentiation)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행성들의 중심에는 철이나 석질의 중심핵이 생성되고 그 위는 보다 가벼운 물질들로 이루어진 맨틀이 형성되었다. 핵 부위는 고체 또는 액체 성분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 행성의 중심핵은 고유의 자기장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자기장은 행성의 대기를 태양풍으로부터 보호하여, 벗겨져 나가지 않게 한다. 행성이나 위성들의 내부열은 이들을 만들었던 물체(방사성 물질로 예를 들면 우라늄, 토륨, 26Al 등이다)들끼리 충돌하여 발생한 열 및, 조석가속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일부 천체들의 경우 화산이나 지각 운동 등 지질학적 활동이 생겨날 정도의 열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들 중 대기를 갖게 되는 천체는 바람이나 물로 인하여 지각의 침식 과정을 겪는다. 질량이 작은 천체들은 빠르게 식었고, 충돌구 생성을 제외한 일체의 지질학적 활동을 멈추었다. Nebula.jpg|섬네일|right|보통의 불규칙한 외형의 성운 형태와는 달리, 개미 성운의 중심부에서 죽어가는 별에서 분출하는 가스는 좌우 대칭형의 구도를 보여준다. 항성 및 그들의 진화 과정을 아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체물리학은 관측 및 이론, 항성 내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항성 연구에 기여해 왔다. 항성 생성은 거대 분자 구름으로 알려진, 먼지와 가스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시작된다. 분자 구름이 불안정 해지면, 분자 구름이 중력때문에 붕괴하면서 여러 조각들로 깨지게 되고, 각각의 조각들은 원시별을 형성한다. 중심핵 부분이 충분히 밀도가 높고, 뜨거워지면 핵융합 작용이 시작되며, 여기서 주계열성이 탄생하게 된다. 수소와 헬륨, 리튬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들을 천문학에서는 중원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항성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계열성을 벗어난 항성의 진화 과정은 주로 별의 질량에 의해 결정된다. 별이 질량이 크면 클수록 더욱 밝아지며 중심핵에서 수소 연료를 더 빨리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별이 갖고 있던 수소가 헬륨으로 모두 바뀌면, 항성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헬륨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중심핵의 온도가 더 뜨거워져야 하기 때문에 항성의 중심핵 밀도는 증가하며, 부피 또한 커지게 된다. 부피가 증가한 항성은 헬륨을 다 태울 때까지 잠시 동안 적색 거성 단계에 머무른다. 질량이 매우 큰 별들의 경우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태우는 일련의 진화 단계를 따로 걷게 된다. 항성의 최후 양상 역시 마지막에 남은 별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 태양 정도 질량을 갖는 별은 행성상 성운의 형태로 질량을 방출하고 중심부에 백색왜성을 남긴다. 주계열 시절 질량이 태양의 8배 이상이었던 별들의 경우 중심핵이 붕괴하면서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친다. 초신성 폭발 후 중심에 남은 물질은 중성자별이 되거나, 혹은 폭발 후 남은 질량이 태양의 3배가 넘는 경우 블랙홀로 진화한다.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쌍성의 경우 주성에서 나온 물질이 반성인 백색 왜성으로 흘러들어가서 신성 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더욱 복잡한 진화 경로를 겪게 된다. 행성상 성운 및 초신성은 중원소를 성간 공간에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생명체가 탄생할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새롭게 탄생하는 별들 및 행성들은 수소와 헬륨으로만 이루어질 것이고, 지구형 행성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Way Arms.svg|right|250px|섬네일|우리 은하의 모식도. 하단부 회색 부채꼴 범위는 성간 먼지에 가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의 태양계는 국부 은하군에 속해 있는 막대나선은하인 우리 은하()에 속해 있으며, 우리 은하의 중심을 공전하고 있다. 가스,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서로의 중력을 통해 묶여 우리은하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공통 질량중심을 축으로 회전하고 있다. 태양계는 성간 먼지를 포함하는 바깥쪽 나선팔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지가 시야를 가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은하의 모습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 은하 중심부에는 막대 모양의 팽대부가 있으며, 은하 중심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은하중심부는 바깥쪽으로 소용돌이처럼 퍼져나가는 네 개의 나선팔로 둘러싸여 있다. 나선팔은 금속함량이 많고 젊은 항성종족 I 별들이 탄생하는 곳이다. 은하 원반을 구형의 은하 헤일로가 둘러싸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로 늙은 항성종족 II 별들과 별들이 조밀하게 뭉친 구상성단들이 분포하고 있다. 별들 사이에는 가스와 먼지 등으로 이루어진 희박한 성간 물질이 분포하고 있다. 성간 물질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수소 분자 및 다른 원소들로 구성된 분자 구름이 만들어지고, 이 곳에서 별들이 태어난다. 별의 생성은 처음에는 분자구름이 밀집된 암흑 성운의 형태로 시작되며, 이들은 압축되고 붕괴되어 원시별을 형성하게 된다. 질량이 큰 별들이 태어나는 곳의 주변은 빛을 방출하는 가스와 플라스마로 이루어진 H II 영역으로 진화한다. 무거운 별들은 강한 항성풍을 방출하고 초신성 폭발로 일생을 마치는데, 이로 인해 주변의 성간물질이 흩어지게 된다. 때로는 여러 별들로 이루어진 산개 성단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산개 성단의 별들은 점차 흩어지게 되면서 우리 은하의 항성 종족에 편입된다. 우리 은하 및 외부 은하에 대한 운동학적 연구를 통해 보이는 물질보다 더 많은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빛을 내지 않지만 질량은 가지는 암흑물질의 본질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나, 암흑물질 헤일로가 우주에 있는 물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블의 소리굽쇠 은하의 형태학적 분류. E 는 타원 은하, S 는 나선 은하, SB 는 막대나선 은하를 가리킨다. 외부은하 천문학은 우리은하 밖의 천체와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주로 은하의 형성과 진화, 외부은하의 형태와 분류, 활동성은하, 은하단과 은하군,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지는 우주의 거대 구조를 연구한다. 대부분의 은하들은 모양에 따라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로 분류된다. 이름대로 타원은하는 하늘에 투영된 모습이 타원을 띄는 은하이다. 타원은하의 별들은 무작위적인 궤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성간물질이 적으며, 새로 생성되는 별이 적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원은하들은 주로 은하단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여러 은하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나선은하는 납작한 회전하은 원반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중심부의 팽대부(또는 막대)와 나선 모양의 팔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선팔들은 성간먼지를 많이 포함하고, 주로 별들이 형성되는 곳으로 푸른 빛을 띠고 있다. 나선은하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헤일로에 둘러 싸여 있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대표적인 나선은하이다. 불규칙은하는 나선은하와 타원은하로 분류할 수 없는 일정한 모양을 갖지 않는 은하이다. 이러한 불규칙한 모양은 다른 은하와의 상호작용 때문에 만들어진다. 활동성 은하는 방출하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별, 먼지, 성간물질 같은 것이 아닌 은하 중심의 다른 에너지 원(블랙홀)으로부터 나오는 은하이다. 이러한 활동은하핵(active galactic nucleus)은 응축원반(accretion disc)을 가진 매우 무거운 블랙홀(Supermassive black hole)이라고 여겨진다. 활동은하에는 시퍼트 은하(Seyfert galaxies), 퀘이사(Quasar), 블레이저(Blazar), 전파은하(radio galaxy)등이 있다. 전파은하는 일반적인 은하와 달리 전파에서 매우 강한 빛을 내며, 퀘이사는 우주에서 가장 밝은 천체 중 하나이다. 우주의 거대구조는 이러한 개개의 은하들이 모여서 이루는 구조를 의미한다. 우주의 거대 구조은 계층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은하들이 모여 은하군을 이루고, 이 은하군들이 모여 은하단을 형성하며, 다시 초은하단을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거대한 군집들은 다시 필라멘트(filaments)와 그 사이의 공동(voids)을 이루며 분포한다. 물리 우주론(physical cosmology)은 우주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는 분야이다. 우주론의 연구 대상으로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대폭발 핵합성, 우주의 거대구조,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등이 있다. 우주론의 밑바탕이 되는 이론은 우주가 약 137억년 전에 시공간의 한 점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팽창하여 왔다는 대폭발 이론이다. 1965년에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이 발견됨으써 대폭발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우주는 여러 중요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대폭발 직후 아주 초기에는 우주가 급팽창이라고 불리는 기하급수적인 빠른 팽창을 겪었다고 생각되며, 이 급팽창 때문에 우주가 현재 관측되는 것처럼 균질()하고 등방적()이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급팽창 이후에는 중수소, 헬륨과 같은 기본적인 원소들이 만들어졌는데,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바리온)이 만들어진 이 과정을 대폭발 핵합성 또는 원시 핵합성이라고 부른다. 우주가 팽창하고 식어감에 따라 중성 원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덕분에 빛이 이온화된 전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우주가 투명해지게 된다. 이 때 발생한 빛이 현재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으로 관측이 된다. 그러나 아직 빛을 낼 수 있는 별들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후의 시기를 우주의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우주에 존재하던 작은 밀도 요동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질들이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뭉치면서, 거대한 가스 덩어리를 만들고, 여기서 처음으로 별들(Population III stars)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별들은 내부의 핵융합을 통해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게 되고, 이 때 발생하는 빛들은 주위의 가스를 이온화시켜서, 소위 재전리라는 과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별들이 중력에 의해 모이면서 처음으로 은하들을 만들게 되고, 이 은하들이 다시 중력에 의해 분포하면서 은하군이나 은하단 같은 더 큰 구조들을 만들고, 이는 우주의 거대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소위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는 이러한 우주론의 근본적인 구성성분이 되어왔으며, 두 성분을 합쳐서 우주 전체의 96%를 차지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현대 우주론과 천문학의 주요 미해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다른 과학분야와 관련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를 활발하게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고천문학 ()은 고고학과 융합된 학문으로서 고대 또는 전통적인 천문학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생물학()은 지구 이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주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의 생성, 변화, 소멸등을 연구하는 분야는 천문화학()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물질들은 주로 분자운, 온도가 낮은 별들, 갈색왜성, 그리고 행성들에서 주로 발견된다. 우주화학()은 태양계내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들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원소과 동위원소의 상대적인 비율을 다룬다. 이 두 분야들은 천문학과 화학이 융합된 분야이다. 천문학은 비전문가들(아마추어들)이 가장 많이 기여를 하는 과학분야 중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다양한 천체와 천문 현상들을 관측한다. 일반적인 관측대상으로는 달, 행성, 별, 혜성, 유성우, 심원천체(성단, 은하, 성운)등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관측에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장비가 사용되기도 한다. 일부 아마추어 천문인들은 밤하늘이나 특정 천체들의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이러한 예술적인 사진을 천문사진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취미활동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천문학 연구에 꾸준히 공헌해왔다. 실제로 천문학은 아직까지도 비전문가들이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해내기도 하고, 변광성을 꾸준히 관측한다. 디지털 관측기기의 발전으로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천문 사진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다. 비록 천문학은 우주와 그 구성원들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 왔지만, 아직도 중요한 미해결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상·우주 망원경, 그리고 획기적인 이론·실험 물리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질량에 따른 별들의 개수 분포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즉 왜 별들이 생성될 당시의 질량분포(초기질량함수)가 일정해 보이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별과 행성의 생성과정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우주에 우리 말고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더 나아가 지성을 가진 외계인이 존재하는가? 외계생명의 존재는 과학뿐 아니라 철학·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 태양계는 보편적인 행성계인가 아니면 특별한가? 왜 우주는 생겨났는가? 우리 우주를 균일하게 만든 급팽창()은 왜 발생했는가? 왜 바리온 비대칭성(baryon asymmetry)이 존재하는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들은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성분이지만 그 본질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주의 궁극적 운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은하들이 처음 형성되었는가? 거대한 블랙홀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초고에너지 입자(ultra-high-energy cosmic ray)들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Astrology and astronomy 천문학자 :분류:천문대 :분류:천문학 관련 기관 천문학 연표 별자리 우주론 우주 거리 사다리 천문학용어집 세계 천문의 해 우주 탐사 우주과학 태양계 별 망원경 한국천문연구원 한국천문학회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NASA의 오늘의 천체사진 국제 천문 연맹 NASA NADA European Space Agency STSci 우주망원경연구소 제트추진연구소 - Caltech International Year of Astronomy 2009 IYA2009 Main website Cosmic Journey A History of Scientific Cosmology from the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천문학, 천체물리학 분야의 주요 서적 과 저널 들. Smithsonian/NASA Astrophysics Data System. 분류:자연과학 분류:천체물리학 |
튀어오르는 공 애니메이션 (위)은 6개의 프레임을 이룬다. 이 애니메이션은 초당 10 프레임으로 움직인다. 애니메이션, 로토스코프로 움직이는 말 애니메이션 (), 보물()는 여러 장의 화면을 연속 촬영, 조작하여 움직이도록 보이게 만든 영화의 일종이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anima 에서 비롯하였다. 간단히 동화 (動畵)라고도 부른다. 만화 나 동화 는 그림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각 장면은 그림이 아닐 수 있다. 3차원 모델링을 통해 컴퓨터 화면상으로 재현된 영상의 경우도 애니메이션에 포함된다.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애니 라고 짧게 표기하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아니메 ()로 줄여 부르거나 도가 (, 동화)라고 말한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을 일본(Japan)과 애니메이션(animation)의 합성어인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초기 애니메이션은 배경에 그림을 그려 움직이게 하는 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흙이나 모형 등의 피사체를 조금씩 변형하여 각 장면을 촬영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생겼고,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프로그램으로 등장인물의 각 동작과 배경을 구현하는 3D 애니메이션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는 2D의 셀 애니메이션만을 쓰거나, 3D와 셀을 조합하여 사용한다. 애니메이션은 유통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TV에서 방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TV 시리즈가 제작되며, 일본에서는 보통 25분 정도의 시간으로 1주일에 한 편씩 13주간 방송할 수 있는 분량을 한 단위(쿨,기)로 하여 방송한다. 일본에서 영상 매체(DVD, VHS, LD, 블루레이 디스크 등)에 담겨 판매 혹은 대여되는 OVA(혹은 OAV)가 있으며, 한 편의 길이는 TV시리즈와 비슷하나 전체 분량은 유동적이다. 극장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있다. 자금과 노력이 많이 투자되어 일반적으로 세 가지 형식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극장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나 극장에서 개봉을 하지 못하고 (VHS, DVD, 블루레이 디스크 등)으로 출시된 애니메이션도 있다. 주로 비디오용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셀 애니메이션 - 필름에 그림을 그려넣고 사진을 찍어 각 장면을 완성하는 방법이다. 클레이 애니메이션 - 찰흙으로 만든 모형을 프레임에 맞게 조금씩 움직인 후 사진을 찍는 방법이다. 페인트 온 글라스 애니메이션 - 일반적으로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이 아닌 유리판 위에 바로 물감으로 색을 입혀, 그 유리판을 한장씩 촬영하여 만드는 애니메이션 기법이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 모든 작업을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화상 처리하는 2D 및 3D 애니메이션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며, 3차원 모델을 이용하기도 한다. 플래시가 가장 좋은 예이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 사진기로만 그림이나 광경을 몇분이나, 소수의 차이가 보이도록 찍어, 한꺼번에 연결시켜 매끄러운 움직임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 외에도 페이퍼 애니메이션, 모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제작 기법이 있다. 현재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소스들을 바탕으로 창작되고 있다. 성격상 가장 유사한 만화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고, 자체적으로 창작하여 제작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 게임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은 결국 애니메이션 기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독자들이나 필자가 디자이너라면 캐릭터를 미술이나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았다. 프로그래머에게 캐릭터란 결국 메시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런 메시들의 집합을 어떤 애니메이션 방식과 결합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표현 방식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투사 심리현상 중 하나인 투사는 지니고 있을 법한 자신의 측면을 타인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타인이 지닌 자신의 측면을 혐오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태도나 특성이 보기 언짢다면 그 캐릭터는 자기 내면의 모습일수도 있고 가정된 상황에서 드러날 수 있는 본인의 측면 중 하나일 수 있다. *감정전이 전이는 특정 상황에 각별한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장면의 유사 요소가 많은 상황이 찾아오면 해당 애니메이션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정서가 그 실제 상황에 반영돼 느껴진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일본성우 전문 엔터테인먼트 사이트 Jade Voice 분류:영상 기술 |
태풍 매미 (태풍 번호 0314, JTWC 지정 번호 15W, 국제명 MAEMI, 필리핀 기상청(PAGASA) 지정 이름 Pogi)는 2003년 9월 12일 한반도에 상륙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태풍이다. “Super Typhoon Maemi” 혹은 “2003년 태풍 제14호”라고도 불리며,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 중 상륙 당시 기준으로 가장 강력한 급이었다. 매미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곤충 매미에서 온 이름이다. 한편 이 태풍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태풍 이름 목록에서 "매미"라는 이름이 영구 제명되어, 후에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무지개"로 재명명되었다. 태풍 매미의 이동 경로 2003년 9월 4일 괌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은 느리게 발달하면서 북서쪽으로 나아가 약 이틀이 지난 9월 6일 오후 3시 무렵 제14호 태풍 매미가 되었다. 이렇게 열대저기압에서 태풍으로 인정되기까지 발달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당초 기상청 등은 이와 같은 느린 발달 경향이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태풍은 9월 9일의 무렵 일본 사키시마 제도 남동쪽 먼 바다에 접근하면서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9월 10일에는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에 달하는 최강 급의 태풍으로 성장했다. JTWC의 해석에서는 1분 평균 최대 풍속 75 m/s (150 kt) 의 “카테고리 5급”이며 일본의 기준으로는 “맹렬한 태풍” 이다. 최성기를 맞이한 태풍은 진로를 서서히 북쪽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9월 11일 새벽에는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을 통과해 동중국해로 들어갔다. 태풍의 중심이 지나간 미야코 섬의 기상관청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12.0 hPa, 최대순간풍속 74.1 m/s 가 관측, 일본에서는 수십 년 만의 기록이 되었다. 동중국해에 들어가서는 북북동 방면으로 전향하여 한반도를 향해 북상, 그러면서 차츰 쇠퇴기에 접어들어 11일 오후에 중심 기압 920 hPa / 최대 풍속 50 m/s 의 강도 “매우 강”으로 조금 약해진 뒤, 9월 12일 오후 3시에는 중심 기압 935 hPa / 최대 풍속 45 m/s 의 세력으로 제주도 남동쪽 해상에 이르렀다. 같은 날 오후 8시 30분경에는 약간 더 쇠약해진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 m/s 의 “중형의 강한 태풍”으로서 경상남도 고성군 일대에 상륙, 이후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동부를 관통하여 상륙 후 약 6시간 만인 9월 13일 오전 2시 30분경에 울진 앞 바다로 빠져나와 동해상으로 진출했다. 이어서 일본 홋카이도 부근 해상까지 나아가, 9월 14일 오전 6시경에는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남부 지방과 일본 미야코 섬의 큰 피해, 그리고 경로, 위력 등에 있어서 1959년의 제14호 태풍 사라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태풍이다. 9월 13일 오전 10시,동해상에 진출한 태풍 매미. 날짜 및 시간 중심 기압 최대 풍속 비고 9월 6일 오전 3시 1002 hPa JTWC의 해석으로 태풍 발생. 9월 6일 오후 3시 994 hPa 18 m/s 일본 기상청의 해석으로 태풍 발생.제14호 태풍 “매미”로 명명. 9월 7일 오전 3시 992 hPa 20 m/s 9월 7일 오후 3시 992 hPa 20 m/s 9월 8일 오전 3시 985 hPa 25 m/s 9월 8일 오후 3시 975 hPa 30 m/s 9월 9일 오전 3시 970 hPa 35 m/s 9월 9일 오후 3시 950 hPa 40 m/s 9월 9일 오후 9시 940 hPa 45 m/s JTWC, “Super Typhoon” 으로 분류. 9월 10일 오전 3시 930 hPa 45 m/s 9월 10일 오전 9시 925 hPa 50 m/s JTWC의 해석으로 중심 기압 885 hPa,1분 평균 최대 풍속 75 m/s (150 kt) 의 “카테고리 5급”. 9월 10일 오후 3시 910 hPa 50 m/s 9월 10일 오후 9시 910 hPa 55 m/s 일본 기상청 기준상의 “맹렬한 태풍”으로 발달. 9월 11일 오전 3시 910 hPa 55 m/s 오전 4시경 미야코 섬 최접근.미야코 섬에서 최저해면기압 912.0 hPa, 최대순간풍속 74.1 m/s.JTWC의 해석으로는 최성기에 비해 조금 약해져 있어,중심 기압 904 hPa, 1분 평균 최대 풍속 70 m/s (135 kt) 의 “카테고리 4급”이 된다. 9월 11일 오전 9시 910 hPa 55 m/s 9월 11일 오후 3시 920 hPa 50 m/s 9월 11일 오후 9시 930 hPa 50 m/s 일본 오키나와 섬의 서쪽 약 250 km 부근 해상을 통과. 9월 12일 오전 3시 935 hPa 45 m/s 9월 12일 오전 9시 930 hPa 50 m/s 9월 12일 오후 3시 935 hPa 45 m/s 오후 4시경 제주도 최접근.성산포에서 최저해면기압 954.4 hPa, 제주·고산에서 최대순간풍속 60.0 m/s. 9월 12일 오후 6시 945 hPa 40 m/s 9월 12일 오후 8시 950 hPa 40 m/s 한반도 상륙 직전. 여수에서 최저해면기압 956.5 hPa. 9월 12일 오후 9시 950 hPa 40 m/s 오후 8시 30분경 한반도 남해안 상륙.통영에서 최저해면기압 954.0 hPa. 9월 13일 자정 960 hPa 35 m/s 대구광역시 남동쪽 20 km 지점 통과. 9월 13일 오전 3시 970 hPa 30 m/s 오전 2시 30분경 동해상 진출. 9월 13일 오전 9시 975 hPa 30 m/s 9월 13일 오후 9시 980 hPa 25 m/s 일본 홋카이도 접근. 9월 14일 오전 6시 984 hPa 온대저기압으로 변질. 9월 12일 오후 5시 25분,태풍의 한반도 상륙 3시간 전. 태풍 매미의 최대 세력은 대한민국과 일본 기상청의 해석으로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105 kt) 이며, 풍속 값을 1분 평균으로 산출하는 JTWC의 해석으로는 중심 기압 885hPa / 최대 풍속 75 m/s (150 kt) 가 된다. 그 위력은 2003년에 발생한 모든 태풍 중에서 으뜸인 것은 물론, 그 해의 모든 허리케인과 사이클론을 통틀어도 가장 강하다. 게다가 북위 30도 이북에까지 진행하였음에도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 (95 kt) 의 강도 “매우 강”에 해당하는 세력을 유지, 북상하면서도 좀처럼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 m/s (80 kt) 의 세력으로 상륙 했다. 상륙 시의 중심 기압 950 hPa 은 이전에 강한 세력으로 상륙했던 2000년 제14호 태풍 사오마이 (상륙 시 중심 기압 959 hPa), 2002년 제15호 태풍 루사 (상륙 시 중심 기압 960 hPa) 의 기록을 크게 경신하는 것이다. 태풍이 이렇게 강력한 세력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원인을 꼽자면, 당시 한반도 주변 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았던 것과 비교적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평년보다 2~3도 높았던 해수면 온도는 태풍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다소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는 태풍이 미처 쇠약해지기 전에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태풍의 상륙 지점에 가까웠던 여수, 통영, 마산 등의 지역에서는 기록적으로 낮은 기압이 되어, 그중 통영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54.0 hPa 를 관측했다. 이것은 태풍에 의해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부문 역대 2위가 되는 기록이다. 특히 일본 기상청의 기록 에 의하면 중심 기압 930 hPa 이하의 세력을 북위 30도 이상까지 유지한 태풍은 극히 드물어, 이러한 태풍은 1951년부터 2008년까지 발생한 1450여개의 태풍 중 매미를 포함하여 11개밖에 없다. 매우 강한 바람을 동반했던 것이 이 태풍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비록, 상륙 시의 폭풍역 (풍속 25 m/s 이상의 폭풍 범위) 이 남동쪽으로 반경 150 km, 북서쪽으로는 반경 55 km 정도로 북서 방향의 폭풍역이 다소 작았기 때문에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있던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최대순간풍속 10~20 m/s 내외의 수준에 그쳤지만, 태풍의 폭풍역에 해당했던 제주도와 전라남도, 경상도, 그리고 대마도 등지에서는 기록적인 강풍이 되었다. 그 결과, 해당 지역에 속한 대부분의 관측 지점에서 종전의 풍속 기록이 바뀌었다. 관측된 최대순간풍속은 제주 60.0 m/s, 고산 60.0 m/s, 여수 49.2 m/s, 부산 42.7 m/s 등으로, 제주도와 여수 등의 지역은 태풍의 가항반원에 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상위 기록의 대부분은 태풍의 중심권에 가까웠던 남부 지방에 집중되었다. 고산에서는 최대 풍속 51.1 m/s 가 함께 관측되어,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최대 풍속 부문 역대 1위 기록이었던, 2000년 제12호 태풍 프라피룬이 흑산도를 내습하면서 세운 최대순간풍속 58.3 m/s, 최대 풍속 47.4 m/s 를 3년 만에 다시 경신했다.