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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모즐리의 법칙이라하며, 이것을 기본으로 현대적 의미의 주기율표가 탄생하였다
수소와 헬륨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주기율표에서는 수소를 알칼리 금속과 마찬가지로 가장 바깥쪽 껍질에 전자를 하나 가진 리튬 위에 배열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수소는 금속 원소가 아니며 수소가 전자의 구조 면에서는 알칼리 금속이 아닌 할로겐에게 가깝고 할로젠 원소와 성질이 비슷하다고 주장하며, 수소의 위치를 17족 원소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생각해서, 수소가 1족 원소라면 헬륨도 베릴륨 위에 2족 원소로 배치해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헬륨은 비활성 기체이므로 현재처럼 네온 위인 18족 원소가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주기율표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이 원소들은 대단히 드물게 화학 반응을 하며, 기체상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비활성 기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할로젠은 17족의 원소들로 구성되어있다
준금속은 금속과 비금속 사이에 있어 금속과 비금속의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
특히 규소나 저마늄은 반도체의 주 원료이다
알칼리 금속은 수소를 제외한 1족 원소들이다
칼로 잘릴 정도로 무른 금속이며, 물과 격렬하게 반응을 하여 때론 폭발을 하기도 한다
알칼리 금속과 희토류 원소의 중간 성질을 띤다
란타넘족은 란타넘 (57번, La)에서 루테튬 (71번, Lu)까지의 희토류 원소이다
란타넘족은 원자번호가 늘어나면서 4f 오비탈을 채운다
악티늄족은 악티늄 (89번, Ac)에서 로렌슘 (103번, Lr)까지인 족이다
악티늄족은 원자번호가 늘어나면서 5f 오비탈을 채운다
전이금속은 주기율표에서 4~7주기, 3~12족 까지의 원소들을 말한다
원자번호가 늘어나면서 d 오비탈이 채워진다
전이후 금속은 주기율표의 p-구역에 있는 금속 원소를 말한다
전이 금속에 비해 녹는 점과 끓는 점이 낮고, 무르다
아미노산()은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기본 구성 단위로, 단백질을 완전히 가수분해하면 암모니아와 함께 생성된다
화학적으로 아미노기와 카복시기를 포함한 모든 분자를 지칭하며 화학식은 NH2CHRnCOOH(n=1~20)이다
생화학에서는 흔히 α(알파)-아미노산을 간단히 아미노산이라 부른다
α-아미노산은 아미노기와 카복시기가 하나의 탄소(알파 탄소라고 부른다)에 붙어있다
아미노산의 일종인 프롤린(proline)은 실제로는 아미노기 대신 이차 아미노기를 포함한 2차 아민인데 생화학적으로 보통의 아미노산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2차 아미노기를 가진 프롤린도 아미노산으로 분류한다
아미노기와 카복실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아미노산은 중성에서 양쪽성 이온으로 존재하며, 카복실기가 공명 상태로 안정화를 취한다
오른쪽의 구조에서 R은 나머지라는 뜻의 "Residue" 혹은 "Remainder"의 머릿글자로 곁사슬(Side chain)을 나타내고, 곁사슬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가 결정된다
아미노산은 곁사슬의 성질에 따라 산성, 염기성, 친수성(극성), 소수성(무극성)의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곁사슬이 수소 원자뿐인 글라이신(glycine)을 제외하고, 다른 아미노산은 모두 두가지 광학 활성을 가져, D형과 L형으로 구분된다
단백질(protein)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거의 대부분은 L-아미노산 형태로 존재한다
청자고둥(cone snail)같은 일부 특이한 바다생물에서 D-아미노산이 발견되기도 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탈수반응이자 펩타이드 결합(peptide bond)인 축합 중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A(염기성),B(산성),C(비전하성)는 친수성이며 D는 소수성이다
21개의 주요 아미노산중에서 파란색은 비필수 아미노산(non-essential amino acid)이며 빨간색은 필수아미노산(essential amino acid)이다
히라가나(, )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가나 가운데 하나다
가타카나는 주로 외래어 표기 등에 쓰고, 히라가나는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쓴다
그래서 온나데(; )라고 불린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히라가나는 여자들만 쓰는 글이라 하여, 오랫동안 일본의 공용 문서에선 가타카나와 한자(칸지)만이 사용되었다
현재 일본 철도의 역명판에는 히라가나와 칸지가 적혀 있다
히라가나는 헤이안 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유아들도 가나를 배울 때는 히라가나를 먼저 배우고 가타카나를 나중에 배우기 때문에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쓰인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한영 자판 상태에서 히라가나를 입력할 경우 ㄸ+한자 키를 누르면 된다
가타카나의 경우 장음 등 일부 문자를 제외하면, 꼭 ㅃ+한자 조합을 해야 한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히라가나의 모양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고, 여러 형태의 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학제 시행 후에야 위와 같은 자형이 표준화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위 이외의 구식 자형은 헨타이가나(変体仮名)라고 부른다
토마스 만(, 1875년 6월 6일 ~ 1955년 8월 12일)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토마스 만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다
그리고 6명의 자식 중 3명인 Erika Mann, 클라우스 만, Golo Mann들도 또한 독일의 중요한 작가로 성장했다
