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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일으키다가 정학을 당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가까스로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여 1966년에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과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결국 그만두었다
이후 막노동과 사시 공부를 병행하였다
1968년 군에 입대하여 제12사단 을지부대에서 육군 상병으로 만기전역하였다
1972년 27세에 권양숙과 결혼하였고 1973년에 아들 건호를, 1975년에 딸 정연을 낳았다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는 4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하게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이후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978년 5월 무렵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후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롭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서,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葬式)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한편 노무현은 자신을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에게 광주항쟁 비디오와 노동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강의하였다
안기부 직원 이화춘은 이러면 우리가 당신을 잡아가야 된다면서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안기부 직원들에게 민중, 노동운동 관련 비디오, 자료들을 태연히 보여주었다
안기부에 들어와 8년 동안 미국 자료를 수집하는 내근 업무를 하던 이화춘은 85년 5월 안기부 부산지부로 파견돼 법조를 담당하게 됐다
전임자는 "'문제 변호사'가 네 명 있는데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당신의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이들 네 명은 노무현, 김광일, 문재인, 이흥록이었다
인사차 찾아간 이화춘과 점심을 같이하던 노무현은 4시간 동안 노동
8년간 미국 자료만 들여다봤던 이화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노무현은 "당신같이 무지한 정보 요원은 처음 봤다
이씨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자 노변호사는 "교육을 받아야겠다"며 밤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
노무현이 보여준 자료들을 보고 안기부의 직원들은 당황해했다
이화춘 등은 "이러면 내가 당신을 잡아가야 한다"며 뿌리치자 노무현은 "나중에 잡아가더라도 일단은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노변호사가 전화를 걸어 독후감을 물었다
이화춘은 "광주사태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아 밤을 꼬박 새웠다"고 답했다
이화춘과 안기부 직원들은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가 같이 운영하는 '노동문제연구소' 겸 변호사 사무실을 출입했다
이씨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 갔고, 그와 노무현은 서로의 애환을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다
한편, 1987년 12월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에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구절이 문제가 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았다
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번복하고 사퇴서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3당 합당 선언을 하였다
이에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노무현은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고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 등과 함께 민주당 (대한민국, 1990년)을 창당하였다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 당시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
"이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노무현이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며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 합당 참여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1990년 7월 5일 민주당 중앙당 기획조정실장이 되었다
한편 노무현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했다
이는 1990년 10월 4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서 수사에 협조해 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밝혀졌다
1991년 10월 14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주간조선'이 게재한 ‘노 의원은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인권 변호사로 알려진 당시 노무현 의원이 부동산 투기의 전력이 있고 호화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등 재산 규모 및 형성 과정의 의혹을 보도했다
노무현 의원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1년여 만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이 기사가 선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계량할 수 없으나 결국 노무현은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2위로 낙선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민주당 후보로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
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1995년에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 행태'라고 비난하면서 합류하지 않았다
많은 의원들이 민주당(1991년)를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로 가면서 민주당(1991년)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주당(1991년)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는데, 노무현도 이 통합민주당(1995년)에 합류하였다
1996년 4월 11일에 시행된 15대 총선에서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1995년)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은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통추 활동기간 동안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3김 정치에 한 번도 저항하지 않은 이인제 후보는 세대교체를 논할 자격도 없다"라며 이인제가 주장한 세대교체에 대해 강력 비판하는 뜻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흐른 후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철회하게 되는데, 이는 통추의 '노무현 대선 출마'에 대한 강력한 비토로 인한 것이었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1995년)의 대통령 후보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면서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이철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라며 신한국당을 선택하자고 주장하였고, 노무현·김원기·김정길 등은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라며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주장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단순히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 데 대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라는 말로 과거의 일을 반성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최종 선고 받기 직전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서울시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무현은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고,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
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당시 이인제 대세론이 있었고, 호남 출신으로 오랫동안 김대중을 보좌해온 한화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당시의 분위기는 노무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남 출신인데다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는 이렇다 할 조직이 없었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거세게 불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무너지면서 광주 경선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정작 1위를 장담했던 호남 출신인 한화갑 후보는 3위를 기록했고, 영남 출신 후보가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당시 연단에 서서 "광주시민 여러분들의 위대한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면서 감격적인 소감을 밝혔고,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盧風, 노무현 바람)'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연단에서 "동서화합의 큰 가능성이 열린 것으로 평가한다"며 "선전해 준 두 후보께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 세력 대통합론'(대통합론)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