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역대 1위를 바꾼 60.0 m/s 의 풍속이 제주와 고산 두 지점에서 동시에 관측된 것은 대단히 진기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편, 최대순간풍속은 비공식으로는 공식 기록보다 훨씬 높은 값을 관측한 경우가 있어, 일본 미야코 섬 자위대 주둔지에서는 공식 기록 (최대순간풍속 74.1 m/s, 미야코 섬 기상관청 관측) 을 훨씬 뛰어넘는 86.6 m/s 를 기록했는가 하면, 부산에서도 공식 기록인 42.7 m/s 를 넘는 비공식 기록이 잇달아, 구덕산 레이다에서 53.4 m/s, 광안대교에서 56.2 m/s, 신선대 부두에서 52.0 m/s 등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기록적인 강풍이 일었던 원인은 물론 강력했던 태풍의 세력이 일차적이지만, 부가적인 요인으로서 두 가지를 더 꼽을 수 있다. 먼저 한반도 상륙 시 45 km/h 정도의 상당히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이 이동속도가 태풍의 풍속 (상륙 시 최대 풍속 40 m/s) 에 더해져 위험반원에서의 바람의 힘을 그만큼 더 강하게 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태풍의 특성상 진행방향의 오른쪽, 다시 말해 위험반원에서는 태풍의 회전과 진행방향이 중첩되어, 태풍의 이동속도가 그대로 풍속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풍 상륙 일인 9월 12일 오후의 한반도 주변 기압배치는 남쪽으로부터 북상하는 매우 낮은 중심 기압의 태풍과 북쪽의 고기압이 마주치는 형국이 되어 있어, 이 부근의 기압경도를 급격하게 만듦에 따라 강풍을 유발시키는 또 하나의 조건을 형성했다. 즉, 이 두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태풍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했던 바람의 힘을 이중 삼중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9월 12일 오후 9시 24분,TRMM 위성에서 관측된 매미.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람의 이미지가 크게 각인되어 있으나, 강수에 있어서도 꽤 큰 영향을 끼친 태풍이다. 전체적인 강수량은 큰 비를 수반한 대표적인 태풍으로 꼽히는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나 태풍 아그네스 등이 몰고왔던 호우와 같이 극단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남해 410.0 mm, 강릉 307.5 mm, 고흥 291.0 mm 가 기록되는 등, 남해안과 영동 지방을 중심으로 최대 450 mm 에 달하는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 무엇보다 태풍이 다소 빠른 속도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나감에 따라 비구름대가 한반도에 머무른 시간이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강수량이 기록된 것으로서, 비교적 단시간에 강수가 집중되는 형태를 보였다. 위에 언급된 강수량의 대부분은 태풍이 한반도 가까이에 존재했던 12일 오후 늦게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기록된 것이다. 또한 지역별로 강수량의 편차가 꽤 크게 나타났는데, 주로 태풍의 중심권이 통과한 제주도, 전남 동부, 경남 서부, 대구 근방 지역에서 총강수량 200 mm 이상의 기록적인 호우가 관측된 반면, 그 외의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가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남해의 강수량은 약 400 mm 에 이르렀지만 동쪽으로 불과 100 km 정도 떨어진 부산의 강수량은 60 mm 안팎에 지나지 않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태풍 진행방향의 서쪽 (가항반원) 으로 꽤 떨어진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는 그보다도 적은 강수를 기록했다. 특히, 대관령과 강릉을 포함한 영동 지방에서는 태풍이 몰고온 온난 다습한 기류와 북동쪽에서 유입된 비교적 한랭한 기류가 태백산맥에서 부딪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강한 비구름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 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형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영동 지방에 300 mm 가 넘는 비가 쏟아진 원인이다. 최대순간풍속 (상위 5지점) * 고산 60.0 m/s * 제주 60.0 m/s * 여수 49.2 m/s * 통영 43.8 m/s * 부산 42.7 m/s * AWS(자동기상관측장비) 관측치 거문도 55.8 m/s, 부산 구덕산 기상레이다 관측소 53.4 m/s, 나로도 44.5 m/s, 마라도 42.9 m/s 최대 풍속 (상위 5지점) * 고산 51.1 m/s * 제주 39.5 m/s * 여수 35.9 m/s * 통영 31.8 m/s * 완도 28.9 m/s 최저해면기압 (상위 8지점) * 통영 954.0 hPa * 성산포 954.4 hPa * 남해 956.1 hPa * 여수 956.5 hPa * 마산 959.0 hPa * 진주 960.9 hPa * 거제 961.6 hPa * 서귀포 964.9 hPa 일(日)최다강수량 (상위 8지점) * 남해 410.0 mm * 고흥 289.5 mm * 진주 259.5 mm * 산청 247.5 mm * 제주 231.5 mm * 여수 216.0 mm * 대관령 216.0 mm * 대구 187.0 mm 기간 강수량 (9월 11일 ~ 9월 13일, 상위 8지점) * 남해 452.5 mm * 대관령 397.0 mm * 강릉 308.0 mm * 고흥 303.0 mm * 진주 271.1 mm * 성산포 269.0 mm * 여수 258.6 mm * 산청 256.5 mm * AWS(자동기상관측장비) 관측치 한라산 진달래밭 637.0 mm, 사천 412.0 mm, 지리산 403.0 mm 1시간최다강수량 (상위 5지점) * 남해 89.5 mm * 대관령 56.5 mm * 진주 56.0 mm * 강릉 52.0 mm * 대구 42.0 mm 태풍 매미 강타시 일본 미야코 섬에서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912.0 hPa 과 최대순간풍속 74.1 m/s 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 일본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씩 기록될 만한 값으로, 최저해면기압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4위 기록, 최대순간풍속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7위 기록이다. 최대순간풍속 * 미야코 섬 74.1 m/s * 이즈하라 46.5 m/s * 이시가키 섬 40.0 m/s 최대 풍속 * 미야코 섬 38.4 m/s 최저해면기압 * 미야코 섬 912.0 hPa 일최다강수량 * 미야코 섬 285.0 mm * 도쿠시마 174.5 mm * 후쿠에 171.0 mm 1시간최다강수량 * 후쿠에 66.0 mm * 나가사키 59.5 mm * 미야코 섬 58.5 mm Wreck, Yeongdo Bridge, Busan.jpg|섬네일|225px|태풍이 지나간 뒤 부산 영도다리 부근에서 침몰한 배 태풍 매미는 발생에서 소멸까지 태풍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포물선 형태에 가까운 경로를 밟았기 때문에, 진로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한반도 상륙의 가능성도 꽤 일찍부터 예상되었다. 기상청은 9월 10일 오후 5시에 보도자료를 통해 태풍의 한반도 남해안 상륙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여 이 소식은 주요 언론기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9월 11일 오전 4시에는 태풍이 최대순간풍속 74.1 m/s 의 맹렬한 강풍과 함께 일본의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을 직격하여 태풍에 대한 방재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이곳에서조차 심대한 피해가 발생, 태풍의 위력이 실상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태풍이 곧 당도할 대한민국 역시 큰 피해가 우려되기 시작했다. 이에 기상청은 9월 11일 오후 2시 30분에 2차 보도자료를 발표해 주의를 촉구했으며, 오후 6시에는 본청을 포함한 전국의 기상관서에서 태풍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주요 방송사 및 신문에서는 태풍의 북상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59년의 태풍 사라에 비견되는 태풍 매미가 북상 중”등으로 연달아 보도함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태풍의 영향이 본격화된 9월 12일에는 초특급 태풍의 한반도 내습 소식을 주요 방송사에서 따로 특보를 편성,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부 당국의 대처는 매우 미흡해 마산 지하 상가 참사 등의 결과로 이어졌으며, 또한 전봇대나 송전 철탑 등의 전기 공급 시설을 확실히 정비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으로, 강풍에 의해 정전이 속출하여 이 일대는 뉴스 특보마저 시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세력의 태풍은 당시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으로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에 따른 희생자가 매우 많았고, 재산 피해액은 전년의 태풍 루사에 이어 사상 최대 급에 이르렀다. 인명 피해 * 사망·실종 132명 * 이재민 6만 1천여 명 재산 피해 * 4조 7천억여 원 (2003년 화폐가치 기준)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워낙 커, 수도권 일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었다. cafe wrecked by Typhoon Maemi.jpg|섬네일|right|250px|태풍 매미로 인해 난파된 부산의 한 선상 카페 태풍의 상륙 시각이 남해안의 만조 시각과 겹쳐 가공할 만한 해일이 발생, 마산에서는 지하 노래방에 갇힌 사람들이 그대로 익사하는 등 1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마산의 고조(高潮) 높이는 약 180 cm 로 예측되었으나 태풍에 의한 해일은 최대 439 cm 에 달해 예측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해일을 예상하지 못했던 마산 당국은 제대로 된 대피령을 내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부두의 원목 수천여 개가 바닷물과 함께 밀려와 지하 건물의 출구를 막으면서 피해를 더욱 키웠다. 부산에서는 해일에 가까운 높은 파도가 해안가를 휩쓸었는데 이에 대한 신속한 대피가 이루어져 인명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해운대에 위치한 부산 아쿠아리움이 침수되고 해안가에 자리 잡은 많은 건물들이 폐허로 변해 재산 피해가 매우 컸다. 이밖에, 태풍을 피해 남해안에 정박해 있던 선박들의 피해가 상당하여 수천 척의 선박이 해일에 의해 파손되거나 침몰했으며 도심에서는 해일에 밀려온 크고 작은 선박들이 널려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해 지역이 워낙 넓었고, 유입된 물의 양이 많아 복구가 늦어졌기 때문에 함께 밀려왔던 쓰레기 및 폐수의 처리가 늦어져 위생 상태가 나빴던 지역이 많았다. 태풍에 동반된 최대순간풍속 50 m/s 가 넘는 강풍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신주와 철탑이 쓰러져 전국적으로 145만여 가구가 정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거제도 지역에서는 송전 철탑이 강풍에 파괴되어 약 4일 동안이나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고층 건물에서는 유리창이 바람에 의해 파손되는일이 잇달았고 도심에서는 날린 간판과 뽑힌 가로수, 깨진 유리창 등이 뒤엉켜 굴러다녀, 일부 거리는 마치 폭격을 당한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날려지던 물체의 일부는 주차된 차량을 덮쳐 곳곳에서 파손된 차량이 수천 대에 달했으며 부산항에서는 800톤이 넘는 컨테이너 크레인 11대가 강풍에 의해 무너지거나 궤도를 이탈 하는 한편, 해운대에서는 7000톤이 넘는 해상관광호텔이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전복되어 피해액은 헤아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여기에, 옥상에서 물건을 줍던 사람이 바람에 떠밀려 추락하여 숨지거나 폭풍속에서 배를 살피러 나온 노인이 파도에 휩쓸리는 등, 바람에 대한 경계심 부족이 인명 피해를 가져오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바람 피해는, 태풍의 위험반원에 해당했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다. 태풍이 통과하던 9월 12일에서 13일 사이에 쏟아진 폭우로 강원도 영동 지방과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400 mm 에 가까운 강수를 관측, 더욱이 이 강수량의 대부분이 태풍이 한반도 내륙에 위치했던 6시간 동안에 집중되어, 짧은 시간 동안의 강렬한 호우로 산간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해 주택가를 덮쳐 많은 인명 피해가 나왔다. 호우에 따른 산사태의 위험성이 제대로 경고되지 않은 것과 대피 명령이 없었던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난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의 교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단시간에 쏟아진 많은 양의 비는 곳곳의 하천을 범람시켜, 농경지가 침수되고 주택가에는 물이 들어차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는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때의 복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태풍 매미에 의한 폭우가 쏟아져 심대한 피해가 되었다. 태풍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사망 3명, 부상자 110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 했고, 그 피해는 주로 미야코 섬에 집중되었다. 태풍 매미는 거의 최성기의 세력을 유지한 채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의 상공을 통과하여, 미야코 섬에 1968년의 제16호 태풍 이래 35년 만의 대 재해를 낳았다. 강력한 폭풍으로 약 1300여 동의 주택이 파손되거나 침수된 것과 함께 160여 억엔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1명이 사망하고 90여 명이 부상했다. 미야코 섬은 태풍에 대한 수준 높은 방재시스템이 있어 웬만한 태풍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는 곳인 만큼 태풍 매미에 의한 이 같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태풍이 대한민국에 입힌 피해가 너무나도 극심했기 때문에, 2005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38차 태풍위원회 총회에서는 이 태풍의 이름이었던 “매미(MAEMI)”를 퇴출시키고 “무지개(MUJIGAE)”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015년에 사용한 무지개라는 이름도 필리핀과 중국에 끼친 심대한 피해로 퇴출되었고 대신 수리개가 쓰이게 되었다. 속보 해석으로 태풍 매미는 북위 30도를 넘은 시점에서 중심 기압 945 hPa 까지 약화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기상청의 사후 해석 에 의해, 북위 30.5도에서의 세력이 “중심 기압 945 hPa / 최대 풍속 40 m/s”에서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로 상향 수정 되었다. 또한, 사후 해석을 참고하면 태풍의 상륙 지점은 당초 대한민국 기상청이 발표했던 경상남도 사천시 부근보다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가까운 것이 된다. 《태풍 매미 백서》, 기상청 발간 대한민국 기상청 태풍 매미 통보문 JTWC 태풍 매미 베스트 트랙 분류:2003년 태풍 분류:일본의 태풍 분류:대한민국의 태풍 분류: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5등급 열대 저기압 분류:폐기된 태풍 분류:2003년 일본 분류:2003년 대한민국 분류:노무현 정부 분류:2003년 9월 분류:태풍 이름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 (, 1826년 9월 17일~1866년 7월 20일)은 독일의 수학자이다. 해석학, 미분기하학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리만 기하학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술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리만 적분, 코시-리만 방정식, 리만 제타 함수, 리만 다양체 등의 수학 용어에 남아 있다. 그는 리만 가설을 최초로 고안한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현재 독일의 다넨베르크(Dannenberg) 근처인 하노버 왕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Friedrich Bernhard Riemann)은 루터 교회의 가난한 목사였고, 리만은 6명의 자녀들 중 둘째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자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보기 드문 수학적 재능을 나타냈지만, 대중 앞에서 말하기에는 너무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었다. 1840년 할머니와 살면서 중학교(lyceum, middle school)를 다니기 위해서 하노버(Hanover)에 갔다. 1842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요하네움 뤼넨부르그(Johanneum Lüneburg)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자주 수학으로 돌아가곤 했다. 심지어 창세기의 정확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생각까지 했다. 담당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천재성을 간파했고, 그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당연히 그 제자는 교사의 수학(授學) 능력 범위를 벗어나곤 했다. 1846년 리만이 19세였을 때, 목사가 되어서 가계(家計)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47년 아버지로부터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수학을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자코비(Jacobi), 디리클레(Dirichlet), 슈타이너(Steiner) 등이 가르치는 독일 베를린으로 가서, 2년동안 머물렀다가 1849년 독일 괴팅겐(Göttingen)으로 돌아왔다. 짧은 일생을 통해서 발표한 논문의 수는 비교적 적지만, 수학의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소함수론(複素函數論)에서의 연구의 특징은 유체역학적(流體力學的) 고찰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수학의 다른 많은 영역과 복소함수론 사이에 광범위한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 복소함수론의 기하학적인 이론의 기초를 닦아준 점이다. 1851년 학위 논문에서 그는 (x, y) 평면을 (u, v) 평면 위에 등각적(等角的)으로 사상(寫象)시켜서, 한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單一連結域)이 다른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으로 변형될 수 있는 함수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이것은 1857년에 아벨 함수에 관한 논문으로, 위상수학적(位相數學的) 고찰을 해석함으로써 도입한 리만 곡면의 개념으로 유도한 것이었다. 1854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에서 그는 리만 적분을 정의하고, 삼각 급수의 수렴(收斂)에 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 적분의 정의인 함수가 적분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정의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H.르베그에 의해서 더욱 포괄적으로 정의가 부여되었다. 1854년 취임 강연에서 그는, 기하학의 기초를 논하면서 리만 공간의 개념을 도입해서 리만 공간의 곡률(曲率)을 정의하였다. 만년에는 W. E. 베버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물리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에 관해서 강의하였고, 그가 죽은 뒤 베버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리만은 40세 생일의 두 달 전인 1866년 7월 20일 사망했다. 수학의 왕자라고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리만의 박사 학위 논문을 보고, "박사 학위 논문이라고 볼 수가 없는 대논문"이라는 찬사를 쉴 틈 없이 보냈다고 한다. 가우스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리만의 논문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리만 가설 리만 기하학 리만의 모든 저작 분류:1826년 태어남 분류:1866년 죽음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 분류:미분기하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
기타 (Guitar)는 현(스트링=Strings)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이다. 머리(Head 바디)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 부분에는 20여 개의 프렛(Fret)이 박혀 있다. 기타는 주로 6개의 현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경우에는 머리가 없는 기타(Headless Guitar=헤드리스 기타)나, 프렛이 없는 기타(Fretless Guitar=프렛리스 기타)도 있다.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재즈, 록, 팝 음악 등 넓은 장르에 쓰인다.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기타리스트 (Guitarist)라고 부른다. 기타 몸체의 울림구멍(Sound Hole=사운드홀)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고, 프렛을 통해 음정을 제어한다. 현의 양 쪽에는 몸체의 브릿지(Bridge) 위에 위치한 하현주(Saddle 너트)가 있다. 그리고 현의 장력을 조절하여 음정을 맞추는 페그(Peg=줄감개)가 머리에 고정되어 있다. 6개의 현은 연주를 위해 기타를 안았을 때 위쪽이 가장 굵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또한 현이 가늘어질수록 음역이 점점 높아진다. 목 부분에는 손가락을 짚는 지판(핑거보드=Finger Board)이 있는데, 지판 위의 프렛에 현을 닿게 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기타의 종류로는, 몸체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통기타(Acoustic Guitar=어쿠스틱기타)와 마그네틱 픽업(Pickup)과 앰프(Amplifier)를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전기 기타(Electric Guitar=일렉트릭기타, 일렉기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근대 기타는 기턴(gittern)에서 유래되었다. 기턴은 류트와 비슷한 작은 악기로 13세기 후반에 무어인의 지배 하에 있던 스페인을 거쳐 유럽에 도입되었다. 4줄의 거트 현이 있는 기턴은 음유시인뿐 아니라 귀족 사이에서도 인기 있었다. 이 악기는 15세기 동안 길게 만들어졌고 현은 3줄의 복현이 각각 D, G, B로 조현되었으며 단현은 E로 조현되었다. 각 복현의 제2현은 한 옥타브 높다. 스페인에서 기턴은 비우엘라(vihuela)로 변형되었다. 비우엘라는 평평한 악기로써 옆면은 구부러져 있고, 복현 5줄과 단현 1줄로 되어 있다. 이 악기는 스페인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영국의 헨리 8세는 스페인 비우엘라를 4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아라곤왕 페르디난드의 딸 케서린과의 결혼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우엘라는 궁정용 악기인데 반해, 복현 4줄의 기타는 대중적인 음악에 사용된 악기로 16세기 후반에 유럽 도처에 알려졌다. 16세기 중엽에는 특별히 기타를 위한 곡이 작곡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아마트는 1586년에 최초의 교본 《기타라에스파뇨라》를 출판하였다. 100년도 안 되어 기타는 스페인에서 인기 있는 악기가 되었고 비우엘라는 서서히 사라졌다. 15세기 초반에는 4줄의 복현 르네상스 기타가 출연했다. 이 기타는 깃대 플렉트럼으로 연주했으며, 현은 목둘레에 묶인 거트 프렛과 움직이는 줄받침을 거쳐 전면의 줄 고정 장치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타보다 작으며, 작은 크기의 기턴과 비우엘라의 큰 몸통을 결합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4줄에 다섯 번째 복현이 더해졌다. 복현이 단현으로 되면서 연주 기술이 단순화되었고, 18세기에는 옆면이 안으로 굽고 뒤판은 평평한 나무 공명기가 있는, 6현의 근대 기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근대 기타는 오늘날의 기타보다 폭이 좁고 길었다. 유명한 제작자로는 스페인 카디스의 호세 파게스, 파리의 르네 프랑수아즈 라코테, 런던의 루이스 퍼너모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 기타는 몸통의 폭이 넓어졌고 안쪽의 버팀대가 부채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금속 프랫을 목에 끼워 고정시켰고, 줄받침은 높게 제작되었다. 이같은 혁신은 스페인 기타 제작자 안토니오 토레스 후라도에 의한 것이었다. 현을 65cm 길이로 표준화시킨 사람 또한 토레스였다. 20세기에는 나무못으로 만든 줄감개를 금속 나사로 바꾸고, 지판을 울림 구멍까지 아래로 늘리는 등 더 많은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기타를 가장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대중음악 밴드이다. 1930년대에 픽업을 사용하여 현의 음을 증폭시키는 전자 기타가 개발되었고 1940년대에는 단단한 몸체의 기타가 레스 폴에 의해 발명되었다. 록 음악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카포 타스토(이동 줄베개)가 개발되어 조옮김이 쉽게 되었다. 카포 타스토를 프렛판 위에 끼우면 모든 현을 동시에 누를 수 있다. 현대 전기 기타는 굵은 금속 현으로 되어 있으며 플렉트럼으로 연주한다. 344x344px342x342px 클래식 기타(좌)와 일렉트릭 기타(우)의 모습과 부위별 번호매김. # 헤드(Head) 인체로 비유할 때 머리 부분에 해당하며, 펙헤드(Peghead)가 달려있는 곳으로 보통 상표와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연주 시 사용하지 않는다. 넥(Neck)의 일부로 넥에 포함된다. # 너트(Nut) 넥(Neck)의 위에 덮여 있는 지판(Fingerboard)의 시작부분에 있는 것으로 줄의 걸림이 시작된다. 현을 고정 및 지지하며 재질은 상아나, 플라스틱을 사용한다 # 펙 헤드(Peghead) 페그헤드, 튜너, 줄감개, 튜닝키, 머신헤드 등으로 불리며 선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조절해 음을 맞춘다. # 프렛(Fret) 음쇠. 즉, 반음 간격으로 나 있는 쇠. 운지 중에 프렛에 손가락이 가까워 지면 줄의 울림이 저하 된다. # 트러스 로드 (Truss Rod) 어저스트 로드 (Adjust Rod)라고도 한다. 줄의 장력으로 인한 넥의 휨을 조절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렌치를 사용하여 조절한다. # 인레이 포지션 마크라고 부른다. 포지션 마크는 보통 1음 1음을 표기할 때 사용하며 특히 12프렛에 있는 포지션마크는 모양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12번째 프렛의 경우 개방현의 소리와 정확히 1옥타브의 음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넥(Neck) 인체로 비유할 때 목부분에 해당 하는 것으로, 프렛(Fret), 너트(Nut, 지판(Fingerboard)등의 위치하며, 현(줄 String)이 넥의 위를 지나간다. 헤드(Head)도 이에 포함. # 힐 넥과 바디의 접합부. # 인체로 비유할 때 목부분에 해당 하는 곳으로, 일반적인 통기타나 클래식 기타의 경우에 현의 울림을 증폭시키는 통(사운드박스)의 역할을 하며, 일렉기타의 경우에는 이의 기능을 픽업이라는 것으로 대체한다. # 픽업 쉽게 말하자면, 현의 울림을 잡는 마이크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 일렉기타의 현의 떨림을 잡아 소리를 전기 기호로 바꾸는 장치이며, 일렉트릭 기타나,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의 제조사에서 특수하게 자신의 회사만의 기술로 제조된 픽업이 있는 경우도 있다. # 노브(Knob) 기타의 전자 장치에서의 소리에 대한 조절을 할 수 있는 장치. 볼륨 노브와 튠 노브가 있는데 각 기능이 다르다. 볼륨은 소리의 크기를, 튠은 소리의 높이를 조정한다. # 브리지 줄을 받치는 전체의 판이다. # 픽가드 스트로크 연주법으로 기타 바디의 피니쉬나 나무 자체의 긁힘으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부착하는 것으로 클래식 기타에는 없는 편이며, 통기타나 일렉트릭 기타에 있는 것이 많다. # 사운드 홀 통기타에서 줄의 진동으로 인한 소리가 바디의 구멍으로 들어가 울리게 된다. # 현 줄, 스트링 등으로 불리며 장기간의 연주 혹은, 손의 땀이나 공기 중의 습도로 인해, 녹이 스는 경우도 있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1~3번 줄이 나일론으로 되어 있으며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의 줄은 크게 차이점이 있다. # 브리지 (새들) 너트와 마찬가지로 현을 고정 및 지지하며, 바디로 현의 울림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일렉트릭 기타의 한 종류에서는 트레몰로 암(Tremolo Arm)이라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 모든 줄의 장력을 조절하여 한꺼번에 음의 높낮이에 변화를 주는 주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 프렛보드 (Fretboard 핑거보드, 지판) 프렛과 너트가 있는 넥의 일부분이다. 손가락과 맞닿는 부분으로 줄이 이부분에서 눌려 줄의 울리는 길이의 조절을 통해 음의 높낮이가 변하게 된다. 클래식 기타 통기타 (어쿠스틱 기타) 플라멩고 기타 웨스턴 기타 12현 기타 미니 통기타 풀 할로우 바디 기타 세미 할로우 바디 기타 솔리드 바디 기타 베이스 기타 12현 기타 테너 기타 슬라이드 기타 현은 6개가 주류이지만 그 밖에 7현, 10현, 12현 기타 등도 존재한다. 또, 베이스 기타는 4개의 현을 갖춘 것이 보통이지만, 5, 6현을 갖춘 것도 널리 사용된다. 현은 금속, 나일론 등이 쓰인다. 클래식 기타에서 고음의 1~3현에 부드러운 나일론 현을 이용한다. 저음의 4~6현에는 가는 나일론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이용한다. 과거에는 양의 창자를 말려 만든 거트 현을 이용하였으나 안드레스 세고비아 이후로 현대에는 내구성이 높은 나일론 등의 화학 합성 섬유로 만든 현이 주로 쓰인다. 통기타나 전기 기타 대부분은 강철 현의 금속(니켈, 스테인리스 등)의 현을 사용한다. 이 가운데 저음의 현은 가는 금속의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사용한다. 보통 통기타가 3~6현, 전기 기타는 4~6현을 감는다. 현의 종류나 두께에 따라 기타의 음색이 달라지며, 이에 따라 저마다 기타의 느낌이 다르다. 0 1 2 3 4 5 6 7 8 9 10 11 12 E F F# G A♭ A B♭ B C C# D E♭ E B C C# D E♭ E F F# G A♭ A B♭ B G A♭ A B♭ B C C# D E♭ E F F# G D E♭ E F F# G A♭ A B♭ B C C# D A B♭ B C C# D E♭ E F F# G A♭ A E F F# G A♭ A B♭ B C C# D E♭ E 현의 튜닝도 여러 가지가 쓰인다. 보통 저음의 현(6현)부터 E-A-D-G-B-E라는 표준 튜닝이 일반적이다. 이는 수많은 코드나 음계 등을 연주할 때 알맞은 튜닝으로 정착하고 있다. 보통 오른손잡이는 반대쪽 왼손으로 넥 부분을 잡고 현을 누르며 오른손으로 현을 탄현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갖출 필요는 없다. 왼손잡이인 사람은 가격, 상품 수 등이 크게 불리하기 때문에 왼손잡이용 기타를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오른손잡이에 맞춰진 기타에 기존의 반대 자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는 있지만, 전기 컨트롤러의 위치가 다를 수 있다. 현을 누르는 손은 넥 부분의 아래쪽을 빠져나가듯이 하여 엄지를 목 뒤쪽에 잡고, 집게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4개의 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클래식 스타일, 곧 기본 자세이다. 또 엄지를 넥 위쪽 핑거보드에 가깝게 목 부분을 잡는 스타일도 주로 록 음악에서 이용된다. 시각이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목의 아래쪽부터 손가락을 위치해 현을 누르지 않고, 위쪽부터 손가락을 감싸듯이 하여 현을 눌러 연주하는 연주인도 있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왼발을 발판에 실어 다리의 위치를 높여서 몸체 측면의 움푹한 곳을 왼발의 넓적다리에 실어 기타를 몸 전체로 감싸 안는 자세로 연주한다. 그 밖의 통기타나 전기 기타의 경우는 발판은 쓰지 않고 기타 측면의 움푹한 곳을 오른쪽 다리의 넓적다리에 실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 무대에서 클래식 기타는 반드시 의자에 앉아 연주하며, 그 밖에는 주로 기타 끈을 매고 어깨에 내려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재즈 기타리스트는 앉아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 때 빅 밴드 시대의 무대 형태의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록 음악인은 앉아서 연주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Guitar physics 분류:현울림악기 분류:발현악기 |
