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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 |
1940년 평안남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남도 대동경찰서에 체포, 유치장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초 풀려났다 |
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聖書朝鮮) 제 158호(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
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 |
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
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평하였다 |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
1947년 3월부터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고, 이후 성서 강해와 신학,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였다 |
또한 조만식의 추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상경하였다 |
이후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견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평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칼럼 하나는 화제가 되었다 |
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
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
"한국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전쟁하는 국가와 거리를 두어보려는 목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
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 |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 |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있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해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정치평론인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하여 군정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
1962년 미국 국무성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특별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파(Quaker敎派) 인사들과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돌아왔다 |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
1967년 장준하의 국회의원 총선거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
그는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좌익 운동에 참여하여 3선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
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
1970년에는 정치, 시사평론을 실은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
이후 씨알의 소리의 발행인, 편집인, 주간 등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등 재야 언론인들을 필진으로 영입하고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신진 문인들을 발간하였으며,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 |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
1980년 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
1980년 신군부 즉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어 2011년 7월 현재 217호까지 출간되어오고 있다 |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에 위촉됐다 |
또한 동아일보로부터 제1회 인촌상을 수여받았다 |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였다(향년 87세) |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과 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
그는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다 |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
귀국 후에도 무교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후 줄곧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
2010년 함석헌이 사회진화론 추종자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을 두고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
2009년 3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한길사에서 30권으로 발간한 ’함석헌 저작집’에 실은 글 '함석헌 저작집 발간에 부치는 말'에서 그가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다 |
당시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이던 김영호는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로 소개하며, 함석헌 사상에서 거듭 반복되는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들었다 |
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10년 1~2월호에 반론인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실어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 |
김상봉 교수는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
이어 그는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 사상은 ’힘의 철학’이 아니라 '사랑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
김상봉은 이어 함석헌이 ’생명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
김상봉은 함석헌이 평소 민족이기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함석헌에게)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
2010년 김영호는 3월 16일 열린 함석헌학회 창립총회 기념 학술발표에서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을 재반박하고 나섰다 |
김영호 교수는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자신이 쓴 '사회 진화론'을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에는 김상봉 교수가 받아들인 '사회다윈주의'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일반론이 있다고 하였다 |
그는 함석헌이 쓴 “지금까지 생각의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이 전체사회, 곧 인류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진화를 통찰했다고 강조하였다 |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 김용준은 함석헌이 철학자라고 하였다 |
그는 "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선생님한테 배웠다고 |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야 |
그건 함선생님의 일부분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맸던 구도자"라고 하였다 |
백남준(白南準, , 1932년 7월 20일 ~ 2006년 1월 29일)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 작곡가, 전위 예술가이다 |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
생전에 뉴욕, 쾰른, 도쿄, 마이애미와 서울에 주로 거주한 그는 여러 가지 매체로 예술 활동을 하였다 |
특히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로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구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출신이다 |
친일파인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
그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
이때 한국이 낳은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다 |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
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
이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심플 머리를 위한 선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전위음악에 주력했고, 곧 유럽과 아시아 및 미국 등 세계로 퍼져나갔다 |
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에 의해 제안된 '사이버네틱스' 개념 하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특히 레이다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2년여 동안 홀로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실험했다 |