토마스 만은 평의원이며 곡물 상인이었던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 부부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독일의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율리아는 7살 때 독일로 망명한 부분적 독일계 브라질리안이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가 1891년에 돌아가시면서 회사는 청산되었다
1893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보험 회사의 견습 사원이 되었다
이때 첫 작품 <호의>가 잡지에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토마스 만은 뤼베크 체육관 기술 분야에 참가하면서, 뮌헨 대학과 기술대학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당시 그는 역사, 경제학, 미술역사, 문학등을 공부하게 되면서 언론계로 커리어를 준비하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살았던 1년을 제외하면 1891년부터 1933년까지 형이자 소설가인 하인리히와 함께 뮌헨에 거주하게 된다
토마스 만은 보험회사에서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일을 하게 된다
그가 Simplicissimus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스 만의 첫 번째 소설은 1898년에 출판된 "꼬마 프리데만 씨"이다
그가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여러 정황이 있으나 종국에는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사랑에 빠졌다
1905년, 그는 그녀와 결혼을 하며, 6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프리드리히와 대동맹>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고, 점차 구낭만주의적인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휴머니즘을 품기 시작하였다
1924년 12년간의 노력의 결정인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서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29년 토마스 만은 Nidden(, 리투아니아)에 있는 어촌에 오두막을 가진다
그 곳에는 독일 예술 공동체가 있었으며, 1930년에서 1932년 여름에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Joseph and his Brothers")"을 집필한다
현재 이 오두막은 소규모 전시를 하면서 토마스 만에 대한 문화적인 중심이 됐다
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으로 조국을 떠나, 남프랑스·스위스 등을 거쳐, 1938년 미국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높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옹호를 위해 싸웠다
1942년 그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로 이사를 한다
그 곳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게 된다
1944년 6월 23일, 토마스 만은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된다
1952년에 스위스, 취리히 근처에 있는 에서 살게 된다
그는 독일을 규칙적으로 여행하긴 했지만, 그 후로 살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독일 방문은 1949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200주년이다
1955년 취리히에 있는 한 병원에서 아테롬선 동맥 경화증으로 죽고, Kilchberg에 묻힌다
그녀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어권 사회에 크게 전파시켰다
1930년 토마스 만은 베를린에서 "An Appeal to Reason"라는 연설을 한다
그는 강하게 나치중심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운동권들에 의한 반대를 격려한다
이것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평론과 문학에서 나치를 공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에 대해서 늘어나는 동정을 표현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을 했을 당시, 토마스 만과 아내는 스위스에서 주말을 보냈다
나치 정책에 대한 그의 매우 강력한 비난 때문에, 아들 클라우스는 돌아가지 말자고 권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책은 하인리히나 클라우스의 책들과는 달리, 히틀러 정권에 의해서 태워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1929년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1936년 나치 정권이 공식적으로 토마스 만의 독일 시민권을 빼앗아간다
몇 달 후,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1933년 8월 26일이라고 기록된 개인적인 편지(그러나 2007년 8월 30일에 공개됐다)에서, 이미, 토마스 만은 나치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파우스투스 박사(Doktor Faustus)"와 일치한다
이 소설에서, 토마스 만은 2차 대전에서 모든 잔인함에 대한 독일 국민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감을 가진 몇몇 지역들을 언급한다
전쟁 동안, 토마스 만은 반-나치 라디오 연설 시리즈()를 만든다
이것은 미국에서 녹음돼서 영국에 전해지고, BBC가 방송을 하게 되면서 독일 청취자들이 듣기를 원한다
1917년 쾰른에서 목공예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후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독일작가들 중 하나
청소년기 나치 하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여하지 않는다
서점의 견습공으로 있다가,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