전자 우편 혹은 이메일 ()은 컴퓨터 통신망(주로 인터넷)을 통해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해당 편지를 일컫는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전자 메일 (Electronic mai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무료 이메일인 한메일이나 구글의 G메일처럼 해당 서비스에 가입함으로써 인터넷이 연결되면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웹 메일, 자신의 컴퓨터에 선택적으로 내려 받을 수 있는 POP3, 간단하게 메일을 보내는 SMTP 방식 등이 주로 쓰인다. PC통신 시절에는 유료로 아이디를 만들어서 전자 우편을 사용하곤 했다. 전자 우편은 인터넷의 발단으로 거슬로 올라가며, 사실 인터넷이 만들어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다.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원격 전화 접속 터미널에서 IBM 7094에 기록할 수 있게 하였고 디스크에서 온라인으로 파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능은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정보를 주고 받는 데 힘을 북돋어 주었다. 전자 우편은 1965년에 시분할 본체 컴퓨터의 여러 명의 사용자들을 위한 방법으로 시작했다. 이렇다 할 만한 역사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시설을 갖춘 첫 시스템들 사이에 SDC의 Q32와 MIT의 CTSS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자 우편은 빠르게 퍼져나가 네트워크 전자 우편 이 되었으며, 사용자들이 적어도 1966년까지 다른 컴퓨터들 사이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허용하였다. (SAGE 시스템이 이전에 이와 비슷한 것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파넷(ARPANET) 컴퓨터 네트워크는 전자 우편의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 1969년에 실험적인 교환 시스템 전자 우편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전송된다는 보고가 있다. 1971년에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은 컴퓨터와 사용자의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 @ 사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파넷은 전자 우편의 대중성을 점진적으로 늘려 나갔으며 아파넷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현대적 형태의 전자 우편은 1979년, 당시 14살의 인도계 미국인인 시바 아야두라이(V.A. Shiva Ayyadurai)에 의해 구상되었다. 뉴저지 의치과대학(University of Medicine and Dentistry of New Jersey) 컴퓨터네크워크 연구소(LCN)에서 프로젝트를 담당한 시바는 포트란을 이용해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제목, 파일 첨부, 내용, 발신함, 수신함, 임시보관함, 주소록 등과 같은 현대적 형태의 전자 우편을 구현하였다. 이에 대한 공헌으로 1981년에 웨스팅하우스 과학상(Westinghouse Award)을 수상하였으며, 1982년 8월 30일, 미국 저작권협회로부터 이것에 대한 저작권을 승인받았다. 오늘날 전자우편의 기원에 관해서 일부 논란이 되고 있다. 전자우편 주소는 아이디@메일서버이름 의 형식이다. 전자우편 주소의 아이디로 한글 등 영문 외 문자를 지원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영문, 숫자, 일부 기호만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메일서버이름(domain)은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고 아이디(local-part)는 대소문자를 구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메일 서비스들은 아이디도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무료 전자 메일 서비스로는 전 세계적으로 야후! 메일, MSN 핫메일, 구글 G메일 등이 많이 쓰이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에서 무료 전자 메일 서비스를 운영한다. 메일링 리스트 이메일 클라이언트 전자 우편 주소 스팸 메일 웹 메일 분류:인터넷 용어 분류:미국의 발명품 |
벡터 ()는 크기 만으로 나타낼 수 있는 스칼라()와 달리 방향과 크기를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벡터는 유향선분(방향이 있는 선분 즉, 화살표)를 써서 표현할 수 있다. 벡터 는 물리학과 공학에서 방향과 크기를 나타낸다. 벡터 는 선형대수학에서 크기가 n ×1(열벡터) 과 1× n (행벡터)인 행렬을 일컫는다. 방향량 (方向量)이라고도 한다. 벡터 는 수학과 천문학에서 동경(動徑. 벡터 는 분자생물학에서 유전 물질의 운반자이다. 벡터 는 의학에서 병균의 매개 동물. 벡터 는 무전에 의한 유도(誘導) 또는 항공기의 진로. 컴퓨터에서 벡터 는 화상의 표현 요소로서의 방향을 지닌 선. 선그림. 컴퓨터에서 벡터는 또한 동적 배열 자료구조를 뜻하기도 한다. * 동적 배열의 일종인 벡터는 표준 템플릿 라이브러리의 자료형이다. 인공 지능의 기계 학습 분야 * 벡터 는 기계 학습 분야에서 입력 데이터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벡터 는 일본의 기업이다. 벡터 는 소닉 더 헤지호그에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벡터 는 TDI사에서 제작 한 기관단총이다. |
행렬의 특정 성분은 보통 문자에 두 개의 첨자를 붙여서 표시한다. 예를 들어, a 2,1 는 행렬 의 2행 1열에 위치한 원소를 가리킨다. 수학에서, 행렬 (行列은 수나 기호, 수식 등을 네모꼴로 배열한 것으로, 괄호로 묶어 표시한다. 다음 여섯 개의 원소를 가진 2 × 3 행렬의 예이다. 크기와 모양이 같은 행렬은 원소별로 더하거나 뺄 수 있다. 행렬을 곱하는 방법은 더 복잡하며, 앞선 행렬의 열의 수와 뒤선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을 때에만 곱셈이 행해진다. 선형변환(와 같은 일차함수의 일반화)의 행렬 표현은 행렬의 중요한 응용이다. 선형 변환의 예인 삼차원 공간 벡터의 회전은 회전행렬로 나타낼 수 있다. R 이 회전행렬, v 가 공간 위 점의 위치를 가리키는 열벡터(한 개의 열로 된 행렬)라고 하면, 곱 Rv 은 회전 후의 점의 위치를 가리키는 새 열벡터이다. 두 행렬의 곱은 두 선형 변환의 합성을 나타낸다. 행렬은 또한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에도 응용된다. 정사각행렬의 일부 성질은 그 행렬식을 계산함으로써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행렬의 가역성 문제는 행렬식의 값이 0인지 아닌지로 전환할 수 있다. 선형 변환에 대한 기하학적 통찰은 그 고유벡터와 고유값을 찾아냄으로써 얻어낼 수 있다. 행렬은 과학의 곳곳에서 그 응용 분야가 발견된다. 물리학에서는 전기 회로, 광학, 양자 역학 등에서 쓰이고, 컴퓨터 그래픽스에서는 3차원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 투영하거나 사실적인 움직임을 그려내기 위해서 사용한다. 행렬 미적분학의 발견으로 미분이나 지수 함수 같은 고전 해석학적 개념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일반화시키기도 했다. 수치해석학의 한 분과에서는 몇 세기 전부터 수학자들이 관심가져 왔던 더 효율적인 행렬 계산법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행렬 분해법(Matrix decomposition methods)은 행렬의 계산을 이론과 실응용 부문 모두에서 단순화시켰고, 특정한 구조의 행렬에 맞춤화된 알고리즘(예 희소행렬, 대각행렬 등)은 유한요소법 및 다른 계산 분야에 진척을 가져왔다. 행성 이론이나 원자론에서는 무한 행렬도 등장하는데, 함수의 테일러 전개에 작용하는 미분 연산자의 행렬이 그 예다. 1848년 수학에 처음으로 실베스터가 사용한 행렬(matrix)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해부학에서 자궁(子宮,모체母體)을 뜻한다. 행렬식에대해서 행렬의 의미를 표현한것으로 전해진다. 행렬 안에 배열된 구성원들을 성분 () 또는 항 , 원소 ()라고 한다. 행렬의 가로줄을 행 (行, 세로줄을 열 (列이라고 한다. m 개의 행, n 개의 열로 이루어진 행렬을 m × n 행렬 이라고 한다. 한 행 또는 한 열 뿐인 행렬을 벡터에 빗대어 행벡터 (row vector), 열벡터 (column vector) 라고 한다. 행과 열의 개수가 같은 행렬을 ( n 차) 정사각행렬 또는 정방행렬 이라고 한다. 위에서 아래로 i 번째인 행을 i 행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j 번째인 열을 j 열 이라고 한다. i 행 j 열에 위치한 성분을 ( i , j ) 성분 이라고 한다. 행과 열의 지표수가 같은 성분을 대각성분 ( 대각항 또는 대각요소 (main diagonal)라고 한다. 예를 들어 행렬 은 3 × 4 행렬이고, 5를 (2, 3) 성분으로 한다. 행렬 은 각각 1 × 5 행벡터, 3 × 1 열벡터이다. 행렬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하고 대괄호나 소괄호등 괄호형태로 감싸 표기한다. 행렬은 주로 대문자로 나타내고, 다른 대상과의 구별을 위해 굵은 글씨체를 자주 사용한다(예 , 또는 ). 행렬의 각 성분은 문자에 행과 열의 지표를 첨수하여 나타낸다(예 , 또는 ). 모든 항을 나열하는 대신, 일반항 을 간추려 표기하기도 한다. 이때 불분명해진 지표의 범위를 표기해줄 수 있다. 행렬의 표기는 행렬의 성분이 직사각형 모양의 행과 열로 배열된것을 의미하는것을 표현하기위해 일반적으로 대괄호나 중괄호등 괄호형태로 감싸 표기하지만 간혹 감싸는 표기자체를 생략한 경우도 있다. 행렬은 엄밀하게는 정수의 순서쌍 ( i , j )(1 ≤ i ≤ m , 1 ≤ j ≤ n )의 집합에서 성분들이 속하는 집합으로 가는 함수로 정의된다. 실행렬(모든 성분이 실수인 행렬)을 예로 들면, :: (여기서 )따라서 모든 m × n 실행렬의 집합은 m × n 에서 로 가는 함수의 집합임을 나타내는 으로 표기한다. 행렬의 상등 의 의미도 함수 정의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두 실행렬 이 일 필요충분조건은, m q , 그리고 aij = bij 가 모든 정수 순서쌍 ( i , j )(1 ≤ i ≤ m , 1 ≤ j ≤ n )에 대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두 m × n 행렬 와 에 대해, 덧셈과 뺄셈은 각각 성분별 덧셈과 뺄셈으로 정의된다. 즉, 예를 들어, 크기가 다른 행렬들에게는 덧셈과 뺄셈이 정의되지 않는다. 주어진 m × n 행렬 와 스칼라 에 대해, 스칼라배 연산은 성분별로 스칼라배를 취한 것으로 정의된다. 즉, 예를 들어, 와 을 스칼라, 를 크기가 같은 행렬이라 하자. 이때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이들 성질은 모두 그 행렬 성분의 성질로부터 유도된다. 이를테면 덧셈의 교환법칙은 다음과 같이 유도된다. 행렬 A 와 B 의 곱 AB 의 계산법 주어진 m × n 행렬 와 n × p 행렬 의 곱은 m × p 행렬이며, 각 ( i , j ) 성분은 의 행벡터와 의 열벡터의 점곱으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왼쪽의 행렬의 열수와 오른쪽의 행렬의 행수가 같지 않다면, 곱셈은 정의되지 않는다. 를 스칼라, 를 각 공식에서 연산이 정의되도록 크기를 정한 행렬이라고 하자. 이때 다음이 성립한다. 행렬의 곱셈은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우선, 가 정의되었어도, 는 정의되지 않았을 수 있다. 둘 모두 정의되었어도, 크기가 다를 수 있다. 크기가 같은 경우(즉 와 가 같은 크기의 정사각행렬인 경우)에도, 두 곱셈의 결과값은 다를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다만, 특수한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에는 교환법칙이 성립한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할 때 행과 열의 개수가 같은 정사각행렬 A 와 B 에 대해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한다. 이면 이다. ( E 는 단위행렬)이면 이다. 이면 이다. (p, q는 실수) 이면 이다. 이면 이다. 위의 조건들은 충분조건이다. 즉, 정사각행렬 A 와 B 가 위의 조건을 만족할 때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하지만,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하는 모든 행렬이 위의 조건을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곱셈의 교환조건을 만족하는 정사각행렬 A 와 B 는 다음의 교환법칙을 만족하고 그 역도 만족한다. 즉 다음의 식에 대해 필요충분조건을 이룬다. 행렬 와 에서, 이고, 이다. 스칼라 는, 이고, 이다. 행렬의 전치란 행과 열을 바꾸는 것으로, 행렬 A 의 전치는 A T 로 나타낸다. 즉 주어진 m × n 행렬 A 의 전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A T 는 m × n 행렬이 아니라 n × m 행렬임에 유의하자. 예를 들어, a 를 스칼라, A , B 를 크기가 같은 행렬이라 하자. 이때 다음이 성립한다. # ( A T ) T = A # ( A + B ) T = A T + B T # ( A - B ) T = A T - B T # ( a A ) T = a A T # ( AB ) T = B T A T 벡터 행렬에서, 행 벡터를 행렬 , 즉의 단일 행으로 구성된 행렬이고, 마찬가지로, 열 벡터를 행렬, 즉, 열의 단일 열로 구성된 행렬로 예약해보면, 행(row)벡터(vector)는 이고 또는 열(column)벡터는 일때, 대각합이란 정사각행렬의 대각항들의 원소를 전부 더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n차 정사각행렬 A 의 대각합은 다음과 같다. c 를 스칼라, A , B 를 크기가 같은 정사각행렬이라 하자. 이때 다음이 성립한다. # tr( A T ) = tr( A ) # tr( c A ) = c tr( A ) # tr( A + B ) = tr( A ) + tr( B ) # tr( A - B ) = tr( A ) - tr( B ) # tr( AB ) = tr( BA ) 행렬식은 또는 로 표시하며 선형 행렬 A의 크기를 나타낸다. 행렬 2x2 행렬 A가 와 같이 주어진다면, det(A)는 와 같이 정의된다. 영행렬 이란 행렬의 모든 원소의 값이 0인 행렬을 말한다. 영행렬은 덧셈에 대한 항등원이다. 단위행렬 은 정사각행렬 중에서 행 번호와 열 번호가 같은 위치의 값은 1이고, 나머지는 0을 가지는 행렬을 말한다. 이 행렬은 곱셈에 대한 항등원이다. 역행렬 이란 어떤 행렬의 곱셈에 대한 역원이다. *삼각행렬 *대각행렬 *사다리꼴행렬 가역행렬 *행렬식 *크라메르 공식 *소행렬식 *헤밀턴의 사원수 *가우스의 행렬 소거법 *밴드 행렬 분류:선형대수학 |
요리 (料理는 먹기 좋게 가공한 음식 혹은 그 가공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크게 나누어 지역별로, 시대별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각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터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들고 시식 후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요리 는 여러 조리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그 음식을 말하며 주로 가열한 것을 말한다. 조리 (調理)는 요리를 만드는 일이나 그 방법, 과정 등을 말한다. 음식의 조리법을 뜻하는 레서피 (레시피)()는 조리법 으로 순화어를 쓰도록 되었다. 문명이 출현하면서 사회집단 또는 부족에 따라서 전통적인 요리법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기후, 토양, 동물 분포와 같은 지역적인 요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전통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가와 자신들의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 금기를 지키는가에 따라서 요리법이 달라지기도 했다. 전통 음식은 국가, 지역별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동아시아 한국 요리 중국 요리 일본 요리 몽골 요리 티베트 요리 동남아시아 라오스 요리 베트남 요리 태국 요리 필리핀 요리 인도네시아 요리 캄보디아 요리 남아시아 네팔 요리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서아시아 레바논 요리 바레인 요리 예멘 요리 오만 요리 이라크 요리 이스라엘 요리 쿠웨이트 요리 파키스탄 요리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요리 타지기스탄 요리 투르크메니스탄 요리 카자흐스탄 요리 양식 북유럽 덴마크 요리 라트비아 요리 스웨덴 요리 노르웨이 요리 핀란드 요리 아이슬란드 요리 서유럽 덴마크 요리 영국 요리 네덜란드 요리 독일 요리 룩셈부르크 요리 벨기에 요리 산마리노 요리 아일랜드 요리 오스트리아 요리 이탈리아 요리 프랑스 요리 스위스 요리 남유럽 스페인 요리 포르투갈 요리 그리스 요리 마케도니아 요리 몬테네그로 요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요리 중앙유럽 루마니아 요리 세르비아 요리 슬로바키아 요리 체코 요리 폴란드 요리 헝가리 요리 동유럽 및 슬라브 요리 조지아 요리 터키 요리 러시아 요리 에스토니아 요리 북아메리카 미국 요리 푸에르토리코 요리 캐나다 요리 라틴아메리카 과테말라 요리 니카라과 요리 멕시코 요리 베네수엘라 요리 브라질 요리 아르헨티나 요리 엘살바도르 요리 온두라스 요리 우루과이 요리 칠레 요리 파나마 요리 페루 요리 코스타리카 요리 쿠바 요리 콜롬비아 요리 가나 요리 나미비아 요리 나이지리아 요리 남아공의 요리 모로코 요리 부르키나파소의 요리 세네갈 요리 소말릴란드 요리 소말리아 요리 시에라리온 요리 우간다 요리 이집트 요리 에리트레아 요리 에티오피아 요리 카메룬 요리 콩고 민주 공화국 요리 튀니지 요리 인스턴트 식품 패스트 푸드 요리법 조리 조리법 취미 |
중국 요리 (中國料理), 중화요리 (中華料理), 또는 청요리 (淸料理)는 흔히 중국의 음식을 말한다. 중국의 화교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세계 지역의 특성에 맞게 바꾼 요리를 말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중궈차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국토가 아주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를 형성하였다. 잔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송나라의 그림. 이 그림은 당나라의 원본 그림을 고쳐 만든 것이다. 중국 요리 대부분은 적당한 크기로 손질되어 바로 집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전통적으로 중국 문화는 식탁에서 칼과 포크를 이용하는 것을 야만스럽게 본다. 이는 이런 도구들이 무기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손님이 직접 음식을 자르는 것도 무례한 것으로 여긴다. 생선 요리는 보통 완전히 요리되어 나오며 젓가락으로 살코기 덩어리를 집어 먹는다. 다른 종류의 요리는 보통 발라내서 먹는데 이와 대조된다. 가능한 신선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는 문화적으로 완전함을 상징하므로 머리와 꼬리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수많은 식당에서 두 개의 숟가락을 이용하여 고기를 나눠 식탁에 올려 놓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닭고기 또한 중국 요리에 있어 자주 사용되는 재료이다. 닭의 살코기를 여러 갈래로 찢어 놓아 벼슬까지 대접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완전함을 상징한다. noodle.JPG|섬네일|뉴러우몐(牛肉麵) Han Imperial Feast Tao Heung Museum of Food Culture.jpg|섬네일|만한전석(滿漢全席) fried rice by stu spivack in Cleveland, OH.jpg|섬네일|달걀차오판(蛋炒飯) 베이징 요리와 난징 요리와 쓰촨 요리와 광둥 요리가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산둥 요리, 후난 요리, 푸젠 요리, 회족들의 음식에서 유래한 칭전 요리가 있다. 베이징 요리 - 북경과 톈진과 산둥성에서 발달하여 황궁 요리가 유명하다. 난징 요리 - 남경과 항주와 소주와 양주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광둥 요리 - 광둥성을 중심으로 한 해안 지방에서 발달하였다. 쓰촨 요리 - 사천성을 중심으로 한 산악 지대의 풍토에 영향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사대 요리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화이양 요리 대신 저장 요리(江浙菜)가 손꼽히기도 한다. 산둥 요리 (魯菜) - 산둥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요리이다. 쓰촨 요리 (川菜) - 쓰촨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요리이다. 화이양 요리 (淮揚菜) - 장쑤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요리이다. 광둥 요리 (粵菜) - 광둥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요리다. 중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구분법은 중국 8대 요리이다. 산둥 요리 (魯菜) 장쑤 요리 (蘇菜) 저장 요리 (浙菜) 안후이 요리 (徽菜) 푸젠 요리 (閩菜) 광둥 요리 (粵菜) 후난 요리 (湘菜) 쓰촨 요리 (川菜) 베이징 요리 상하이 요리 식재를 다듬을 때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鬆 (송) 다진다. 片 (폔) 얇게 썬다. 絲 (쓰) 가늘게 자른다. 条 (탸오) 실보다 길게 하여 봉 모양으로 짧게 자른다. 丁 (딩) 각지게 자른다. 塊 (콰이) 덩어리 지게 자른다. 중화 요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를 한다. 炒 (차오) :기름의 양을 적게 해서 볶는다. 더 적게 해도 중화요리의 기준이지만, 한국인의 느낌으로 볼 때는 여전히 많다. 빨리 불을 통과하면서 조리하는 방법으로 대표적인 중화요리의 조리법이다. 溜 (류) :원료를 익힌 후 걸쭉한 전분으로 즙을 만들어 원료 위에 부어서 만든 다음 졸여서 즙이 비교적 많게 만들어 진한 맛을 나게 한다. 예) 류산슬 炸 (자) :튀김 조리법. 불을 균일하게 하여 고르게 튀기다가 재료가 크기와 모양을 갖추면 불을 줄이는 것 烹 (펑) 기름에 튀긴 재료를 살짝 끓인다. 爆 (바오) 차오(炒) 보다 더 센 불에 단숨에 볶는 방법 燴 (후이) 조리방법의 하나로, 졸여서 걸쭉한 국물을 만들어 완성한다. 氽 (툰) 기름으로 튀긴다. 燒 (사오) (식재료를) 찌거나 튀기거나 살짝 볶은 후에, 국물과 양념을 넣고 다시 볶거나 졸이다. 혹은 먼저 끓인 다음 다시 기름에 튀기는 방법 煮 (주) 끓인다. 燜 (먼) 기름에 튀기거나 재료를 끓인다. 炖 (둔) (불로) 끓여서 졸인다. 扒 (바) 조리법의 하나로 약한 불로 장시간 끓인다. 煎 (젠) 양면을 잘 굽는 조리법 蒸 (정) 찌고 증기를 통과 시키는 조리법 烤 (카오) 직화로 구운 토스트 조리법 (예, 베이징 카오야) 煨 (웨이) 조미료를 첨가, 장시간 약한 불로 끓인다. 涮 (솬) 얇게 썬 재료를 가볍게 끓인다. 샤부샤부한다. 卤 (루) 각종 조미료, 향료를 넣어 숙성한다. 拌 (반) 혼합하여 버무린다. 腌 (옌) 소금에 절인다. (넓게는) 된장, 간장 등을 바른다. 熏 (쉰) 醤 (장) 간장에 끓인다. 掛霜 (과솽) 채식주의는 서양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흔하지 않다. 중국 채식주의자들은 두부를 많이 먹는다. 중국의 채식주의자들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며 고통을 줄이는 불교적 가르침을 따른다. 중국의 채식주의적 요리는 커다랗고 다양한 야채를 포함하고 있으며 고기를 모방한 음식도 몇 가지 넣는다. 고기 모방 요리는 대부분 콩 단백질과 글루텐으로 만들어 오리, 닭, 돼지와 비슷한 모양과 맛을 낸다. 콘작을 이용한 해산물 모방 요리도 존재한다. 전통 중국 문화에서, 차가운 음료는 뜨거운 음식을 잘 소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차가운 물이나 청량 음료와 같은 액체는 전통적으로 식사 시간에는 취급하지 않는다. 죽이 나오면, 뜨거운 차나 뜨거운 물 등의 음료가 식탁에 오른다. 차는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맥주와 청량 음료를 중화 음식과 함께 널리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지방의 조그마한 식당의 많은 수가 찬 맥주에 핫 팟을 둔 렁단베이(冷淡杯)라는 음료를 취급하며 이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leaves steeping in a zhong čaj 05.jpg|섬네일|우롱차 중국에서 차는 아주 널리 사랑받고 있다. 북방지역에서는 화차, 상해와 절강성 등 중부지방에서는 녹차, 남부지방에서는 우롱차를 즐겨마신다. 이외에도 중국내 생산량의 1/4을 차지하는 홍차와 백차 등도 있다. 손님이 오면 주인은 거듭 석 잔을 권하는데, 처음 두 잔은 자유롭게 마셔도 되지만 마지막 잔은 한 번에 마시는 것이 예절이다. 황주는 3~4천 년의 역사가 있는 술로 곡식으로 제조하는 발효주이며 종류가 다양한데 홍여주가 유명하다. 백주는 천 년의 역사가 있는 곡주로 40도 이상의 증류주로 무색투명하며 특이한 향이 난다. 우량이에, 마오타이가 유명하다. 포도주도 2천 년의 역사가 있으며 장백산 포도주, 통화 포도주 등이 있다. 중국의 맥주 생산량은 세계 3위를 차지한 적도 있는데, 청도맥주, 오성맥주가 유명하다. 보통 식사가 나오기전에 건배를 하며,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면 즉시 따라 주는데, 비우지 않았는데도 첨잔하며 계속 권한다. 술잔은 술을 마신 후 밑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주인이 손님에게 권한다. 보통 만찬을 위한 식당에 가면 요리가 나오는 순서가 있는데, 보통 차가운 요리를 먼저 내온 후 더운 요리를 내온다. 더운 요리도 흔히 먹는 볶음요리(热炒)가 먼저 나오고, 가장 중요한 주요리는 그 다음에 나온다. 주요리는 해삼, 전복, 샥스핀, 제비집 등으로 만든 고급 요리 또는 오리나 돼지를 재료로 만든 요리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요리 중간 중간에 디옌신(딤섬)이 나오는데 보통 식욕을 돋우기 위하여 짠맛의 디옌신이 올라오고, 단맛의 디옌신은 디저트로 먹는다. 주요리가 끝나면 밥이나 면으로 식사를 하는데, 요리가 충분하면 건너뛰고 탕을 마신다. 그 다음 단맛이 나는 디저트와 과일을 먹는다. 주문을 할 때에는 이 순서를 고려해서 냉채, 볶음요리, 주요리, 디예신을 각각 선택을 하되, 보통 사람 수 만큼의 주요리를 시키면 적당하다. 일반적으로 식단은 전채 2~4종, 탕 6~8종, 디저트 2종 등 짝수로 나오는데,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내어 먹는다. 보통 손님이 먼저 덜고 주인이 나중에 덜어 낸다. 요리는 한 접시에 한 가지씩만 먹고 여러 요리를 한 꺼번에 가져다 먹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 섞이지 않도록 접시를 바꾸어 먹는데, 접시를 들고 먹거나 국수를 소리내어 먹거나 죽 종류는 그릇을 입에 대고 먹지는 않는다. 생선을 먹을 때에는 뒤집어서 먹지 않는데, 이는 배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How to Cook and Eat in Chinese , Buwei Yang Chao, first ed. 1945년. Chinese Table Manners - You Are How You Eat , Eugene Cooper. 1986년 한국식 중국 요리 미국식 중국 요리 타이완 요리 중국 요리 八大菜系 분류:아시아 요리 |
짜장면 (작장면, 또는 자장면 은 양파, 양배추 등 채소와 돼지고기에 춘장을 넣어 식용유와 함께 볶은 양념을 굵은 국수에 비벼서 먹는 한국식 중국 요리이다. 굵은 국수에 검은 색에 가까운 양념을 얹어 비벼 먹는다. 국수 짜장면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늘려 만든 굵은 국수가락을 사용한다. 스파게티 면보다는 굵고 우동 면보다는 가늘다. 양념 돼지고기, 양파, 양배추 등에 춘장을 넣어 식용유와 함께 볶아 만든다. 짜장면 1인분의 열량은 대략 700kcal 정도로, 이는 한국 성인 기준 남자 1일 섭취량의 28%, 여자의 35%이다. 종류는 다양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간짜장 (←) 물과 전분을 넣는 대신 춘장을 기름에 볶아서 만든다. 국수하고 짜장소스가 따로 나온다. 기호에 따라 달걀 프라이를 곁들이는 경우도 있다. 삼선짜장 (三鮮-) 생선을 제외한 새우, 오징어, 해삼, 미더덕과 같은 해산물을 넣어 만든다. 유니짜장 (←) 채소와 고기를 잘게 갈아 넣은 부드러운 짜장이다. 유니 는 다진 고기를 뜻하는 중국어 肉泥의 산둥 지방의 발음에서 온 말이다. 유슬짜장 (←) 재료를 실처럼 가늘고 길쭉하게 채썰어서 국수와 같이 볶아 납작한 접시에 올려진 짜장이다. 유슬 은 길게 채썬 고기란 뜻의 중국어 肉絲의 산둥 지방의 발음에서 온 말이다. 옛날짜장 옛날 형태의 짜장면으로 소스가 묽은 편이고 감자가 들어가 있어 춘장의 맛이 부드럽다. 사천짜장 (四川-) 쓰촨 요리와 같이, 맵게 만든 짜장이다. 짜장에 겨자 또는 고추를 넣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춘장과 두반장을 섞어서 하거나 혹은 춘장 대신 두반장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쟁반짜장 큰 쟁반에 볶은 짜장을 올려 여럿이 같이 먹는 짜장면이다. 대표적으로 해물 쟁반짜장 이 있다. 짜장밥 국수 대신 밥에 짜장을 비벼먹는 음식이다. 짜장면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공되어 짜장라면(짜파게티, 짜짜로니 등)이 판매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반 짜장면에 다양한 토핑을 얹어서 먹는 종류의 짜장면도 있다. by stu spivack.jpg|짜장면 black bean noodle dish-Jaengban Jajangmyeon-01.jpg|쟁반짜장 topped with Samgyeopsal.jpg|삼겹살 짜장면 상차림 짜장면박물관 (구 공화춘 건물) 짜장면은 중국의 산둥 반도 지역의 가정식이었던 작장면()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하여 만들어진 음식이다. 지금도 베이징에서는 라오베이징자쟝몐다왕(老北京炸醬麵大王)등 전문점이 산동식 자쟝몐을 판다.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 온 부두 근로자인 쿠리(苦力·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작이었다. 이후 청조계지를 중심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식음식점이 많이 생겼는데, 흔히 원조 짜장면 집 으로 알려진 공화춘은 1905년에 문을 열었다. 1948년 영화장유가 창업하여 짜장면용 면장을 만들어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영화장유의 사장 왕송산은 춘장에 캐러멜을 넣어 단맛이 나도록 하고 사자표 춘장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짜장면은 여러모로 중국의 자쟝몐과는 다른 음식이 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펼친 분식장려운동과 조리 시간이 비교적 짧은 점이 산업화 시대와 맞아 떨어지면서 짜장면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짜장면은 저렴한 가격에 어디서나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북극해 횡단을 3개월 만에 마친 등산가 허영호씨는 인터뷰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짜장면을 꼽기도 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는 서민들이 외식할 때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각광 받았으며, 특히 입학·졸업·생일을 축하할 때, 이사를 가는 날 등에 가족들이 같이 즐겨 먹었다. god의 1집에 수록된 《어머님께》에서도 짜장면을 통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살인의 추억》과 드라마 《환상의 커플》 등 많은 작품에서 짜장면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서는 중화요리의 대를 이어온 화교 삼부자 이야기에 등장했다. 문교부(현 교육부)가 1986년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과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장면’만이 표준어이고 맞춤법에 맞는 표기로 실려 있었다. 국립국어원 박용찬의 설명에 따르면, 자장면은 짬뽕과는 달리, 중국 된장을 가리키는 자장 과 한자어인 면(麵) 이 결합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002년에 발행된 표준 발음 실태 조사(최혜원,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서울·경기 지방 사람 210명 중, 72%가 자장면 대신 짜장면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시인 안도현은 그의 작품 《짜장면》의 제목과 관련해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썼다. 그 밖에도 “짜장면은 자장면으로 쓰면서 짬뽕은 왜 잠봉이 아닌가 의문이 들게 만든다"면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비판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편, 2009년 5월 17일, SBS TV의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인 SBS 스페셜의 164회 자장면 의 진실에서 짜장면 이란 표기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해당 프로그램에서 자체적으로 자장면 과 짜장면 의 표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응답자 중 91.8%가 짜장면 으로 부르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은 아나운서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 자장면 에 비해 짜장면 이 실생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현실을 수용해 짜장면 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짜장면의 물가 지수 변화 1963년 무렵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은 20 - 30 원 정도였다. 2010년 가격을 100으로 하였을 때 짜장면의 물가 지수 변화는 아래의 표와 같다. 연도 물가지수 비고 2013년 110.15 5,000 원 2012년 108.26 4,500 원 2011년 107.0 2010년 100.0 3,900 원 2009년 98.768 2008년 97.067 2007년 85.839 2006년 82.749 2005년 81.674 2004년 81.331 2003년 79.463 2002년 71.938 2001년 67.929 2000년 67.091 1999년 66.150 1998년 68.575 1997년 60.125 1996년 56.790 1995년 52.241 1,900 원 1994년 49.011 1993년 44.440 1992년 41.096 1991년 36.795 1990년 30.391 1989년 25.119 1,200 원 1988년 21.236 1987년 18.889 1986년 18.032 1985년 17.222 1984년 15.925 1983년 14.732 1982년 14.780 1981년 9.756 1980년 7.788 500 원 1979년 5.720 1978년 5.455 1977년 5.455 1976년 4.271 1975년 3.870 210 원 한국 요리 한국식 중국 요리 블랙데이 탕수육 공화춘 짬뽕 짬짜면 작장면 분류:볶음국수 분류:비빔국수 분류:한국식 중국 요리 분류:한국의 국수 요리 |
블랙데이 (Black Day)는 매년 4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대중 문화에서 매월 14일째 되는 날 일정한 의미를 담아 특별한 행동을 하는 비공식 기념일의 일종이다. 2월 14일인 발렌타인데이와 3월 14일인 화이트데이 바로 다음에 돌아오는 14일이라는 점에서 그 두 기념일의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블랙데이 다음에 돌아오는 5월 14일은 로즈데이이다. 블랙데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90년대 신문 기사들로, 어느 신문은 블랙데이에 대해 “애인이 없는 남녀 청소년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짜장면과 블랙 커피등 검은색 계통의 음식을 먹으며 서로 위로하는 날”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청소년 사이에서 시작된 유행이 2000년대 들어 2-30대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아니냐 하는 해석도 있다. 블랙데이 라는 명칭은 화이트데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커플들의 기념일인 3월 14일 화이트데이와는 정 반대로, 한달 뒤 솔로들의 날인 4월 14일을 화이트의 반대인 블랙으로 비튼 것이다. 한편 솔로의 우울함을 블랙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여느 데이 와 마찬가지로, 빼빼로데이처럼 마케팅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으나, 특정회사의 독점 상품이 아닌 일반적인 짜장면이기 때문에 비판의 근거는 약한 편이다. 실제로 중국집(Chinese restaurant)들이 블랙데이 기념으로 특별히 짜장면을 판촉하지도 않으며, 이날에 한해 매출이 크게 오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데이 로즈데이 분류:대한민국의 기념일 분류:비공식 기념일 분류:4월의 기념일 |
에릭 레이먼드가 쓴 〈 성당과 시장 〉(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은 자유 소프트웨어 철학을 대변하는 유명한 글이다. 레이먼드는 이 글에서 리눅스 커널 개발과정과 패치메일이라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개발한 경험을 들어 오픈 소스 개발 방식의 유효성을 설명한다. 1997년 5월 27일 리눅스 회의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1999년 같은 이름의 책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글에서 저자는 두 가지 방식의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을 대조한다. 성당 모델 출시 때에만 소스 코드를 공개하고 그 사이에는 제한된 개발자들만 소스 코드에 접근할 수 있다. GNU 이맥스와 GNU 컴파일러 모음이 예이다. 시장 모델 소스 코드가 인터넷으로 일반에 공개된 상태로 개발된다. 레이몬드는 리눅스 커널 프로젝트의 리더인 리누스 투르발스가 이 방식을 발명해 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또한 페치메일 프로젝트에 자신이 이 모델을 적용한 이야기도 쓰고 있다. 글의 주제는 그가 리누스 법칙이라고 이름붙인 "보는 눈만 많다면, 어떤 버그라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테스트하고 훑어보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 코드가 공개되어 있으면 버그는 빨리 잡힐 것이란 뜻이다. 이에 대해 성당 모델에서는 소스 코드를 여러 명의 개발자들만 볼 수 있으므로 버그를 잡는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주장했다. 이 글로 인해 GNU 이맥스와 GCC를 포함한 많은 오픈 소스와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들이 시장식의 열린 개발 모델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넷스케이프가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의 소스를 공개한 것과 모질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성당 모델은 상용 소프트웨어의 전형적인 개발 방식이다. 더욱이 상용 소프트웨어는 보통 출시 때 소스가 같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과 성당"이라는 구문은 종종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와 상용 소프트웨어를 비유하는 데에 쓰인다. 그러나 원래 글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들 중에 두 종류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상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성당과 시장의 예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키백과는 시장식의 프로젝트이고, 누피디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당형의 프로젝트이다. 〈성당과 시장〉, 1.31.2 버전, KLDP 위키, 2001.( 그누)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1997년 책 분류:1999년 책 |
에릭 레이먼드 (Eric Steven Raymond, ESR , 1957년 12월 4일 ~ )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인류학자이며 오픈 소스 개발 과정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반복되는지 설명한 그의 초기 문서인 성당과 시장의 저자로 잘 알려진 오픈 소스 운동의 대표 인물이다. 해커들이 쓰는 용어를 설명한 자곤 파일("신 해커사전")을 편집했으며, 넷스케이프의 소스 코드 공개, 모질라의 설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현재 태권도 검은 띠의 소유자이다. 《성당과 시장》 《The New Hacker s Dictionary》 《The Art of Unix Programming》 에릭 레이먼드의 홈페이지 에릭 레이먼드의 블로그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레이먼드, 에릭 분류:살아있는 사람 레이먼드, 에릭 레이먼드, 에릭 레이먼드, 에릭 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분류:보스턴 출신 분류:미국의 블로거 분류:뇌성마비 환자 |
온라인 게임 (online game은 각종 네트워크로 하는 멀티 플레이 게임이며, 컴퓨터, 휴대전화, 휴대용 게임기 등 다양한 기기에서 각자 다양한 장르의 온라인 게임을 지원한다. MUD 웹게임 MMORPG MMOFPS RTS FPS TPS 레이싱 게임 스포츠 게임 격투 게임 액션 게임 어드벤처 게임 액션 어드벤처 게임 음악 게임 슈팅 게임 퍼즐 게임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사람들이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과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꾸미기 위해서(35%)이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32%), 빠른 성장(18%), 경쟁심(15%)의 이유도 있다. 과금하면 만족한다고 답한 사용자는 39%였고 아니라고 답한 사용자는 20%였다. 과금하지 않는 사용자들은 돈이 아깝거나(33%)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26%) 과금 없이도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19%)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다. 한편 과금이 지나친 경우 피로감을 느낀 이용자가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게임을 찾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 게임 목록 오프라인 게임 MMORPG 주소 성명록 cool math games online free |
송두율 (宋斗律, 독문명 Song Du-yul , 1944년 10월 12일 ~ )은 한국계 독일인 사회학자, 철학자로, 현재 독일 뮌스터 대학의 사회학, 철학 교수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독일식 이름은 Du-yul Song (두율 송)이다. 1944년 10월 12일 일본 도쿄도 아라카와 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제주도 출신이다. 아버지 송계범은 일본 도쿄 물리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 경성제국대학 물리학부에서 근무하였다. 송계범이 한국 전쟁 이후 전남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송두율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광주에 거주하며 광주 중앙초등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서울로 이주해, 경기고등학교 입시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동고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훗날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된 최재석이었다. 교사 송찬식(후에 국민대 사학과교수)의 권유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하면서 대학 시절 59학번이던 김지하와 알게 된다. 1967년 독일로 유학해 1972년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 뮌스터대학의 사회학과에서 조교수로 채용되어 정치경제학, 사회학방법론, 후진국사회학을 강의했으며, 뮌스터에서 정정희와 결혼하여 준과 린 두 아들을 낳았다. 1973년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이후 총 18회 북한을 방문하였다. 독일에서 한국 학술원을 운영하며 북한에서 지원금을 받았다. 1974년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으며, 본에서 벌어진 유신 독재 반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1977년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81년 공산주의에 대해 내재적 방법으로 비판적인 분석을 한 논문 소련과 중국 을 발표하였고, 1982년 1월 사회학교수자격논문을 마무리하여 교수자격을 받았다. 1988년과 1989년에는 미국의 롱아일랜드대학 철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1991년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김일성과 대면하였다. 1994년부터 베를린 홈볼트대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1997년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김일성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북한을 방문하였다. 2003년 한국에 귀국했으나,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서울지방법원 최완주 부장판사는 2003년 10월22일 "범죄사실이 소명되나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해 증거인멸 우려가 있고 높은 처단형이 예상돼 도주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받아 기소되었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는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은 살아온 과정 등을 볼 때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나도 존경한다 고 진술하였다. 2004년 7월 21일 2심 재판부(서울고법, 재판장 김용균 부장판사)는 기소된 사건 내용중 방북사실을 제외한 간첨혐의 등 대부분을 무죄로 판정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그날로 송 교수는 구속 9개월 만에 석방됐고, 2004년 8월 초에 부인과 함께 독일로 출국했다. 2004년 7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송두율은 "2003년 10월24일~11월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포승줄과 수갑에 묶인 채 검찰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는 등 부당한 계구 사용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는 등의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12단독 최지수 판사는 2005년 1월 7일 "당시 정황상 송두율이 도주하거나 폭행할 우려가 없었는데도 계구를 사용한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국가는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의자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 계구 사용은 합리적이고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해 최소범위에서 허용돼야 한다 무리한 계구 사용은 피의자의 심리를 위축시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는 송두율에게 1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88단독 김래니 판사는 조사과정의 변호인 입회를 불허한 검사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구속상태에 처한 피의자에게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은 인권보장과 방어준비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권리이다"라고 하면서“국가는 500만원, 관련 검사 4명은 각각 100만원씩 모두 9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송두율 측 변호인단은 2003년 10월 송두율이 구속수감된 이후 검찰이 보안을 이유로 변호인 입회를 허용하지 않자 "입회불허 결정을 취소하라"는 준항고를 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변호인 입회불허 취소를 결정했다. 2008년 4월 17일 상고심(2004도4899)에서 외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다가 북한에 간것은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일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2008년 8월 24일 서울고법은 확정 판결을 내렸다. 2009년 여름 학기를 끝으로 뮌스터 대학에서 퇴임했다. 60년대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시도한 유신 체제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반체제 인사로 낙인이 찍혔다. 이후 독일에 머물며, 남한과 북한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일련의 저서를 썼다. 그 안에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론을 내세우며 한국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5년부터 베이징에서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 학술적인 교류를 갖는 남한/북한 학술 회의를 주도했다. 1972년 철학 박사 학위 논문 〈Aufklärung und Emanzipation Die Bedeutung der asiatischen Welt bei Hegel, Marx und M. Weber〉, Berlin:X-Press, 1987 논문의 지도교수는 위르겐 하버마스이다. 계몽과 해방-헤겔과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세계관/ 한길사, - 1988 (236쪽)-원문을 번역하고 ‘1985년 추고’를 덧붙임 계몽과 해방, 당대, 1996 (264쪽) 위 번역본에다 2편의 논문을 덧붙인 개정증보판으로 한국어판 ‘정본’ 1980, (송두율 편) Wachstum, Diktatur und Ideologie in Korea (대한민국 내 성장, 독재 그리고 이데올로기) 1982, 사회학 ‘교수 자격(venia legendi)’ 획득 교수 자격 논문(Habilitation-Schrift), 1981년 제출 - Sowjetunion und China Egalisierung und Differenzierung im Sozialismus (소련과 중국-사회주의내에서 평등화와 차등화), Frankfurt am Main:Campus, 1984 윤도현, 이성백 옮김, 소련과 중국-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농민·지식인/ 한길사, 1990 (302쪽) 1990, Metamorphosen der Moderne Betrachtungen eines Grenzgängers Asien und Europa (근대의 변형-아시아와 유럽사이에서 한 경계인의 고찰), Münster:Wulf-Verlag 1990, 현대와 사상-사회주의·(탈)현대·민족/ 한길사 (324쪽) 1991,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 한길사 (228쪽) 1995, Korea-Kaleidoskop Aktuelle Kontexte zur Wiedervereingung (한국이라는 거울 통일에 관한 현실적 맥락), Osnabrück 1995, 역사는 끝났는가/ 당대 (378쪽) 현대와 사상”에서 5편,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에서 3편을 재수록 1995,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한겨레신문사 1998, 21세기와의 대화/ 한겨레신문사 (271쪽) 2000,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신문사 (309쪽)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의 개정판 준비하려다가 새 책 집필 (송두율 편) Südkorea Kein Land für friedliche Spiele (남한 평화로운 놀이가 없는 땅 ) 2002, Schattierungen der Moderne Ost-West-Dialoge in Philosophie, Soziologie und Politik (현대의 명암 철학, 사회학 그리고 정치학에서 동-서 대화), 2002, 경계인의 사색/ 한겨레신문사 (295쪽) - 위 독일어 저서에서 5편의 글을 뽑아 이 책의 ‘4부’에 실었다. 2007,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후마니타스 (출간예정) Konstitution der Moderne (현대성의 구성) 2012, 境界人の眼から見たカントの世界市民主義 in カント研究会 編、石川求・寺田俊郎 編著, 世界市民の哲学 (現代カント研究12), 晃洋書房(京都), pp. 137-163 2012. Korea - von der Kolonie zum geteilten Land (코리아-식민지에서 분단국으로), Wien (Rainer Wernig 공저) 2017, 불타는 얼음. 경계인 송두율의 자전적 에세이/ 후마니타스 (396쪽)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위르겐 하버마스 좌파 민족주의 강정구 (1945년) 강만길 서중석 한홍구 진중권 홍세화 국가보안법 경계도시 (영화) 윤이상 진중권 마광수 김완섭 박노자 브루스 커밍스 노암 촘스키 (독) 타게스 차이퉁 2003년 4월 26일자 인터뷰 기사 (독) 타게스 차이퉁 2003년 10월 18일자 송두율사태에 대한 기사 "Koreas Teilung ist der Grund allen Übels" Interview mit Du-Yul Song in "Wiener Zeitung"(2012년 7월 8일자 인터뷰 기사):http://www.wienerzeitung.at/themen_channel/wz_reflexionen/zeitgenossen/470599_Koreas-Teilung-ist-der-Grund-allen-Uebels.html 분류:1944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여산 송씨 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 분류:독일의 대학 교수 분류:대한민국의 사회학자 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 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 분류:독일의 사회학자 분류:독일의 철학자 분류:도쿄도 출신 분류:한국계 독일인 분류:위르겐 하버마스 분류:사회철학자 분류:20세기 사회학자 분류:21세기 사회학자 |
기상청 (氣象廳, , 약칭 KMA)은 기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1990년 12월 27일 중앙기상대를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여의대방로16길 61에 위치하고 있다. 청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으로 보한다. 「정부조직법」 제39조제2항 기상에 관한 사무 대한제국 농상공부 산하에 설치한 관측소가 기상청의 전신이다. 당시 관측소는 러일 전쟁 때 일본의 필요로 설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인천광역시에 설치된 것이 중앙관상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1912년에는 내무부 학무국 소관이 되었다가 해방 후 학무국이 문교부로 독립하면서 문교부 소관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인천에 위치한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한 것은 1948년 3월 1일의 일이다. 다만, 근거 법령은 1949년 8월 18일에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관상대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관상감 (觀象監)이라는 직책에서 유래했다.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을 관장한 기관으로 천체 현상을 관찰해 백성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1956년 3월 16일에는 미국 국무부의 도움을 받아 세계기상기구에 정식 가입했다. 1962년에는 교통부 소속으로, 1967년에는 과학기술처로 이관되었다. 1982년에는 중앙기상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0년에 지금과 같은 기상청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기상업무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상청을 기상기후청으로 개편하는 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기상관측만이 아니라 기후변화 예측·감시 업무까지 수행하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깊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새 정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1949년 08월 18일 문교부 소속으로 국립중앙관상대 설치. 1962년 07월 16일 교통부 소속으로 변경. 1963년 02월 12일 중앙관상대로 개편. 1967년 03월 30일 과학기술처 소속으로 변경. 1982년 01월 01일 중앙기상대로 개편. 1990년 12월 27일 기상청으로 개편. 1998년 02월 28일 과학기술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 2008년 02월 29일 환경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 대변인실 운영지원과 감사담당관실 기획조정관실 기획재정담당관실 혁신행정담당관실 연구개발담당관실 국제협력담당관실 예보국 총괄예보관 예보정책과 예보기술과 국가태풍센터 예보분석팀 영향예보추진팀 관측기반국 관측정책과 계측기술과 정보통신기술과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정보보호팀 기후과학국 기후정책과 기후예측과 해양기상과 기후변화감시과 이상기후팀 기상서비스진흥국 기상서비스정책과 국가기후데이터센터 기상융합서비스과 지진화산국 지진화산정책과 지진화산감시과 지진화산연구과 지진정보기술팀 수치모델링센터 기상기후인재개발원 국가기상위성센터 기상레이더센터 지방기상청 * 수도권기상청 * 부산지방기상청 * 광주지방기상청 * 강원지방기상청 * 대전지방기상청 * 제주지방기상청 국립기상과학원 항공기상청 기상청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총계 403명 정무직 계 1명 청장 1명 일반직 계 402명 고위공무원단 7명 3급 이하 5급 이상 113명 6급 이하 281명 전문경력관 1명 총수입·총지출 기준 2019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220억 3600만 원 +139.03% 합계 220억 3600만 원 +139.03%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과학기술일반 3881억 9100만 원 -2.44% 합계 3881억 9100만 원 -2.44% 2004년 11월, 기상청은 기상용 슈퍼컴퓨터 2호기로 1천억여원을 들여 CRAY X1을 도입했다. 3호기는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가 완공되는 2009년에 도입할 예정이다. 시스템공학연구소의 슈퍼컴퓨터 대한민국 최초의 슈퍼컴퓨터. 기상청이 1990년부터 이 컴퓨터로 수치예보. 기상용 슈퍼컴퓨터 1호 1999년 6월 도입. 기상용 슈퍼컴퓨터 2호 18.3 테라플롭스의 연산능력.(초당 18조 5130억 번의 수치 연산 속도) 2004년 11월 도입. 도입 당시 국내 2위, 세계 86위의 슈퍼컴퓨터. 가격 1천억여 원. 기상용 슈퍼컴퓨터 3호 2009년 12월에 준비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2010년 3월 초기분시스템 해빛이 도입되었다. 2010년 12월까지 최종분시스템 해온과 해담이 도입될 예정이다. 기상용 슈퍼컴퓨터 2호기는 2007년 2월 13일 기준 유럽 연합,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의 슈퍼컴퓨터(연산 처리 속도인 테라플롭스 기준)이다. 그러나 수치예보 모델(기상예측용 방정식)의 품질은 최하위인 러시아에 이어 10위로 평가되었다. 날씨ON은 기상청에서 국민에게 기상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2007년 5월 10일부터 시험운영하는 인터넷 기상방송으로 2007년 8월 4일부터 정식 개국하였다. 기상청은 2015년 6월 말 애플리케이션을 폐지하였다. 2016년 여름철에 장마와 폭염에 대해 오보를 계속 내어 비판을 샀다. 7월에는 소나기 예보를 내린 날에는 해가 뜨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소나기가 내려 양치기 기상청 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폭염이 절정에 달할 것 이라고 예보했으나 19일이 되어도 폭염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후에도 폭염이 꺾이는 시점에 대한 보도를 16일, 22일, 24일로 계속해서 미루었는데 이에 대해 기상청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공기 흐름이 정체되어 있어 폭염이 끝날 줄 알았으나 계속 이어진다는 등 대기 예측이 매우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한편, 기상청이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슈퍼컴퓨터를 통한 자료를 예보관들이 분석함으로써 알려주는 것인데 오보가 나올 때마다 예보관을 교체해서 해당 분야에 유능한 인재가 머물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기상청장 기상청 차장 동네예보 기상관측소 자동기상관측장비 일기예보관 전지구정보시스템센터 아시아풍력협회 국가농림기상센터 날씨ON (인터넷 기상방송) 기상청 기상청 |
Bopha and Saomai 2006-08-07 0435Z.jpg|섬네일|200px|right|열대 저기압의 일종인 태풍 열대 저기압 (熱帶低氣壓, 열대성 저기압 , tropical cyclone)은 지구의 열대 지역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이다. 이들은 발생 지역에 따라 태풍 , 허리케인 , 사이클론 으로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 부근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을 윌리윌리 로 불렀으나, 현재는 사이클론 으로 통용되고 있다. +10분 평균 최대풍속을 사용하는 기관의 열대 저기압 분류 풍속(kt, 10분 평균) KMA대한민국 기상청 JMA일본 기상청 MFR프랑스 기상청 FMS피지 기상청 BoM호주 기상청 114 매우 강한 사이클론 +1분 평균 최대풍속을 사용하는 기관의 열대 저기압 분류 풍속(kt, 1분 평균) JTWC미국 합동 태풍 경보 센터 NHC미국 국립 허리케인 센터 CPHC중태평양 허리케인 센터 135 5등급 허리케인 +3분 평균 최대풍속을 사용하는 기관의 열대 저기압 분류 풍속(kt, 3분 평균) IMD인도 기상청 119 슈퍼 사이클론 열대 저기압은 여러날 동안 지속될 수 있고, 예보에서 올 수 있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붙는다. 주변 관계국들이 이름을 붙이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한다.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최대 풍속은 대한민국 기상청, 일본 도쿄에 위치한 지역특별기상센터(RSMC) 등 대부분의 기관에서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0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하고 있다. 기압은 헥토파스칼(hPa), 강수량은 밀리미터(mm)를 표준 단위로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SSHS)이라는 등급을 이용하여, 5등급을 가장 강력한 열대 저기압으로 분류하고 있다. 2003년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태풍 매미는 5등급 태풍이었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5등급 허리케인이었다. 2008년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 등을 강타하여 10만 명 이상을 사망하게 한 사이클론 나르기스는 4등급 사이클론이었다. 미군은 전 세계에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전 세계에 10여 대의 항공모함 함대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태풍의 경보와 그에 따른 함대의 이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와이주 진주만의 해군해양기상센터(Naval Maritime Forecast Center) 내에 미국 해군과 미국 공군이 합동으로 운영하는, 합동태풍경보센터(JTWC)가 있다. 대부분의 해역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이동 상황 등을 전 세계 미군에게 알려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2008년 4월 21일 국가태풍센터를 제주도에 설립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가태풍센터는 전 세계의 열대 저기압을 감시 하지 않으며, 일본 도쿄 지역특별기상센터처럼 북서태평양의 태풍만 감시하고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의 넓은 해상에서 발생하고 발달하기 때문에 그 실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주로 남태평양에 있는 몇몇 섬에서 관측이 행해졌고, 그 외에는 때때로 그 해역을 지나가는 배에서 전해 주는 기상통보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존재를 알 뿐이었다. 따라서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고, 강도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때때로 섬을 통과할 때나 배가 태풍 중심에 휘말려 들어갈 때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면 미군의 비행기가 그 중심까지 날아가 관측하게 되어 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관측지 근처에 가까이 오면 각지에 있는 레이다에 의해 저기압을 연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열대성 저기압 주위에 있는 특유한 구름 분포가 찍히는데, 이것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정할 수 있다. 또한 1977년부터 쏘아올린 기상위성에서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구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재는 일기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갑작스럽게 열대성 저기압이 엄습하여 피해를 입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할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하루에 두세 번 미군 비행기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까지 들어가 레이다나 드롭 존데를 이용하여 열대성 저기압을 자세히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의 등압선은 거의 원형이므로 비행기가 언제라도 왼쪽으로 바람을 받아 날아가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다. 중심에 가까이 가면 레이다로 중심의 위치를 잡아 더욱 중심에 가까이 접근한다. 격렬한 동요와 강한 비가 내리는 지역을 뚫고 나가 열대성 저기압의 눈 안에 들어간 다음 그 안에서 8자를 그리듯이 비행한다. 그러면 정확한 중심 위치가 정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드롭 존데를 떨어뜨려 비행 고도에서 해면까지 사이의 기온과 습도를 측정하고, 또 해면에서 중심 기압을 구한다. 그리고 파도의 상태로 해면 부근의 풍속을 추정한다. 열대성 저기압이 200 ~ 300km 거리까지 다가오면 레이다로 열대성 저기압을 관측할 수 있다. 레이다로 찍은 열대성 저기압을 보면 중심 주위를 나선형 구름이 몇 줄 에워싸고 있는데, 이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알 수 있다. 레이다의 경우는 비가 내리고 있는 구름밖에 찍을 수 없지만 위성에서 본 경우에는 상층의 구름 등 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 곳도 찍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연속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진로나 강도의 변화 등도 추정할 수 있다. 미국의 극궤도 기상위성 NOAA는 하루에 두 차례 대한민국 상공을 통과한다. 이러한 기상위성의 관측 데이터는 기상위성센터에서 처리하는데, 구름 화상 사진으로 작성하여 태풍감시나 기상예보에 이용되고 있다. 열대 저기압의 구조. (북반구 기준) 열대성 저기압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과는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은 그 중심부에 눈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열대성 저기압의 구조도 눈의 안과 밖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고도 십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적란운이 중심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이 고리 모양의 구름을 벽운(壁雲)이라 하며 그 안쪽을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눈의 크기는 평균 15 ~ 20km 정도이지만 열대성 저기압에 따라 다르며, 같은 열대성 저기압이라도 시간적으로 매우 다르다. 눈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길다란 띠 모양으로 연결된 적란운이 주위에서 모여들어 벽운을 형성하고 있다. 레이다에 찍히는 것은 굵은 빗방울을 내리게 하는 구름뿐이며, 찍히지 않는 검은 부분이라도 실제로는 구름이 있다. 또한 비행기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들어가 보면 태풍의 눈 안에도 구름이 있다. 이 구름은 벽운처럼 길다란 것이 아니라 틈이 있어 해가 비치거나 별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일기도상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주위에 동심원 모양을 한 등압선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 간격은 좁아진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이 지나간 관측소의 기압이나 풍속의 변화를 보면, 기압은 중심에 가까우면 급격히 낮아지고 바람도 급격히 강해지지만, 태풍의 눈 안에서는 갑자기 약해진다.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의 주위에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바람이 등압선과 20 ~ 30°각도로 열대성 저기압 안으로 불어들고 있는데,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고 있는 상공의 바람을 비행기에서 보면 중심에서 극히 가까운 곳을 제외하면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해 불어나오고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열대 지역에 있는 동안은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 지역 내의 기온에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의 경우에는 난역과 한역(寒域) 사이에 커다란 온도차가 있으므로 열대성 저기압과 상당히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상공의 기온은 매우 특징있는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비행기에서 관측해 보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는 온도가 매우 높고, 주위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그 도중에는 온도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서로 교대로 나타난다. 온도가 높은 띠 모양의 구역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띠 모양의 구름과 일치한다. 태풍의 눈 내부가 기온이 매우 높은 것은 이곳이 하강기류 영역이기 때문이며, 중심 부근에서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것은 구름 속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潛熱)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곳은 편동풍 골의 끝부분이나 중위도에서 뻗어 있는 기압골 위쪽 등 상승 기류가 있는 곳이다. 열대의 해면은 수온이 높고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증발이 활발하여 대기는 충분히 습해져 있다. 또한 라디오 존데 관측 결과에 의하면 열대의 대기는 조건부 불안정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가 어느 정도 상승하여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 그 다음은 점점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어서 적란운이 형성된다. 적란운 안에는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이 방출되기 때문에 온도가 높아진다. 한편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것은 상공에서 커다란 기류의 발산이 있을 때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면의 적란운 주위에서 수렴하여 상승한 기류가 상공에서 발산하여 그것이 하층의 수렴을 웃돌게 되면 기압이 내려간다. 또한, 적란운으로 에워싸인 눈 안에서는 강한 하강 기류가 있기 때문에 공기는 단열적으로 온도가 상승하여 기온이 한층 높아진다. 기온이 높아지면 밀도가 감소하기 때문에 중심부의 기압은 눈 주위보다 더욱 낮아진다. 계산에 따르면, 태풍의 중심부에서는 온도의 상승에 의해 밀도가 감소한 것만큼 기압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기압이 내려가면 주위에서 기류가 수렴하여 적란운을 더 한층 발달시킴에 따라 열대성 저기압이 점점 발달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해면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하여 대기가 충분한 습기를 가지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태풍이 발달하려면 표면 수온이 26 ~ 27℃ 이상이어야 한다. 열대의 해양에서도 남동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수온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북서 태평양에서 강한 태풍이 된 것은 모두 수온이 28℃ 이상인 곳에서 급속히 발달한 것이다. 지금까지 비행기 관측으로 얻은 열대 저기압의 중심 기압의 최저치는 870hPa로, 열대에서의 평상시 기압보다도 135hPa나 낮은 수치이다. 열대성 저기압은 해면의 수온이 높고 상승 기류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상공에서 큰 발산이 있는 경우에 발달한다. 실제로 태풍의 발달 상황을 조사해 보면 발생하고 나서 2, 3일 후에 급속히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한 차례만 기상 통보를 수신하던 배가 갑자기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여 당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넓은 해면에서는 수온이나 기류의 상태가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가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이와 같은 곳으로 오면 발달이 멈추고 쇠퇴한다. 그러나 일단 발달한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 해상에서 금방 소멸하지는 않는다. 열대성 저기압은 육지에 오르면 해면에서 수증기의 보급이 없어져 표면 마찰이 커지기 때문에 급속도로 쇠퇴한다. 가을에 중위도까지 와서 일단 주춤한 열대성 저기압이 온대성 저기압 성질을 갖기 시작하여 다시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진행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를 필요로 한다. 태풍 허리케인 하이퍼케인 사이클론 저기압 온대 저기압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 분류:저기압 |
launching conventin.jpg|섬네일|1955년의 자유민주당 창당 대회 자유민주당 중앙당사(2018년 1월) 자유민주당 (, 약칭 자민당 ()은 1955년에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이 합쳐져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2018년 현재 총재는 아베 신조, 간사장은 니카이 도시히로이다. 1955년의 창당 이후 중의원 내에서 지속적으로 여당 자리를 지켜오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 55년 체제라 불리는 양대정당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후 1993년에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연립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당 우위 정당제가 처음으로 붕괴하였다. 그러나 익년인 1994년 다시 내각을 이룬 이후로도 2009~2012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제1당의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으며, 계속적으로 총리를 배출해내고 있는 등 일본국내의 정치계에서의 그 영향력은 거대하다. 소속 의원들은 당내의 특정 파벌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총리나 내각 인사의 선출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55년 11월 15일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을 합쳐 결성(보수합동). 초대 총재는 하토야마 이치로. 1993년 8월 9일 일본사회당·신생당·공명당·민사당·민주개혁연합·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의 7개 군소정당이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삼아 연립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처음으로 야당이 됨. 1994년 6월 30일 일본사회당·신당 사키가케와 연합해 일본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하는 연립 내각을 구성하여 여당으로 복귀. 1996년 1월 11일 연립내각에서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가 됨. 2005년 11월 22일 창당 50주년 기념 당대회에서 “신헌법 초안”을 정식으로 발표. 2009년 8월 30일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119석(정수 480)을 얻어 야당이 되었고, 여당은 308석을 얻은 민주당이 되었다. 2010년 4월 11일 자민당 강경파 의원 6명이 당의 노선과 운영을 비판, 탈당하여 신당 일어나라 일본을 창당해 의석수가 113석으로 줄었다. 2012년 12월 16일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294석(정수 480)을 얻어 여당이 되었다. 2014년 12월 14일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291석(정수 475)을 얻어 여당이 되었다. 2017년 10월 22일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284석(정수 465)을 얻어 여당이 되었다. 2018년 9월 20일 아베 신조가 총재 선거에서 당선되어 사토 에이사쿠 전 총재 이후 46년만에 3연임에 성공한 총재가 되었다. 자유민주당의 당수이며, 당의 최고 책임자로서 당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임기는 3년으로, "연속 3기"에 한정하여 재임할 수 있다. 제1당의 총재가 내각총리대신직을 맡게 되는 관례에 따라 일반적으로 자유민주당의 총재는 총리직을 겸하게 된다. 현재 총재는 제90·96·97·98대 총리대신인 아베 신조이다. 선거 총재 당선자 득표율 (선거구) 득표율 (비례대표) 집권 여부 1958년 기시 노부스케 59.0% 집권 1960년 이케다 하야토 58.1% 집권 1963년 56.0% 집권 1967년 사토 에이사쿠 48.9% 집권 1969년 47.6% 집권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46.9% 집권 1976년 미키 다케오 41.8% 집권 1979년 오히라 마사요시 44.59% 집권 1980년 47.88% 집권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45.76% 자민-신자유클럽 연립 1986년 49.42% 집권 1990년 가이후 도시키 46.14% 집권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36.62% 비집권 자민-사회-사키가케 연립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38.63% 32.76% 자민-사민-사키가케 연립 2000년 모리 요시로 40.97% 28.31% 자민-공명-신보수 연립 200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43.85% 34.96% 자민-공명 연립 2005년 47.80% 38.18% 자민-공명 연립 2009년 아소 다로 38.68% 26.73% 비집권 2012년 아베 신조 43.01% 27.79% 자민-공명 연립 2014년 48.10% 33.11% 자민-공명 연립 2017년 48.21% 33.28% 자민-공명 연립 선거 총재 선거 후 의석수 득표율 (선거구) 득표율 (비례대표) 원내 지위 1956년 하토야마 이치로 48.4% 39.7% 1959년 기시 노부스케 52.0% 41.2% 다수 여당 1962년 이케다 하야토 47.1% 46.4% 다수 여당 1965년 사토 에이사쿠 44.2% 47.2% 다수 여당 1968년 44.9% 46.7% 다수 여당 1971년 44.0% 44.5% 다수 여당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39.5% 44.3% 다수 여당 1977년 후쿠다 다케오 39.5% 35.8%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42.5% 43.3% 다수 여당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43.2% 35.3% 다수 여당 1986년 45.07% 38.58% 다수 여당 1989년 우노 소스케 30.70% 27.32%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 45.23% 33.29% 소수 야당 다수 연립 여당 1995년 고노 요헤이 27.29% 25.40% 다수 연립 여당 1998년 하시모토 류타로 30.45% 25.17% 다수 연립 여당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41.04% 38.57% 다수 연립 여당 2004년 35.08% 30.03% 다수 연립 여당 2007년 아베 신조 31.35% 28.10% 소수 야당 2010년 다니가키 사다카즈 33.38% 24.07% 소수 야당 2013년 아베 신조 42.7% 34.7% 다수 연립 여당 2016년 39.9% 35.9% 다수 연립 여당 일본의 정당 자유민주당 파벌 * 세이와정책연구회(청화회) - 자민당 내 최대 파벌세력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분류:자유보수주의 정당 분류:포퓰리즘 정당 분류:1955년 설립된 정당 분류:일본의 정당 분류:국민보수주의 정당 |
옴의 법칙에서 V,I 그리고 R. 옴의 법칙 ()은 도체 의 두 지점사이에 나타나는 전위차(전압)에 의해 흐르는 전류가 일정한 법칙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두 지점 사이의 도체에 일정한 전위차가 존재할 때, 도체의 저항(resistance)의 크기와 전류의 크기는 반비례한다. 는 도선에 흐르는 전류로 단위는 암페어( A ,ampere), 는 도체에 양단에 걸리는 전위차로 단위는 볼트(V,volt), 그리고 는 도체의 전기저항(resistance)으로 단위는 옴(Ω, ohm)이다. 특히, 옴의 법칙에서 저항 R 는 상수이고, 전류와 독립적이다. 회로망에서 저항은 두 노드(node) 사이에 존재한다. 옴의 법칙은 다른 회로 법칙과 함께 회로 해석에 중요한 요소이다. 저항은 물리적으로 특정 형태를 갖는 일정한 길이의 물체로 존재하므로, 전체 전위차가 저항체의 길이 전체에 나누어 분포한다. 그러나 회로망 해석에서는 두 노드 사이에 존재하는 한 점으로 모델링하여 전체 저항값(상수값)을 저항의 대표값으로 취급하여 해석한다. 옴의 법칙은 전자기학의 법칙 중 하나이다. 이름은 독일의 과학자 게오르크 옴의 이름을 딴 것이다.그러나 후에 저항이 없는 물질이 발견됨에 따라 옴의 법칙이 모순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옴의 법칙 은 미시적으로 다음과 같다. :. J 는 전류 밀도이며, σ 는 전기전도율 (비등방성 물질에서 텐서일 수도 있음)이고, E 는 전기장이다. 이 방정식은 오직 전도체의 기준계에서만 유효하다. 만약 물체가 자기장 B 에 대해 v 의 속력으로 움직인다면 이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이 식은 로런츠 힘과 관계를 가지는데, 이로써 옴의 법칙을 로런츠 힘과 (전하 운반체의 속력에 비례하는) 항력이 있다는 가정 아래 유도할 수 있다. 옴의 법칙의 미시적인 형태에서 "전기장과 도선의 전압, 도선의 길이간에 상관관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옴의 법칙의 거시적인 형태 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는 전류 밀도를 적분한 전류이고, 은 비저항 을 적분하여 얻은 저항이고, 는 전기장을 적분하여 얻은 전압이다. 옴의 법칙 계산 · The Magic Triangle 전자력, 전압, 흐름 및 저항의 계산 단순 전기 회로의 상호 시뮬레이션. 분류:전자기학 분류:전기공학 분류:전자공학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전기저항 |
데즈카 오사무 (, 1928년 11월 3일~1989년 2월 9일)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오사카 대학을 졸업한 의사이기도 하다. 본명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다. 《우주소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의 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다작 성향, 선구적 테크닉, 장르의 혁신적인 정립으로 "일본 만화의 아버지", "일본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선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가신 데즈카 미쓰모리(手塚光盛)이며, 고조, 증조 할아버지도 대대로 에도 시대의 난학자였다.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 부속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 재학 중이던 1946년 1월 1일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 『소국민신문』(少国民新聞) 연재)으로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1947년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가 원안을 그린 만화 단행본 『신보물섬』(新寶島)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오사카에서 아카혼(赤本) 붐을 일으켰다. 1950년부터 만화잡지에 등장,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등 히트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1963년、자신의 작품을 토대로 일본 최초의 30분짜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 이후의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0년대에는 『블랙잭』(ブラック・ジャック), 『삼목동자』(三つ目がとおる), 『붓다』(ブッダ) 등의 히트작을 발표하였다. 또한 만년에도 『양지의 나무』(陽だまりの樹), 『아돌프에게 고한다』(アドルフに告ぐ) 등 청년만화에 있어서도 걸작을 남겼다. 데뷔 때부터 사망(1989년)할때까지 일선에서 작품을 발표해 나갔고, 생전부터 일본 만화계에서 「만화의 신」(マンガの神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藤子・F・不二雄、藤子不二雄A)、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야시로 마사코(矢代まさこ)、하기오 모토(萩尾望都)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데즈카 오사무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접촉이 있었던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데즈카 오사무(본명 오사무治)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 부(大阪府) 도요노 군(豊能郡) 도요나카 정(豊中町, 지금의 도요나카 시豊中市)에서 데즈카 유타카(手塚粲, 1900년 - 1986년 5월 14일)와 어머니 후미코(文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마침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明治節)이었기에 「메이지」(明治)에서 한 글자를 따서 「治」를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1933년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에 그의 집안은 1년 전에 타계한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효고 현(兵庫県) 가와베 군(川辺郡)의 오하마 촌(小浜村, 지금의 다카라즈카 시宝塚市) 가와모(川面)로 이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다카라즈카에는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가 미노오아리마 전기궤도(箕面有馬電気軌道)의 승객 증가를 노리고 전원 풍경 가운데 개발한 신흥 주택지가 산재해 있었고,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宝塚少女歌劇団, 훗날의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의 전신)의 본거지였던 다카라즈카 대극장(宝塚大劇場)、다카라즈카 패밀리 랜드(宝塚ファミリーランド)의 전신인 다카라즈카 신온천(宝塚新温泉)이나 다카라즈카 루나파크(宝塚ルナパーク) 등 행락시설이 차례로 세워져 일종의 별천지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다카라즈카의 인공적인 근대도시 풍경은 데즈카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오사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宝塚ホテル) 안에서 세워진 다카라즈카 구락부(宝塚倶楽部)의 회원이었고 때때로 오사무는 아버지를 따라 다카라즈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또 데즈카 집안의 옆집에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남자배역 톱스타였던 아마쓰 오토메(天津乙女, 본명 도리이 에이코鳥居榮子)와 구모노 가요코(雲野かよ子, 본명 도리이 카코鳥居華子)와 이케노베 쓰루코(池邊鶴子, 본명 도리이 히사요鳥居久代) 세 자매가 살고 있어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이 그 보호자와 함께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등,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여성들과 접할 기회도 많았다. 훗날 데즈카는 자신의 첫사랑 상대도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생도였다는 것, 다카라즈카 생도를 보려고 다카라즈카 대극장에 다녔다는 것, 쓰키오카 유메지(月丘夢路)나 아와시마 지카게(淡島千景) 같은 당찬 여성을 좋아했었다는 것, 1942년작 쓰키오카 주연의 영화 『신설』(新雪)을 스무 번이나 보았다는 것 등을 회고하고 있다. 1935년,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池田師範附属小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교육대학부속 이케다 소학교大阪教育大学附属池田小学校)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도쿄 출신이었던 탓에 긴키 방언을 잘 하지 못했던 그는 학교에서 맴도는 존재였고 2학년때에는 「안경잽이 꼬마」(ガヂャボイ)라는 별명까지 붙어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본 것을 그린 만화 그림이 오사무를 구원해 주게 되는데, 소학교 3학년 때 최초의 만화 「핑핑 세이쨩」(ピンピン生チャン)을 완성했고, 그 뒤 만화 연습을 이어나갔으며 소학교 5학년 때에는 장편만화 「지나의 밤」(支那の夜)을 완성하였다. 그 작품은 급우들 뿐 아니라 학교 교사들 사이에도 화제가 되는 등 이후 교사들로부터도 만화를 그리는 것을 묵인받았다고 한다.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학급 내에서 일약 주목받으며 만화가 계기가 되어 처음에는 그를 괴롭히던 급우가 데즈카의 집에 놀러올 정도가 되는 등 차츰 따돌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데즈카의 생일에는 그의 집에 스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친구들이 집에 올 때는 당시에는 진기한 것이었던 홍차와 과자도 가져왔고 오사무의 생일에는 모듬초밥(五目寿司)이며 계란찜 요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린 만화의 일부는 이후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소장 보존되어 있다. 이 시기에 오사무의 동급생 이시하라 마코토(石原実, 오사카 요도야바시淀屋橋 이시하라 시계점石原時計店 사장)와 친해졌고, 그의 영향으로 곤충이나 과학,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데즈카 집안의 넓은 정원에는 곤충 창고가 있었고、또 주위의 전원지대에서도 많은 곤충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곤충 채집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으며, 곤충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해 주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빌린 히라야마 슈지로(平山修次郎)의 『원색천종곤충도보』(原色千種昆蟲図譜)를 읽으며 딱정벌레목 딱정벌레류(オサムシ)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무렵까지는 「治虫」는 그대로 「오사무시」로 읽었다. 1941년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부립 기타노 중학교(大阪府立北野中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부립 기타노 고등학교大阪府立北野高等学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 전국은 전쟁 중으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학교에까지 물들어 있었고 소학교 시절과는 달리 만화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학교의 교련 교관에게 그가 만화를 그리는 것이 눈에 띄어서 교관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이 시기 그는 급우들 사이에서 제작한 동호회 회지(会誌) 등을 통해 만화를 집필하는 한편으로 데즈카판(手塚版) 「원색 딱정벌레 도보」(原色甲蟲圖譜) 등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도감을 자체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44년 여름에는 체력이 약한 자가 들어 가는 강제수련소에 보내졌다. 9월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군수공장에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데즈카는 격납고 지붕을 덮는 슬레이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전쟁에 따른 수업 연한 단축에 따라 기타노 중학을 4년만에 졸업하고 6월에 근로봉사로 감시초를 서고 있을 때 오사카 대공습이 벌어졌는데, 오사무의 머리 바로 위로 소이탄이 투하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 공습은 데즈카 자신의 체험담으로써 훗날 그가 1974년에 그린 만화 『종이상자』(紙の砦)나 1979년부터 1년 간 그린 『세게 때리기』(どついたれ) 등 자전적 작품 속에서 묘사된다. 이 체험 이후 데즈카는 공장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1945년 3월에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舊制浪速高等学校)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패전 한 달 전인 7월에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의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에 응시해 입학을 허가받았다. 의학전문부는 전쟁의 장기화로 군의관을 속성으로 길러내기 위해 임시로 오사카 제국대학 내에 부설된 것으로 학제상으로는 구제 의학전문학교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구제중학교에서 입학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사카 대학(大阪大学, 옛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는 1951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한창 《정글대제》와 《우주소년 아톰》을 연재하던 와중이었다. 1928년 - 11월 3일 오사카부 도요노 군 (현 오사카부 도요나카 시)에서 출생. 1933년 - 5세 때, 효고현 다카라즈카 시로 이사 1946년 - 《마아짱의 일기장》으로 데뷔 1947년 - 사카이 시치마 원작의 장편 만화 《신보물섬》 간행. 회를 거듭해 40만부 판매고 기록. 1955년 - 4월 4일 라디오 도쿄에서 연속극 《리본의 기사》 방송 개시(~ 9. 26.) 1963년 -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후지 테레비에서 방송 1975년 - 《블랙잭》으로 제4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특별상 수상 1989년 - 2월 9일, 위암이 악화 되어 도쿄 자택에서 향년 61세의 나이로 타계함. 1990년 - 일생의 업적으로 제19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장관상 수상 1994년 - 효고현 다카라즈카 시에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이 개관 데즈카는 서양에서 수입된 영화와 소설에서 서양 문학을 일본적인 양식으로 도입한 것과 창의적인 스토리로 유명하며, 초기 작품은 《밤비》와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을 포함하고 있다. 데즈카가 어린 시절에 읽은 밀트 그로스의 초기 그래픽 노블인 《히 던 허 롱》( He Done Her Wrong )의 영향을 받은 데즈카의 영화적인 컷 배치는 후에 데즈카의 족적을 따르는 만화가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제목 출판사 권수 나의 손오공 솔출판사 8권 넘버 세븐 학산문화사 4권 넥스트 월드 AK커뮤니케이션즈 1권 노만 학산문화사 3권 더 크레이터 학산문화사 3권 도로로 학산문화사 4권 돈 드라큐라 학산문화사 3권 리본의 기사 학산문화사 3권 리본의 기사 소녀편 학산문화사 2권 마그마 대사 학산문화사 3권 미크로이드S 학산문화사 3권 밀림의 왕자 레오 학산문화사 3권 뱀파이어 학산문화사 4권 불새 학산문화사 16권 불새 소녀편 학산문화사 1권 붓다 고려원 8권 학산문화사 14권 학산문화사 10권 블랙잭 학산문화사 22권 신보물섬 AK커뮤니케이션즈 2권 아돌프에게 고한다 세미콜론 5권 아야코 학산문화사 3권 아톰 현재와 과거 학산문화사 3권 아톰의 슬픔(유작 산문집) 문학동네 1권 아폴로의 노래 학산문화사 3권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산문집) 누림BOOK 1권 우주소년 아톰 학산문화사 18권 우주소년 아톰 외전 학산문화사 2권 키리히토 찬가 학산문화사 4권 로스트 월드 AK커뮤니케이션즈 1권 메트로폴리스 AK커뮤니케이션즈 1권 뮤 AK커뮤니케이션즈 2권 칠색잉꼬 학산문화사 7권 루드비히 B. AK커뮤니케이션즈 1권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하자, 만화가로서 데즈카가 세운 업적을 전면 긍정하였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애니메이션 작가로서의 데즈카가 일본의 애니메이션사에서 차지한 역할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TV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데즈카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무시 프로덕션) 제작 프로그램을 원가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가격에 팔아치운 것이, 현재까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극도로 낮게 책정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발언은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도키와 장 미야자키 하야오 무시 프로덕션 일본 애니메이션 디즈니 Tezuka Osamu @World 宝塚市立手塚治虫記念館 데츠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박윤의 데츠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 ②) , 소녀만화의 중심에 서다, 오마이뉴스, 2006.11.26. 즐거운 책읽기 -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 매일신문, 2010.02.25.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유고 산문집 ‘아톰의 슬픔, 국민일보,2009.01.31 분류:1928년 태어남 분류:1989년 죽음 분류:일본의 만화가 분류: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분류:일본의 프로듀서 분류:애니메이션 프로듀서 분류:일본의 불가지론자 분류:도요나카시 출신 분류:오사카 대학 동문 분류:훈3등 서보장 수훈자 분류:데즈카가 |
《 우주소년 아톰 》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쇼넨》(少年)지에 연재한 SF만화이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21세기의 미래를 무대로 소년 로봇 아톰의 활약상을 그렸다. 원제는 철완 아톰 () 이다. 고단샤에서 2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여러 차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만화계의 대표적 작가로, "일본의 만화는 오사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오사무는 1951년 발표한 〈아톰대사〉(アトム大使)에서 아톰 캐릭터를 선보였고 이 캐릭터를 살려 1952년 《쇼넨》에 철완 아톰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 판 텐마 박사가 죽어가는 아들의 부탁으로 만든 로봇. 그러나 아톰을 폭파하기 위한 과학청 직원의 장갑차 조절 실수로 장갑차가 도쿄 전체를 헤집고 다니자 총리 몰래 아톰을 완성시켰다는 것이 드러난다. 결국 텐마 박사와 함께 미국으로 가던 도중 아틀라스와 싸우게 되고 에너지가 떨어진 아톰은 패한 후 햄에그에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아톰을 알아본 오차노미즈 박사에 의해 구출되어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후 도쿄를 위협하는 악당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2003년 판 고명한 박사가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만든 로봇. 그러나 고명한 박사에게 작동 정지 당하고 봉인된다. 그러나 유식한 박사가 아톰을 부활시키고, 되살아난 아톰은 도시의 악당과 싸우면서 로봇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다. 아톰의 능력 1982년 판 60개국의 언어 소통 가능(2003년 판과 공통) 인간 청력의 1000배(2003년 판과 공통) 팔과 발에서 제트 분사(2003년 판과 공통) 파워 10만 마력(2003년 판과 공통) 엉덩이에서 기관총 손가락에서 레이저(2003년 판과 공통) 눈에서 서치라이트가 나옴(2003년 판과 공통) 2003년 판 눈에서 물체를 분석할 수 있음 왼쪽 팔에서 레이저포 아톰의 동생으로 전투능력과 비행능력은 없으나 동물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고 힘이 5만 마력이다. 아직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몰라서 사고를 자주 친다. 1982년 판 서커스단에 팔린 아톰을 입양하여 일본으로 데려간다. 또한 아톰의 부모도 만들어 주고 아톰을 수리해 주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을 준다. 2003년 판 고명한 박사에 의해 작동 정지된 아톰을 부활시키고 아톰을 입양한다. 아톰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한다. 1982년 판 아톰을 만든 제작자. 2003년 판 아톰을 만든 제작자. 그러나 아톰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아톰을 봉인한다. 이후 자신이 연구하던 A.I로봇과 아톰 관련 자료를 말소하고 행방불명됐다. 그러나 유식한 박사가 되살린 아톰의 힘을 보고 로봇은 진화하여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 확신하고 아틀라스나 플루토 등 강력한 로봇을 보내 아톰을 진화시킨다. 청기사가 등장하는 25화 부터는 아톰이 인간을 공격하여 로봇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각종 사건을 일으킨다. 이후 47화에서 로보타니아를 찾아와 섀도우에게 자신을 로봇으로 개조할 것을 부탁하며 로봇의 신이 되려고 하지만 섀도우가 거절하자 좌절한다. 48화에서 램프가 쏜 미사일을 맞고 고장난 아톰을 고치기로 유식한 박사와 약속하나, 고명한 박사는 아톰의 기억을 봉인하고 철이의 기억을 이식한다. 하지만 램프의 공격으로 자신이 로봇임을 깨달고 아톰의 기억이 봉인 해제되자 절망한 고명한 박사는 자신의 로봇견을 이끌고 과학청을 습격, 아톰과 대면한다. 그러나 아톰이 자신의 제안에 따르지 않자, 로봇폐기공장을 폭파하고 자살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톰이 구하고 감옥에 수감된다. 1982년 판 아톰의 설계도를 훔친 와루프로기스 남작 이 만든 로봇. 세계정복의 야망을 가지고아톰과 8차례에 걸쳐 결투를 벌인다. 이후 침략당하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외계인과 같이 소멸된다. 2003년 판 청해(도쿠가와) 그룹 사장의 아들. 화가가 되고 싶어한 자신의 꿈을 박살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깊다. 아톰을 능가하는 공격력과 방어력을 지녔으며 나중에는 특수칩에 의해 조종당하기도 하고 로보타니아에서 활약하기도 한다. 1982년 판 술탄이 만든 지상 최강의 로봇,세상에서 가장 강한 7대의 로봇(엡실론, 몽블랑, 노스 2호, 게지하트, 헤라클레스, 브란도, 아톰) 중 6대를 파괴하나 아톰에게 밀리고 200만 마력의 보라에게 참패를당한다. 2003년 판 고명한 박사가 만든 로봇, 지상에서 강한 4대의 로봇(델타, 엡실론, 헤라클레스, 아톰)중 3대를 파괴한다. 초반에 아톰을 압도하였으나 아톰에게 패하고 다크 플루토에 의해 화구 속으로 빠졌다가 다시 올라와서 다크플루토를 잡고 다시 용암 속으로 빠져 최후를 맞이하는 듯했으나 섀도우에 의해 되살아나 로보타니아에서 인간들과 싸운다. 고명한 박사를 본뜬 로봇 과학자 섀도우가 만든 로봇, 원래는 로봇 수리용 로봇 부르봉이었으나 격투 로봇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할 때 햄에그에 발각되어 우주에 버려지고 섀도우에 의해 발견, 기억이 봉인되고 청기사로 다시 태어난다. 로봇의 자유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방해가 되는 인간, 로봇을 학대하는 인간, 그리고 아톰까지 해친다. 로보타니아를 건설하고 인간과 전쟁을 벌였으나 아톰의 호소로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을 향해 떠났다. 1982년 판 에너지가 빠진 아톰을 서커스단에 데려가 학대한다. 아톰을 버리려고 하지만 아톰이 전기 프랑크를 성공하자 아톰에게 눈독을 들이고 유식한 박사의 아톰 입양을 반대하나 캐시가 가짜 아톰을 부순 것에 속아 아톰 노예 계약을 파기한다. 2003년 판 어둠의 로봇 크래쉬를 지휘하는 남자. 17화에 처음 등장한다. 플루토와 자신의 격투로봇을 대결시켜 큰 돈을 벌려고 했으나 플루토가 10초만에 격투로봇을 모조리 박살내서 실패한다. 거기에다가 플루토의 돌진으로 자신의 우주선이 모두 박살나고 자신도 죽을 뻔 한다. 32화에서 다시 등장. 화성에서 어둠의 로봇 크래쉬를 지휘하고 있다. 아톰과 청기사VS자신의 격투로봇으로 돈을 벌려고 했으나 아톰의 손에 로봇 조종장치가 박살나고 분노한 청기사가 자신의 비상탈출셔틀을 두 동강 내버려 추락하나 아톰이 구해준 후 경찰에게 넘겨진다. 1982년 로봇 노예화를 주장하는 남자. 부하인 킬러 로봇 제우스를 이용하여 고위급 로봇들을 부수고 다니다가 체포된다. 2003년 연방의회의 대표적인 반로봇 의원. 스폰서로부터 자금을 받고 TV에 출연하거나 과학청 앞에서 시위, 각종 흉계로 세상의 반로봇 감정을 부채질한다. 46화에서 연방의회의 실력자 레드 장군의 딸 애나가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이를 기회로 레드 장군을 이용하여 세상의 반로봇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하지만 그의 집에 수배중인 니트로 박사가 있다는 사실이 수세미 경감에게 발각되고, 의원직 상실+니트로 박사의 체포로 인해 권력을 잃게 된다. 48화에서 대형 미사일을 발사해서 로보타니아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아톰이 저지한다. 그러나 미사일의 폭발로 아톰이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환호한다. 하지만 스폰서들이 일제히 자금 지원을 거부하고, 절망한 그는 마운트 아머를 이용해 고명한 박사의 집을 파괴하지만 아톰에게 저지당하고 수세미 경감에게 체포된다. 과거 42화의 독백에서 그의 과거가 밝혀진다. 원래는 로봇 메이커 사의 신임 사장으로, 낙하산 인사로 인해 사내에 입지가 좁은 인물이었다. 그러던 도중 로봇 박람회에 신형 로봇을 발표하러 가게 되고, 중간에 폭풍우를 만나 비행기가 추락하고 만다. 아포이나 산에 추락한 그는 비행기에 실려 있었던 신형 로봇과 같이 지내게 되고, 점차 그를 친구로 인식하며 프렌드 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러나 아포이나 산이 분화 할 때 구조대가 그를 발견하게 되고, 램프는 프렌드 는 두고 가면 안 된다고 했으나 구조대가 강제로 비행기에 태우고 탈출한다. 탈출할 때 램프는 산 위에서 자신을 보는 프렌드 를 보았고, 나중에 신형 로봇이 대량생산 된 것을 보고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신형 로봇을 모조리 폐기한 후 반로봇주의자로 거듭나게 된다. 1982년 판 아틀라스를 만든 장본인 2.(아톰의 설계도를 찍어 와루프로기스 남작에게 전해 줬다.) 이후 아틀라스에게 도둑질을 교육시키다가 아틀라스가 폭주하자 도주했다. 이후 조직의 보스가 되어 도둑질을 하다가 개조된 아틀라스를 만나고, 아틀라스에 의해 죽을 위기를 넘긴다. 이후 프랑켄을 이용하여 거액을 훔치고 국회의원 후보에게 접근하여 돈을 뜯어내는 등 악행을 일삼는다. 2003년 판 4화에 처음 등장. 투명로봇인 시엘을 이용하여 보석상에서 보석을 훔쳐오게 한다. 그러나 시엘이 솔로몬의 왕관을 훔쳐오자 시엘을 버린다. 12화에서 거액을 훔치다 경찰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구형로봇 점보를 되살려 크로이첼 형무소를 습격, 스컹크를 탈옥시키는데 성공한다. 15화에서는 연방의원에게 접근하여 A.I로봇을 말살하는 로봇 사카보트를 만들어 로봇들의 인공지능을 약탈, 고가에 되판다. 그러나 사카보트의 오작동으로 자신 역시 사카보트에 흡수당한다. 아톰이 구해준 이후 16화에서 사냥꾼로봇 레드를 만들어 로봇의 인공지능을 탈취, 무기로 개조해서 판다.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아톰과 아스, 레드까지 다 날려버리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나중에는 자기로봇인 가뎀으로 금괴를 훔치려하지만 수염영감에게 붙잡힌다. 1982년 판 고아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로봇, 빛에너지로 상대방을 공격하나 흐린 날에 플루토와 싸워 졌다. 2003년 판 로봇 환경관측원이다. 플루토와 싸웠으나 해저화산지대에서 광자포를 쏘지 못해 플루토에게 졌다. 나중에 아포이나 산 분화 사건에서 활약하고 로보타니아 사건에서 애나와 함께 남극으로 간다. 로봇경찰이다. 부하로봇 4대와 함께 아스 에 소속되어 있으며 로봇사냥꾼을 잡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플루토와 결전을 벌여 이길 뻔 했으나 플루토에게 자신의 위치가 들켜 기관포 맞고 쓰러졌다. 1982년 판 아톰의 반 선생님으로 무술도 할 줄 안다. 아톰의 조력자 역할을 한다. 2003년 판 탐정으로 유식한 박사의 비서인 서연의 숙부이다. 주로 실종된 동물을 찾는 일을 한다. 고명한 박사가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삽입해 만든 로봇. 고명한 박사와 마찬가지로 아톰을 진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청기사를 만들고 자유로봇들의 은신처인 강철섬을 만들어 주며, 나중에는 로보타니아를 건국하여 인간들과 대결한다. 그러나 아톰의 연설로 청기사의 계획이 실패하자, 섀도우는 로보타니아를 발사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다. 1982년 판 동경의 경찰. 로봇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2003년 판 메트로 시티의 경찰. 로봇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지만 때때로 아톰에게 의지한다. 반로봇 단체의 리더, 메트로 시티에서 로봇을 몰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다른 반로봇 단체와 다른 점은 다른 반로봇 단체는 A.I.로봇을 반대하지만 프러더는 로봇 자체를 반대한다. 반A.I.로봇주의자, 과학청 시절 살상무기를 개발한 것이 들통나 유식한 박사에 의해 해임됐다. 이에 앙심을 품고 유식한 박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램프의 집으로 도망간다. 이후 램프와 함께 반로봇 감정을 부채질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위치가 들통나 수세미 경감에게 체포된다. 파괴이야말로 예술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 파괴를 위해 폭탄을 많이 사용한다. 고명한 박사가 만든 개로봇, 고명한 박사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다. 유식한 박사의 비서, 매우 깐깐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메르키아데스(플라즈마 웨이브 망원경)으로 외계 생명체를 조사하다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로봇볼 선수다. 전 세계 최고의 사령탑이나 아톰과 플루토에게 처절하게 패했다. 1959년 3월 7일부터 1960년 5월 28일까지 마이니치 방송에서 제작·방송된 드라마이다. 세가와 마사이리 네기시 가즈마사 나카가와 미쓰오 모리노고로 네기시 히로코 미키 히로시 라쇼몬 쓰나고로 기타가와 요네히코 다나카 아키오 도미나가 이치로 시미즈 긴이치 와카하라 하루에 기야마 히로시 구라타 지조 나카에 류스케 프로듀서 마쓰자키 게이지, 요네야마 쓰요시 각본 이와타 시게토시, 고오로기 하루오 원작 데즈카 오사무 음악 오가와 히로오키, 마스다 가쓰유키 촬영 요시다 유타카 연출 시바 세이카, 요시카와 히로시 1957년에는 KRTV(현:TBS)에서 모험만화인형극 철완 아톰 을 방영하였고 실사판은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마이니치 방송제작, 후지 TV계열로 방영하였지만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후지 TV에서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방영되었다. 흑백 화면으로 총 193화가 제작되어 평균 3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컬러로 총 52화가 제작되면서 니혼TV에서 방영하였고,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는 후지 TV, 한국에서는 SBS에서 1995년 2월 27일부터 1995년 6월 7일까지 총 50화로 방영했고, 이후 2003년 11월부터 2004년 8월까지 재방영되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며 높은 시청률을 과시했다. 또한 2010년 1월에는 아스트로 보이 아톰의 귀환이 헐리우드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1980년대 TV 시리즈로 제작된 내용과 관련성은 확신할 수 없으나, 일본 국내 영화 방송이었던 "수요 로드쇼"에서 극장판의 형식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아톰에서 보기 드문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주제로한 내용이었으며 배경은 하와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행이 과거로 갔을때 유적에 직접 새겨둔 문양을 현대에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유식한 박사의 시간 여행이 사실임을 확인하며 웃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2003년 4월 6일부터 2004년 3월 28일까지 후지 TV에서 제작·방송된 애니메이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SBS를 통해 1995년 2월 27일부터 1995년 6월 7일까지 방영했고, 이후 2003년 11월부터 2004년 8월까지 재방영되었다. 아톰 (성우 쓰무라 마코토) 아룡 (성우 마루야마 미키) 고명한 박사 (성우 오오와다 신야) 서연 (성우 가와세 아키코) 로비타 (성우 다쓰타 나오키) 봉구 (성우 구마이 모토코) 켄이치 (성우 사토 유코) 황보 (성우 치바 스스무) 유식한 박사 (성우 가쓰타 히사시) 스컹크 (성우 야오 가즈키) 아틀라스 (성우 히야마 노부유키) 플루토 (성우 오오쓰카 아키오) 수세미 경감 (성우 긴가 반죠) 콧수염 아저씨 (성우 도미타 고세이) 사라 (성우 고야마 마미) 크리스 (성우 쓰다 쇼코) 가라 (성우 토요구치 메구미) 청기사 (성우 다나카 히데유키) 입실론 (성우 히라마쓰 아키코) 기획 시미즈 요시히로, 시미즈 겐지 원작 데즈카 오사무 촬영 다카하시 히로카타, 노구치 하지메 음향효과 미마 마사후미 미술 가토 히로시 캐릭터 디자인 세야 신지 메카닉 디자인 아라마키 신지, 다카쿠라 다케시 작화 감독 세야 신지 아톰이 살고 있는 도시, 허구한 날 괴물로봇, 악당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도시는 의외로 멀쩡하다(?). 연방정부에 속해있는 자치권이 있는 도시이며, 아마도 연방의 중심도시인걸로 추측된다.(실제로 연방의회도 메트로 시티에서 열린다.)지금까지 나온 도시들 중에 가장 최신식인 도시. 위치는 해안 도시이며 중심부는 고층빌딩이 많지만 교외로 갈수록 건물이 낮아지며 중간중간에 고가도로가 있다. 교외에는 G-O-OM(메트로 시티 발전로봇)과 우주공항이 있고, 근처의 작은 섬에는 크로이첼 형무소가 있다. 도시 중심에 과학청이 있다. 20년전 로봇혁명이 진행되면서 반로봇 감정이 일고 있는 도시이다. 경찰은 상당히 무능(?)하다. 메트로 시티를 포함하여 여러 국가들이 모여 만든 정부, 아직까지 메트로 시티 외의 가입국은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진 기관으로는 연방의회와 연방의 정규군인 율리시스가 있다. 램프 의원 유식한 박사 레드 장군(율리시스 지휘관) 리온 연방의회 의장 낙후된 왕국이었지만 로봇을 받아들인 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나라. 메트로 시티와 다르게 동양적이다. 20년 전과 달리 테라포밍이 상당히 진행됐으나 그에 따라 범죄율도 급상승, 로봇 밀매장이 되고 말았다. 미국 서부를 많이 닮았다. 플루토에게 진 후 햄에그가 활동중인 곳이다. 아직 완벽하게 테라포밍이 되지 않아 화성 거주민은 외출할 때 산소가 나오는 막이 쳐지는 모자를 따로 써야 한다. 청기사가 해체처분하러 가는 로봇들을 탈취하여 남극에 세운 나라. 국토는 중앙의 성과 그 주변 영토이다. 로보타니아의 건국을 용납 못한 연방의회의 결정으로 율리시스가 로보타니아를 치러 가나, 로보타니아의 반격으로 인해 기갑 사단과 공중 편대가 전멸한다. 이에 격분한 레드 장군이 로보타니아에 셔틀라이트 빔포를 조준하나 아톰과 청기사의 공격으로 빔이 빗나가 실패한다. 그러자 레드 장군이 본대의 전력으로 로보타니아를 섬멸하기로 결심하나 유식한 박사와 아톰의 중재로 마지막 대화를 시작한다. 아톰의 연설에 자신이 따르던 로봇이 이탈하자 로보타니아는 남은 로봇들을 데리고 우주로 날아간다. 2010년 1월 13일 개봉된 아스트로 보이 아톰의 귀환. 아톰 (성우 유승호) 덴마 박사 (성우 조민기) 고라 (성우 남지현) 스톤총리 (성우 유세윤) 감독 데이빗 보워스 원작 데즈카 오사무 가까운 미래,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사람들은 큰 산을 떼어내어 구름의 윗부분으로 올려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메트로시티는 로봇과함께 번성한다. 메트로 시티의 로봇문명을 탄생시킨 텐마 박사는 정부의 압력으로 전투로봇인 피스키퍼 를 만들게 되고, 이것을 보고 싶어한 텐마 박사의 아들 토비 는 실험을 보다가 호기심에 실험현장에 너무 가까이 가서 폭주한 피스키퍼 에 흡수당해 죽는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텐마 박사는 아들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게 되고, 토비 의 DNA와 블루 코어를 넣어 로봇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로봇이 토비 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텐마 박사는 로봇을 버린다. 가출한 로봇은 블루 코어 에너지를 노린 스톤 총리 의 추격 때문에 서페이스 로 떨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대부인 헴에그와 코라를 만나게 된다. 코라 일행과 함께 살던 아스트로 로봇 혁명단을 만나고, 토목공사용 로봇인 조그 를 되살리게 된다. 그러나 조그 를 끌고오는 과정에서 아스트로가 로봇임을 안 헴에그 는 로봇 격투장에서 아스트로를 계략에 빠뜨린 후 격투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러나 아스트로 는 나오는 로봇을 족족 부숴버리고, 화가 난 헴에그 는 아스트로 를 공격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메트로 시티 전함이 나와 아스트로를 끌고 간다. 다시 텐마 박사 와 대면한 아스토로는 블루 코어가 빠져 작동 정지 되고, 블루 코어는 스톤 총리 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총리가 아스트로 를 장난감이라고 한 것에 대해 화가 난 텐마 박사 는 블루 코어를 빼돌려 아스트로 를 부활시킨다. 부활한 아스트로는 과학청을 탈출하고, 분노한 스톤 총리는 레드코어를 피스키퍼 에 장착, 아스트로 를 잡고 블루 코어를 되찾아 오게 한다. 그러나 폭주한 피스키퍼 는 오히려 스톤 총리 를 흡수하고, 도시를 공격한다. 한편 도시를 탈출한 아스트로 는 피스키퍼 가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유리 청소 로봇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돌아가 피스키퍼 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한편 서페이스 에서는 아이들이 헴에그를 붙잡아 에어카를 탈취하고 메트로 시티로 향한 후 위기에 빠진 아스트로 를 구하지만 쫓아온 피스키퍼 가 발전소를 파괴해 메트로 시티가 추락할 위기에 놓인다. 아스트로 는 코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트로 시티를 위기에서 구한 후 다시 피스키퍼 와 대결하지만 피스키퍼 의 로봇팔에 잡히고 중심부로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블루 코어와 레드 코어의 충돌로 둘은 튕겨진다. 이후 텐마 박사한테서 레드 코어와 블루 코어가 충돌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낸 아스트로는 피스키퍼 의 중심부로 돌진하여 동반자살한다. 이후 살아난 스톤 총리는 경찰에 잡혀가고 아스트로는 에너지를 조그 한테서 받아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이때 외계인이(?) 메트로 시티를 공격하고 아스트로는 외계인 에게 펀치를 날린다. 철인 28호 뮤지오 국내공식 에이전시 (주)지앤지엔터테인먼트 02-2108-7066 / yungpali@naver.com 사이토 지로 지음, 손상익 옮김, 《아톰의 철학》 -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세계, 개마고원, 1996 (리뷰) , 우라사와 나오키X데즈카 오사무 그 장대한 출발 - 오마이뉴스, 2006.11.27. astroboy.jp TezukaOsamu@World 베스트 애니메 1 2 Read first chapter online 분류:데즈카 오사무 분류:1963년 애니메이션 분류:1964년 애니메이션 분류:1965년 애니메이션 분류:1966년 애니메이션 분류:1980년 애니메이션 분류:1981년 애니메이션 분류:2003년 애니메이션 분류:2004년 애니메이션 분류:로봇 애니메이션 분류:후지 TV 계열 애니메이션 분류:닛폰 TV 계열 애니메이션 분류:사이보그를 소재로 한 만화 분류:동양방송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분류:SBS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분류:투니버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
소거법 (消去法은 연립방정식(특히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간단한 기법이다. 미지수의 개수를 줄여나가는 것은 소거법의 관건이며, 아래와 같은 서로 비슷한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 특정 미지수를 포함한 항의 계수가 0이 되도록, 방정식의 몇 배를 더하거나 뺌( 가감법 , 加減法; ) 특정 미지수의 남은 미지수로의 표현을 방정식에 대입( 대입법 , 代入法 특정 미지수의 남은 미지수로의 두 가지 표현을 등호로 연결( 등치법 , 等値法) 소거법을 통해 연립방정식의 해가 만족해야 할 일련의 필요조건들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들 중 어떤 조건이, 연립방정식의 해가 될 충분조건이기도 하면, 그 조건이 곧 연립방정식의 정확한 해이다. 만약 필요조건들이 모순이라면, 연립방정식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의의 연립일차방정식은 소거법만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 불능 여부 등에 대한 판단 없이는 다소 맹목적이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의 실질을 추상화하여 얻어진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법이다. 소거법은 일반적인 연립방정식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소거법만으로 풀이되는 특별한 연립방정식은 연립일차방정식 이외에도 존재한다.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을 가감법으로 풀이할 것이다. 두 방정식을 더해서(즉 ) 를 소거하면 즉 이를 첫번째 방정식에 대입하면 즉 따라서 이다. 당연히 이므로, 튜플 이 바로 (유일한) 해이다. 다르게는, 만약 대입법과 등치법에 의해 를 소거한다면, 그 과정은 각각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에 의해 를 로 표현한 식을 에 대입) (에 의해 를 로 표현한 두 식을 등호로 연결) 삼원일차 연립방정식 은, 그리고 을 통해 얻은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에서 를 구해서 에 대입하면 해 를 구할 수 있다. 다음 예시는 앞선 것들과 조금 다르다. 반대로 따라서 정확한 해는, 임의의 꼴의 튜플이다. 해일 수 있는 튜플에 대한 반대 방향으로의 검증은, 해의 구조를 미리 알면 어느 정도 생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지수와 방정식의 개수가 같은 연립일차방정식에 대해서는, 만약 계수행렬의 행렬식이 0이 아니면, 해가 유일하다는 결론이 있다. 자유낙하 시의 속도-시간, 변위-시간 관계식 으로부터, 를 소거하여, 속도-변위 관계식 를 얻을 수 있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을 구체화, 정형화하여 얻는, 연립일차방정식의 해법이다. 소거법은 엄밀히는 연립일차방정식이 성립할 필요조건만을 제시하므로, 정확한 해집합을 구하기 위해선 해의 후보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하지만, 가우스 소거법은 원래와 동일한 해집합을 갖는 연립일차방정식으로 전환시키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 분류:초등대수학 분류:방정식 |
선형대수학에서, 가우스 소거법 (Gauß消去法은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알고리즘이다. 풀이 과정에서, 일부 미지수가 차츰 소거되어 결국 남은 미지수에 대한 선형 결합으로 표현되면서 풀이가 완성된다. 가우스 소거법은 보통 행렬을 사용하며, 첨가 행렬을 그와 풀이가 같은 더 간단한 행렬로 변환하여 풀이를 완성한다. 가우스 소거법은 행렬식과 역행렬의 계산에도 응용된다. 체 에 대하여, 개의 미지수에 대한 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연립일차방정식 이 주어졌다고 하자. 여기서 은 주어진 행렬이고, 은 개의 미지수를 포함하는 열벡터이다. 즉, 이는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 이 경우, 이 연립방정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산을 가할 수 있다. 이들을 기본 행 연산 (基本行演算이라고 한다. (행의 치환) 의 번째 행과 번째 행을 서로 바꾼다. : (행의 상수곱) 번째 행을 0이 아닌 임의의 상수 으로 곱한다. : (행의 합) 임의의 상수 에 대하여, 번째 행의 배를 번째 행에 더한다. : 일반적으로 사다리꼴행렬(Echelon matrix,에쉴론 메트릭스, 또는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 에 대하여, 이라고 하면, 를 번째 행의 선행 계수 (先行係數라고 한다. 선행 계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행렬 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을 행사다리꼴행렬 (사다리꼴行列이라고 한다. 만약 이라면, 모든 에 대하여 이다. 만약 이며 와 가 존재한다면, 이다. 행렬 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을 기약행사다리꼴행렬 (旣約行사다리꼴行列이라고 한다. 은 행사다리꼴행렬이다. 가 존재한다면, 이며, 모든 에 대하여 이다. 즉,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의 항들이 대략 위에는 사다리꼴, 밑에는 0인 형태의 행렬이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 조건은 행사다리꼴행렬 조건보다 더 강한 조건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행렬은 행사다리꼴행렬이다. 다음과 같은 행렬은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이다. 가우스 소거법 은 행렬 을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행사다리꼴행렬로 만드는 알고리즘이며, 다음과 같다. 먼저 첫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 선행 계수가 위치하는 가장 작은 열수 을 찾는다. # 이라면, 첫번째 행을 인 어떤 번째 행과 치환한다. # 모든 번째 행에 첫번째 행의 배를 더해, 밑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그 뒤, 두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 어떤 번째 행의 선행 계수가 위치하는 가장 작은 열수 을 찾는다. # 이라면, 두번째 행을 인 어떤 번째 행과 치환한다. # 모든 번째 행에 두번째 행의 배를 더해, 밑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뒤에 오는 다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한다. 일반적으로, 번째 행은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 어떤 번째 행의 선행 계수가 위치하는 가장 작은 열수 을 찾는다. # 이라면, 번째 행을 인 어떤 번째 행과 치환한다. # 모든 번째 행에 번째 행의 배를 더해, 밑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만약 어떤 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째 행에서 멈춘다. 만약 항상 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번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하며, 으로 둔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을 원한다면, 찾았던 모든 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추가로 거친다. # 번째 행에 를 곱해, 를 1로 만든다. # 모든 번째 행에 번째 행의 배를 더해, 위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여기서 이며 인 데 주의하자. 사실, 이는 행렬의 계수이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의 과정을 특히 조단이 제시한 "가우스 조단 소거법"으로 부른다.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모두 가역 연산이다. 행의 치환의 역연산은, 자기 자신이다. 행의 상수곱의 역연산은, 그 행에 그 상수 대신 역수를 곱하는 것이다. 어떤 행에 다른 행의 배수를 더하는 것의 역연산은, 더하는 대신 빼는 것이다. 두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이 하나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행동치라고 한다. 첨가 행렬이 행동치라면, 연립방정식의 풀이는 서로 같다. 기본 행렬은 단위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한 번 가하여 얻는 행렬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기본 행렬 곱셈과 같다. 가우스 소거법 알고리즘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은 그와 같은 해를 갖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행렬로 변환할 수 있다. 따라서,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에 대한 풀이로 귀결된다. 행사다리꼴행렬 에 대한 연립일차방정식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존재한다. 상수항이 0이 아닌 행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수항은 번째 열의 항, 0행은 선행 계수가 없는 행을 뜻한다.) 해가 존재하는 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유일하다. . 즉, 0행이 아닌 행의 개수는 미지수의 개수와 같다. 즉, 선행 계수가 없는 열이 계수 행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해가 존재하는 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유일하지 않다. (체의 표수가 0이라면, 이는 해가 무한히 많은 것과 동치이다.) . 즉, 0행이 아닌 행의 개수는 미지수의 개수보다 적다. 즉, 선행 계수가 없는 열이 계수 행렬에 존재한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을 계산할 수 있다. 이는 정사각행렬에 대하여 다음 사실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기본행연산을 가하면, 행렬식은 "상수배" 변화하며, 주어진 기본행연산이 행렬식을 변화시키는 배수는 자명하다. 즉, * 행을 치환하면, 행렬식은 -1배가 된다. * 행에 상수곱을 하면, 행렬식은 그 상수의 역수배가 된다. * 어떤 행에 다른 어떤 행의 상수배를 더하면, 행렬식은 변하지 않는다. 가우스 소거법을 통해 행렬을 행사다리꼴행렬로 변환할 수 있다. 특히 정사각행렬이므로, 이는 0행(즉 모든 항이 0인 행)을 갖거나, 상삼각행렬이다. 0행을 갖는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은 0이다. 상삼각행렬의 행렬식은 모든 대각항의 곱이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역행렬을 계산할 수 있다. 행렬 의 역행렬은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에 단위행렬을 추가하여 행렬로 만든다. 이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로 만든다면, 행렬 은 과 같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행렬의 계수를 계산할 수 있다. 행렬 의 계수는 가우스 소거법을 가하여 얻는 행사다리꼴행렬에서 0이 아닌 행의 계수(즉, 선행 계수의 개수) 이다. 다음과 같은 선형 방정식이 주어졌다고 하자. 첫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 첫째 식의 -2배를 둘째 식에 더한다 # 첫째 식의 1배를 셋째 식에 더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둘째 식의 1배를 셋째 식에 더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다. 이제 행렬이 사다리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미지수들을 가장 밑의 행으로부터 순서대로 대입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을 후방대입 (back substitution)이라 한다. 정칙(Nonsingular) 행렬일 경우의 예 (식 2와 3을 바꾸어 해결한다) 비정칙(Singular) 행렬일 경우의 예 (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다음과 같은 행렬 의 역행렬을 계산한다고 하자. 기본행연산을 가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은 다음과 같다. *사다리꼴행렬 *크래머 공식 분류:수치선형대수학 |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 1790년 11월 17일 ~ 1868년 9월 26일)는 독일인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오늘날 작센안할트주 나움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하인리히 뫼비우스()였으며, 아버지는 춤 강습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이었다. 1820년 도로테아 크리스티안 율리안 로테와 결혼했으며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13년 괴팅겐 대학교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만나서 공부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철학학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 1816년 1월 22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천문대 관찰사가 되며 천문학과 특별교수가 되었다. 1844년 엔 고등 역학, 고등 천문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플라이센부르크에서 고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일반에게 가장 유명한 업적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이며, 그는 주로 기하학과 역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저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Der barycentrische Calcul (1827년) Lehrbuch der Statik (1837년) Die Elemente der Mechanik des Himmels (1843년) 이 외에도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짧은 논문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분류:1790년 태어남 분류:1868년 죽음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독일의 천문학자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기하학자 분류:19세기 천문학자 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 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분류:할레 대학교 동문 |
이승엽 (李承燁, Seung-Yuop Lee, 1976년 10월 11일 (음력 8월 18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및 지명타자이자, 현재 KBO 홍보대사 겸 이승엽야구장학재단 이사장 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의원, 스포츠기관단체인, SBS 야구해설위원이다. 본관은 광주. 중앙초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투수와 타자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경북고등학교 졸업에 맞추어 연고 지명을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1995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 1루수로 완전히 전향하였다.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어져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되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면서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해 나갔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1995년에 0.285의 타율과 13개의 홈런과 73타점을 기록해 장거리 타자로서 자질을 보였고, 이후 당시 백인천 감독에게서 ‘인천 부두 타법’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인 홈런 타자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1997년에 장타력에 돋보여 홈런 1위(32개), 타점 1위(114개), 최다 안타 1위(170개)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MVP와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차지했다. 1998년에 38개 홈런과 102타점을 기록하여 당시 타이론 우즈와 시즌 최다 홈런 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2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팀의 주축 타자로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1999년에 홈런(54), 타점(123), 득점(128), 출루율(0.458), 장타율(0.733)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고, 대한민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2002년에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와 홈런 경쟁을 벌여 47개를 기록하여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LG 투수 이상훈으로부터 극적인 동점 3점포를 터뜨리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는 곧 마해영의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이어져 소속 구단 삼성 라이온즈에게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안겼다. 2003년 6월 22일 SK 투수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의 오 사다하루(27세 3개월 11일)와 메이저 리그 앨릭스 로드리게스(현 뉴욕 양키스/당시 텍사스 레인저스ㆍ27세 8개월 6일)를 제치고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고지(26세 10개월 4일)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롯데전에서 투수 이정민을 상대로 56번째 홈런을 쳐내며 대한민국 프로야구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다. 이는 곧 아시아 신기록이 되었다(그 이전에는 왕정치가 1964년에 세운 55개).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하였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원정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 상대 투수는 세이부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이자 ‘괴물 투수’인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종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0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결국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하면서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때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되었다. 시즌 최종 타율은 2할대 타율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현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기록한 기록이었다)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하였다. 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었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을 쳐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이 재팬 시리즈 챔피언 등극을 하는데에 있어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 해 재팬 시리즈 MVP도 유력하였으나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밀려 안타깝게 MVP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2005년 시즌 종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친정 팀인 대한민국의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3번과 6번 타자로 출전하기도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이승엽. 2005년 시즌이 끝나고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지바 롯데 마린스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당시 새로 부임한 하라 감독 아래 팀 전력의 보강을 꾀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2006년 1월 19일에 전격으로 계약하였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은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하였는데, 이러한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여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팀 자체는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으로 인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를 기록하여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개를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해졌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하면서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2006 시즌을 마감하였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2006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소속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우승 이후로 연기하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맺은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천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엔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2007년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하였다. 외다리 타법을 고쳐 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말미에는 승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하였다.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종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여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투런 홈런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투런 홈런을 뽑아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 45경기에 출장하여 2할대 타율, 7할 5푼 5리의 OPS를 보였으며,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센트럴 리그 우승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경기로 진행되었는데 여기에서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에 삼진을 12개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에는 3할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하였다. 홈런 16개와 타율 2할 2푼 9리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에 나가사키현 야구장에서 열린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2루타 두 방을 날리며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였다. 시즌 종료 후 2010년 11월 1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이후 일본 잔류를 위해 팀을 물색하던 그는 퍼시픽 리그 소속의 오릭스 버펄로스와 1억 5천만엔에 플러스 옵션이 포함된 연봉으로 계약하였다.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의 이승엽.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2010년 12월 2일 퍼시픽 리그 오릭스 버펄로스와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투수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NPB가 공인구를 반발력이 적은 것으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홈런 15개를 치며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 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타석 미달로 인해서 순위에는 들지 못하였다. 2011년 10월 21일 오릭스 버펄로스의 고베 홈 구장인 호토모토 필드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였다.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을 체결하여 복귀했다. 2012년에는 3할대 타율,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홈런 타이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고, 상대적으로 1루수로 출장한 경기가 적어서 처음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2013 시즌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의 대결에서 6-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을 맛봤다. 2013년 8월 28일 NC와의 경기에서 3,000루타에 달성 하였으며, 이는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이다. 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2할대 타율, 13홈런을 기록하였다.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되기도 했다.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던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되어 7경기에서 타율 1할4푼8리(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2013년 11월 1일 7차전까지 단 한 점의 타점도 뽑아 내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의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하여 그 해 골든 글러브(지명타자)를 타격왕을 차지한 이병규에게 내주어야 했다. 2014년에는 타격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 - 30홈런 - 100타점을 달성하며 국민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2014년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였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쓸어담았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을, 한 달 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하였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때리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회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하여 총 9번을 받으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하였다. 2015년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구승민을 상대로 장외홈런이자 시즌 10호 홈런,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한일통산 559호 홈런을 기록하였다.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5타수 6안타 타율 4할의 호성적을 기록하였으나, 패배는 막지 못하였다. 시즌 종료 후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2월 8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으면서,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2015년을 마치고 FA 선언을 하였고 2년 36억원에 잔류를 하였다. 2016년 2월 25일에 삼성 라이온즈의 새로운 홈 구장인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가 준공되면서, 그 기념으로 대구도시철도공사 홍보대사로 뽑혀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의 특별 안내방송을 맡게 되었다. 2016년 8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중전 적시타를 날리며 2루주자 최형우가 홈을 밟으면서 KBO 리그 통산 타점 1위였던 양준혁의 1389타점을 넘어서는 1390타점을 기록하게 되었고, KBO 리그 통산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9월 14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재우를 상대로 홈런을 날리며 한일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는 2017년 KBO 리그가 시작되기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2017년 5월 21일 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을 하였고,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 선수를 상대로 KBO 리그 최초로 4000루타를 달성하였다. 시즌 후반기 부터는 그의 소속팀인 삼성 라이온즈를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투어를 진행하였고 그 여정이 끝난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홈경기를 끝으로 공식 은퇴를 했다. 그 경기에서 국민타자답게 한현희를 상대로 투런 홈런과 솔로 홈런으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면서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경기 후 삼성 라이온즈는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 은 구단 역대 세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밖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KBO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이순철과 함께 SBS 야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3년 제3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6 (1995년 ~ 2003년, 2012년 ~ 2017년, 삼성 라이온즈(영구 결번) 36 (2004년 ~ 2005년, 지바 롯데 마린스) 33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5 (2007년 ~ 201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3 (2011년, 오릭스 버펄로스) ‘국민타자’, ‘라이언 킹’ 등으로 불린다.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이다.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여 “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제 대회나 중요한 경기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특히 8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8회의 사나이 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제 2구장인 포항야구장의 성적도 뛰어나 포항의 사나이 라고도 불린다. 부친 이춘광 (1943년생. 전라남도 강진군 신전면 용월리 출신) 모친 김미자 (1949~2007. 전라남도 해남군 출신이며 형 이종호 누나 이현주(체육교사) 배우자 이송정 (2002년 결혼) * 첫째 아들 이은혁 (2005년생) * 둘째 아들 이은준 (2011년생) 대구중앙초등학교 경상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연도 소속 나이 출장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도루 도실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루타 병살타 몸맞 희타 희플 고4 1995 삼성 19 121 411 365 55 104 29 1 13 73 0 3 33 54 .285 .345 .477 .822 174 4 4 2 7 1 1996 20 122 504 459 57 139 32 6 9 76 4 1 34 42 .303 .354 .458 .811 210 10 5 1 5 4 1997 21 126 577 517 96 170 37 3 32 114 5 2 49 79 .329 .391 .598 .988 309 10 6 1 4 4 1998 22 126 568 477 100 146 32 2 38 102 0 2 78 97 .306 .404 .621 1.024 296 4 5 1 7 10 1999 23 132 614 486 128 157 33 2 54 123 10 2 112 114 .323 .458 .733 1.190 356 7 12 0 4 6 2000 24 125 544 454 108 133 33 0 36 95 4 5 80 113 .293 .404 .604 1.008 274 5 7 0 3 7 2001 25 127 574 463 101 128 31 2 39 95 4 2 96 130 .276 .412 .605 1.017 280 6 12 1 2 11 2002 26 133 617 511 123 165 42 2 47 126 1 2 89 109 .323 .436 .689 1.125 352 11 15 0 2 5 2003 27 131 596 479 115 144 23 144 7 0 101 89 .301 .428 .699 1.127 335 11 10 0 6 9 2004 지바롯데 28 100 382 333 50 80 20 4 14 50 1 2 42 88 .240 .328 .450 .779 150 6 3 1 3 0 2005 29 117 445 408 64 106 25 2 30 82 5 4 33 79 .260 .315 .551 .866 225 9 1 0 3 3 2006 요미우리 30 143 592 524 101 169 30 0 41 108 5 1 56 126 .323 .389 .615 1.003 322 5 5 0 7 3 2007 31 137 583 541 84 148 29 2 30 74 4 3 38 119 .274 .322 .501 .823 271 8 1 2 1 0 2008 32 45 170 153 21 38 4 0 8 27 1 0 11 37 .248 .324 .431 .755 66 3 6 0 0 0 2009 33 77 257 223 33 51 9 0 16 36 1 2 28 65 .229 .327 .484 .811 108 1 5 0 1 4 2010 34 56 108 92 13 15 1 0 5 11 1 0 12 26 .163 .280 .337 .617 31 0 3 1 0 0 2011 오릭스 35 122 432 394 28 79 20 0 15 51 0 0 32 121 .201 .257 .365 .622 144 8 0 0 6 1 2012 삼성 36 126 556 488 84 150 28 2 21 85 6 0 59 101 .307 .384 .502 .886 245 10 4 1 4 4 2013 37 111 483 443 62 112 24 0 13 69 3 1 30 94 .253 .298 .395 .693 175 8 2 0 8 2 2014 38 127 548 506 83 156 30 0 32 101 5 1 40 77 .308 .358 .557 .915 282 10 0 0 2 3 2015 39 122 522 470 87 156 28 1 26 90 2 1 40 71 .332 .387 .562 .949 264 10 6 0 6 2 2016 40 142 623 542 91 164 32 2 27 118 5 2 65 89 .303 .380 .518 .899 281 7 8 0 8 1 2017 41 135 533 472 65 132 30 5 24 87 1 1 47 85 .280 .347 .517 .864 244 7 6 0 8 6 KBO 통산 15년 1906 8270 57 25 953 1344 .302 120 102 7 76 75 NPB 통산 8년 797 2969 2668 394 686 138 8 159 439 18 12 252 661 .257 .324 .494 .818 1317 40 24 4 21 11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 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 고교 청룡기 대회 - 우수 투수상 (1993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최다 홈런상, 최다 타점상 (1994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0년)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2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수 선수 (2006년, 1루수 부문) & 초대 홈런왕 및 타점왕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8년) MVP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골든글러브 10회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12년, 2014년, 2015년) 한국시리즈 MVP 1회 (2012년) 홈런왕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점왕 4회 (1997년, 1999년, 2002년, 2003년) 득점왕 5회 (1998년, 1999년, 2000년, 2002년, 2003년) 최고 출루율 1회 (1999년) 최고 장타율 3회 (1998년, 1999년, 2002년) 최다 안타 1회 (1997년)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2005년) 월간 MVP 1회 (2006년 6월) 도쿄 돔 MVP 1회 (2006년)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7년)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7년)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8년)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9년) 한국스포츠연맹 선정 올해의 남자프로선수상 (1999년) 일간스포츠001 최고타자상 (1999년) 스포츠투데이 매일우유상 대상 (1999년) 제37회 백상체육대상 (2000년) 서울외신기자클럽 외신홍보상 (2003년)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대상 (2003년) 한국언론인연합회 선정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2003년) 자황컵 체육대상 프로선수상 (2003년)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특별상 (2006년) 제55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대상 (2009년)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최고타자상 (2012년)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타자상 (2012년) 제2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2년) 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2013년)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재기상 (2014년) 제6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6년) 휘슬러코리아 일구상 일구대상 (2016년)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공로상 (2016년)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2017 최고의 레전드 특별상 (2017년) 기록 날짜 소속 구장 상대팀 상대 투수 경기수 달성 당시 나이 기타 각주 최연소/최소 경기 2000루타 2002. 5.16 삼성 대구 롯데 914 25세 8개월 28일 DH-2 1999년 5월 5일 대구 현대전, 최연소 통산 100 홈런(만 22세 8개월 17일, 상대 투수 3회 정명원) 2001년 6월 21일 대구 한화전, 최연소 통산 200 홈런(만 24세 10개월 3일, 상대 투수 8회 김정수) 2003년 6월 22일 대구 SK전, 세계 최연소/최단 경기 통산 300 홈런(만 26세 10개월 4일/1075경기, 상대 투수 8회 김원형) 2003년 10월 2일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최고 기록 경신 (56개), 대구 롯데전 상대 투수 2회 이정민 2012년 7월 29일 한·일 통산 500 홈런, 목동 넥센전 상대 투수 4회 앤디 밴 헤켄 2013년 6월 20일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 경신 종전 양준혁 (351개),(352개), 인천 SK전 상대 투수 3회 윤희상 2015년 6월 3일 KBO 리그 통산 400 홈런, 포항 롯데전 상대 투수 3회 구승민 2016년 9월 14일 한·일 통산 600 홈런, 대구 한화전 상대 투수 2회 이재우 2017년 10월 3일 KBO리그 은퇴경기 최초 연타석 홈런기록 넥센전 상대 투수 2회 한현희 일본 진출 첫 출장 · 첫 안타 2004년 3월 27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세이부 돔, 상대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 일본 진출 첫 홈런 2004년 4월 4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3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상대 투수 아라가키 나기사) 한·일 통산 400호 홈런 달성 2006년 8월 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도쿄 돔, 만 29세 11개월 13일, 상대 투수 1회 이가와 게이) 일본 통산 100호 홈런 달성 2007년 7월 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상대 투수 아오키 디카히로) 일본 양대 리그 우승 외국인 선수 지바 롯데 마린스(200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09년) MBC * 성공시대 - 홈런왕 이승엽 (1999년 10월 23일) * PD수첩 - 이승엽 신드롬 (1999년 8월 24일) * 밀레니엄특집 아듀 20세기 웰컴 21세기 - 스포츠 100년 손기정에서 이승엽까지 (1999년 12월 31일) * 일밤 - 불가능은 없다 (2007년 12월 30일) * 대구MBC The Lion - 이승엽 삼성 복귀 내레이션 참여 (2012년 3월 25일) * 대구MBC 덕아웃 -프로야구 삼성 우승특집 방송 출연 (2012년 11월 16일) KBS * 체험 삶의 현장 -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1998년 11월 16일) * 서세원쇼 (1999년 8월 17일) * 작전타임 스포츠쇼 - 집중탐구 (1999년 9월 29일) * 개그콘서트 - 걸인의 추억 (2003년 8월 26일) *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 (2003년 12월, 게스트 윤도현, 장나라와 동반출연) * 파워 인터뷰 (2005년 11월 27일) * 단박 인터뷰 - 야구 선수 이승엽 (2007년 6월 26일) * 여유만만 - 역대 연봉 스포츠 스타로 키운 사연 (2009년 7월 31일) SBS * 줌인 내인생의 특종 (1999년 8월 17일) *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국민타자 이승엽 (2012년 11월 19일, 2012년 12월 3일), 신년의 밤 (2015년 1월 19일) * SBS 스페셜 - 승엽의 시대 편 492회 (2017년 10월 15일) 1999년 삼성그룹 1999년 삼성증권 2003년 신세계 신세계상품권 (부인 이송정과 함께 출연) 2006년 해태제과 홈런볼 2006년 삼성전자 파브 full hd 모젤 2007년 CJ헬스케어 컨디션파워 (2편에선 김제동과 함께 출연) 2007년 KB국민은행 2007년 AIA생명 꼭하나의로보험 (부인 이송정, 손범수와 함께 출연) 2008년 나이키 2009년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2018년 SK브로드밴드 옥수수 (김제동과 공동출연) 1998년 삼성투자신탁 1999년 삼성투자신탁증권 2003년 삼성전자 애니콜 2000년 대구지방경찰청 대구경북 청소년선도위원 2009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명예홍보대사 2012년 대구경북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장학지원 홍보대사 이승엽 - 스탯티즈 이승엽 선수 소개 - 요미우리 자이언츠 웹사이트 스포츠호치 2008년 8월 22일자 기사 분류:1976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광주 이씨 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 분류:오릭스 버펄로스 선수 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분류:지바 롯데 마린스 선수 분류: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분류:대한민국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 분류:한국 프로 야구 1000타점 클럽 분류:한국 프로 야구 300홈런 클럽 분류:한국시리즈 MVP 수상자 분류:KBO 골든글러브 수상자 분류:KBO MVP 수상자 분류:KBO 장타율상 수상자 분류:KBO 출루율상 수상자 분류:KBO 득점상 수상자 분류:KBO 안타상 수상자 분류:KBO 타점상 수상자 분류:KBO 홈런상 수상자 분류:KBO 리그 내야수 분류:KBO 리그 1루수 분류:KBO 리그 지명 타자 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분류: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분류: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 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분류: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분류: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분류:대구중앙초등학교 동문 분류:경상중학교 동문 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 분류:대구대학교 동문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KBO (Korea Baseball Organization)/ KBO 사무국 (Office of the Commissioner, KBO)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 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 (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KBO 는 이 기구의 영문 약자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 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 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 별명으로는 크보(KBO를 그대로 읽어서)가 있다. 1981년 12월 11일 한국야구위원회 창립 1982년 3월 27일 서울의 동대문 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KBO 리그 출범 2011년 1월 1일 기준으로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에서 2012년에 2군 퓨처스리그 참가 및 2013년에 1군리그 참가를 목표로 통합 창원시에 제9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선언했다.2011년 2월 8일자로 KBO로부터 창단승인을 받아 2013년 NC 다이노스라는 팀명으로 9번째구단으로 프로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2013년 통신회사인 KT가 수원시에 제10구단 창단을 선언하고 KBO가 협의 끝에 창단을 승인하여 팀명 kt 위즈로 정식창단하였다. 2014년까지 2군 리그 참가 후 2015년 정식 1군 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 KBO 총재 는 KBO 리그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구분 이름 재임 기간 비고 1, 2대 서종철 1981년 12월 11일 ~ 1988년 3월 27일 3, 4대 이웅희 1988년 3월 28일 ~ 1992년 5월 27일 5대 이상훈 1992년 5월 28일 ~ 1993년 9월 16일 6대 오명 1993년 11월 26일 ~ 1993년 12월 21일 7대 권영해 1994년 3월 21일 ~ 1994년 12월 23일 제30대 국방부 장관 8대 김기춘 1995년 2월 8일 ~ 1996년 6월 8일 15·16·17대 국회의원제40대 법무장관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 9, 10대 홍재형 1996년 7월 4일 ~ 1998년 5월 26일 16·17·18대 국회의원18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제37대 재무장관 11대 정대철 1998년 5월 27일 ~ 1998년 9월 15일 9·10·13·14·16대 국회의원 12, 13, 14대 박용오 1998년 12월 8일 ~ 2005년 12월 11일 총재 대행 (1998년 9월 16일 ~ 1998년 11월 28일)최장 임기(2561일) 15, 16대 신상우 2006년 1월 12일 ~ 2008년 12월 16일 8·9·10·11·13·14·15대 국회의원초대 해양부 장관 17대 유영구 2008년 12월 17일 ~ 2011년 5월 2일 총재 대행(18대) 이용일 2011년 5월 17일 ~ 2011년 8월 21일 19, 20, 21대 구본능 2011년 8월 22일 ~ 2017년 12월 31일 두번째 최장 임기(2324일) 22대 정운찬 2018년 1월 1일 ~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제40대 국무총리 구분 이름 재임 기간 비고 1, 2, 3대 이용일 1981년 12월 15일 ~ 1991년 2월 21일 4, 5대 안의현 1991년 2월 ~ 1995년 12월 6대 박종환 1996년 1월 ~ 1998년 3월 7대 최영언 1998년 10월 8일 ~ 1999년 12월 24일 8, 9, 10대 최영언 1999년 12월 28일 ~ 2006년 4월 5일 11대 하일성 2006년 5월 8일 ~ 2009년 3월 31일 12대 이상일 2009년 4월 1일 ~ 2011년 12월 13일 13, 14대 양해영 2011년 12월 14일 ~ 2017년 12월 30일 15대 장윤호 2018년 1월 30일 ~ 2019년 2월 7일 16대 류대환 2019년 2월 8일 ~ 현재 한국 프로 야구 관리, 통괄 페넌트레이스, 올스타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주최 야구 경기 기록, 관련 자료의 수집과 조사 및 분석 연구 국제 야구 활동 교류 추진 아마추어 야구의 발전을 위한 제반 지원 활동. TV 및 라디오 방송중계권 계약 활동. 야구 기술의 개발 및 지도 보급 야구 관계자의 상벌 및 복지 사업 회원 간의 연락 및 친선 야구 박물관, 도서관 및 회관의 설치 운영 한국 프로 야구 연감 및 간행물 발간. 한국야구위원회 재산/회계 관리. 기타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KBO 리그 KBO 퓨처스리그 KBO 한국시리즈 한화 이글스 해태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키움 히어로즈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 NC 다이노스 SK 와이번스 kt 위즈 현대 유니콘스 대한야구협회 한국 프로 야구 병역 비리 사건 넥센 히어로즈의 트레이드 파동 KBO 리그 승부조작 사건 NC 다이노스 홈구장 부지 선정 논란 분류:사단법인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행정 기구 분류:1981년 설립 분류:서울 강남구 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단체 |
일반적으로 언어학 (言語學은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언어학은 인간의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법과 같은 무의식적인 지식을 체계화, 규칙화하는 것에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언어학의 연구 분야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 중의 하나는 어떤 한 순간의 언어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공시언어학 통시언어학 다음은 언어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분야이다. 이러한 구분은 언어가 낮은 단계의 소리에서 높은 단계의 뜻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음성학은 음성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학문 음운론은 화자가 말할 때 심리적으로 구분하는 소리(음운)에 대한 학문 형태론은 단어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통사론은 문장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의미론은 단어의 의미와 단어의 조합에 따른 의미 변화에 대한 학문 화용론은 대화에서 화자의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학문 텍스트언어학은 언어 소통의 궁극적 단위인 텍스트에 대하여 다각도로 연구하는 학문 다음 분야들은 그 연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분야들로 전통언어학의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휘론과 문법론은 언어의 의미와 구조를 연구하는 분야에 해당하고 어원론은 언어의 시간적인 변화, 방언학은 언어의 공간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어휘론 문법론 어원론 (어원학) 방언학 어떠한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분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에 제시된 대상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음운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역사음운론, 전산적인 차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전산의미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통사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이론통사론 등으로 불린다.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등의 방법론을 이용한 접근법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순수한 언어학이 아니라 학제간 연구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로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해 응용언어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비교언어학 (또는 역사언어학, 역사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 (언어유형론, 또는 짧게 유형론) 전산언어학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 또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존재한다. 언어학의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를 하는 메타언어학과 언어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사가 있다. 메타언어학 언어학사 이외에도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문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는 문체론과 수사학,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기호학 등이 있다. 문자학은 현대 언어학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음성을 언어의 가장 낮은 단계의 물리적인 기반으로 보는 관점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므로 문자는 부수적인 도구 혹은 언어 이후의 것으로 파악되어 언어학의 연구 대상에서 배제된다. 문체론 수사학 기호학 문자학 언어와 관련된 실질적인 분야를 다루는 응용언어학에는 언어 관련 교재 개발, 교수법, 번역과 통역, 사전 편찬, 언어치료, 언어정책, 전산처리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담화분석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 맞춤법, 정서법 대조언어학 번역학 사전학 (사전편찬학) 언어교육학 언어정책 자연언어처리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 언어학은 연구 주제에서 문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특정 학문 분야의 하위 분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야들은 흔히 학제간 연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일부 분야는 언어에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호학 사회언어학 언어 되살리기 수리언어학 신경언어학 심리언어학 언어병리학 - 언어장애, 언어치료 언어습득 응용언어학 인류언어학 (참조 언어인류학) 인지언어학 자연언어처리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 전산언어학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 언어지리학 언어철학 비교 재구 김방한 (2001), 언어학의 이해, 민음사. () 김선미 (2003), 언어와 언어학 이론, 한국문화사. () 김진우 (2007), 언어 - 이론과 그 응용, 탑출판사. () 김진호 (2004), 언어학의 이해, 역락. () 배주채 (2015), 언어학개론, 태학사. ( |
한국 정보 올림피아드 (, KOI )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한민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이다. 알고리즘 설계 능력을 평가하는 경시 부문과 학생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공모 부문으로 나뉜다. 부문별 우승자는 각각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와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14개 교육청에서 주관하며, 한국정보과학회에서 후원한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 를 선포했다. 국가적으로 정보산업을 육성하자는 의도였다. 대통령 산하에 정보산업육성위원회 가 출범하여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는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4월 22일,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 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지금과 같이 전국에서 선발된 초·중·고 학생들이 300명이 참가하여, 3시간 동안 문제를 풀었다. 개회식은 오전 9시에 열렸고 실제 대회는 9시 20분에 시작되었다. 참가 대상이 국민학생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교사부가 있었다. 공모부문도 1회부터 있었는데, 참가 대상에 제한이 없어서 단체도 참가할 수 있었다. 사용기종은 8비트 컴퓨터, 사용언어는 베이직과 어셈블리어였다. 역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같은 날 개최되었다. 이 첫 대회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전 10시 20분에 체육관 전체가 정전되어 참가자와 관계자를 비롯해 모든 컴퓨터가 꺼진 것이다. 항의가 쏟아지자 대회 마감 시각이 12시 20분에서 2시간 연장되어 14시 20분으로 미루어졌다. 정전 원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었다. 전두환이 예정에 없이 대회장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자 대통령 경호실이 경비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회장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응시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처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일개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갈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정부의 정보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경진대회 입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도 함께 먹었다. 정전만큼이나 놀라운 일은, 컴퓨터를 고작 10개월밖에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 하형진(대구 계성국민학교 6학년)이 기라성 같은 중, 고등학생들을 다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하형진은 여러 차례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게임회사 KOG에서 프로그래머로 재직 중이다.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13회까지 열린 후 1996년부터 현재와 같이 정보올림피아드로 이름을 바꿔 개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시 부문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부문이다. 지역 예선 필기를 통과하면 전국 본선에 진출한다. 2016년 이전에는 시 단위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또 시 도별 지역 본선도 통과해야 했다. 경시부문 우수자(통상 금상 이상)에게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예선은 필기 시험으로 치른다. 수학적 규칙을 찾는 능력과 작성된 코드를 파악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컴퓨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기로 치른다. 2016년에 예선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실기로 치른다. 문제는 대체로 네 개가 출제되고, 시험시간은 3시간 가량이다. 구체적인 시상 규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 시상규모 계 시상내용 초등학생부 중학생부 고등학생부 계 200 200 200 총 600명 대상(국무총리상) - - 1 1 상장, 메달 대 상(장관상) 1 1 - 2 상장, 메달 금상 (장관상) 3 3 4 10 상장, 메달 은상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45 45 45 135 상장, 메달 동상 (전문기관장상) 50 50 50 150 상장, 메달 장려상 (전문기관장상) 101 101 100 302 상장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장려상은 0점자와 미참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시상된다. 항상 위 표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매년 세부 시행계획에서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다. 공모 부분은 학생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도별 추천작품이 본선에 올라간다. 지역 예선 대회 개최 여부는 시·도마다 다르다. 공모부문 우수 시상자에게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의 컴퓨터 공학 부문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다음은 그 시상 규모와 내용이다. 구분 시상인원 시상내용 초등학생부 중학생부 고등학생부 계 18 18 18 총 54명 대상 - - 국무총리상(1) 상장, 메달 대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1)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1) 금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 〃 은상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 〃 동상 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 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 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 〃 경시부문과 마찬가지로,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회의 심사에 따라 수상인원은 변경될 수 있다. 2014년에는 이전과 달리 배열 크기가 제한되었으며 각 교육청은 이를 학생들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지역 본선(대구시정보올림피아드)이 치러질 당시 대구시교육청 산하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수험생에게 이를 안내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잘못을 인정하고 재채점을 진행하였다. 이 채점에서 5명이 구제되면서 대구시에서 전국 본선에 진출하는 고등부 수험생은 기존 7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났다. 2015년에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문제풀이 형식을 파일 입출력에서 표준 입출력으로 변경하였다. 몇몇 학생과 학부모는 시험 방식이 변경된 사실이 제대로 공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대회에 응시한 일부 학생은 파일 입출력을 사용한 코드를 작성하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응시자 주의사항과 감독관을 통하여 충분히 강조했을 뿐더러 기존 방식대로 푼 학생을 구제하면 문제를 제대로 읽고 풀이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면서, 구제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파일 입출력에 맞춘 코드를 작성한 학생들은 결국 0점 처리가 되었다. 2018년 4월에 개최된 지역대회에서는 총 일곱 문항이 정답없음 , 복수정답 처리되었다. 보기로 제시된 코드에 오타나 정의되지 않은 행동(Undefined behavior)이 포함된 데다가 컴파일러가 비주얼 스튜디오임을 전제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등, 상당히 많은 문제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에 학생과 학부모가 거세게 반발하자,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과 한국정보과학회 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출제 오류로 피해를 본 전원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기존에 합격점을 받은 600명에 구제된 147명을 더해 도합 747명이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정보올림피아드 발전을 위한 대책위원회 를 꾸리고, 그 해 6월 정보올림피아드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공청회를 주최하였다. 공청회에서 대책위는 영재교육 위주 대회에 공교육 취지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문제 난이도 등 기준이 명확히 세워지지 않은 것, 출제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뽑지 못한 것, 기존 영재교육 전문가와 새로 들어온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 전문가가 제대로 협업하지 못한 것을 출제 오류 사태의 원인으로 꼽았다. 2018년 7월 개최된 전국대회에서는 고등부 채점이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보올림피아드 본선에서는 답안을 서버에 제출하면 프로그램이 채점하여 즉시 결과를 돌려주는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도 채점 결과가 나오지 않아 참가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주관 측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은 국제정보올림피아드의 채점 지연 시 대응 규정을 준용하여 경시 시간을 30분 연장하였고, 대회가 종료된 뒤 채점 결과를 참가자들에게 따로 통보하였다. 이후 진흥원은 예비소집 때 실시한 채점 환경 점검과 대회를 마친 후 진행한 원인 분석에서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데이터가 대량으로 몰리는 경시 시간 동안에만 일어나는 문제로 판단된다고 해명했다. 채점위원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지연되었으므로 기존 채점 기준대로 채점하였다고 밝혔다. 연도 학급 상격 지역 소속 학교 이름 2012 초등부 대상 경기 철산초등학교 서규호 금상 경기 신영초등학교 김현수 서울 경기초등학교 신동원 경기 안양신기초등학교 백윤기 중등부 대상 대구 대구동중학교 김민수 금상 경기 상동중학교 김종범 제주 제주제일중학교 고지훈 서울 신반포중학교 이현민 고등부 대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박상수 금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이재범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정현식 부산 동래고등학교 박수찬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김종범 2013 초등부 대상 서울 서울도곡초등학교 김재우 금상 대구 대구월배초등학교 박정익 전남 순천부영초등학교 김세빈 인천 인천새말초등학교 김민성 중등부 대상 부산 동래중학교 박수찬 금상 경기 능동중학교 백우현 경기 늘푸른중학교 오제노 경북 포항제철중학교 최원우 고등부 대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조승현 금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윤지학 김진형 대구 경원고등학교 방성원 경남 김해율하고등학교 서상우 2014 초등부 대상 경기 벌말초등학교 배서연 금상 충남 천안용암초등학교 김진우 경기 호암초등학교 장래오 충남 도하초등학교 김계성 중등부 대상 경북 영남삼육학교 시제연 금상 광주 광주동명중학교 신승원 경기 심원중학교 이건호 서울 강신중학교 이재영 고등부 대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박상수 금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이재범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정현식 부산 동래고등학교 박수찬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김종범 2015 초등부 대상 인천 삼목초등학교 최서현 금상 서울 신중초등학교 최은수 경기 경기초등학교 박준호 경남 신서초등학교 양병선 중등부 대상 경기 부천중흥중학교 박관영 금상 서울 대왕중학교 임유진 경기 철산중학교 서규호 경기 가운중학교 신민철 고등부 대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최민제 금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김제형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조민규 김강욱 대구 대구과학고등학교 시제연 2016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별말초등학교(6) 송준혁 금상 개운초등학교(6) 황수영 신정초등학교(6) 조수연 상현초등학교(6) 이예린 중등부 대상 연향중학교(2) 김세빈 금상 문정중학교(2) 조경원 가운중학교(2) 신민철 제주중앙중학교(3) 박찬호 고등부 대상 경기과학고등학교(3) 오선재 금상 대구과학고등학교(2) 시제연 경기과학고등학교(1) 김현수 수원고등학교(1) 김건 충북과학고등학교(2) 조보령 2017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만수초등학교 반딧불 금상 초당초등학교 김건우 벌말초등학교 이동현 불당초등학교 전정현 중등부 대상 문정중학교 조경원 금상 잠심중학교 이민준 내정중학교 이종영 갈뫼중학교 최정현 고등부 대상 경기과학고등학교 신승원 금상 서울과학고등학교 구준서 수원고등학교 김건 경기과학고등학교 김세빈 박민솔 연도 학급 상격 지역 소속 학교 이름 작품명 2012 초등부 대상 서울 서울원명초등학교 박락영 재시작 매니저 금상 서울 광운초등학교 한재혁 Pizza s CEO 중등부 대상 광주 광주서석중학교 한윤도 스크립트매크로 금상 인천 청량중학교 류지석 선호투표제를 이용한 전자투표 프로그램 고등부 대상 경기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한바환 코드 매니악스 금상 경기 서해고등학교 김지수 엘피지 프로젝트 2013 초등부 대상 충남 천안불당초등학교 이준모 다각형 나라 여행 금상 경기 상현초등학교 이선규 오델로 알고리즘 대회 중등부 대상 서울 당산중학교 함어진 작은별 금상 서울 방원중학교 이어진 두뇌개발 트레이닝 고등부 대상 대구 대구화원고등학교 정주영 불후의 플랜테이션 2014 초등부 대상 서울 서울을지초등학교 이든솔 Easy Program Maker 금상 서울 서울상원초등학교 강태원 E/V 군관리시스템 중등부 대상 경북 김천중학교 박원빈 링을 던져라 금상 경북 구룡포중학교 김훈 에스컨도 고등부 은상 충북 충북과학고등학교 박원호, 김준구 손끝, 내 마음의 메신저 조창호 말하듯이 쓰는 온라인 수식 편집기 울산 신정고등학교 김지용 깃박스 동상 서울 관악고등학교 함어진 타임키드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윤지용 RFLP 디자이너 2015 초등부 대상 대전 삼천초등학교 전종현 숫자맞추기 금상 대전 송림초등학교 권도헌 자동차의 목적지로 가는 길 검색기 중등부 대상 대전 두리중학교 송석호 빛의 퍼즐 금상 대전 대덕중학교 박진우 듀얼테어 고등부 대상 대전 대덕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등학교 박정환, 정원태 플랙스 스크립트 금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양찬솔 비도비 스매시 2016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글꽃초등학교(6) 김준영 미 기 재 금상 영도초등학교(6) 전효승 중등부 대상 노은중학교(1) 권도헌 금상 매봉중학교(3) 김지섭 고등부 대상 유성고등학교(1) 김동민 금상 백양고등학교(2) 김진관 Cairo American College(9) 이희준 2017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경복초등학교 이지성 미 기 재 금상 구룡초등학교 서범준 중등부 대상 동도중학교 염현지, 염장운 금상 포항제철중학교 조운경 고등부 대상 양영디지털고등학교 안지홍 금상 경남과학고등학교 박지안, 이자윤, 조수진 동안고등학교, 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이희준, 함종헌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IOI)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 한국정보올림피아드 공식 웹사이트 분류:대한민국의 문화 분류:올림피아드 분류:과학경시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